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판에 밥과 반찬을 소복이 쌓고 또 쌓고 또 눌러 쌓았다.
뒤따라오던 짱순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야아~ 내일 전쟁 난다니? 왜 이렇게 많이 담아 왔어?”
“어젯밤부터 계속 공복이었단다. 이 정도는 먹어줘야 체력을 유지하지.”
“너 진짜 검사해 봐야 되는 거 아니야?”
짱순이 빈 자리 식탁 위에 식판을 놓으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 말어. 내 위장은 아직 돌도 소화시킬 정도로 건강하니까.”
짱순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위장 말고, 기생충 검사!”
“뭐라고?”
윤슬은 쥐고 있던 밥 숟가락으로 짱순의 머리를 치려다 말았다.
“아니 그렇게 먹는데도 이렇게 마른 거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어. 아마 네 뱃속에 있는 놈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약 효과도 별로 없을 거야.”
“밥맛 떨어지게! 그만해~”
“20년지기 친구로서 밥맛 좀 떨어지라고 하는 소리다.”
“아~ 몰라몰라. 내 배 안에 기생충이 있든 송충이가 있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일단 내 사랑 탄수화물이 필요해.”
식판을 들여다보며 눈을 반짝거리던 윤슬이 삽질을 해서 입 안으로 넣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식판 위에 놓여 있던 것들을 비워냈다.
“아~잘 먹었다.”
윤슬이 그제야 허리를 펴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윤슬이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짱순은 고개를 저었다.
“기어이 그걸 다 먹었구나!”
포만감을 느낀 윤슬이 냅킨으로 입술을 한 번 닦고는,
“커피 한잔 하자.”
“헉~ 커피가 들어갈 자리가 남아있어?”
“커피는 소화제지. 가자.”
식당에서 올라와 1층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을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들고 카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짱순에게,
“우리 오래간만에 거기 가까?”
윤슬이 눈짓으로 그 곳을 가리켰다.
“그래!”
짱순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둘은 별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별관 옥상은 개방해 두었지만 이용하는 직원들은 별로 없었다.
시야가 탁 트이니 속도 뻥 뚫린 것 같았다.
둘은 평상같이 넓직한 난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짱순이 컵 캐리어에서 자신 몫의 커피를 뽑아가며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커피를 마시던 윤슬이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왜 그래?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궁금한 눈빛으로 윤슬을 바라보며 짱순은 커피를 한 모금 쪽 빨았다.
“아~ 진짜 내가 민망하고 쪽 팔려서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다.”
“이왕 말할 거 빨리 해 봐~”
짱순이 윤슬을 구슬렸다.
윤슬은 힐 때문에 버스에서 중심을 잃고 그 남자의 무릎에 앉은 이야기며, 일어서다 그 남자의 얼굴에 엉덩이 펀치와 가스 살포까지 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했다.
짱순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았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출렁 출렁댔다.
“푸하하하”
짱순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남자는....... 그 남자는.. ?”
웃느라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당황스러워서 얼굴이 벌갰졌더라! 언제 그런 일을 당해 봤겠냐?”
“아니, 가스 살포까지 했다며? 남자 안 쓰러......”
짱순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자기가 옆으로 쓰러지며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나마 정말 다행인 게 어젯밤에 야식을 안 먹었어. 오늘 아침도 안 먹었고.......”
“너는 비염이 있어서 네 방귀 냄새 모르지? 되게 나.”
옆으로 쓰러진 체 짱순이 정색하며 윤슬에게 답했다.
“뭐?”
윤슬이 화들짝 놀랐다.
“사람들이 너 민망할까 봐 모르는 척 하는 거지.”
짱순은 윤슬의 놀란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으려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
고개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괜찮아, 괜찮아, 친구야! 그 남자를 네가 다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언제 일어나 앉았는지 짱순이 윤슬의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를 했다.
“그치? 다시 본데도 그 때 그 여자가 난지 모르겠지?”
고개를 치켜들며 애써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고 짱순의 말에 동조했다.
짱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느라 흘린 눈물을 닦아냈다.
“힐이 내 친구를 아주 그냥 안드로메다로 영영 보내 버릴 뻔 했네.”
“내가 다시는 힐을 신나 봐라.”
윤슬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떨었다.
짱순은 커피를 쭉 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 사단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그 이사장이라는 놈의 쌍판대기는 볼만 했냐?”
짱순은 잽싸게 입속으로 커피를 공급하던 빨대를 빼며 조금 전과는 결이 다른 웃음소리를 냈다.
