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나의 자카르타
작가 : 히타히타
작품등록일 : 20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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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필요해
작성일 : 19-09-05     조회 : 67     추천 : 0     분량 : 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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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중 잠에서 깼다.

 벌써 며칠째 이러고 있다.

 아잔 소리 때문은 아니다.

 아잔 소리가 울려 퍼지기 훨씬 전 나는 뭔가 딸각이거나 저벅저벅 걷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그 소리는 항상 1층에서 났다.

 눈을 뜰 때면 미친 마법사 할멈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할멈은 한 달째 반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반둥에서 천국에 가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일주일 전 들여놓은 테이블이 창틈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문밖에선 빗소리가 작게 속삭이듯 들려왔다.

 

 “잠자긴 글렀군.”

 

 나는 1층 전등을 켜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아내의 레시피 공책을 들고 나와 새 탁자에 앉았다.

 

 자카르타에 온지 벌써 한 달이 흘렀다.

 나는 호텔에서 나와 식당건물 2층에 기거했다.

 지난 한 달은 내 평생 처음 겪어보는 악전고투였다.

 

 나는 인근 대학의 비파(BIPA: 외국인을 위한 인도네시아어 강좌) 초급 과정을 열심히 들었고, 생각보다 빨리 회화 실력을 올렸다.

 그건 내 언어감각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어가 쉽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식민정부는 민족마다 다른 언어를 쓰는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말레이어를 표준어로 정했다.

 말레이어는 무역어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학습하기 쉬웠다.

 까다로운 격변화, 복수, 성, 시제 등이 없고 발음 역시 거의 예외 없이 철자에 따른다.

 

 나는 한 달 만에 생존에 필요한 문장을 대부분 구사했다.

 그러나 언어 외의 모든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식당의 메뉴를 정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나는 자카르타에서 이름께나 있다는 한식당을 돌아다니며 메뉴를 살펴봤다.

 

 인도네시아의 유명 한식브랜드는 교민이 만든 ‘청기와’와 백종원 회사의 ‘본가’였다.

 두 식당 모두 숯불로 고기를 굽는 한식 바비큐집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식은 숯불 바비큐와 비빔밥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음식은 교민과 주재원을 상대로 한 소수의 식당들만 취급했다.

 

 나는 고심 끝에 핫플레이트에 담은 갈비를 주메뉴로 정했다.

 한식도 이제 손님상에서 숯불로 요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간편하고 회전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핫플레이트는 이미 일식과 양식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다.

 다소 모험적인 방식이긴 했으나 소스에 재놓은 갈비를 주방에서 굽고 핫플레이트에 담아 내놓는다면 원가를 절약하면서도 맛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부메뉴로는 돌솥비빔밥을 선택했다.

 인도네시아는 열대 국가답게 밥을 차게 먹었으나, 돌솥비빔밥은 그 먹는 재미와 독특한 풍미 때문에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레시피 노트를 다시 읽었다.

 갈비 소스와 비빔밥 소스 부분은 이미 수십 번 읽어 외울 정도였다.

 아내가 꼼꼼히 적어놓았기 때문에 레시피를 구현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식재료를 구하는 게 어려웠다.

 

 간장이나 고추장 등은 가격이 좀 높더라도 한국 수입품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채소였다.

 채소마저 한국산을 고집하다간 비빔밥 한 그릇을 스테이크 가격에 내놓아야 했다.

 

 나는 레시피 공책에서 ‘시금치’라고 쓰인 부분에 밑줄을 쳤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망할 놈의 호린소.”

 

 호린소는 인도네이아어로 시금치라는 뜻이다.

 자카르타에선 가격이 비싼 채소고 물량도 얼마 나오지 않는다.

 호린소와 맛과 향이 비슷한 인도네시아 채소를 찾아야 했으나, 재래시장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았다.

 

 “몰라. 몰라.”

 

 나는 공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잠을 자지 못해 눈알이 뻑뻑하고 시큰거렸다.

 

 “식당을 아는 친구가 필요해.”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었다.

 내게는 제우스와 캐서린 말고 마음이 맞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캐서린은 식당 개업과 관련한 서류 작업 외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철저히 계약에 따라 자기 할 일만 하는 화교의 방식이 그러했다.

 

 제우스는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추가 대행료를 계속 요구했다.

 식당 인테리어, 기물 구매, 심지어 간판 제작 업체에 대해 물어봐도 청구서부터 쓸 준비를 했다.

 비용을 지급한 일도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

 제우스가 연결해준 비자브로커 와띠는 급행료까지 받아먹고 두 주면 완료된다는 비자 수속을 한 달이 넘도록 질질 끌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말레이시아로 건너가 관광비자를 연장해야 했다.

