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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왕자 새끼
작가 : 어사화
작품등록일 : 20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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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닝 천재의 우아한 아침
작성일 : 19-10-03     조회 : 298     추천 : 0     분량 : 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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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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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슬은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한량 한량한 추리닝으로 꽉 차 있었다.

 

 “설마 내일도 그 복장으로 출근하려는 건 아니죠? 추천(추리닝 천재를 줄인 말로 의대생 때부터 어디로 가나 추리닝만 입고 다녀서 붙은 윤슬의 별명) 강 윤슬 선생?”

 

 윤슬은 며칠 전부터 병원장이라는 놈이 아침 회의 시간마다 자신을 콕 집어 강조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누가 보면 생지부(생활지도부장)인 줄! 내가 그런 것에 얽매이는 게 싫어서 검정고시 보고 대학을 갔는데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라니! 어휴~”

 

 윤슬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린 옷장 문을 닫고 그 옆의 옷장 문을 열었다.

 

 대여섯 벌의 정장이 단출하게 걸려 있었다.

 

 ‘제발 나 좀 입어줘요’라며 처량하게 외치고 있는 듯 했다.

 

 날이 날이니 만큼 검은색 정장은 피해야 할 거 같고, 화사한 색감의 요즘 날씨를 고려해서 입을 수 있는 옷은 딱 한 벌 뿐이었다.

 

 여신들이나 입을 것 같은 하늘하늘한 핑크색 쉬폰 원피스.

 

 넉 달 전, 펠로우 이 지성 선생의 결혼식 때문에 백화점에 가서 짱순이 골라 준 원피스였다.

 

 “예쁘긴 한데 이거 은근히 허리 부분이 타이트한데.......”

 

 평상시 불규칙한 생활 패턴으로 장이 좋지 않은 그녀였다.

 

 허리 부분이 타이트 한 옷을 입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찼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취임식만 끝나고 나면 내가 당장 벗어던지고 말 거야.”

 

 그녀는 퇴근할 때 입을 여분의 추리닝도 잊지 않고 챙겼다.

 

 제 옷이 아닌 거 같은 원피스에 힐까지 신고 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야이 년아~ 갑자기 느껴지는 이 갑갑함은 뭐냐? 나 좀 살려줘!

 

 몸에 딱 맞는 옷에, 발에 딱 맞는 힐로 꽁꽁 싸맨 몸 구석구석 장기들에게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꾸만 접혀지는 발목 때문에 힐을 당장이라도 벗어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버리고 가실 임도 없는데 발병 나게 생겼으니 말이다.

 

 내가 취임하는 것도 아니고, 이사장 놈이 취임하는데, 왜 내가 차려 입어야 하냐고!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투덜이가 된 듯 투덜투덜 대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좀비 걸음으로 겨우겨우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무도 앉지 않은 버스 정류장의 긴 나무의자에 얼른 앉았다.

 

 한 쪽 발을 반대편 무릎위에 올려놓고는 무지외반증을 예방해야 한다며 발을 주물렀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이 십린데 어떻게 참고 견뎌야 할지.......

 

 그러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출근하는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고무줄로 된 편한 옷이 아닌 불편함을 감수한 예쁜 오피스룩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대한민국 여성들의 대단함을 새삼 느꼈다.

 

 스스로 괜히 머쓱해져 무릎 위에 올린 발을 고이 힐 안으로 접어 넣었다.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앞에 정차하는 버스가 왔다.

 

 버스 안에 이 몸 기댈 자리 하나 남아 있길 안 바쁜 아무 신이나 좀 들어주소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버스에 올라타서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리 훑어봐도 빈 좌석은 없었다.

 

 “아이고~”

 

 곡소리가 저절로 났다.

 

 그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손잡이를 잡았다.

 

 드드드드.

 

 휴대폰 진동 소리가 핸드폰 속에서 들렸다.

 

 응급실인가?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냈다.

 

 짱순이었다.

 

 “어, 왜?”

 

 -어디야?

 

 “버스 이제 막 탔어.”

 

 -너 오늘도 설마 추리닝 바람으로 출근하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병원장 놈, 지금 로비에서 눈에 불 켜고 있다.

 

 “걱정하지 마. 오늘은 무사통과할 테니까!”

 

 -오우~ 이 자신감! 알았어. 좀 있다 봐!

 

 “그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이사장 놈이 오길래 병원장 놈이 이 난리를 펴는지 내가 오늘 그 면면을 요리조리 따져 보고 안 대단하면 욕을 한 바가지 해 줄 테다.

 

 그녀는 아래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핸드백에 다시 넣으려는 순간 버스가 급출발했다.

