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지나가는 나를 향해 호명이 말했다. 이나는 호명과 함께 조금 더 있겠다고 말하여 나는 먼저 방에 들어왔다. 지금 잠이 들지 못하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기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 ...영! 이영…! ”
나는 누군가 소리치는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 이영. 밥 먹으러 가게요. ”
나는 아무런 무늬 없는 회색의 낯선 천장을 보고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 왜 그래요? ”
내 옆에 있던 이나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아…. 여기로 왔었지…. ”
나는 고개를 돌려 이나의 얼굴을 보자 어제의 일이 모두 기억났다.
“ 밥 먹으러 가요. 어제 이영 들어가고 나서 호명이 배식실 위치 알려줘서 잘 찾아갈 수 있어요. ”
밥을 먹으러 가자는 이나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2번이 떠올랐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부를 수 없는 2번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 미안해요. 저 오늘 밥 못 먹겠어요…. ”
나는 지금 밥을 먹으면 토할 것 같았다.
“ 그래도 와요. 굶으면 더 속 안 좋아요. 토 나올 것 같아도 일단 밥은 먹어요. 배고프면 더 생각날 테니까. ”
“ 네? ”
“ 그 36번 승급심사. 이영 지금 그거 때문에 어제부터 그러는 거잖아요. 이영이랑 36번 승급심사 같이한 사람이랑 친한 거 우리 교도소에서 모르는 사람 없었다고요. ”
“ ... ”
나는 고개를 숙였다.
“ 이영. 지금 기분 안 좋은 거 솔직히 나는 이해 못 하겠는데요. 미션을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요. 그냥 생각 안 하면 안돼요? 옆에서 보니까 그 사람은 애초에 이영이 마음 약한 거 알고 접근한 것 같던데. ”
이나는 고개를 숙인 나를 향해 다가왔다.
“ 왜 이영이 그 이름도 없는 사람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거예요? 그냥 편하게 살아요. 편하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이용당한 사람이 왜 힘들어하는 거야 대체? ”
나를 타박하는 이나의 말투에서 계속 2번이 생각났다. 이나의 말투는 이기적이고 미션이 우선이었던 2번의 말투와 정말 닮아있었다. 생각하는 사고나 바라보는 시각 또한 비슷한 것 같았다. 특히 나의 감정에 작고 큰 상처를 남기는 말을 하는 모습이 너무 닮아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나와 말을 하면 할수록 2번이 더욱 생각났다.
“ 이용당한 거죠…? ”
사실 알고 있었다. 2번이 나를 이용하기 위해 먼저 말을 걸고 접근했다는 걸. 모든 게 계획적이고 철저한 사람이던 2번이 어리숙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오류인 나를 챙겨준다는 것은 곧 내가 2번의 계획안에 존재하는 사람이란 걸 의미했다. 나는 이 모든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2번은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해왔었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기에.
“ 네. 이용당하셨어요. 그러니 그냥 잊어버려요. ”
이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닐 수 있지만 나를 이용하려던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그 사람을 죽여도 되는 명분이 되지 않으며 2번을 죽인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명분은 더더욱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 그래요. 밥 먹으러 가요. ”
이나에게는 잊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2번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나 혼자서 느낀 감정이었지만 내가 2번과 함께 있을 때 느낀 감정은 잊기엔 너무도 소중한 감정이었다. 나는 이나의 말을 듣고 2번을 잊어버리지 않되 2번의 기억에 붙잡혀 살지는 않기로 했다. 이용당한 내가 죄책감에 붙잡혀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은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가혹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 잘 생각했어요.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미션을 해결한 보람이 없잖아요. ”
이나는 배식실을 향해 앞장섰다.
배식실은 전 교도소에 비해 넓고 사람도 많았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좌석은 모두 2인용이었으며 한 곳은 남자가 앉아야 했고 다른 한 의자는 여자가 앉아야 했다. 나와 이나는 배식을 받고 각자 다른 장소에 앉았다. 이나는 한 남자가 이미 앉아있는 자리에 앉았고 나는 아무도 없는 자리에 앉았다. 이나는 앞에 앉아있는 남자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고 내 앞은 계속 아무도 앉지 않았다. 내가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갑자기 방송이 켜졌다.
[ 감정 시간 시작합니다. 삐--- ]
방송이 켜지자 이나와 이나 앞의 사람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 자리까지 이나의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나를 계속 바라보던 그 순간 누군가 내 시야를 가렸다.
“ 안녕하세요. ”
한 남자가 배식판을 들고 내 앞에 앉았다.
“ 네…. 안녕하세요. ”
나는 고개 끄덕였다. 나는 내 쪽으로 배식판을 끌어당겼다.
“ 제 이름은 한도원이에요.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
도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 이름이 잘 어울리시네요. 제 이름은 강이영이에요. ”
부담스럽다.
