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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카르타
작가 : 히타히타
작품등록일 : 20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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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일어 서
작성일 : 19-10-08     조회 : 404     추천 : 0     분량 : 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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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삶이란 별 게 아니다.

 사람은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아내의 병실에서 나는 이 사실을 배웠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누구를 떠올리게 될까.

 자신이 사랑을 베푼 사람이 아니라 상처 준 사람을 떠올린다.

 아무리 성공한 삶을 산 사람도 죽음의 순간에는 자책에 몸부림치며 그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사는 동안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마흐무드가 떠난 다음날 아침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앞에는 브따위족 삼총사가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내 옆에는 전화로 자초지종을 들은 캐서린이 앉아 있었다.

 등 뒤에는 텅 빈 주방이 문을 벌리고 있었다.

 

 201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힘차게 닻을 올린 돌담도 2013년과 함께 문 닫을 처지에 놓였다.

 

 나는 이제 브따위족 아가씨들과 헤어져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겨두긴 싫었다.

 나는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화내거나 호통 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디디, 왜 친구를 서른 명이나 불러서 마흐무드를 때렸어?”

 “서른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에요. 때린 게 아니라 말다툼 하다가 살짝 밀쳤고요.”

 

 서른 명과 세 명.

 진실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숫자를 헤아려 봤자 무슨 소용인가.

 

 디디가 진심을 알아달라는 듯 질밥을 단정하게 고쳐 썼다.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그 아가씨에게 말했다.

 

 “마흐무드를 협박한 건 사실이잖아. 그건 범죄야.”

 “협박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마흐무드와 얘기하고 싶었어요.”

 “무슨 얘기?”

 “절 괴롭히지 말라고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바로 협박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흐무드와 네가 사이가 안 좋은 건 알아. 하지만 친구를 부르진 말았어야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왜?”

 “그건... 그건...”

 

 디디가 말을 머뭇거렸다.

 어쩌면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나는 브따위족 아가씨들의 급여를 계산하려고 탁상용 달력과 계산기를 꺼냈다.

 개업 준비부터 이날까지 보름 남짓한 기간의 급여를 모두 챙겨주고 작별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나는 또다시 텅 빈 건물에 혼자 남아야 했다.

 

 줄리가 그런 나를 보았다.

 그 크고 검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달력을 더듬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내 손가락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소리쳤다.

 

 “디디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줄리는 개업을 연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소리치던 그때처럼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줄리의 말을 기다렸다.

 

 “마흐무드가 우리를 만졌어요.”

 

 자마.

 줄리는 ‘자마’라는 단어를 썼다.

 자마. 만지다. 건드리다. 더듬다.

 나는 그 단어에 어떤 숨은 뜻이 있는지 몰라 캐서린에게 영어로 물었다.

 캐서린은 성추행을 뜻한다고 대답해주었다.

 

 “마흐무드가, 마흐무드가, 자기 부인이 없는데 디디와 내가 들어오면, 그러면, 막 만졌어요.”

 

 줄리는 잔뜩 흥분해 줄리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나는 주방과 홀팀이 업무 문제로 다툰다고만 생각했다.

 돌담 주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예의를 중시한다.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무슬림들이지만, 남녀 간의 신체 접촉은 꺼리는 편이다.

 나는 줄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캐서린에게 물었다.

 

 “정말일까?”

 

 캐서린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항상 내게 짓곤 하는, 아이를 나무라는 엄마의 표정이 되었다.

 

 “이 친구들을 믿으세요. 이 친구들은 돌담을 좋아해요.”

 

 줄리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말을 쏟아내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신체부위 이곳저곳을, 보기 민망한 부위까지 가리켰다.

 마흐무드가 그런 부위를 건드렸다는 뜻이었다.

 

 줄리는 낯을 많이 가리는 여자다.

 그런 그녀가 수치심을 참고 온몸으로 자신을 믿어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마흐무드가 도망간 진짜 이유를 알았다.

 급여를 올려준다고 해도 반둥으로 내뺀 것은, 성추행이 탄로 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어?”

 “미스뜨르는 마흐무드 말만 믿잖아요. 마흐무드 편만 들고.”

 

 그건 사실이었다.

 내게는 홀 직원들보다 마흐무드가 더 중요했다.

 서빙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레시피를 다 익힌 한식 주방장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홀 직원에게 참으라고 말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작별인사 대신 사과를 했다.

 그러고 나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돌담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캐서린은 출근해야 한다며 가버렸다.

 

 나는 아무도 없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회오리 감자를 깎는 간이의자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졸음이 쏟아졌다.

 어깨가 묵직한 것이 감기가 온 듯 싶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우기 때 몸살에 자주 걸리는데, 그걸 ‘몸에 바람이 든다’고 표현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우기의 날씨 때문이다.

 그때 내 몸은 바람이 아니라 폭풍에 휩싸인 것 같았다.

 

 비몽사몽간에 나는 오늘이 12월 말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금 뒤엔 아이의 손을 잡은 가족들이 돌담의 문을 열 것이다.

 나는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했다.

 검은 얼굴의 손님들이 휘청휘청 카운터로 다가오며 비명을 지른다.

 

 “먹이를 줘! 먹이를 달라고!”

 

 그러나 돌담엔 음식을 조리할 사람이 없다.

 나는 당분간 휴업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개업일 때처럼 준비 없이 손님을 맞았다가 낭패를 보기 싫었다.

