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비서는 출근하자마자 오늘 일정에 대해 읊었다.
“점심시간에는 (하는데)”
책상 위에 손가락을 까닥까닥 거리고 있던 철인이 갑자기 일어섰다.
윤슬은 지금 수술실에 있는 걸 확인 했으니까 지금이 적기였다.
“남 비서 응급실에 시찰 한 번 나가야 할 거 같아!”
“갑, 갑자기 응급실은 왜요?”
“그러니까........ 그래, 응급실이 얼마나 바쁜지 보러......”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응급실인데 이사장님이 가면 응급실 의료진들이 더 바빠질 텐데요.”
“그렇지!”
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본 남 비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너무 쉽게 설득 당하잖아.
그럼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건데.
이사장님을 밤새 잠 못 들게 한 무언가.......
남 비서가 허리를 숙여 철인의 눈빛을 봤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물었다.
“뭐 있죠?”
“뭐, 뭐가 있다는 거야?”
철인이 이마를 감싸며 남 비서를 째려봤다.
“그럼 누가 걱정이 돼서 이러는 건가?”
철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
남 비서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나 봤는데? 이사장님 눈빛 흔들리는 거!”
“!!!!!”
“말하기 싫음 관두세요.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다 알게 돼 있으니까.”
남 비서가 철인의 눈치를 보며 돌아서려고 하자 철인이 입을 뗐다.
“아니, 어젯밤에 가아앙 교수 아이가 응급실로 들어왔는데 그 상태가 심각한 거 같더라고.”
“누구 아이요?”
남 비서가 귀를 들이댔다.
“강, 강 윤슬 교수!”
왜 그런지 몰라도 강 교수의 이름을 말하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강 누구요? 크게 좀 말해 보세요!”
“정형외과 강 윤슬 교수라고!”
철인이 이번에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크게 말했다.
“우리 정형외과에 강 은술 교수님도 있나요?”
남 비서가 귀를 파며 못 들은 척 했다.
“관 둬. 관 둬. 말 안 해.”
철인이 의자를 홱 돌려 앉았다.
“아~ 우리 병원 에이스 정형외과 강 윤슬 교수님요!”
“다 알아 들었으면서!”
철인이 의자를 다시 홱 돌려 남 비서를 눈이 빠질 듯 째려보았다.
“강 교수님이 우리 이사장님을 이토록 시름에 들게 하셨구나!”
남 비서의 눈빛이 재밌어 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철인은 남 비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을 읽고는 말을 이었다.
“시름이 아니라 걱정, 걱정!”
“아~ 밤새 강 교수님 걱정! 결혼했을까 봐~”
얘 뭐야?
내가 비서를 신기 충만한 무슨 도령을 뽑은 거야?
“아니, 나는 아이가 아프니까 우리 병원 매상에 지장이 있을까 봐 그런 거지! 설마 말도 한 번 안 섞어본 사람을 내가? 말도 안 돼!”
철인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려 애를 썼다.
“말 섞어 봤잖아요.”
남 비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헐!
얘 진짜 어디 자리 깔고 앉아야 되는 거 아니야?
비서하는 거보다 돈 더 잘 벌겠는데?
“뭐?....... 언제?”
“취임식 날 버스 안에서요. 강 교수님이 버스 안에서 이사장님 허벅지에 딱 앉았을 때요.”
철인이 놀라 의자를 뒤로 밀었다.
“너 뭐야? 계룡산에서 온 도령이야?”
커진 눈으로 남 비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도령은 무슨? 저도 그 버스를 타고 있었으니까 알죠!”
남 비서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뭐야?”
철인이 발끈했다.
“버스를 탄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저도 그 때는 이사장님이 이사장님인 줄 모르고, 강 교수님이 강 교수님인 줄 몰랐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오늘 나 왜 이러냐? 이거 남 비서에게 완전 말리는 기분인데.......
철인이 한숨을 쉬었다.
“강 교수님이 엉덩이로 이사장님 얼굴을 빡 강타하고, 가스 배출까지 하셨는데 화를 내기는커녕 민망해 할 강 교수님을 걱정하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저는 딱 알아봤습니다.”
남 비서가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어! 어디 가서 유언비어 터트리지 마. 그럴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이사장님 하는 거 봐서요.”
“너 오늘 안 되겠다. 혼 좀 나자! 나 갑질로 신고 당할게.”
철인이 자켓의 단추를 풀며 일어나자 남 비서가 수첩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문을 다시 열고 얼굴만 내밀고는,
“가아앙 교수님 일은 제가 알아보고 보고 드리도록 할게요.”
*
*
윤슬이 수술을 끝내고 휴대폰을 켜자마자 전화기가 울려댔다.
응급실이었다.
어제 데리고 온 아이의 어머니가 응급실에 와 있다고 했다.
윤슬은 당장 내려가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아이의 어머니라는 여자를 봤을 때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수현이 다가와 그 아이 엄마라고 온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고 귀 뜸 해 주었다.
