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가장 높은 수를 받은 사람이 처분된다.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며 선택할 시 정정할 순 없다. 처음 방으로 들어온 자는 3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중복투표도 가능하다]
옷장 안에는 11번들의 사진이 있었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선택했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이 또한 내 손으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나를 선택하였다. 이 또한 고민은 없었다.
[12번 승급심사 종료. 지금 당장 취침하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생각해보려 했으나 언제부터 나오고 있었는지 모르겠는 가스가 갑자기 방에 가득 차더니 나는 잠이 들었다.
∞
눈을 떴을 때 내가 아직 내 방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또한 전자판의 숫자가 12번으로 바뀐 것을 보고 한 번 더 안도했다. 나의 안전을 확인한 나는 바로 밖으로 나가 11번 아니 어쩌면 12번일지도 모르는 11번의 방으로 달려갔다.
“제발…제발 살아있어 주세요.”
11번의 방은 내 생각보다 멀었다. 어떻게 매일 나에게 왔는지 존경스러울 정도로 멀었다.
“여기쯤이었는데…?”
11번의 방을 제대로 가보지도 않은 나는 복도를 서성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가봤을 적의 기억을 떠올리며 방을 찾아다녔다.
“여기!”
내 기억 속 11번의 방이 있는 위치에 도착하였고 나는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야. 여기가 아닌가 봐…”
나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11번의 방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11번이 눈치가 없고 말을 못되게 하지만 누구보다 나를 가장 생각해주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11번이 이 먼 거리를 달려왔다는 것을 느낀 지금은 11번이 제발 안전하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리고 너무 고마웠다.
“처분된다.”
어제 교도관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11번이 처분되었다는 생각이 갑자기 내 머릿속에 퍼지기 시작했다. 어제 나를 재운 가스처럼 내 머릿속은 11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고 새어 나온 가스가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내 눈에서 나오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다시 내 방으로 가기 위해 11번의 방문을 잡고 쓰러질 듯 일어났다.
“음…11번 아니 12번 거기서 뭐 해요?”
막 일어나 비틀거리는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울어요? 왜?? 그 방 주인이랑 아는 사이에요?”
그 사람은 쓰러질 듯한 나에게 달려왔다.
“여기까진 왜 왔어요? 나 지금 그쪽 방에 갈려고 했는데. 동기 1번.”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았다.
“왜 방에 없었어요? 11번 아니 12번 처분된 줄 알았잖아요.”
12번은 나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죄송한데 그 방이 아니라 저 방에 있었어요. 죄송해요. 저 방이 내 방이라서.”
“전에 왔을 떈 이 쫌이었는데…”
잘 살펴보니 그 방은 12번의 방이라기엔 너무 더러웠다. 이불도 정리되어있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12번에게 항상 나는 냄새가 아닌 고약한 냄새가 났다.
“일어나요. 지금 되게 추해.”
12번은 나를 일으켜주었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게 자주 좀 오지 그랬어요.”
12번은 팔짱을 끼며 밥을 먹으러 가자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만 말해요. 지금 되게 창피하니까. 근데 어떻게 저인 줄 알고 왔어요?”
나는 먼지를 털고 12번 뒤를 따라갔다.
“주변 좀 봐봐요.”
나는 12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주변 방의 사람들이 전부 방 밖으로 나와 12번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왜 다 저희를 봐요…?”
“정확히 말하면 12번을 보는 거죠. 다들 펑펑 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겠어요?”
아차. 이제서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 중 대부분은 웃고 있었지만 일부는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그러면 혹시…. 12번도 제가 우는 거 다 봤어요?”
나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12번의 귀에 속삭였다.
“아니요? 전 절대 못 봤어요. 12번이 갑자기 주저앉으면서 11번!! 11번!! 이러면서 우는 걸 제가 어떻게 봤겠어요?”
12번은 내가 우는 모습을 따라 하며 나를 놀렸다.
“그냥 이 말은 그만하죠…. 괜히 꺼냈어.”
나는 부끄러워 배식실을 향해 달렸고 12번은 내 뒤를 따라 달렸다.
배식을 받고 자리에 앉은 곳은 우연히도 내가 3번이었을 때 처음 배식실에 앉았던 곳이었다. 그때는 4명이서 함께 밥을 먹었었는데….
“누가 처분됐을까요?”
12번은 아직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누구인지 별로 알고 싶지 않네요…. 알고 아무렇지 않을 용기가 없어서.”
처분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나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12번 미션은 보고 나왔어요?”
12번은 내 표정을 보고 말을 돌렸다.
“아.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와서 못 봤어요. 뭐였어요?”
12번이 걱정되어 12번 미션을 보지도 않고 나왔다는 것이 조금 창피했다.
“동기 번호 정하기. 12번이 힘들 건 아는데 지금부터 저희 다른 12번 찾아야 해요. 그래야 미션을 수행하죠.”
12번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누가 처분됬는 지 알아야 한다. 어떻게 이곳은 나에게 하나의 쉼표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죠. 어쩔 수 없는 거죠.”
“밥 먹고 가봐요. 다른 12번 방으로.”
“방이 어딘 줄은 알아요?”
“당연하죠. 다 제가 밥 먹자고 데리러 다녔는데. ”
새삼 다시 12번이 신기했다. 사실 알고 보면 나보다 더 착하고 더 생각이 깊은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12번과 대화 중 갑자기 내 옆에 누군가 앉았다.
“살아있네요?”
나는 그 사람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당신 선택했는데.”
항상 예쁘게 웃던 11번이었다.
“네…?”
갑자기 나타나 나를 죽이려는 말을 하는 12번을 보며 당황했다.
“제가 당신 선택했다고요. 처분되기 바랬는데 아쉽네요.”