 

 두 손을 손잡이에서 놓고 있었던 차였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윤슬의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은 윤슬은 뒤로 쏠려 갔고, 버스 바닥에 넘어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급히 의자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다행히 바닥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안착하긴 한 거 같은데.......

 

 그녀가 문득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뜨고 뒤를 돌아봤다.

 

 눈앞에는 웬 젊은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몹시 놀란 표정을 한.......

 

 “헐!”

 

 절로 멘붕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필이면 안착한 곳이 웬 남자의 무릎 위였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런 머릿속과는 다르게 온 몸의 신경은 착실하게도 그 남자의 몸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착지점을 잘못 찾은 엉덩이는 꿈틀거리는 그의 물건이 얼마나 건실한지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윤슬이 당황해 벌떡 일어나는데 빨간불로 바뀐 신호등 덕분에 이번에는 버스가 급정거를 했다.

 

 그 찰나 그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과 다리와 배에 힘을 주었다.

 

 앞으로 몸이 쏠렸다가 다시 뒤로 튕겼다.

 

 다행히 그의 무릎에 다시 앉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엉덩이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하고, 동시에 충돌 충격으로 괄약근의 힘 조절에 실패했다.

 

 차라리 그의 무릎에 앉는 게 나을 뻔 했다.

 

 오. 마이. 갓!

 

 가스 배출까지 해 버렸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연기처럼 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다리는 풀려 민망함도 잊은 채 다시 그의 무릎에 주저앉았다.

 

 겨우 붙들고 있는 이성이 붉으락 푸르락 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계속 이렇게 가실 건가요?”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도저히 얼굴을 보일 수 없어 핸드백으로 얼굴을 가린 체 사과를 하고 일어섰다.

 

 그러다 또 한 번 바람 풍선처럼 몸이 휘청였다.

 

 이놈의 힐아 쫌!

 

 그녀는 아예 힐을 벗어 앞좌석 의자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의자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손목과 팔에 있는 핏줄들이 다 튀어 나올 정도로.

 

 그리고는 핸드백을 방패삼아 그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코피가 안 나는 거 보니 코뼈도 이상 없는 거 같고.......

 

 코를 막거나 창문을 열지 않는 거 보니 가스 배출할 때 냄새도 안 난 거 같고.......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남자도 이 상황이 상당히 당혹스러운지 연이어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아침부터 여자 엉덩이로부터 무방비로 그런 공격을 당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저 이제 괜찮은데요.”

 

 힐을 벗고 다소곳이 모여 있는 발을 보고 대답했다.

 

 “그러다 혹여나 다칠까 봐 불안해서 안 되겠습니다.”

 

 민망해 할 윤슬을 배려해서 그러는지 정면을 바라보며 그 남자는 나직하게 말했다.

 

 윤슬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또 다른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고맙습니다.”

 

 윤슬이 가벼운 목례와 함께 말했다.

 

 그도 목례로 답했다.

 

 그리고는 양 팔로 앞뒤의 등받이를 잡으며 윤슬이 자리에 무사히 앉을 때까지 그녀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힐을 주섬주섬 챙겨 신고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윤슬은 자신은 아직 세 정거장이나 남았으니 그가 먼저 내리길 손톱을 물어뜯으며 또 다시 안 바쁜 아무 신에게 빌었다.

 

 *

 *

 

 오늘 아침에는 신들이 다들 바빴는지 윤슬의 소원을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다.

 

 그 남자와 버스에서 같이 내렸다.

 

 좀비 걸음을 걷는 그녀를 앞서 걷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긴 했지만.......

 

 병원 본관 앞 정문 위에는 이사장 취임식 경축이라는 플랜 카드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이름 부분은 바람에 고정시킨 줄이 끊어졌는지 접혀 잘 보이지 않았다.

 

 좀비 걸음이었지만 정문에 서 있는 병원장의 자체 검열에 무사통과를 했다.

 

 연구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윤슬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려댔다.

 

 펠로우 이 지성이었다.

 

 “네, 이 선생님.”

 

 -교수님, 유기한 교수님 모친상 부고 문자 보셨어요?

 

 “아니, 못 봤어요.”

 

 -수술 스케줄이 조정 돼서요. 관절경 수술은 교수님께 배정됐어요. 1시간 후에 슬랩 봉합술 환자 있고, 11시에 무릎 반월상연골판 절제술 있습니다.“

 

 “수술방은요?”

 

 -3번 방입니다.

 

 “보호자와 환자들에게 설명하고 수술 동의서 다시 받아줘요.”

 

 -네.

 

 전화를 끊은 윤슬은 잘근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윤슬은 오늘 아침 수술 스케줄이 없었다.