수현의 말대로 막상 그 여자를 봤을 때 말문이 막혔다.
윤슬이 생각했던 태도와 이미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명품 옷에 명품 가방에 화장을 진하게 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었다.
짧은 치마에 꼬고 있던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바꿔 꼬며 간호사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윤슬이 다가가도 게임에 집중하느라 모르는 눈치였다.
“아이 보호자 되신다구요?”
윤슬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아이 주치의세요?”
그 여자는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 얼굴을 처박고 답했다.
“그런데요.”
“아이 씨........ 잠깐만요.”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휴대폰 액정을 두들겼다.
윤슬이 어이가 없어 핸드폰을 그 여자의 손에서 낚아챘다.
그 여자가 뭐 하는 짓이냐고 기리기리 날뛰며 일어섰다.
그리고 윤슬을 매섭게 째려봤다.
“지금 게임이나 하자고 병원에 왔습니까?
“오빠한테 이르기 전에 내 핸드폰 내 놔요.”
윤슬은 휴대폰을 허리 뒤로 숨기며 병원에 게임하러 왔냐고 다시 물었다.
그 여자는 그 때서야 눈을 바닥으로 깔며 팔짱을 꼈다.
“우리 아이 퇴원시켜 가려구요.”
스모크 화장을 짙게 한 그녀의 눈에서 죄책감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식도 없는 아이를 어떻게 퇴원시켜 간다는 말씀이시죠?”
그 여자는 윤슬의 말에 코웃음을 지었다.
“애 상태를 보고도 지금 웃음이 나와요?”
“우리가 그런 거 아니에요. 지가 까불다가 넘어져서 그런 거예요.”
윤슬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느라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럼 애가 다쳤으면 병원으로 데려와야 되는 거 아니니? 그건 상식 아니냐고?”
“지가 안 가겠다고 하잖아요.”
윤슬이 주먹을 꽉 쥐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왜 이래요?”
그 여자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안 가겠다고 했다고? 그래도 부모라면 저 지경이 되기 전에 데리고 와야지!”
윤슬은 자신이 진짜 애 엄마하고 이야기를 하는 게 맞나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부모 손에 저 아이가 맡겨졌으니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경찰도 괜찮다는데 당신이 뭔데 이래요?”
“뭐라구요?”
“우리 오빠가 경찰하고 다 이야기 했다구요.”
“오빠 불러요! 나는 경찰 부를 테니까. 나는 그 말 못 믿겠으니까 사자대면 해요.”
“안돼요! 우리 오빠 이런데서 얼굴 팔리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자식이 아픈데 병원에 오면 안 되는 사람이 어딨어~요?”
윤슬은 화를 참느라 몸에 사리가 곳곳에 생기는 느낌이었다.
“이 언니 말귀 어둡네. 그렇게 이야기 하면 대충 알아들어야지.”
그 여자는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급 자신감이 생겼는지 윤슬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그래?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오늘 면상이나 한 번 보자!
윤슬은 쥐고 있던 그 여자의 휴대폰을 켰다.
그 여자는 휴대폰을 뺏기 위해 윤슬에게 죽자고 달려들었다.
윤슬은 돌아서 몸으로 필사적으로 막아내며 최근 통화 목록에서 그 오빠로 보이는 ‘내 사랑 돈방석’에게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제가 할게요.”
그 여자가 휴대폰을 뺏어가며 말했다.
“전화번호 외웠다. 딴 짓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경고를 한 뒤 윤슬은 챠트를 뒤져 어젯밤에 왔던 관할 파출소에 전화를 해서 따져 물었다.
부모의 말을 들어보니 아동학대로 의심되는 정황이 없어 더 이상 수사할 게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이다니........ 얼척이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과의 통화를 끝낸 뒤 넋 놓고 있는데 얼마 안 돼 병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그 아이 지금 당장 퇴원 시키라고.......
윤슬은 그 여자를 째려봤다.
그 여자는 윤슬을 보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윤슬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며 혀를 내밀었다.
“아오, 저걸 그냥........”
윤슬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 둘 윤슬이 아니었다.
윤슬은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라는 제목 아래 글을 썼다.
아이의 상태와 반성 없이 사건을 무마하기에 급급한 부모의 태도, 조사에 소극적인 경찰의 태도를 꼬집으며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부모를 조사와 더불어 처벌해 주라는 국민 청원을 올렸다.
그리고 병원 직원 메일에 청원에 적극 참여해 달라는 글도 함께 올렸다.
윤슬의 글은 올리자마자 아이를 둔 병원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
*
남 비서는 철인에게 새로운 내용이 업데이트 될 때마다 자세하게 보고했다.
“병원장이 강 교수에게 전화를 해서 그 아이를 퇴원시키라고 했다는 거지?”
“네.”
“그럼, 병원장은 그 오빠가 누군지 알겠네.”
“아마도요.......”
철인은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가시게요?”
“병원장에게 가서 이런데서 얼굴 팔리면 안 되는 오빠가 누군지 알아내야지.”
