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사아어 초급 수준의 외국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것 같았다.
잠시 후 할머니는 입을 동그랗게 벌려 한 단어를 말했다.
“고스트.”
나는 피식 웃었다.
할머니가 고심 끝에 꺼내놓은 영어 단어는 너무 황당한 것이었다.
“제가 고스트를 만났습니까?”
“맞아요. 고스트는 과거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미래에서 오는 거예요. 미래에서 죽은 다음에 이렇게 과거로 와요.”
할머니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슈우욱 소리를 내며 하늘 끝에서 유령이 비행하는 시늉을 했다.
“이부가 고스트를 부르셨습니까?”
“아니요. 고스트는 기억이 있는 곳으로 저절로 와요. 저는 고스트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 뿐이에요.”
할머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악수를 청하는 줄 알고 그 손을 잡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 손을 빼내 손금을 들여다보았다.
“저는 곧 식당을 열 겁니다. 잘 되겠습니까?”
“그럼요. 성공하실 거예요.”
“여기서 계속 살까요?”
“여기는 당신의 고향이 될 거예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할 거예요.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만날 거예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바라건 바라지 않건 그렇게 될 거예요. 미래는 정해져 있어요. 누구도 미래를 바꿀 수 없어요.”
“제가 만난 그.... 고스트가...”
나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고스트라는 말을 내 입으로 꺼내기가 마뜩치 않았다.
“고스트의 말을 듣고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까?”
“아니요. 할 수 없어요.”
“고스트가 또 올까요?”
“올 거예요. 다른 고스트가.”
할머니가 손을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는 묘하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나는 뭐에 홀린 듯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탁한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미스뜨르. 저를 못 믿겠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때였다.
열린 창문으로 날벌레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날벌레가 한 마리, 두 마리 들어오더니 갑자기 한꺼번에 수백 마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눈을 감으면 벌레들의 날개가 내 뺨을 긁는 감각까지 떠올릴 수 있다.
그날 우리 집 2층 거실은 날벌레의 구름에 덮였다.
얼마나 지독하게 많았는지 형광등을 벌레들이 가려 어두워질 정도였다.
벌레들은 날개를 파닥이며 형광등에 달려들고, 식탁과 벽에 들러붙고, 내 머리 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창문을 닫았다.
그러나 벌레 떼가 이미 거실을 점령한 상태였다.
할머니가 소리쳤다.
“라론! 라론!”
나는 나중에 라론이 수캐미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기 직전에 떼를 지어 날아든다는 라론이 왜 그날 우리 집을 덮쳤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모기용 살충제를 사방에 뿌려댔다.
라론이 비처럼 우수수 거실 바닥에 떨어졌다.
할머니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물지 않아요. 놔둬요.”
“하지만...”
“라론은 돈을 불러요. 미스뜨르는 부자가 될 거예요.”
나는 살충제를 내려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어지럽게 날던 라론이 제풀에 지쳤는지 벽과 바닥에 내려앉아 기어 다녔다.
“미스뜨르는 자러 가세요.”
“라론은 어떡하고요.”
“금방 죽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치우면 돼요.”
할머니가 빗자루와 쓰레받이로 라론을 주워 담는 시늉을 했다.
별 수 없이 나는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던 할머니가 나를 돌아보았다.
“미스뜨르. 기억하세요.”
“뭘요?”
“모든 만남은 마법이에요.”
매직.
할머니는 매직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 라론이 들어오지 않도록 문을 꼭 닫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할머니는 떠나고 없었다.
나는 산더미 같은 라론의 시체를 치우느라 진땀을 흘렸다.
**
아침 10시, 나는 홀에서 가장 큰 테이블에 앉았다.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내 앞에 앉아 있는 세 아가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들이 나와 눈을 마주치면, 나는 시치미를 떼고 가게를 둘러보았다.
인테리어 공사가 끝났다.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이 원목을 뒷벽에 덧댄 것뿐이었다.
니스칠 냄새 나는 식당의 새 모습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데도 봐줄만 했다.
나는 옆에 앉은 캐서린에게 속삭였다.
“너무 어린데?”
“열아홉 살들이에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낫지 않아?”
“포스기 사용법 같은 기본적인 교육은 다 시켰어요. 여기 식당일에 닳고 닳은 애들보다는 새롭게 시작하는 애들이 나아요. 몇 년 식당 돌아다닌 애들은 조건 따지기 바쁘다고요.”
“오케이.”
캐서린의 말엔 토를 달 수 없다.
특히 그녀가 영어로 속사포처럼 말할 땐 짜증이 났다는 뜻이니 가만히 있는 게 좋다.
오늘은 홀서빙 직원들 면접을 보는 날이다.
