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계단을 윤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랐다.
숙였던 고개를 드는 순간 연구실 앞 복도 난간에 시커먼 무언가가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때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시꺼먼 무언가가 몸을 틀었다.
집중해서 보니 자신을 보고 선 사람이었다.
이 새벽에 누구지?
순간 겁이 났다.
앞으로 내디디던 발걸음을 급하게 멈췄다.
요즘 대학가에 교수 행세를 하며 연구실 등에서 금품을 훔치는 사람이 있다는 뉴스를 본 것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뒷걸음치며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뉘신지요?”
그녀의 말이 들렸는지 누군가는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누군가가 발걸음을 내디딘 만큼 그녀는 뒷걸음 쳤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다리가 꼬여 뒤로 또 넘어졌다.
불안한 마음이 온 몸에 퍼져 몸이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복도에 설치되어 있는 동작 인식 조명이 켜지자 누군가는 시커먼 그림자로 바뀌어 다가오고 있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울리는 구두 소리가 무섭게 들렸다.
사방은 어둡고 공기마저 찼다.
인턴 때 환자가 수술 중 사망했는데 마무리 한다고 잠깐 혼자 남아 있을 때처럼 싸한 분위기가 지금도 느껴졌다.
식은땀이 나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거 같았다.
뒤로 기어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왔다.
엘리베이터는 이번에도 저 아래층에 가 있었다.
손이 떨려 버튼도 누르지 못했다.
“오늘 진짜 재수가 왜 이래? 굿이라도 해야 되는 거야? 또 여기서 굿이 왜 나와?”
그 와중에 윤슬은 과학적인 근거도 없다며 무시했던 굿 이야기만 들먹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자신의 몸 위에 겹쳐질 만큼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그냥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굿타령을 계속 하시던데 여기 귀신이 많은가 봅니다.”
말을 걸어왔다.
중저음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였다.
‘아까부터’라는 말을 하는 거 보니 응급실로 갈 때 문 앞에서 자신을 받쳐줬던 그 남자인 거 같았다.
그 남자라면 자신을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해치려고 했으면 아까 해쳤을 테니까 말이다.
마스크 위로 유일하게 나와 있는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쁜 놈의 얼굴은 보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혹시 모르는 상황에서 얼굴이라도 봐 놓아야 나중에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냥 잘 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짙은 눈썹에 쌍꺼풀이 진하지 않은 큰 눈, 손대면 베일 것 같은 날렵한 콧날, 적당히 도톰한 입술과 하얀 피부에, 멋들어지게 흘러내린 몇 올의 웨이브 진 단발 길이의 갈색 머리카락을 빼고 뒤로 묶은 머리 스타일은 어떻게 그렇게 조합이 잘 되었는지 미술책에서 본 조각상 같았다.
삼신 할매가 에너지 음료를 마시며 몇 날 며칠을 공들여 만든 그런 얼굴?!
거기다 185cm은 넘을 것 같은 키와 다부진 몸에 걸쳐진 하얀 와이셔츠, 느슨하게 맨 남색 넥타이, 그 위에 껴입은 회색 가디건과 검은 자켓은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윤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놀라고 불안해서 뛰는 박동과 낯선 심장의 두근거림이 섞여 있었다.
‘아~ 내가 너무 굶었어. 비주얼이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심장이 뛰다니! 다 사용하라고 만든 본능을 그 동안 너무 억제해서 그래......’
윤슬은 눈을 감고 고해 성사를 하듯 중얼거렸다.
“이제 귀신 물러가라고 주문이라도 외우는 건가?”
다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윤슬은 놀리는 듯한 말투에 자존심이 상해 그를 째려봤다.
나쁜 놈들이 나쁜 놈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병원이다 보니 귀신이 아무래도 많겠지요.”
긴장을 해서인지 목소리가 떨렸다.
“아하~”
그가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이 시간에 제 앞에 서 계신 시커먼 분은 뉘신지요?”
윤슬은 왜 자신의 연구실 앞에 계속 서 있어서 사람 놀라게 하냐고 욕이라도 한 바가지 끌어 붓고 싶었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귀신이 아니라면 신분을 좀 밝혀 주시지요.”
“나 이상한 놈 미친 놈 나쁜 놈 아니니까 이제 좀 일어나요.”
철인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의 상냥한 말투에 이상하게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낯선 남자의 손을 덥석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런 놈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어서요.”
윤슬이 혼자 일어서니 그도 손을 거두고 몸을 세웠다.
그의 숨결이 머리카락을 흔들 정도로 가까이에 서 있었다.
눈을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올려다보지 않으면 벽 같은 그의 가슴과 목 밖에 볼 수 없었다.
조금 전보다 더 가까이에 서 있는 그를 보니, 입고 있는 슈트는 그의 몸에 알맞게 붙어 잘 빠진 몸의 실루엣을 잘 드러내며 멋있게 보이게 했다.
“그런 놈의 몸은 왜 그렇게 훑어보시나? 어떻게 감당하려고?”
“걱정 마요. 덮치진 않을 테니까.”
“어허, 그래요? 하지만 나는 어쩌나? 본능에 충실한 수컷이고, 사방은 어둡고, 우리는 이렇게 또 가까이 있는데!”
“내 눈 앞에 몸을 가져다 놓은 건 그쪽이거든요. 나는 지금 눈알 굴릴 힘도 없어서 그 쪽 몸 훑어 볼 생각 추후도 없었다구요.”
“아~ 그랬구나!”
그가 피식 웃었다.
“싸움 잘 하세요? 내 친구 중에 어벤져스가 쳐들어 와도 물리쳐 줄 보안 팀장님도 있는데......”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전화기를 찾아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없다.