“알아내셔서 뭘 어떻게 하시게요?”
“똑똑히 알려줘야지. 너희들이 무시한 강 교수에게도 나 같은 오빠가 있다고.”
“네에?”
남 비서는 기겁을 했다.
그 사이 철인은 벌써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본관에 있는 병원장의 사무실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병원장의 비서들에게 보고하지 말라고 하고 철인은 병원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원장은 누구의 전화를 받고 있는지 몰라도 쩔쩔 매며 철인이 온지도 모르고 있었다.
철인은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사모님!”
병원장이 한숨을 쉬며 응급실로 전화 했다.
“당장 강 윤슬 바꿔!”
병원장은 단단히 화가 난 거 같았다.
윤슬이 전화를 받았는지 거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진짜 미쳤어? 돌았어? 죽고 싶어 환장을 했어?(하는데) 뚜뚜뚜.......
병원장이 수화기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했다.
“수화기 이만 내려놓으시지요.”
유선 전화기의 재발신 버튼을 꾹 누르고 있다 놓으며 철인이 말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으며 병원장이 물었다.
“여쭤볼 게 있어서 왔지요. 아, 그리고 노크를 했는데 너무 오래 답이 없으셔서 허락도 없이 이렇게 들어와 있었습니다.”
철인이 배시시 웃었다.
병원장은 저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 이번에는 뭘로 자신을 골탕 먹일지 바짝 긴장을 하는 눈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한 가지 여쭤 보지요.”
“.......”
“응급실에 있는 아동학대 의심되는 그 아이 아버지가 누굽니까? 누구길래 병원장님께서 강 교수에게 퇴원시키라 마라 명령하신 겁니까?”
철인이 병원장의 책상을 두 손으로 치며 물었다.
잠깐 눈을 감고 든 병원장은 한 쪽 입 꼬리를 치켜들어 웃더니 혀를 찼다.
“쯧쯧쯧, 부모 잘 만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네가 뭘 알겠어?”
철인의 눈앞에 실핏줄이 터진 자신의 눈을 갖다 댔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사명감이니 정의니 하며 불나방처럼 뛰어 들겠지만 조금만 지나 봐. 그 후유증이 얼마나 아픈지 뼈저리게 후회할 테니.”
그 때 철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남 비서였다.
철인은 허리를 펴며 전화를 받았다.
“이사장님, 미션 완료 했습니다!”
철인이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넣고 병원장에게 말했다.
“이리저리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명줄 이어가느니, 불나방처럼 한 번에 불에 뛰어드는 게 덜 고통스럽겠지요.”
“......”
철인이 병원장의 찌그러진 표정을 보고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아, 그리고 이 시간 이후로 모든 병원 직원들에게 그 어떠한 부당한 일로 압력 행사하지 마세요. 그랬다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명줄마저 끊어줄 테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살벌한 눈빛을 날리고는 돌아서서 병원장실을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 비서가 눈짓을 보냈다.
철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병원장의 비서들에게 수고하라는 인사를 했다.
비서들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도 본 듯 손을 맞잡고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병원장실을 완전히 벗어나자 표정을 굳힌 철인이 남 비서에게 물었다.
“그래, 뭐 좀 알아냈어?”
“병원장에게 그 아이 당장 퇴원시키라고 종용한 분이 사모님이랍니다.”
남 비서가 전혀 뜸을 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숙모님?”
“아니, 사모님이요.”
“어어, 어머니가 왜?”
철인이 아차 싶어 말을 번복했다.
남 비서는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대국 그룹 법무팀에 계신다는 사모님의 막내 동생, 그 분이랍니다. 애 아빠가.”
“법에 대해 잘 아는 놈이 그런 짓을 했다 말이야?”
“혼외 자녀인가 봐요.”
“변태 같으니라구. 딸 뻘 되는 여자와.......”
철인은 인상을 구기며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룹 이미지 나빠지기 전에 빨리 마무리 지으라고 회장님께 압력을 넣어야지.”
“사모님이 가만히 계실까요?”
“그러게! 그런 놈들은 더 이슈화 시켜서 세상에 얼굴을 못 들게 해야 하는데, 강 교수 다칠까 빨리 마무리 해야겠네.”
“강 교수님 말고 이사장님께 불똥 튈지는 걱정 안 하세요? 사모님 이사장님 탁탁치 않아 하시잖아요.”
남 비서가 걱정스런 투로 툴툴거렸다.
철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받아들여야 할 운명인 거지.”
“강 교수님도요?”
“그만 해라. 강 교수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니까!”
“무슨 이윤데요?”
“넌 몰라도 돼. 회장님께 가야 하니까 빨리 가서 차 시동이나 걸어.”
“오늘 회장님과 점시 약속 되어 있으시잖아요.”
“그랬나? 하여튼 비서 하나 잘 뽑았다 말이야. 어떻게 알고 이렇게 딱딱......”
철인은 남 비서의 어깨를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