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박 사장은 망한다며 말리고 나는 망해도 좋다고 버텼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서히 취해갔다.
박 사장은 취해가면서 말을 놓았고 나는 그를 형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자네 한번 생각해 봐. 인도네시아 사람한테 한식은 외국 음식이지. 가끔 생각날 때 한번 먹으러 가는 음식이란 거야. 우리가 멕시코나 브라질 요리를 먹는 것처럼. 근데 그런 동네에서 되겠어? 여기서 한식당을 하려면 철칙이 있어.”
“무슨 철칙이요?”
“첫째, 새로 생긴 쇼핑몰에는 절대 내지 말 것. 거긴 자리 잡을 때까지 손가락만 빨아야 하고 게다가 임대료는 상상을 초월하지. 둘째, 한식당이 모여 있는 곳에 낼 것. 여기 세노파티처럼 말야. 사람들이 한식을 먹으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어야 수요가 유지되지.”
“소개해준 분이 거기도 좋다던데요. 화교들이 많아서 돼지고기 팔아도 된다고.”
“브로커한테 걸렸군. 일어납시다. 갈 데가 있어.”
“어딜요?”
“2차 가야지.”
우리는 세노파티 근처 위자야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꽤 고급스럽게 단장한 위스키 바 형태의 가게였다.
휘장을 친 룸에는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앉아 무슬림의 본분을 잊은 채 위스키를 마셨다.
기역자 모양으로 꺾어진 바에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모여 맥주를 홀짝이면 뭔가를 소근거렸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았다.
박 사장이 맥주를 주문한 뒤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 앉은 양복쟁이 보여?”
“보이죠.”
“쟤도 브로커야. 한국 투자자들 등쳐먹는 브로커. 여긴 브로커들이 고객 접대하는 술집이라고.”
나는 구석 테이블을 훔쳐보았다.
양복을 입고 머리에 왁스를 잔뜩 바른 남자가 늙수그레한 남자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대머리 제우스보다는 똑똑해 보이는 남자였다.
“여기는 한국인 등치면서 살아가는 한국인이 많아. 자네도 그런 놈한테 걸린 걸세. 나는 심지어 비자 받아주겠다고 여권 받아가서 현지인한테 팔아먹는 놈까지 봤어.”
“제우스와는 관계를 끊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대 계약은 이미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요.”
“제우스라고? 하핫. 이름부터 걸작이네.”
나는 조금 기가 죽었다.
뿌리인다의 낡은 건물을 볼 때부터 뭔가 석연치 않았으나, 제우스가 안 나가는 건물을 내게 떠넘겼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박 사장이 그런 나를 위로하듯 말했다.
“뭐, 브로커에게 당한 건 어쩔 수 없어. 지금부터가 문제지. 자네는 계약금 날린 셈 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하던 일 하는 게 제일 좋아. 그럴 수 있겠나?”
“그럴 순 없어요.”
“그럼 그 망할 놈의 곳에서 장사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사업을 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해. 첫째는 철저한 시장조사. 둘째는 믿을 만한 현지인 파트너가 있어야 돼. 사업주 이름을 빌려준 사람이 있겠지?”
“네. 젊은 여자에요.”
“화교인가?”
“예.”
“화교라면 사기꾼이 아닐 거야. 맹탕도 아니고.”
나는 캐서린을 생각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진 않았지만 자기가 할 일을 피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제우스에게 대행료를 많이 주지 말라고 했던 적도 있는데, 그런 말을 할 때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캐서린과는 관계를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이후의 술자리는 엉망이 되었다.
술에 취한 일본인 한 명이 우리 테이블에 끼어들어 잭 다니엘을 돌렸다.
우리는 일본인 상사의 업무방식이 답답하다는 그를 위로하며 폭탄주를 만들어주었다.
결국 다 함께 ‘퍼킹 자카르타’를 외치며 술집을 나왔다.
또 비가 내렸다.
우리는 편의점 간이 의자에 앉아 오늘의 마지막 술인 맥주캔을 땄다.
“우기엔 편의점에서 비를 보며 막잔을 해야 돼. 그게 도리야.”
오리털 파카를 입은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음료수와 담배를 사 갔다.
비에 젖은 직장인들이 늦은 저녁을 컵라면으로 때웠다.
