며칠이 지나도 윤슬은 아무 때고 문득문득 생각나는 그 남자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살아오면서 슬픈 사람들의 많은 표정들을 봤다.
하지만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 나무가 울 엄마 나무인 게 미안할 만큼.......
뭐라고 위로도 못해 줄 만큼.......
그녀는 수술복을 벗으면서 그 남자 생각이 또 나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야아! 뭔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넋 놓고 있어?”
윤슬의 제일 친한 친구 마취과 짱순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이런다니....”
윤슬은 벗다 만 수술복을 얼른 벗어 폐기물통에 쑤셔 넣다 다시 넋을 놓았다.
“얘가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너 수상해! 뭐야? 무슨 일이야?”
짱순이 얼굴을 들이밀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 아니, 요즘 좀 피곤하네.”
윤슬은 눈치 빠른 짱순이 눈치 챌까 얼굴을 얼른 돌렸다.
짱순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으나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너 이제 수술 없지?”
“어, 왜?”
“나랑 점이나 보러 같이 가자. 울 엄마가 잘 가는 엄청 용한 도사가 있는데.......”
“저엄~?”
윤슬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이것저것 막 던져 놓고 어쩌다가 하나 걸려서 맞추면 용하다고 할 점을?
윤슬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짱순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아냐? 천년 묵은 총각 귀신이 달라붙어서 몇 십 년을 뽀송뽀송한 남자 한번 못 만나보고 감옥 같은 수술실에 갇혀 이렇게 우중충하게 살고 있는 건지!”
윤슬이 그래도 고개를 흔들자 짱순은 침까지 튀기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서른이 되도록 남자 한 명 못 만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점도 한 번씩 봐 줘야 돼.”
“나는 있거든!”
윤슬이 발끈했다.
“누구? 누구? 설마 나 왕자 선수를 말하려고 한 건 아니겠지?”
윤슬은 부인하지 않았다.
짱순은 답답하다는 듯이 킹콩처럼 가슴을 두들겼다.
“야, 정신 좀 차려! 다른 사람 눈엔 넌 그냥 나 선수 덕질하는 덕후일 뿐이고, 나 선수는 덕후에 대한 예의를 좀 차린 거 뿐이라고.”
“아니야, 분명 그 때 나한테 수술 받고 퇴원하면서 내 눈을 이렇게 똑바로 보고 사랑한다 했다 말이야.”
눈앞에 윤슬이 눈을 가까이 갖다 대며 다가오니 짱순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아~ 정말! 그 때는 약에 취해 있었나 보지 뭐!”
그리고는 이를 꽉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나 선수는 우리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야. 그 세계 사람들은 너 같은 사람이 다 돈인데 눈 한 번 크게 뜨고 사랑한다고 말 하는 게 대수겠냐?”
짱순은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거렸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현생에서 남자는 내 생명의 은인 나 선수 밖에 없다.”
여유가 느껴지는 윤슬의 대답에 짱순은 포기한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 돌아섰다 다시 다가오며 과장된 손짓 발짓을 해가며 오버되게 말했다.
“4개월 뒤면 여름휴가, 6개월 뒤면 추석이고, 9개월 뒤면 크리스마스다. 애인도 하나 없는데 이런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공포스럽지도 않니?”
“전~혀! 여름휴가 땐 나 선수 경기 보러 미국 가고, 추석에는 나 선수 중계방송 보고, 크리스마스는 별 거냐? 케잌이나 하나 사서 예수님 생신 축하나 해 드리면 되지 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윤슬을 보며 짱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얘! 지금 뭐라 하니? 여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덕질 말고, 현남이랑 연애를 해야지!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그리고....... 얘는 지렁이, 달팽이, 거머리, 디스토마와 같은 자웅동체도 아니고......”
윤슬은 얼굴까지 붉혀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 짱순을 보고 싱긋이 웃기만 했다.
“내 성의를 이런 식으로 계속 무시할 거냐?”
“그게 아니고, 나는 과학적이지 않은 개인적인 견해를 주입하려는 사람과의 만남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
“재미로 보러 가는 거지. 같이~ 가자아~”
연구실까지 따라 들어와 짱순이는 같이 가자고 떼를 썼다.
