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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카르타
작가 : 히타히타
작품등록일 : 20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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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꿈이 아니야
작성일 : 19-09-10     조회 : 72     추천 : 0     분량 : 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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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비자 브로커 와띠를 잡았다.

 내 전화를 씹거나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만나지 않던 와띠가 박 사장이 몇 번 으르렁대자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박 사장은 그녀를 보자마자 왜 내 전화를 씹었냐고 추궁했다.

 와띠는 핸드폰이 계속 말썽을 부렸다고 둘러댔다.

 

 흔한 핑계였다.

 인도네시아는 통신 사정이 여의치 않아 통화가 자주 끊긴다.

 특히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 더 심해진다.

 그래서 자카르타 사람들은 각기 다른 통신사 유심칩 두 개를 핸드폰에 심어 넣고 두 개의 전화번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번호가 연결되지 않으면 다른 번호로 연결하는 것이다.

 

 “미스터 권 비자는 어떻게 됐어?”“잘 되고 있어요. 문제없어요.”

 

 잘 된다, 문제없다,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이 3종세트 말의 성찬을 믿었다가 낭패를 보기 쉽다.

 그 말은 그냥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자가 어느 단계에 왔냐고.”

 “지금 노동청에 접수됐어요.”

 

 거짓말이었다.

 박 사장은 와띠를 만나기 앞서 아는 대행사를 통해 내 비자 진척사항을 파악해 두고 있었다.

 내 서류는 노동청에 접수조차 되지 않았다.

 노동허가가 나와야 거주 허가 프로세스를 밟을 수 있는데, 그 단계에 막혀 있는 것이다.

 

 “노동청 누굴 만났어? 명함 보여줘.”

 “여기요. 저는 이미 미스터 권이 준 돈도 전달했다고요.”

 

 나는 노동청 담당자에게 줄 뇌물을 이미 지불했다.

 그게 전달이 됐는데도 아직 서류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담당자에게 가자고 와띠를 잡아끌었다.

 와띠는 약속이 있다느니 회사에 가야 한다느니 온갖 핑계를 대다가 박 사장의 서슬에 눌려 노동청까지 따라왔다.

 

 우리는 노동청 1층 커피숍에 앉아 담당자를 불러냈다.

 10여분 뒤 잘 생긴 중년 남자가 서류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박 사장이 그에게 인도네시아어로 뭔가를 한참 설명했다.

 내 비자를 위해 필요한 돈을 지불했는데 왜 진행되지 않냐는 뜻인 것 같았다.

 남자가 으쓱 하며 되물었다.

 

 “우앙?(돈?).”

 

 남자는 와띠를 만나 서류를 전달받긴 했으나 돈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와띠는 얼굴을 붉어진 채 허공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나는 그제야 와띠가 왜 그렇게 내 전화를 피했는지 이해했다.

 와띠는 내가 준 돈을 딴 데 써버리고 비자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추궁에 와띠는 깜빡 잊었다고 했다.

 루빠. 잊어버리다.

 우리는 연신 루빠, 루빠를 외치는 와띠를 보며 할 말을 잊었다.

 

 나는 당장 돈을 가져오라고 호통 치는 박 사장을 만류했다.

 와띠에게 내 비자문제에 손을 떼라고 말한 뒤, 그 자리에서 130만루피(13만원)를 꺼내 담당자에게 건넸다.

 더 이상 와띠란 여자와 비자 문제로 얽히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박 사장이 남자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남자가 보여준 신분증은 노동청이 발행한 진짜였다.

 남자는 서류 봉투에서 영수증을 꺼내더니 자필 서명을 넣어 내게 건넸다.

 

 뇌물을 받고 영수증까지 써주는 자카르타 공무원이여, 만세.

 남자는 5일 내로 서류가 노동청을 통과하고 비자가 나올 때까지 열흘쯤 걸릴 거라고 말했다.

 

 한 고비 넘었다.

 이 고비 뒤에는 다른 수많은 고비들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카르타에 발붙이고 살기 위한 첫 관문을 통과했다는 데 만족했다.

 끼따스(임시 체류증)를 받는 날엔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형님, 고맙습니다. 내일 술 살 게요.”

 “왜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야?”

 “오늘은 건물 청소를 하려고요. 내일 인테리어 업자가 오기로 했어요.”

 “난 언제나 시간이 많으니까 언제든 술을 사도 좋아.”

 

 식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개업을 앞당기기로 결심했다.

 이전까지 나는 1년 뒤쯤 개업을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안의 알 수 없는 뭔가가 어서 시작하라고, 너는 죽으러 온 게 아니라 살러 온 거라고 충동질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충동에 따르기로 했다.

 

 박 사장이 나를 식당 건물 앞에 내려주었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벼락에 기대 서 있었다.

 조금 있으면 지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전해 사방이 깜깜해지고 아잔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나는 어둠을 기다리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짚어 보았다.

 

 업자를 재촉하면 인테리어 공사는 빨리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테리어는 아내의 식당처럼 단출하여 큰 공사가 필요 없었다.

 

 식당 기물은 자카르타 북쪽 글로독에 있는 수입업체에 가보기로 했다.

 냉장고와 싱크대는 중국산을 써도 되지만 가장 중요한 가스렌지는 한국에서 중고로 들여오는 게 좋다고 박 사장은 말했다.