“야아~ 장난 아니야.”
“왜? 눈이 쭉 찢어지고 깐깐하고 못 되게 생겨 처먹은 영감탱이야?”
윤슬의 물음에 짱순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야!”
“헉! 눈이 흘러 내렸어?”
미간을 찌푸리며 윤슬이 물었다.
짱순은 갑자기 눈에서 빛을 내며 답했다.
“얼굴도 몸매도 뇌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잘생김이 촤르르 흘러 넘쳐. ”
윤슬의 팔을 때리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취임사를 하면서 이렇게 눈을 내리깔았다가 드는데 호박색 눈동자가 얼마나 섹시하게 빛나던지. 그런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고 생각을 해봐.”
윤슬은 생각만 해도 오글거려 주먹을 쥐었다.
“거기다 돌싱도 아닌 서른일곱 후레쉬한 미혼이란다.”
짱순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무엇보다도 인성이 중요하다며? 외모와 조건은 꼴값과 정비례한다며? 너 아무래도 이성을 어디다 놓고 왔나 본데 찾으러 가자.”
윤슬이 짱순의 손을 잡고 끌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이성도 무용지물이야.”
윤슬은 의아한 표정으로 짱순을 쳐다봤다.
언제나 남자를 볼 때 제 1순위가 인성이었던 짱순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선을 보러 나갈 때도 아무리 외모와 조건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예의 없고 무례하다 싶으면 무조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남자를 만날 때는 무조건 인성이라는 것을 인생신조처럼 여기며 사는 친구였다.
“짱순이 이성을 놓을 만큼이라.......”
윤슬은 시선을 멀리 떨어뜨리며 커피를 쪽쪽 빨아들였다.
짱순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윤슬이 다시 쳐다볼 때까지 입을 다물지 못한 체!
“턱받이 해줘야겠다. 침 흐른다. 입 좀 닫어.”
“어차피 이사장님은 우리 같은 중생들이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 반의 반만 닮은, 그런 남자라도 어디 없나?”
손등으로 입가의 침을 한 번 훔치던 짱순이 날숨과 함께 말했다.
“이사장 놈이 우리 짱순이 눈까지 배리게 했구먼.”
“그러게! 우리 집이 작은 중소기업만 하나 했어도 침이라도 발라 보겠거만....... 참, 너는 그래도 인어 공주니까 가능성도(하는데)”
“그 이야기는 그만해라.”
윤슬이 커피에 들은 얼음을 입 안에서 우두둑 부수며 짱순의 입에 커피 잔의 빨대를 강제로 물렸다.
*
*
철인은 자신의 요청에 의해 조촐하게 마련된 취임식을 얼른 끝냈다.
다들 할 일도 많고 바쁜데 갑자기 끼어든 허례의식에 많은 에너지를 쏟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는 귀빈들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자신도 얼른 사무실로 도망쳐 왔다.
쇼파 등받이에 기대 목을 죄는 듯한 와이셔츠의 첫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좀 헐렁하게 했다.
자켓 안 쪽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연이어 울리며 가슴께를 덩달아 울리게 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드는데 주머니 속에 같이 들어있던 손수건이 딸려 나와 그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돌려놓고 손수건을 집어 들어 빤히 쳐다봤다.
『제가 당신을 만났다는 건
당신은 지금 슬프고, 힘들고, 아픈 시간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의 슬픈 눈물과 힘든 땀방울, 아픈 상처를
닦아 드릴 테니
당신은 지금 당장 일어나셔서
예쁜 시간을 만나러 가십시오.
손수건이 당신에게-』
철인은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자수로 새겨진 글귀를 보며 지난 수목장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 때문에 올해 생일이 더 우울했을 그녀.
하지만 오히려 자신을 더 위로해 주었던 그녀.
그리고 오늘 아침 버스 안에서 일도 떠올렸다.
수행원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익숙치 않고, 사지 멀쩡한 놈이 비서에게 운전을 시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한국에 들어와서 늘 타고 다니던 버스를 탄 거 뿐이었는데 그녀를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누가 던져 준 선물 상자처럼 자신의 무릎에 안겨 온 그녀.
의도치 않았겠지만 자신의 얼굴에 가스 살포까지 한, 장이 안 좋은 그녀.
볼 때마다 평범치 않은 일로 자신과 계속 엮이게 되는 걸 보니 그냥 스쳐 지나갈 인연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마음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강 윤슬 교수........ 우리 병원 에이스라.......”