저마다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술에 잔뜩 취한 채 신메뉴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한식은 너무 번거로워요. 숯불 넣어야 하고 연기 빼야 하고 얼굴 벌겋게 달궈진 채 고기 뒤집어야 하고. 일본 요시노야 브랜드 한번 보세요. 단순히 덮밥에 토핑 몇 개 고르면 되잖아요. 한식도 그렇게 표준화하고 단순화해서 보급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핫플레이트를 생각한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외국인들이 한식에 바라는 건 자리에서 고기 구워서 쌈 싸먹는 거야. 그것뿐이라고. 본가를 봐봐. 예전에 먹지도 않던 우삼겹을 불판에 올려놓고 접시에 쌈채소를 죽 늘어놓잖아. 그것만 봐도 인도네시아인들은 눈이 뒤집힌다고.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야 돼.”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장사에 실패했냐고? 나는 돈이란 놈하고 사이가 안 좋아.”
갑자기 술이 깼다.
내가 원래 돈이란 놈하고 사이가 안 좋거든.
지난밤 노인은 똑같은 말을, 지금보다 늙은 음성으로 했다.
“뭘 또 그렇게 쳐다 봐? 이제 바닥을 쳤어. 올라갈 일만 남은 거야.”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수도 있죠.”
“하핫. 자네는 멋진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군. 마음에 들어.”
나는 맥주를 꿀꺽 삼켰다.
빨리 취기 속으로 돌아가 내가 미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고 싶었다.
“식당은 일본 놈한테 팔 거야. 내 말에 속아서 황금이라도 쏟아질 줄 알거든. 이게 애국이지.”
“식당 때려치우면 뭐 하시려고요?”
“허브 사업을 할 거야. 자네 룩셈부르크인 만나본 적 있나?”
“그럴 리가요.”
“룩셈부르크 인구가 50만 명밖에 안 돼. 만나는 것조차 황송한 일이지. 그런데 내가 아는 화교 여편네 남편이 룩셈부르크인이었어. 허브 농장을 사서 유럽에 수출한다는데, 나도 투자할까 생각중이야.”
나는 허브 사업이 기울어가는 박 사장의 인생을 블랙홀에 밀어 넣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밤 노인의 말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식당보다 더 무모한 투자였다.
“그거보단 찌까랑 부동산에 투자하세요. 상가 건물 같은 거요.”
“음... 부동산이라. 안 그래도 대학 동기 놈이 요즘 투자하라고 쫓아다녀.”
박 사장이 새우과자를 씹었다.
바람이 불어 거리의 작은 물 알갱이들이 그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부동산은 재미없어.”
“그럼 허브는 재미있어요?”
“그것도 재미는 없지. 그냥 먹고살려면 허브가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형님은 뭐에 관심이 있습니까?”
“난 요즘 양자역학에 관심 있어. 뉴턴의 물리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통하지 않는 그 작은 세계 말이야. 정말 신기하지 않아?”
“저는 형님이 더 신기한데요.”
박 사장은 자신의 말대로 돈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보고 들은 건 많아서 남의 일에 참견은 잘 하지만, 정작 자신의 일에는 끈기도 의욕도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고집이 있어서 남의 말은 잘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그런 연약함이 좋았다.
“이제 자네 얘기를 해 봐. 왜 망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잘 알아보지 않고 브로커 말에 속아서 말이야. 그 정도로 맹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뿌리가 뽑힌 것 같았어요.”
“그 말은 살려고 온 게 아니라 죽으려고 온 거라고 들리는데?”
나는 대답 없이 밤하늘을 보았다.
적도의 따뜻한 빗방울들이 우산을 잘 쓰지 않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무심히 맞았다.
“나도 그 기분 알지. 나는 외대 마인어과를 졸업하자마자 여기로 와서 삼성에 현지 취업했어. 그리고 20년이야. 자카르타엔 4개의 지옥이 있어. 비자지옥, 교통지옥, 의료비지옥, 그리고 의미의 지옥이지. 마지막 지옥이 제일 끔찍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사나 하는 거 말이야.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생각이 심해져.”
“절 도와 주시겠어요?”
“정 할 거라면 별 수 있나. 도와야지.”
박 사장이 편의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초코가 듬뿍 덮인 메그넘 초코 아이스바였다.
“술 마신 다음에 해장으로 최고야.”
“그거 드시지 마세요. 당뇨에 안 좋아요.”
“내 건강은 내가 잘 알아.”
그러다 15년 뒤에 당뇨로 죽을 거라는 미친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박 사장을 따라 아이스바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