윤슬은 귀찮아서 알았다라고 말하는 순간,
책장 위의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급히 할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짱순의 등을 떠밀어 반 강제적으로 돌려보낸 뒤,
스툴 위에 올라서서 낑낑대며 그 상자를 내렸다.
상자 뚜껑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먼지를 스윽 털어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제법 많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방수 팩에 담겨 엄마의 수목장 앞에 놓여 있던 편지들이었다.
그녀는 한 꾸러미의 방수 팩을 열고 편지 봉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주소란에는 바른 글씨로 그냥 ‘보고 싶은 어머니께’라고만 적혀져 있었다.
윤슬은 뜯어볼까 말까를 잠시 망설였다.
“버려진 줄로 알고 있을 텐데 좀 보면 어때?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하지만 그 남자가 정성을 다해 쓴 편지였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조심스러워졌다.
가위로 최대한 끝 쪽으로 깨끗하게 잘라냈다.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꺼냈다.
편지봉투 안에는 신문 스크랩 한 것도 한 장 들어 있었다.
윤슬은 그것부터 읽었다.
『벨린저 상병 구하기』
한국 군의관의 영웅적 활약이라는 제목과 함께 군복을 입은 그 남자의 사진이 있었다.
윤슬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2015년 4월 17일 미군의 협조 요청에 의해 남수단 육군 야전병원에 실려 온 코리 벨린저 상병.
피범벅이 된 군복과 붕대를 자르고 부상 입은 곳을 보자마자 군의관 강철인 대위는 벨린저 상병 몸 안에 폭탄이 터지지 않고 박혀있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모두 나가라고 소리쳤다.
강 대위는 바로 폭탄 제거팀에 연락을 했고, 폭탄 제거팀은 벨린저 상병의 몸 안에 박혀 있는 폭탄은 탱크를 주로 공격하는 RPG 라는 로켓추진 수류탄이라고 알려줬다.
육군 규정에는 폭탄이 몸에 박힌 군인은 병원 전체를 날릴 수 있고, 더 큰 인명 피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병실에서 멀리 떨어진 벙커에 두고 진통제만 주며 사실상 죽게 내버려 두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강 대위는 자신을 보고 말을 하고, 숨을 쉬고 있는 그 부상병을 보고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규정을 어기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폭탄 제거 수술에 헬멧과 방탄 조끼를 입고 수술실에서 강 대위의 지도하에 폭탄 제거팀과 함께 제거 수술을 했다.
로켓추진 수류탄은 그 부상병의 왼쪽 골반을 부서뜨렸고 장기를 심하게 손상시킨 체 박혀 있었다.
2시간 만에 무사히 수술을 마쳤고 그 부상병은 미군에 인계된 후 미국으로 후송되어 건강히 회복되고 가족들과도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강 대위가 규정대로 했으면 분명 죽었을 텐데 한 사람 목숨을 그렇게 자신의 목숨 걸고 살렸다.
“그 날은 제가 마침 그 자리에 있어서 수술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저보다 목숨을 건 수술에 망설임 없이 스스로 참여하고 끝까지 같이 해 준 동료들의 희생정신이 더 놀랍습니다.” 라고 했다.
강 대위가 이 공로로 비교전상태에서 동료군인의 생명을 구하는 영웅적 행동을 한 군인에게 수여하는 솔더 메달을 받았다.
그 후에도 야전 병원에 테러 단체의 공격으로 창문 옆으로 포탄이 떨어져 불길이 엄습해 오고 있는 가운데 모두들 대피하라고 했는데 수술을 하고 있었던 강 대위는 끝까지 수술을 했다.
수술하던 사람이 아군이 아닌 야전 병원을 공격한 테러 단체의 2인자였는데 도통 입을 열지 않던 그도 강 대위의 희생정신에 생각을 바꾸어 테러 단체가 계획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의사였어? 같은 의사지만 이 남자 멋있다.”
윤슬의 표정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신문 기사를 다 읽은 윤슬은 편지지를 폈다.
