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번 승급심사가 끝나면 항상 들려오던 교도관의 말은 이제 나를 향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지금이 꿈이 아니라 것을 인지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살인마이며 가장 가까웠던 내 편을 내 손으로 죽였다. 나는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끔찍하게 여긴 행동을 저질렀다. 이 감정이 몇 분 후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열심히 슬퍼해야만 했다. 언젠가 2번이 죽게 되면 누구보다 슬퍼해 주기로 약속했기에….
“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교도관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주저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나의 앞으로 3명의 발이 보였다.
“ 저 사람으로 선택할게요…. ”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아무나 손으로 가리켰다. 누가 선택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 충고하자면 그냥 아무와도 말을 하지 마. 연이 생기는 누구든 너와 좋게 끝내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
이 말이 맞았다. 나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 즉 나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은 모두 좋게 끝을 맺지 못했다. 나는 급식실에서 35번의 죽음을 목격한 뒤부터 더는 누군가와 말을 나누기도, 바라보며 웃을 수도 없을 것 같았고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나와 연을 맺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내가 혹은 어떤 사람이 소중한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슬픔과 배신감도 없을 것이기에 나는 아무와도 연을 맺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군가와 연을 맺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받는 감정에 메말라 있었고 항상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2번까지 잃어버린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죄수 번호 36번인 것이다. 어느새 슬픔과 죄책감은 사라졌다. 단언컨대 이번의 감정이 가장 길었다. 죄책감과 공포, 연민과 슬픔. 여러 가지 감정을 한 번에 느낀 이번 경험이 지금까지 내가 느낀 감정의 시간 중에 가장 길었다. 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느낀 감정은 다시 한 번 느낄 용기는 없으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어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교도관은 내가 선택한 것으로 추정되는 34번의 가슴에 기계를 가져갔고 그 기계를 떼자 34번의 번호는 36번으로 바뀌었다.
“ 가자. ”
나와 내가 선택한 34번은 교도관의 뒤를 따라갔다. 교도관은 한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한때 이 문밖으로 넘어가면 거지 같은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이 문 앞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교도관이 문 앞에 멈춰 수신호를 하자 문이 점점 열렸다.
“ 들어와라. ”
교도관은 멀뚱멀뚱 서 있는 나와 내 옆의 새로운 36번을 바라보며 말했다.
“ 네!! ”
당연한 말이지만 36번은 굉장히 신나고 들뜬 것 같았다. 나는 36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 ”
나는 36번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바로 한 번호 아래였기 때문에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또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 안녕하…. ”
36번이 나의 인사에 대답하려던 그 찰나에 교도관들은 우리에게 아무 말 없이 안대를 씌웠다. 안대를 쓴 우리를 교도관들은 입고 있던 죄수복을 벗기고 새로운 옷을 입혔다. 옷을 입었을 때 어딘가 허전했다. 나는 옷을 더듬거리며 만져보니 새로 갈아입은 옷에는 항상 가슴에 있었던 전자판이 없었다.
‘ 번호가 없는 곳? ’
안대를 쓰고 이동할 동안에 나와 36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36번은 나에게 계속 말을 걸려고 시도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내려. ”
앞에서 들려온 교도관의 목소리가 ‘내려’라고 말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내렸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안대를 벗었다. 문소리가 바로 뒤에서 났으니 아마 이곳에 들어오는 문 앞에서 내려준 것 같았다. 안대를 벗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환한 빛. 밝디밝은 빛은 하얗기도 혹은 몇 가지 색이 섞인 것 같기도 하였다. 또한, 그 찬란한 빛만큼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슬픔 하나 없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고개를 드니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푸르고 높은 하늘이 나에게 고생 많았다고 말을 건네고 안아주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내가 도착한 곳은 바라보는 세상인 것 같았다.
“ 와!!! 환영해요! ”
고개를 내려 정면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이 우리를 보며 박수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안대를 벗고 이곳에 도착한 것은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36번을 제외하고 4명 정도 더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며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야!! 여기 좀 봐봐!! ”
저 멀리 어딘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어?? ”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내 앞으로 달려왔다.
“ 결국 네가 왔구나? 역시 이래야 내가 선택한 번호 답지. 따라와 구경시켜줄게. ”
내가 처음 교도소에 왔을 때 교도소를 소개해준 15번이 오늘도 새로운 곳을 소개해준다며 웃었다. 36번은 자신도 따라가도 되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15번의 손에 끌려갔다. 15번과 내가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둘은 번호가 없었다. 번호가 없다는 것은 곧 우열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 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
“ 호명. 강호명. 그냥 여기에선 번호말고 호명이라고 부르면 돼. 여기에 오면 가장 처음으로 ‘이름’을 부여받아. 번호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돼. ”
‘이름’…. 단어의 느낌이 동기와 비슷했다.
“ 우리 교도소에서 온 사람들의 성은 ‘강’. 이름은 저기로 가면 너 짐에 붙어져 있을 거야. ”
호명은 침대가 두 개 놓여있는 방을 가리켰다. 36번은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 가서 짐 정리하고 나와. 어떻게 승급했는지 정도는 알려줘야지. 너보다 낮은 것 같은 번호를 데려왔다는 건 36번 승급심사를 거치고 왔다는 거잖아? ”
나는 호명의 질문에 대답 없이 36번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36번 승급심사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오니 전에 있던 교도소에서 쓰던 짐이 옮겨져 있었다. 방은 전보다 훨씬 좋지는 않았지만 쾌적하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 ‘이름’은 어디 있는 거야…? ”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 저…. 이거 아닐까요? ”
내 혼잣말을 들은 36번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36번이 가리킨 곳에는 전 교도소에서 사용했던 베개와 함께 우리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 강이영. 강이나. ]
내 베개에 적혀져 있는 이름은 강이영. 그렇게 강이영은 내 이름이 되었다.
“ 그래서 너 이름은 뭐야? ”
문밖에 서 있던 호명이 말했다.
“ 이영…. 강이영이에요. ”
나는 번호가 아닌 나를 알리는 나만을 뜻하는 단어가 생겼다는 행복감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호명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수 십번 바뀐 호칭이 아닌 나만을 위한 이름이 생겼다.
“ 이영이라…. 너한테 잘 어울리네. 넌? ”
호명은 36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전 이나에요. 강이나. ”
36번도 아니 이나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 듯 환하게 웃었다.
“ 웃는 거 보니까 좋네. 미션을 확인하는 방법은 똑같아. 옷장을 열면 번호에 해당하는 미션이 있을 거야. 뭐 여기에선 번호도 딱히 의미가 없어. 나갈 때까지 미션은 거의 하나뿐인 거나 마찬가지라. ”
아차. 너무 행복한 나머지 미션이라는 존재를 잊어버렸었다. 장소만 달라졌을 뿐 내가 출소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 여기선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자신의 번호를 알릴 필요 없어.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할 수 있고. ”
호명의 말이 끝나자 나는 옷장 앞에 섰다. 어떤 미션이든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옷장 문을 열었다. 바라보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주어진 미션이 무엇일지 나는 설렘 반 긴장 반이었다.
[ 하루에 세 번 주어지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이용하여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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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