 나는 그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이제 남은 건 식당 안에서 일할 사람들이다.

 다행히 주방팀은 박 사장이 식당을 폐업함과 동시에 넘겨주기로 했다.

 반둥이 고향인 순다족 셰프와 그의 아내, 처남으로 구성된 일가족 3명이었다.

 한식 경험도 있으니 내게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문제는 홀에서 서빙할 직원들이었다.

 박 사장의 식당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찌까랑을 벗어나길 꺼려했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 구직 사이트에 올리자니 시간도 많이 들고 번거롭기도 했다.

 

 “해답은 뿌리인다 토박이 캐서린이야.”

 

 나는 캐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식당 개업을 최대한 앞당기겠다는 내 말에 캐서린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서두르지 마세요. 미스터 권은 준비를 많이 해야 돼요.”

 “다음 달에 열 겁니다.”

 “알아서 하세요.”

 

 캐서린은 알아서 하라는 말만큼은 인도네시아어로 ‘뜨르스라’라고 말했다.

 ‘뜨르스라’는 남의 일에 간섭하기 싫어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서빙할 직원을 구해줄 수 있어요?”

 “제가 할 일이 아닌데요. 세무신고와 포스기 업체 소개까지는 제가 해줄 수 있어요. 그건 회계와 관련된 일이니까.”

 

 나는 잠시 침묵했다.

 수화기 너머로 캐서린이 잔기침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캐서린. 친구로 부탁하는 거라면 해주시겠어요?”

 “우린 친구가 아니잖아요.”

 “지금부터 친구하죠.”

 

 캐서린이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나는 자카르타에 와서 처음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은 뒤 캐서린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좋아요. 알아보죠. 누굴 구해와도 불평하지 마세요.”

 “걱정 마세요.”

 

 전화를 끊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지?”

 

 나는 1층 전등 스위치를 켜려다 멈칫했다.

 2층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와 계단을 적시고 있었다.

 이 시간에 2층 형광등을 켤 사람은 없으니, 내가 떠날 때 스위치를 내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계단을 오를 때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누군가 2층 거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좀도둑을 발견하는 순간 계단을 내려가 도망칠 준비를 하며 2층 현관문을 열었다.

 

 주술사 할멈이 2층 거실에 앉아 있었다.

 떠날 때와 똑같은 주름치마에 분홍 질밥에, 녹색 군용 백팩을 방문 앞에 기대 놓았다.

 

 “미스뜨르(Mr: 외국 남자를 높여 부르는 호칭). 어서 오세요.”

 

 할머니는 자기 집인 것처럼 나를 맞이했다.

 나는 할머니의 순박한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면 눈이 가늘어지며 눈꺼풀도 수많은 주름 중 하나로 보였다.

 

 “이부(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 오랜 만입니다.”

 

 나는 인도네시아어로 말했다.

 할머니가 내 입에서 나오는 단어를 듣고 놀라서 입을 벌렸다.

 

 “호, 인도네시아어를 하시네요.”

 “조금 배웠어요.”

 

 호, 라고 할머니가 감탄사를 내뱉을 때 눈은 다시 동그래지며 충혈된 눈동자를 드러냈다.

 표정이 풍부한 할머니였다.

 

 “람부딴을 사왔어요. 같이 먹어요.”

 

 할머니는 백팩 주둥이를 열어 가지에 밤송이처럼 매달려 있는 람부딴을 꺼냈다.

 길거리 좌판에서 흔히 파는 열대과일 람부딴은 밤송이 같은 껍질을 벗기면 리쯔처럼 하얗고 시큼달달한 속살을 드러낸다.

 할머니는 건물로 들어오기 전 나를 위해 람부딴을 샀을 것이다.

 

 나는 저 백팩에 뭐가 더 들어있을지 궁금해졌다.

 거꾸로 뒤집으면 고양이 앞발이나 말린 황소 눈알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어서 먹어요.”

 

 할머니가 람부딴을 까서 내게 건냈다.

 나는 그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을 씹었다.

 시큼한 과즙이 톡 터지자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할머니가 씨를 뱉어내며 또 웃었다.

 부러진 앞니가 드러나고 온 얼굴의 주름이 출렁거렸다.

 그 주름을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건물에 나 말고도 또 한 사람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

 

 “여기 얼마나 계십니까?”

 “내일 가요.”

 “내일이요?”

 “네. 이번엔 수카부미로.”

 

 할머니는 자바섬 곳곳에 고급 고객이 있는 것 같았다.

 지난 번 반둥으로 떠날 때도 고객이 번쩍번쩍한 벤츠를 보내 모셔갔다.

 그런 걸 보면 두꾼(주술사) 중에서도 꽤 신통력 있는 두꾼일 것이다.

 

 할머니가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방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서둘러 할머니를 불러 세웠다.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부는 두꾼이시죠?”

 “맞아요.”

 “꿈을 아십니까?”

 “꿈이요? 무슨 꿈?”

 

 나는 무슨 말을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해몽할 능력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인도네시아어가 딸려 물을 수 없었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요.”

 “그건 꿈이 아니에요.”

 “그럼 뭐죠?”

 

 할머니는 대답을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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