 

 조금만 더 일찍 전화가 왔더라면.......

 

 그랬더라면 이사장 놈의 취임식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힐을 신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힐을 신지 않았더라면 버스에서 그녀의 인생에 길이 남을 그런 불상사도 없었을 것이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급히 올라탄 윤슬에게서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 남자와 우연히라도 다시 만나게 하고 하는, 그런 가혹한 벌을 제게 내리지는 말아 주소서!”

 

 성호를 그린 뒤 두 손을 모았다.

 

 연구실에 올라가자마자 힐을 벗어 던지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가운을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컴퓨터를 켜서 수술할 환자들의 챠트와 MRA 영상 등을 꼼꼼히 확인했다.

 

 *

 *

 

 병원장과 병원 관계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취임식이 열리는 세미나실로 가기 위해 별관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로비 한 가운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철인.

 

 뒤따르던 다른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무슨 일인지 싶어 촉각을 세우는데.

 

 철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 곳을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병원장이 조용하게 물었다.

 

 “저기 엘리베이터 앞에 핑크색 원피스 입은 여성분은 누구인가요?”

 

 병원장의 시선이 철인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갔다.

 

 누군지 단번에 알아 본 병원장은 웃으며 답했다.

 

 “추천.......아니 정형외과 강 윤슬 교숩니다. 보기에는 좀 어리숙해 보이는데 열다섯에 의대에 입학한 천재 의삽니다. 손도 야무져 관절경, 미세접합 등 못 하는 게 없는 우리 병원의 에이습니다!”

 

 병원장이 윤슬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그렇습니까?”

 

 철인은 불과 몇 분전에 자신의 얼굴에 엉덩이 펀치를 날리고 생화학전까지 벌였던 그녀의 의외의 스펙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단번에 병원 에이스를 알아보시고?”

 

 “제가 후각이 좀 민감해서요, 특히 방귀 냄새에!”

 

 “네? 네.”

 

 병원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 가시죠!”

 

 철인은 윤슬을 힐끗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세미나실로 향했다.

 

 *

 *

 

 수술복으로 환복하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역시 내 몸의 단짝 고무줄 바지”

 

 허리 부위의 고무줄을 두 손으로 쭉 늘렸다 놓으며 배를 두들겼다.

 

 탈의실을 나오는데 짱순과 마주쳤다.

 

 “야아~ 너 얼굴이 왜 이래?”

 

 “오늘 아침에 내가 어떤 치욕을 행하면서 출근했는지 알면 이렇게 서 있는 것도 용하다 할 거다.”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또 왜?”

 

 “나중에 점심 같이 먹어. 대서사시를 읊어야 하는데 지금 수술 들어가야 해.”

 

 “그래.”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라 민망함에 치가 떨렸다.

 

 스크럽대 앞에 서서 손을 빡빡 문질렀다.

 

 윤슬이 수술실로 들어서자 수술실 안에 있던 모든 이가 돌아보며 목례를 했다.

 

 윤슬도 가볍게 목례를 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오피 필드를 준비하던 지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며 말했다.

 

 멸균 가운과 장갑을 착용한 윤슬이 수술대 앞에 섰다.

 

 “한동훈, 18세, 슬랩 파열 2~3형으로 매트리스 슬랩 봉합술을 시행하겠습니다.

 MLB에서도 욕심내는 유망한 투수라고 하니 집중해 주세요.”

 

 마스크 위로 빛나는 윤슬의 눈빛이 비장했다.

 

 “네.”

 

 퍼스트 어시스트의 자리로 이동하던 지성과 레지던트 2년차 성현이 대답했다.

 

 “그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열여덟 살의 소년.

 

 투수들의 저승사자인 SLAP lesion(이두박근 상부관절순 파열)로 어린 나이에 수술대 위에 올랐다.

 

 이 소년도 어렸을 때부터 각종 대회에 나가며 어깨를 혹사 시켰을 것이다.

 

 윤슬은 꿈을 맡긴 이 소년에게 꼭 7% 속에 포함시키겠다는 각오를 하며 수술에 임했다.

 

 (SLAP로 수술을 받은 MLB 선수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수술 후 대부분의 선수들이 던질 때 기능이 떨어져 7%정도만이 다치기 전의 수준으로 공을 던질 수 있다고 했다.)

 

 윤슬은 지금 MLB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는 나 왕자 선수의 수술도 성공적으로 해 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다.

 

 관절경을 이용하여 정확한 부위를 확인한 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고 빠르게 끝냈다.

 

 감탄과 존경을 담은 지성과 성현의 눈이 윤슬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마무리는 이 지성 선생님이 해 주세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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