편지지를 자세히 보니 평범한 의사 오더지였다.
『저는 그 날 여느 날처럼 부상 입은 군인을 수술한 거 뿐이었습니다. 모든 게 괜찮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덤덤하게 적혀 있었다.
윤슬은 그렇게 한 통 한 통의 편지를 펼쳐 봤다.
울었다가 웃었다가, 가슴이 찡했다가 철렁했다가......
밤새 읽은 편지들이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았다.
탁자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눈물 젖은 휴지 뭉텅이들처럼 이 남자에게 젖어 든 것 같았다.
“괜히 봤어! 이제 보지도 못할 남자한테 이렇게 빠져들면 어떡해??”
*
*
피와 흙의 얼룩이 지지 않고 남아 있는 흰색의 티셔츠와 의사 가운, UN 로고가 찍
힌 조끼 등이 줄에 널려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고,
빨랫줄 저 너머로는 섬광과 함께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촛불 몇 개가 천막 안을 밝히며 겨우 가까이 있는 사람을 알아볼 정도다.
7살 정도가 된 흑인 소년이 의자에 앉아 있다.
그 앞에는 철인이 흑인 소년의 무릎에 난 상처를 소독해 주며 이런 저런 말을 걸고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한국 신부님이 운영하는 학교를 다녀서 한국말을 알아듣고, 할
줄도 알았다.
“일주일만 기다리면 동생 본다며? 좋겠다.”
하지만 소년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요 녀석 표정 보니까 벌써부터 동생을 질투하는 거 같은데? 으이구~ 귀여워.”
그가 소년의 양 볼을 가볍게 꼬집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년이 조용히 중얼댔다.
“뭐라고?”
철인은 잘못 들은 거 같아서 다시 되물었다.
“동생이 태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구요.”
“쉿! 동생 들을라.”
커튼으로 나눠 놓은 옆 진료실에서 산전 진찰을 받고 있는 그 소년의 어머니와 뱃
속의 동생에게 들릴라 철인은 조심을 시켰다.
“들으라죠!”
그는 소년과 눈높이를 맞췄다.
“뭐야? 뭐 때문에 이렇게 심통이 났어?”
소년이 머뭇머뭇 대더니 대답을 한다.
“선생님에게는 배가 고프지 않게 하는 약이 있나요?”
“어?”
생각지 못한 물음에 철인은 당황하여 되물었다.
“어른들이 하는 이 무서운 싸움을 끝나게 해 주는 약은요?
“.......”
철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싸우러 나간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게 해 주는 약이라도 있어요?”
철인은 계속되는 소년의 물음에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그런 약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소년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일으킨 전쟁으로 아무 죄도 없는 이 어린 아이들의 마음까지
멍들게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려 왔다.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소년을 보았다.
“저도 제 동생이 생겨서 좋아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배고프고, 무섭고, 아픈 이런
곳에서 동생이 행복해 할지는요.”
소리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계속 흘리는 소년을 그가 안아 주었다.
“그랬구나. 동생 걱정이 많이 됐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 동생은 이렇게 멋있는
형이 옆에 있어서 다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철인은 자신의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해 주었던 말을 그대로 소년에게 해 주었다.
자신도 소년과는 다른 이유였지만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동생을 걱정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거렸다.
“제가 이 괴물들부터 동생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 그도 소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때였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철인은 훈련 받은대로 대피소로 가기 위해 소년을 데리고 천막을 나왔다.
소년이 뒤따라 나오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더니 달려갔다.
그리고 온 몸을 이용해 볼록한 배를 감싸주며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엄마! 동생이 많이 놀라지 않았어요?”
그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괜찮아!”
“다행이다.”
소년의 걱정스런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런 소년에게 철인이 다가가 말했다.
“선생님은 엄마 모시고 천천히 가야 하니까 너는 다른 선생님과 먼저 가 있어!”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먼저 가는 것이 싫은 듯 소년의 입이 삐죽 나왔다.
소년의 마음을 눈치 챈 철인은 소년의 눈을 보고 말했다.
“대피소로 빨리 가서 어머니와 동생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에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거야!”
“그래 주면 동생이 너무 고마워 할 거야.”