그 때 열린 창문으로 발코니 쪽에서 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안 쓰려고 했지만 점점 커지는 웃음소리와 수다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철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체 발코니로 나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옆 옥상 난간에서 수술복을 입은 여자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을 가늘게 떴다.
등을 지고 있는 여자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깔깔대고 있고, 마주 보이는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한 여자는.......
강 윤슬?!
윤슬을 보는 순간 그는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조용히 귀를 쫑긋 세웠다.
힐, 방귀 냄새, 다시 만날 확률이 없는 남자......
들려오는 중요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오늘 아침 버스 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이사장 놈의 쌍판대기라는 말!
“쌍판대기? 욕같이 들리는데?”
그는 윤슬을 째려봤다.
저 여자뿐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다시 봤을 때 기억을 못하는 여자는.......
*
*
윤슬은 점심시간을 짱순과의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고 곧장 논문 준비로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다.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리자 시간을 확인하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돌려 입고는 오후 회진을 위해 연구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병원 직원들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지나가는 병원 직원들도 매 이사장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 직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사장은 현생에 있을 수 없는 저승남이었다.
여하튼 윤슬은 본관 5층 병동으로 오는 내내 반강제적으로 이사장에 대한 세뇌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기진맥진이 되어 병동에 도착했는데, 간호사실에는 레지던트 2년 차 일명 소문 일보 수현이 간호사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게 보였다.
간호사들도 수현의 이야기에 빠져 윤슬이 온 걸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목을 옆으로 돌리는데 그 목선이 얼마나 섹시하던지, 거기다 손가락은요, 길고 가지런한 게 또 얼마나 퇴폐미가 흘러넘치는지...... 그 긴 손가락이 제 목덜미를 이렇게 감싸(하는데).......”
윤슬이 다가가 눈을 감은 수현의 목덜미를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간호사들은 그제야 윤슬을 보고 목례를 했다.
윤슬도 목례를 하며 조용히 하라고 오른손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수현은 그 손이 마치 철인의 손이라고 생각하는 듯 부여잡고 미소를 지었다.
윤슬이 한 쪽 입 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손에 힘을 주어 수현의 목덜미를 꽉 움켜쥐었다.
“아아~”
목과 어깨를 잔뜩 움츠린 수현이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잠시라도 시간 나면 어디 짱 박혀서 잠을 더 자고 싶을 땐데, 김 선생은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다 말이야.”
수현이 오징어처럼 몸을 꼬자 목덜미에서 손을 떼며 윤슬이 말했다.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목덜미를 주무르던 수현이 윤슬을 보고 놀라 그 때서야 허리를 굽신 거리며 인사를 했다.
“그래~ 나도 안녕? AI 김 선생.”
“아니에요, 교수님! 조금 전에 여기 서서 잠깐 졸았어요. 교수님께서도 보셨잖아요. 저 눈 감고 잠꼬대 하는 거.”
그러면서 배시시 웃었다.
웃어? 레지던트 2년 차가 되더니 많이 능글맞아졌어, 요놈!
“아~ 꿈속에서 섹시한 목선과 퇴폐미가 넘치는 손을 가진 어떤 남자와 키스라도 했나 보구나.”
윤슬이 담당 환자들의 챠트를 들쳐보며 말했다.
“아, 아니요.”
수현이 두 손을 흔들며 펄쩍 뛰었다.
“그럼 섹스?”
수현을 놀리려고 작정을 한 듯 윤슬이 눈을 부라리며 톤을 높혔다.
“아, 아니에요 교수님! 저는 그냥 오늘 취임한 이사장님에 대해 이브닝 번 병동 식구들이 궁금해 하길래 설명을 잠깐 아주 잠깐 해 준 것 뿐이에요.”
억울한 듯 발까지 동동 굴렀다.
“이사장?”
“네.”
도대체 이사장이란 놈이 얼마나 대단하게 생겼길래 다들 이 난리인 거야?
윤슬은 이제 이사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우~ 기 빨려!”
“네?”
수현이 아직 억울한지 뚱한 표정을 하고 되물었다.
“아니, 오해해서 미안하다구.”
윤슬은 다시 챠트를 보며 말했다.
어느 새 생기를 찾은 수현은 윤슬 옆에 붙어서 조잘대기 시작했다.
“교수님, 오전에 수술이 있어서 이사장님 못 보셨죠? 완전 슈퍼 울트라 캡숑으로 (하는데)”
안다고! 벌써 들었다고! 그 놈의 이사장 이야기는 그만 좀 하라고!
“회진 안 돌거니? 이사장 이야기는 그만 하고 할 일을 하라고!”
윤슬은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