 

 배식구 너머로 직원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사장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화장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와 검정 앞치마까지 둘렀다.

 리리는 그 와중에 케이팝까지 틀었다.

 배식구를 등지고 있어 표정까지 보이진 않지만 이민호의 사진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 게 분명했다.

 나는 식당 문을 닫으라고 말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줄리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줄리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마흐무드의 아내가 걸어놓은 조리복을 입었다.

 몸집이 작은 줄리가 입으니 허수아비 옷 같았다.

 줄리는 씩씩하게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을 드러내며 나를 보았다.

 

 “미스뜨르, 어디 아파요?”

 “바람이 들었어.”

 “얼굴이 창백한데 괜찮아요?”

 “괜찮아. 근데 너 뭐해?”

 “손님 맞아야죠.”

 

 나는 웃었다.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다.

 프라이팬도 들 수 없을 것 같은 줄리의 가냘픈 팔뚝을 보자 더 웃음이 나왔다.

 

 “미스뜨르, 왜 웃어요?”

 “식당문 닫자.”

 “안 돼요!”

 

 줄리가 소리쳤다.

 불평하고 소리치는 데는 타고난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한번 닫으면 다시 열기 힘들어요.”

 “요리할 사람이 없잖아.”

 “제가 요리할 줄 알아요. 집에서 많이 했다고요.”

 “한식 해봤어?”

 “미스뜨르가 레시피를 알잖아요. 시키세요. 내가 할 게요.”

 

 안 된다.

 우리가 주방에 있으면 개업일처럼 엉망이 돼버린다.

 아무리 인내심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라도 오늘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 말을 하려던 찰나, 첫 손님이 들어왔다.

 리리가 배식구에 입을 대고 소리쳤다.

 

 “돌비빔 둘!”

 

 줄리가 계란 프라이를 부치기 위해 프라이팬을 들었다.

 그녀는 가스렌지를 능숙하게 다뤘고 주방기구들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

 서빙을 하며 주방을 훔쳐본 모양이었다.

 

 나는 채소 냉장고를 보았다.

 돌솥비빔밥용 채소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깐꿍과 당근 등은 살짝 데쳐져 모양 좋게 썰려 있었고 버섯은 물에 불려 있었다.

 전기밥솥을 열어보니 밥까지 돼 있었다.

 

 “줄리, 이런 걸 언제 했어?”

 “미스뜨르 내려오기 전에 일찍 출근했어요. 버섯 좀 잘라 주세요.”

 “난 시키기만 하면 된다며?”

 “시간 없어요! 빨리!”

 

 나는 물에 불린 버섯을 썰어 살짝 볶았다.

 그 사이에 줄리는 계란 프라이를 하고, 비빔밥용 고기를 볶고, 돌솥그릇을 데우고, 참기름을 바르고 밥과 채소를 얹었다.

 동작이 마흐무드 못지않게 민첩했다.

 

 조금 뒤 갈비와 떡갈비 주문이 들어왔다.

 마흐무드가 도망가기 전 재놓은 갈비와 빚어놓은 떡갈비가 오늘을 버틸 만큼 있었다.

 나는 1인분씩 포장된 고기를 들고 그릴기로 갔다.

 숯통에 숯을 가득 채워놓고 가스불을 켠 뒤 고기를 얹었다.

 떡갈비를 살짝 누르자 기름이 올라오며 불길이 일었다.

 리리가 또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슬리 오랑 꼬레아(원조 한국 사람)!”

 

 손님들이 나를 흘깃거렸다.

 나는 손님들의 시선을 의식할 틈도 없었다.

 달아오른 숯불의 열기에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엔 천근만근이던 어깨도,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팔다리도 잊었다.

 

 그렇게 우리는 점심 장사를 넘겼다.

 다행히 손님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고 꾸준히 들어왔다.

 손님이 순차적으로 들어오면 편하다지만, 졸지에 셰프가 된 줄리와 내가 점심을 넘긴 것은 기적이었다.

 

 **

 우리는 오후 3시에 점심을 먹었다.

 줄리가 간장 소스를 넣은 볶음밥을 했는데, 나시고랭을 많이 해봐서 그런지 맛이 괜찮았다.

 리리가 밥을 입에 잔뜩 넣고 물었다.

 

 “미스뜨르, 새 셰프는 언제 뽑아요?”

 “걱정돼?”

 “그럼요, 걱정되죠.”

 

 디디는 밥을 잘 뜨지 못했다.

 가뜩이나 무표정한 친구인데, 마흐무드 사건 이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디디, 배가 안 고파?”

 “별로요.”

 “네 잘못이 아냐. 마흐무드 잘못이야.”

 

 디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미스뜨르, 구직 사이트에 올릴 거면 제가 할 게요. 그쪽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요.”

 “괜찮아.”

 “셰프가 급하잖아요.”

 “셰프는 새해가 되면 저절로 올 거야.”

 “네?”

 

 디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걱정 말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걱정이 사라졌다.

 좀 전까지 휴업을 생각하던 나는 점심을 넘기고 난 뒤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인드라의 유령을 만난 건 꿈이 아니다.

 박 사장을 만난 것처럼 인드라 또한 만나게 될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두꾼 할머니의 말처럼 모든 만남은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이런 생각들이 홀씨처럼 날아와 내 안에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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