소년의 어머니도 철인의 말을 거들었다.
그 때서야 소년의 삐죽 나온 입이 들어갔다.
“할 수 있겠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른 가!”
“어머니와 동생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알았어. 걱정하지 마!”
철인은 어머니의 손을 놓는 소년을 다른 의료진에게 부탁하여 먼저 보냈다.
계속 돌아보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철인의 눈에 저 멀리서 날아오는 포탄들이 보였다.
저만치 앞서 가던 소년도 그것을 보았는지 뒤돌아 뛰어오며 눈물을 흘렸다.
소년의 눈이 멈춰 선 철인과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에 눈빛을 통해 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소년을 데리고 가던 의료진이 소년을 잡아 들쳐 안고 뛰기 시작했다.
소년은 의료진의 품 안에서 울며 발버둥을 쳤다.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서 점점 사라져 갈 때쯤,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포탄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철인은 걸음을 멈추고,
산모의 귀를 가리고 눈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섰다.
얼마나 가까운 곳에 떨어졌는지 철인의 한 쪽 귀에서 고막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귀가 먹먹했다.
등짝이 얼얼했다.
철인이 눈을 다시 떴을 때 여기저기에 포탄이 떨어져 사방에 연기가 자욱했다.
피를 흘리며 아픔에 괴로워하는 부상자들과,
사람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찢어지고 신체 부위가 잘려 나간 시체들의 모습이 을씨년스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충격에 의식을 잃은 임산부를 살폈다.
“눈 좀 떠 보세요! 눈 좀 떠 보세요!”
그녀가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뜨자마자 철인의 팔을 붙들고,
“우리 큰 애는요?”
“무사히 대피소로 갔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 철인의 팔을 놓았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없는 거 같은데 배가......”
그녀가 다시 의식을 잃었다.
경동맥에 손을 대 보니 빠르고 약한 맥이 잡혔다.
철인은 아직 가는 숨을 붙잡고 있는 그녀를 안고 대피소로 뛰었다.
그리고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의료용 간이침대에 눕혔다.
다리 사이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철인의 온 몸에도 산모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철인이 동료 의사를 바삐 불렀다.
“태반 조기 박리야!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산모와 아이 둘 다 위험해!”
여자 의사가 다른 의료진에게 소리쳤다.
“닥터 강, 좀 도와 줘요. 나 혼자는 못해요.”
“알았어.”
철인은 귀에서 흐르는 피를 닦다 말고 얼른 수술용 장갑을 꼈다.
수액을 달고, 수술 도구 몇 가지로 그 자리에서 바로 제왕절개를 시행했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다.
새 생명의 울음소리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절망적이던 대피소 안의 분위기가 환해지고 웃음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철인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벌어져 있는 산모의 배와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이렇게 멋진 아들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동생도 이렇게 멋진 오빠가 있어 항상 든든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 꼭 지켜줘야 해.
어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리고,
동생은 사라지고 배는 갈라진 체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어머니와 방바닥에 흥건한 피 구덩이 속에 주저앉아 어머니와 피 묻은 손을 번갈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을 가렸다.
“나는 동생도 지키지 못했고, 어머니도 지키지 못했어.”
난생 처음 떠오른 기억에 몸이 떨리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뒹굴었다.
숨이 막혀 곧 죽을 것만 같았다.
다른 의료진들이 철인의 주위에 모여 들었다.
“닥터 강! 닥터 강! 정신 좀 차려 봐요.”
그의 흐린 의식 속에 어머니와 수목장지에서 만난 그 여자가 보였다.
“인아! 이제부터 이 아가씨 엄마 대신 네가 잘 지켜줘.”
그러면서 철인의 손을 끌어 그녀의 손 위에 얹어 주었다.
그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괜찮냐고 물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동료 의사의 얼굴이 보였다.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현을 동료 의사에게 했다.
꿈이었다.
“어머니께서 왜 그 여자를........”
주머니에서 그녀가 손에 쥐어 준 손수건을 꺼내 보았다.
그녀가 혹시 동생인 걸까?
철인은 윤슬에게서 어쩌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