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일지도. ”
그 사람은 나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꿈인지 현실인지 자각시켜주겠다는 것 같았다.
“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 여긴 어디고…? ”
나는 떨리는 내 몸을 멈춰보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 여기가 진짜 내 자리에요. 오랜만이에요 11번. ”
“ 오랜만이에요…. 35번. ”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사람은 내가 정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유일하게 내 감정을 이해해준 분명히 배식실에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끝낸 내 기억 속 가장 불쌍한 사람. 35번이었다.
“ 아마 여기서 나를 35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을 거야. ”
35번은 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 어때? 지금 그 안에서의 생활은? ”
“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요. 미션도 깨기 어려울 정도로 어렵진 않아요. ”
35번은 편하게 앉으라는 듯 나를 향해 손짓했다.
“ 오…. 나름 나쁘지 않은 적응력이네. ”
35번은 아마도 나와 관련된 것 같은 서류를 넘기며 대답했다.
“ 오류. 넌 모르겠지만 너랑 내가 대화하고 있다는 자체가 굉장히 규칙에 어긋난 일이야. 이곳에서 내가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 없지만 딱 너 하나. 너는 내가 건드릴 수가 없거든. ”
35번은 불안한 듯이 손톱을 깨물었다. 35번의 손에는 검정 띠가 감겨있었다.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어떻게 지금 내 눈앞에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분명히 35번은 스스로….”
“ 오류. 말 끊어서 미안한데 나도 시간이 없어서. 경고하는데 더는 너에게 주어지는 무언가에 깊게 생각하지 마. 처분 막는 것도 이젠 한계야. 무언가를 그 이상을 궁금해하거나 찾아보려 한다면 처분되는 수가 있어. 나는 네가 처분되는 걸 원하지 않아…. ”
방금 전까지 누구보다 여유로워 보였던 35번은 순식간에 불안해 보였다. 마치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것처럼. 혹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린 것처럼.
“ 왜요…? 왜 원하지 않아요? 다 원하고 있던 것 같던데. 혹시 저를 지켜보자는 것도 35번의 의견이에요? 미션을 쉽게 내는 것도? ”
이젠 궁금한 걸 다 물어봐야 한다.
“응…. 내 의견이야. 나는 네가 이 세상의 끝에 가기를 원해. 나보다 더 높이.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네가 끝냈으면 해. 물론 지금은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해하게 될 거야. 마음속에 항상 기억해둬.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이제 너밖에 없어. ”
35번의 말이 빨라짐과 동시에 35번의 손목의 띠가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 절대 잊지 마.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
35번의 띠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내 눈앞이 온통 빨간색이 되었을 때 나는 눈을 떴다.
“ 34번!! 1번!! 우리 선택됬어요!! ”
차가운 공기. 딱딱한 침대. 여긴 내 방이었다.
“ 1번!! 저희 34번 됐다고요. 이번 승급은 꽤 쉽지 않았어요? 교도관도 딱히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잠깐 꿈꾼 기분이라니까요? ”
2번이 내 앞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 2번…. 저희가 교도관을 만났나요…? ”
“ 네!! 저는 12번 승급심사 때 온 그 사람이었어요. 아마 제 생각엔 저희가 잠든 상태에서 어떤 장소에 데리고 갔다가 심사가 끝나고 다시 재우고 여기로 데려다 놓은 것 같아요. ”
“ 왜 전 그냥 꿈같죠…? ”
“ 저도 꿈인 줄 알고 뺨을 몇 번이나 때렸는데 아프더라고요. ”
2번은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 빨개진 볼을 보여주었다.
“ 꿈…. 정말 말도 안 되는 꿈…. ”
나는 34번으로 바뀐 전자판을 보며 눈물이 차올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오래가는 감정. 35번과의 만남, 아니 이젠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 그 사람과의 만남이 다시 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왠지 모르게 그 사람과 만나게 되면 항상 이런 감정을 느낀다. 떠올리면 슬프기도 하면서 또 항상 떠올리고 싶어지며 그 사람과 내가 하나인 것만 같은 감정. 동질감.
“ 드디어…. 드디어 34번. 이제 거의 다 왔어. ”
2번이 방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 1번. 저희 오랜만에 같이 광장이나 돌까요? ”
방 문턱 밖에서 2번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그래요. 생각 정리 좀 해야겠어요. ”
나와 2번은 함께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은 사람들이 많았다. 작은 모래 축구장 같은 이 광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번호가 낮았다.
“ 무슨 일 있나? 왜 저렇지? ”
2번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인파가 몰려있었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긴 한데…. 설마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겠어요?”
이상하게 2번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있었고 어찌 보면 신난 것 같기도 하였다.
“무슨 일일까요?”
나는 2번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 36번 승급심사 아닐까요?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있는 거면. ”
2번의 말이 맞았다. 인파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나보다 한 번호 앞서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두 사람은 주먹을 쥐고 서로를 구타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미 결정이 난 것 같았다. 한 35번은 지친 듯 바닥에 누워있었고 또 다른 35번은 그 위에 올라타 피를 튀기며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 죽어. 죽어. 죽어. ”
위에 올라타 있는 35번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 죽어. 죽어. ”
모래 바닥에는 빨간 피가 가득했고 내 발에도 빨간 핏방울이 튀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용기도 나지 않았고 이 싸움을 말릴 자신도 없었으며 정말 하찮게도 내 미션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삐…. 삐….”
한 사람의 가슴에는 36번이 적혀져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의 전자 판에는 숫자가 아닌 [OVER]이 적혀져 있었다. 삐 소리가 2번이 난 후 더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 숨 쉬는 소리 등 사람이 살아있다면 나야 할 소리가 더는 나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죽는 사람을 보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 어디서 겪어본 것 같은데…. 그때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 죽어. 죽어. 죽어. ”
이미 끝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35번. 아니 36번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 이제 그만. ”
교도관의 한마디에 36번은 움직임을 멈췄다. 나와 2번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교도관의 앞으로 향했다. 우리뿐만 아닌 다른 한 사람. 즉 34번 승급심사에서 살아남은 3명은 교도관과 36번의 앞에 한 줄로 섰다.
“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
교도관이 36번에게 말했다.
“ 이거…. ”
36번은 나도, 2번도 아닌 그 또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난 순간 나와 2번의 번호는 35번이 되었다. 옷장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그 미션.
[ 준비가 됬다고 생각이 들 때 동기를 죽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