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은 순항했다.
작은 암초들을 만나 비틀대기도 했지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대목까지 무사히 넘겼다.
매출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개업일처럼 손님이 몰리진 않아도 꾸준히 이어지는 날이 많았다.
12월30일이 됐다.
2013년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거리에는 상점마다 새해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섭씨 30도의 연말도 영하 10도의 연말처럼 시끌벅적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노빨과 장을 보고 가게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주문한 그릴기가 막 설치되던 참이었다.
마흐무드와 디디가 그릴기 앞에서 설전을 벌이다 내가 나타나자 입을 다물었다.
마흐무드는 주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디디, 기도는 끝냈어?”
“네.”
“물 한 잔만 부탁해.”
디디가 생수를 잔에 따라주었다.
나는 단숨에 물을 마신 뒤 물었다.
“왜 또 그래?”
“그릴기가 홀에 설치되니까 우리가 청소해야 한다잖아요.”
“좀 참아. 주방보조를 구하면 그 사람한테 시킬 테니까.”
홀과 주방의 갈등은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암초였다.
직원을 더 늘려도 업무 분담을 둘러싼 신경전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새 그릴기를 보며 마음을 달랬다.
숯통과 불판이 내장돼 가스를 켜면 숯불로 고기를 구울 수 있는 기계였다.
나는 손님들이 고기 굽는 장면을 구경하도록 주방 앞에 유리벽을 쳐놓고 기계를 들여 놓았다.
이제 좁은 주방에서 고기를 구울 필요가 없었다.
리리가 케이팝을 틀었다.
이틀 전 구입한 스피커에서 러블리즈의 ‘아츄’가 흘러나왔다.
“미스뜨르, 가사 뜻이 뭐에요?”
“어, 해석해줄게.”
내 인도네시아어는 쑥쑥 자랐다.
매일 현장에서 직원이나 손님과 부딪치다 보니 자고나면 어휘가 늘어 있었다.
나는 인도네시아어로 가사를 고쳐 러블리즈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맛있는 걸 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그 사람은 식당 사장님. 참 멋있게 생겼어. 너는 내 맘 모르지. 아츄.”
리리가 입을 비죽거렸다.
“가사가 정말 그런 뜻이에요?”
“그럼. 정말이지.”
“이제 사장님은 못 믿겠어요.”
어제 나는 벼르고 별렀던 일을 했다.
리리가 없는 틈을 타 이민호의 사진에 네임펜으로 콧수염을 그렸다.
리리는 그걸 보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리리가 그 정도 일로 눈물을 보이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욕을 좀 먹었다.
줄리는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호통 쳤다.
캐서린은 말 안 드는 일곱 살짜리 어린애를 보듯 나를 보았다.
어쨌든 우리는 전진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메뉴를 조금 손보았다.
가장 먼저 옥수수 보리차를 포기했다.
한식에 딱 맞는 음료였지만, 맛이 너무 빨리 변질돼 돌담의 인력으로 관리하기 어려웠다.
마흐무드는 시원한 떼(차)를 내놓자고 주장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물처럼 마시는 떼는 오래 놔둬도 맛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고민 끝에 그냥 생수를 서비스하기로 했다.
유자차도 메뉴에서 없앴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유자의 독특한 향에 적응하지 못했다.
주문하는 손님도 별로 없었고, 맛을 본 사람들은 화장품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는 대신 과일주스와 아이스크림을 얹은 컵빙수를 추가했다.
사이드 메뉴로는 잡채와 회오리감자를 추가했다.
잡채는 면의 투명한 색감 때문에 손님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회오리 감자는 최근 자카르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간식이었다.
하지만 감자를 기계에 넣어 깎고, 보기 좋게 꼬치에 꿰고, 반죽을 묻혀 튀겨내고, 거기에 분말 소스를 뿌리는 것은 생각보다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감자를 끊이지 않게 깎는 것부터 연습이 필요했다.
주로 나와 마흐무드의 아내 소피가 도맡았는데, 일 할 때마다 소피가 알게 모르게 중얼거리는 욕설을 견뎌야 했다.
나는 길거리 음식인 떡볶이, 라볶기, 김밥, 핫바도 계획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완성할 생각이었다.
돌담의 유일한 중식이 될 짜장면은 박사장의 레시피를 빌려 시험 중이었다.
손님들은 한국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그 검은 면을 궁금해 했다.
한식이 여기선 외국음식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개업빨’로 장사가 잘 된다고 해서 마음을 놓으면, 1년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개업 직후에는 손님들의 호기심 덕분에 장사가 되는 것이다.
한두 번씩 맛본 손님들은 다시 인도네시아 식당으로 발길을 돌리게 마련이다.