말이 면접이지 캐서린이 알아서 근로계약서까지 작성한 뒤라, 나와의 만남은 상견례 정도였다.
그런데 어렸다.
어려도 너무 어렸다.
아무리 많이 봐도 스무 살을 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새 직원들에게 간단한 신상 정도만 물었다.
더 자세한 사항을 물을 인도네시아 실력도 안 됐고, 캐서린이 알아서 가려 뽑았을 테니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세 직원 리리, 디디, 줄리는 서자카르타 토박이인 브따위족이었다.
리리와 디디는 사촌지간이고 줄리는 그들과 동네 친구였다.
리리라는 통통한 친구는 한류 팬이었다.
그 때문인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한국어 인사를 할 줄 알았다.
내가 더 할 수 있는 한국말이 있냐고 묻자 리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요, 오빠.”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런 말은 앞으로 하지 말라고 말했다.
리리는 13살 때 <꽃보다 남자>를 보고 이민호의 광팬이 됐다.
꿈에서도 가끔 이민호와 손잡고 걷는데, 한식당에서 일하며 한국어를 더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뜨르스라, 맘대로 하라고 대꾸해 주었다.
디디는 마른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모범생 얼굴이었다.
리리와 사촌지간인데도 전혀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붉은 질밥을 꽁꽁 동여매고 있는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자카르타 젊은 층은 독실한 무슬림을 제외하고 질밥을 쓰지 않는데, 디디는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제대로 쓰고 있었다.
나는 디디에게 식당 일이 힘든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세 명 중 가장 키가 작고 여려서 걱정됐기 때문이다.
디디는 힘든 건 아무렇지도 않다며 이슬람 율법을 지킬 수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역시 뜨르스라, 알아서 하라고 나는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디디는 말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세 번 기도를 올려야 돼요. 그리고 이슬람 휴일엔 가급적 다 쉬고 싶어요.”
나는 캐서린에게 이슬람 휴일이 많냐고 물었다.
캐서린은 두 팔을 벌려 하늘을 가리켰다.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요.”
“멋진 직원이 들어왔네.”
줄리는 작은 미소도 보이지 않는 아가씨였다.
나는 줄리가 내 앞에 앉아 가게를 둘러보던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흑단 같이 윤기 나는 곱슬머리에 노란 리본을 꽂았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검은 눈은 아름다웠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
잔뜩 긴장한 채 틈을 보이지 않으려 웅크린 고양이 같았다.
“가게가 어때?”
“너무 단순해요.”
줄리가 가게 인테리어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식당이 잘 되려면 좀 더 화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잘 해 보자고.”
“저는 셰프가 되고 싶어요.”
줄리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꿈을 털어놓았다.
아마 그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긴장했을 것이다.
“요리학교 다녔어?”
“아뇨. 집에서 요리했는데 다들 잘 한다고 했어요.”
“그걸로는 안 돼.”
“여기서 배울 게요.”
뜨르스라.
나는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줄리는 첫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건물 이곳저곳을 지적하며 불평을 해댔다.
자, 이렇게 시작됐다.
한류 팬 하나, 광신도 하나, 불평꾼 하나.
서자카르타 보종의 한 동네에서 자란 세 아가씨가 돌담의 품으로 들어왔다.
솔직히 그땐 저 아가씨들과 오래 일할 자신이 없었다.
홀 직원들의 근무일은 오늘부터였다.
나는 어제 롯데 홀세일 마트에서 사온 노란 유니폼을 나눠주었다.
별 생각 없이 산 폴로 티셔츠였지만 병아리 같은 아가씨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줄리의 생각은 달랐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줄리는 옷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줄리. 유니폼이 마음에 안 들어?”
“저는 노란색이 싫어요.”
어떤 색깔이든 네 마음에 들까.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려는 말을 꿀꺽 삼켰다.
반면에 한류 팬 리리는 싱글벙글이었다.
유니폼이 뚱뚱한 상체에 쫄티처럼 달라붙었는데도 리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내일 당장 엑스라지 사이즈를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리리는 유니폼 따위가 아니라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방에서 이민호 사진을 꺼내더니 바지춤에 슥슥 닦고 내게 물었다.
“미스뜨르, 이 사진 포스기에 붙여도 돼요?”
“뜨르스라... 맘대로 해.”
리리가 포스기 모니터 앞에 이민호의 사진을 붙였다.
이민호가 부리부리한 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형국이었다.
나는 언젠가 저 이민호의 사진에 콧수염을 그려 넣겠다고 결심했다.
디디는 유니폼이 좋은지 나쁜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 마귀들이 득실대는 식당에서 살아남게 해달라고 알라께 기도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