 

 나는 눈을 떴다.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1층이 오늘따라 쓸쓸해보였다.

 외로움을 각오하고 떠나왔지만 오늘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웠다.

 2층으로 올라가려고 일어설 때, 나는 식당 구석에 서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1층 출입문은 셔터까지 내린 채 잠겨 있었다.

 그가 들어오려면 창문을 깨는 수밖에 없지만 어디에도 깨진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깡마른 노인이었다.

 광대뼈가 불거진 길쭉한 얼굴에, 티셔츠 밖으로 튀어나온 팔뚝은 마른 장작처럼 보였다.

 나는 자카르타에 도착하자마자 산 블랙베리 저가폰에 긴급 신고 기능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좀도둑이 많으니 웬만하면 호텔에서 지내라는 제우스의 말도 떠올랐다.

 

 노인이 씩 웃었다.

 툭 튀어나온 뻐드렁니에 누런 담뱃진이 묻어 있었다.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멍해져 인도네시아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노인이 그런 나를 보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권 사장. 잘 지냈어?”

 

 한국인이었다.

 노인은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무심하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진 않았습니다만, 뉘신지요?”

 “큭큭큭. 여전하군.”

 

 노인은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와, 자리를 권하지 않았는데도 주저앉았다.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마른 팔뚝을 건들거렸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노인은 내 날선 눈빛을 미소로 받아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날 찬찬히 바라보는 그 표정에는 적의가 묻어있지 않았다.

 

 “그래, 그런 거였어.”

 “뭐가 그런 겁니까?”

 “일면식도 없는 권 사장이 왜 날 찾아왔는지 몰랐거든. 알고 보니 내가 자네를 먼저 찾아온 거였어. 이렇게 말이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노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물이 하나도 들어와 있지 않은 건물을 보면서도 그는 뭔가를 안다는 듯 계속 고개를 끄덕거렸다.

 

 “돌담이 아직 개업도 안 했으니 15년 전이구먼. 이때쯤 자네가 날 찾아왔지.”

 

 나는 깜짝 놀랐다.

 노인은 간판도 달지 않은 식당 이름을 알고 있었다.

 

 “돌담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우스가 말하던가요? 그 사람이 보냈습니까?”

 

 노인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름이 늘어진 목이 칠면조처럼 붉게 부풀어 올랐다.

 

 “우리는 15년 동안 이 빌어먹을 자카르타에서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네. 15년 뒤에 나는 죽게 되지. 자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모릅니다.”

 “나도 몰랐네. 죽기 전까진 몰랐어.”

 “지금 어르신이 돌아가신 분이란 말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과거로 여행을 떠나지. 자기 일생을 죽 둘러보게 된단 말이야. 나도 그러던 차에 여기 잡혀 버렸네. 왜 여기 오래 머물게 됐는지는 나도 몰라.”

 

 미친 노인이었다.

 나는 노인이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해졌다.

 돈이든 물건이든 노인이 원하는 걸 줘버리고 당장 쫓아내고 싶었다.

 

 “뭘 드릴까요?”

 “그런 건 없어. 나는 지금 찌까랑에서 미가라는 식당을 하고 있네. 한인회 주소록을 보면 바로 나와. 그리로 찾아오게.”

 “제가 왜 갑니까?”

 

 노인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노인의 옹이처럼 튀어나온 손가락 마디가 움직일 때마다 똑똑똑 소리를 내며 가늘게 흔들리던 테이블 바닥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것은 환각이나 꿈이 아니었다.

 

 “자네 지금 힘들고 외롭잖아? 내가 힘이 돼줄 걸세. 우린 죽이 잘 맞았어. 특히 자네의 그 냉소적인 유머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지.”

 “15년 동안이나요?”

 “그렇지. 15년 동안. 처음에 나는 자네가 식당을 연다는 걸 말릴 걸세. 그 말에 굴복하지 말게나. 그땐 내가 식당에 넌더리났을 때였거든. 자네는 훌륭하게 해냈어.”

 

 나는 쓸데없는 짓인지 알면서도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 식당이 잘 됩니까?”

 “나는 계속 자네를 부러워해 왔어. 사업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꽤 큰 성공을 거뒀거든. 하지만 내 인생은 계속 추락했어. 여기가 바닥인가 싶으면 또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찌까랑을 찾아가서 어르신한테 무슨 말을 하면 됩니까?”

 “그냥 도와달라고 솔직하게 말하게. 자네가 그렇게 말할 때 꽤 마음에 들었어. 자네는 빌어먹을 사업가 놈들처럼 허풍을 치지도 않았고 날 치켜세우지도 않았어. 그냥 외롭고 슬퍼 보였어. 그게 자네였지.”

 “제가 좀 그렇죠.”

 

 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튀어나온 뻐드렁니가 다시 드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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