주머니가 뚫어질 정도로 샅샅이 뒤졌다.
텅텅 비어 있었다.
의료복 주머니에도, 어디에도 휴대폰이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연구실에서 나올 때 분명히 가운 주머니에 넣었는데 말이다.
“휴대폰이 어디 갔지?”
“싸움 잘 하는 보안 팀장을 부를 핸드폰이 없다고? 이걸 어쩌나?”
그가 좀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이미나!”
“이미나?”
조금 전의 장난끼로 똘똘 뭉쳤던 얼굴 표정은 싹 사라지고 그는 자기 몸에서 냄새가 나는지 몸을 이리저리 돌려 냄새를 맡았다.
“이상한 놈, 미친 놈, 나쁜 놈이라고 한 건데!”
윤슬은 한 쪽 얼굴 근육만 찌푸린 체 놀림체로 말했다.
윤슬의 말에 철인은 몸에서 냄새 맡는 행동을 멈추고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윤슬은 순식간에 긴장이 풀어져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자신을 농락하는 듯한 그녀의 웃음과 경사진 말투가 상당히 거슬렸다.
허리를 잔뜩 숙여 아직도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는 싸하게 웃었다.
윤슬은 웃음을 싹 거두고는 고개를 최대한 뒤로 뺐다.
그나마 마스크 때문에 얼굴이 다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환자 말고 낯선 남자와 마주 보고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흔들림 없이 고정된 눈동자는 불빛을 알맞게 흡수하여 촉촉하게 빛났고, 적당히 붉은 입술은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와 눈싸움에서 진 그녀의 눈동자는 빠르게 여기저기로 도망다녔고, 할 말을 찾지 못한 입은 마스크 안에서 닭나발처럼 앞으로 쭉 나왔다.
“내 분명 경고했는데 왜 이렇게 도발을 계속 하는지...... 참기 힘들게!”
그는 중얼거리듯 조용히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없어진 그녀의 휴대폰이었다.
“어, 그거 내 꺼 같은데! 당신, 요즘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그 강도예요?”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 눈앞에 있는 휴대폰을 가져가려고 하니 그는 휴대폰을 든 손을 높이 올리며
“이 메이커 대학 병원 교수라고 해서 다 똑똑한 게 아닌가 봐? 내가 소매치기면 이 야심한 밤에 정확하게 4시간 17분을 아무것도 할 것도 없는 여기에서 휴대폰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기다렸겠소?”
그의 눈빛이 엄하게 빛났다.
“내 연구실에 있는 다른 금품을 노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럼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에 빨리 당신을 제압시키고 당신이 말한 그 금품들을 가지러 갔겠죠?”
“그럼 왜......”
그의 엄한 눈빛에 제압되어 말끝을 흐렸다.
“말했잖소! 휴대폰 주인 찾아주기 위해 기다렸다고.”
또 다시 그의 눈이 천천히 다가왔다.
윤슬은 몸을 최대한 뒤로 젖혔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숨소리가 다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대고 놀리 듯 말했다.
윤슬의 몸과 마음이 다시 긴장 되었다.
“진짜 뭘 기대한 건가?”
“변태 꼴통!”
그녀가 발끈했다.
“좋은 일 좀 하려고 했는데...... 욕을 먹고 나니 삐뚤어지고 싶네. 나도 그 쪽을 기다렸으니 그럼 그 쪽도 좀 기다리죠.”
뒷걸음치면서 그는 허리를 펴더니 인상이 굳어지고, 장난기 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구요? 뭘 기다리라는 거예요?”
잔뜩 인상을 쓰고 목소리로 높였다.
그러는 사이 그는 휴대폰을 들고 언제 버튼을 눌렀는지 홀연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침에 연락할 테니 당신이 와서 찾아가십시오. 다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고 찾으러 가요?”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고 그는 재밌다는 듯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야이~ 돌아이 밥통 같은 놈아 거기서!”
있는 힘껏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심장은 그를 향해 계속 두근거렸다.
하지만 머리에서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우~ 살다 살다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나네. 경찰에 확 신고를 해 버릴라. 오늘 일진이 왜 이러냐 정말!”
씩씩대며 연구실로 걸어왔다.
응급실에서 사모한테 당했던 것보다,
두 번이나 넘어진 모습을 돌아이 밥통 같은 그 놈에게 보여 줬다는 것보다,
누군지도, 뭐 하는 놈인지도 모르는 그 놈에게 반응을 보인 자신의 마음에게 화가 났다.
*
*
“휴우~”
철인은 사무실로 들어와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아, 이제 좀 진정하자! 더워 죽겠다.”
손 부채질을 해 보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직도 낯선 심장의 두근거림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자켓을 벗어 소파에 던져 놓고 발코니로 나가 앉았다.
아침을 준비하는 새벽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그는 손에 들린 그녀의 핸드폰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그녀를 다시 보니 오래 사귄 친구처럼 마음이 편했다.
자신을 짓누를 수 있는 권력 앞에서도 어떤 격식이나 꾸밈없이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이 그의 마음을 평화롭게까지 했다.
그래서 핸드폰을 인질로 잡아 왔다
그녀의 눈빛을 잠깐이라도 더 익히고 싶어서......
하지만 이제 이걸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문 앞에 갖다 놓고 유선 전화라도 할까?
그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두세 시간만 기다렸다가 직접 전해주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철인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들어왔을 때는,
손에 몇 개의 종이 가방이 주렁주렁 달린 체였다.
직접 작성한 대자보를 그녀가 볼 수 있도록 1층 게시판에다 붙여 놓고 그녀가 되도록 빨리 보기를 바랬다.
남 비서는 핸드폰이 누구의 것인데 크리스마스 아침에 출근을 해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물어왔다.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