따라서 손님들의 기호에 맞는 메뉴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나는 가격도 계속 고민했다.
자카르타 한식당들은 가격이 높은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재료가 수입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형프랜차이즈가 아닌 소규모 식당들에겐 가격이 장벽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 장벽을 낮추고 싶었다.
돌담은 큰맘 먹고 가는 식당이 아니라 내키면 가는 식당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테이블마다 숯불을 놓고 연통을 잇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푸드코트처럼 핫플레이트를 사용했다.
그것이 맛을 유지하면서도 인력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핫플레이트에 담아낸 소갈비와 떡갈비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아내의 레시피 덕이 컸다.
나는 새해에 가격을 더 낮추겠다고 결심했다.
재료 현지화를 더 진행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시금치를 깐꿍으로 바꾸고 고기를 잴 때 한국 과일을 줄인 것처럼, 소스와 양념류에서도 해결책을 찾아내야 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왜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는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내 안에 고여 있는 무기력을 몰아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못한 몸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매일 밤 몸살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오한을 느끼며 잠들고, 통증과 함께 깨어났다.
하지만 나는 만족했다.
12월30일의 장사가 시작됐다.
연말이라 그런지 손님이 꽤 많이 들어왔다.
나는 홀에 경험 있는 캐셔 한 명을 더 고용했다.
나스리라는 175cm 장신의 순다족 여성이었는데, 대형 쇼핑몰 경험이 있어서인지 주문체크를 능숙하게 처리했다.
덕분에 브따위족 3총사들은 우왕좌왕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주방에도 잡일을 처리할 보조를 한 명 채용할 생각이었다.
손님들이 갈비와 떡갈비를 시켰다.
마흐무드의 처남이 그릴기 앞으로 나와 고기를 구웠다.
어제 재 놓은 소갈비가 육즙을 뿜어내며 노릇노릇 익었다.
손님 몇 명이 일어나 유리벽으로 다가와 연기를 피우는 갈비를 구경했다.
떡갈비가 익어가며 부풀었다.
마흐무드의 처남이 그것들을 살짝 누르자, 떡갈비의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섞어놓은 비계가 불꽃을 일으켰다.
손님들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뒤로 물러섰다.
떡갈비는 만들기도 어렵고 관리하기도 어렵다.
냉장한 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묵은내가 났다.
그러나 손님들은 갈비만큼이나 떡갈비를 많이 찾았다.
햄버그 스테이크보다 달콤하고 채소와 양념이 많이 들어간 맛을 신기해 하는 것 같았다.
잘 익은 갈비와 떡갈비가 핫플레이트에 담겼다.
나는 홀 직원들이 핫플레이트를 배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았다.
핫플레이트에는 밥과 숙주나물도 함께 놓였는데, 손님에 따라 밥 대신 감자튀김을 제공하기도 했다.
김치는 5천루피(500원)를 받고 따로 팔았다.
점심때가 지날 쯤 리리가 복수를 시작했다.
리리는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원빈 닮은 한국 사람이 있어요!”
손님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리며 쯧쯧 혀를 차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리리는 기죽지 않았다.
“오랑 아슬리 꼬레아(원조 한국 사람)! 원빈!”
나는 주방 안으로 도망쳤다.
리리는 배식구 안을 가리키며 계속 외쳤다.
“진짜 한국사람 있어요! 원빈 닮았어요!”
손님들이 배식구 안을 기웃거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돌아섰다.
나는 아예 배식구에서도 보이지 않게 냉장고 문 앞에 붙어 서야 했다.
“리리, 이민호 새 사진 붙여 놨잖아. 그럼 된 거지.”
“한국 사람이 있으면 손님이 좋아한다고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12월의 마지막 날까지는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나는 영업을 종료하고 직원들과 함께 홀을 정리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 보도(멍청이)!”
갑자기 주방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
들어가 보니 마흐무드와 디디가 삿대질하며 싸우고 있었다.
디디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왜 그래?”
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디디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마흐무드가 말을 잘랐다.
“별 거 아니에요.”
“그만 하고 퇴근하자.”
“네.”
나는 퇴근하는 디디에게 왜 싸웠냐고 다시 물었다.
디디는 아까처럼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그게...”
“괜찮아. 말해 봐.”
“그냥... 마흐무드가 저더러 일도 못하는 바보라고 그랬어요.”
“알았어. 퇴근하자.”
나는 디디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주방팀과 홀팀은 물과 기름 같지만, 그중에서도 마흐무드와 디디의 사이가 가장 안 좋았다.
독실한 신자 디디는 너무 고지식했고 마흐무드는 느물느물 속을 긁어놓는 재주가 있었다.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마흐무드와 디디는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