12번의 얼굴에는 내가 알던 예쁜 웃음은 없었고 살기가 맴돌았다. 나는 대체 이 사람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웃음이 예쁘단 칭찬이 너무 과했나, 아니면 내가 하는 말이 심기를 건드렸었나.
“밥 잘 먹고 있는데 왜 갑자기 와서 지랄이세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나 대신 12번이 말했다.
“12번 미션 때문이죠. 얼굴을 보기 싫어도, 뭐 죽이고 싶어도 하긴 해야죠.”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순진하고 순박해 보이던 그 웃음은 어느새 남을 끌어내기 위한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변했다.
“그냥 간단하게 하죠. 1번, 2번, 3번.”
12번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 자신, 그리고 나를 싫어하는 12번을 마지막으로 가리켰다.
“ 그래요. 오래 같이 있기 역겨웠는데 빨라서 좋네요. 그럼 밥 잘 먹어요. 동기 1번, 2번.”
12번 아니 동기 3번은 말이 끝나자마자 일어나 다른 곳에서 밥을 먹었다. 3번이 가고 나서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 사람이 12번을 뽑았다면…. 뭔가 이상한데?”
3번이 가고 나서 먼저 말문을 튼 건 12번 아니 2번이었다.
“뭐가요?”
“생각해봐요. 저는 방에 4번째 마지막으로 들어왔는데 제가 달려가면서 3번이 방에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 ”
“네. 그런데요?”
“12번 아니 1번도 나와 같이 달렸으니까 처음 들어온 건 아닐 테고…?”
“네.”
“그렇다면 처음 들어온 사람은 처분된 11번인데. 1번은 두 번 선택받았잖아요.”
“한 번은 방금 저 싸가지였고 다른 하나는요?”
나는 내가 나를 선택한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는 2번이 왜 내가 두 번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1번. 자기 자신 뽑았잖아요. 아니에요?”
역시 이미 나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1번 성격상 차라리 자기 자신을 뽑겠다 싶었죠. 내가 아는 1번은 모든 11번들을 좋아했으니까 자신을 뽑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을 거라고 미션을 받았을 때 생각했죠. 그럼 여섯 번 중 두 번을 1번이 받았다면 처분자는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텐데…?”
2번은 숟가락을 놓고 탁자에 턱을 괴었다.
“그러네요? 적어도 2개의 표를 자기 자신을 선택해야 했을 텐데?”
“음…. 요즘 멍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네요. 뭐 어때요. 살았으면 된 거죠. 그만 이야기합시다. 멍청한 행동에 대해 말하면 나도 멍청해지는 것 같달까.”
“그래요. 별로 좋은 기억도 아니니까.”
나는 2번의 말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같은 생각이었다. 선택에 대한 의문만 남은 채 나와 2번은 다시 밥을 먹었다.
“아 맞다. 1번. 어때요? 그렇게 원하던 칭호를 들으니까?”
2번은 다소 진지해진 분위기가 싫었는지 몇 분 후 다시 입을 뗐다.
“그렇게 좋지는 않네요. 동기라고 부르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동기는 조금 더 따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내가 기대를 너무 높게 가졌던 것일까 따뜻하기는커녕 한 발짝 더 멀어진 기분이었다.
“그럼 뭐 끈끈한 우정이라도 생각했어요?”
“네. 더 뭉치고 그럴 줄 알았는데.”
“1번. 여기서 그런 거 기대하면 안 돼요. 기대가 많을수록 실망도 많다는 건 이미 경험했잖아요?”
2번의 말이 맞았다. 내가 정상이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그 믿음을 다시 잡아준 35번의 죽음 후 그 믿음을 다시 조립하려 했지만 어제 교도관의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정상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호칭 하나 달라진 건데 뭔가 변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죠…. 괜한 희망을 품었네요.”
“1번은 너무 감성적이라니까요. 어디 잘못된 건 아니죠?”
2번의 말이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어제의 기억은 지워지는 모든 감정과 달리 선명한 기억, 아픔으로 남았나보다.
“정말 저는 뭔가 잘못된 걸까요?”
나는 한숨을 쉬며 2번을 바라보았다.
“음? 갑자기 왜 그래요? 평소 같으면 저를 탓 했을 텐데?”
“그냥요. 저만 이상하잖아요.”
나는 고개를 숙였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뭐야 1번. 1번 답게 해요. 얼른 평소처럼 내가 이상하다고 빨리 뭐라고 해요. 사실 저도 1번 처음 만났을 때 1번이 바뀔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어떡하겠어요. 그냥 1번이 그런걸.”
‘1번답게 해요.’ 그 말이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나는 그냥 나답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라는 2번의 말이 정답이었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맞춰갈 필요 없이 내 성격이 굳이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바꿀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한, 나를 살려놓았다는 것은 내가 피해보다는 득이 된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저답게?”
“그래요. 1번답게 눈물도 펑펑 흘리고….”
2번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흘리고?”
“그리고…. 뭐 말하기 좀 부끄러운데. 저의 죽음에도 슬퍼해 주세요. 생각해보니 한 명 정도 내 죽음에 슬퍼해 주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게 더욱이 1번이라면.”
2번은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나의 감정에 조금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연하죠. 2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을 리 없잖아요. 되도록 그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2번도 이만 2번답게 행동하시죠?”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2번을 놀렸다.
“그래야죠. 그럼 방으로 갔다가 광장에서 만나요. 미션 확인해야죠.”
우리의 번호는 13번이 되었고 나와 동기 2번은 함께 배식실을 나와서 각자의 방으로 옷장을 확인하러 갔다.
[동기를 구타하라. 어떤 동기인지, 어느 신체 부위나 상관없다.
※ 이 미션 이후로 모든 동기는 동기 1번의 옆 방에서 생활한다. 즉시 짐을 정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