“ 강이영…. 이름도 예쁘시네요. ”
“ 아…. 감사합니다. 전 밥을 다 먹어서 이만. ”
나는 이런 상황과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아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등에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 조심히 가세요. ”
도원은 일어나는 나를 향해 인사하고 다시 밥을 먹었다. 나는 이나를 향해 몸을 돌렸지만 이나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없는 듯 보였다.
“ 저분과 같이 온 거에요? ”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도원이 밥을 먹다 고개를 들어 다시 말을 걸었다.
“ 네... 갈 생각이 없어 보이네요. 혼자 가죠. 뭐. ”
나는 계속 나에게 말을 거는 도원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 그럼 저분이 가기 전까지만 저랑 같이 있는 건 어때요? ”
“ 네?? ”
나는 도원의 말에 쓸데없이 깜짝 놀랐다. 감정 시간의 탓인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감정의 한계선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 그렇게 싫으시면 안 그래도 돼요. 그냥 저도 심심하기도 하고 이영씨도 혼자 가는 것보다 저분과 둘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
너무 큰 나의 반응에 당황한 듯 도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횡설수설했다.
“ 그럼…. 이나가 갈 때까지만 있을게요. 밥 드세요. 전 여기 가만히 앉아있을게요. ”
나는 당황한 도원의 모습을 보고 살짝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아…. 네! ”
내가 자리에 앉자 도원은 안심한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 강 씨면…. 월텀 교도소인가요? ”
“ 네. 어떻게 아세요? ”
“ 어…. 뭐 그냥 알고 있는 거죠. 거기에 얼마나 있다가 왔어요? ”
도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저는 미션이 꽤 쉽게 나와서 빨리 나왔어요. ”
“ 빨리라면…. 두 달 정도일까요? ”
“ 아니요. 두 달은 아니고 약 한 달 정도 된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아요. ”
나는 도원과 이야기하며 계속 이나를 바라봤다. 낯선 사람과 오래 대화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나는 속으로 제발 이나가 빨리 일어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 한 달?? 한 달이요? 미션이 얼마나 쉬웠길래 한 달 만에? 거기 미션 힘들다던데? ”
내 말이 끝나자 깜짝 놀란 듯 도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 그냥 별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저 교도소 이야기 계속해야 해요? ”
나는 전 교도소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기 싫었다. 월텀 교도소 이야기를 계속하면 2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아. 죄송해요…. 그럼 저. ”
“ 이나 가네요. 대화 재미있었어요. 저는 이만. ”
저 멀리 이나가 밥을 다 먹고 일어나는 것을 본 나는 주저 없이 일어나 이나를 향해 갔다. 말을 끊은 것은 좀 미안했으나 더 앉아있으면 체할 것 같았다.
“ 이나! 무슨 대화를 그렇게 많이 해요? ”
나는 이나와 함께 배식실에서 나오자마자 이나를 향해 말했다.
“ 이영. 저 사랑 뭔지 안 것 같아요. 이 몽실몽실 거리는 기분.... ”
이나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고 이나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환하게 웃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며 슬픈 눈이라기엔 희망에 꽉 차 있는 초점은 없으나 빛나는 눈이었다.
“ 아니 얼마나 봤다고…. ”
[ 감정 시간 종료합니다. 삐--- ]
방송이 내 말을 끊었다. 오늘은 되는 일이 없는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방송이 종료되자 갑자기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 몸속에서 누군가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듯 문을 두드리고 벽을 치는 느낌이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고 나는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 이나씨... 강이나…. 저 좀….”
나는 벽에 주저앉아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나를 불렀다.
“ 이영... ”
뿌연 시야 속에서 보인 이나는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나는 이나에게 가고 싶었으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도 정신을 잃었다.
∞
“ 강이영. 강이나. 강이영! 강이나!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천장이었다. 하얗고 수많은 점이 박혀 있는 천장.
“ 으…. 갑자기 왜….”
나는 침대에서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 중얼거렸다.
“ 조절도 못 하는 감정을 느끼려고 하니까 당연히 몸에 무리가 오지.”
내가 3번에게 머리를 맞고 쓰러졌던 그때 나를 말끔하게 치료해준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전자판이 없는 옷이나 우리와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 그래도 너는 처음치고는 꽤 괜찮네. 처음엔 대개 저렇게 피 토하면서 쓰러지던데. ”
그 사람은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사람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나가 침대에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 저기…. 음…. 뭐라고 불러야 할지... ”
“ 마도담. ”
“ 도담씨. 어떻게 된 거에요? 이나 괜찮은 거에요? ”
“ 뭐…. 아마 괜찮겠지. 가끔 처음에 바로 죽기도 하는데 설마 그러겠어. ”
도담은 이 상황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이나에게 가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 저…. 도담씨…. ”
나는 버둥거리며 도담을 불렀다.
“ 약 먹인지 얼마 안 지났으니까 가만히 있어. 감정 시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다친 거는 회복이 더디단 말이야. 괜히 지금 움직였다가 상황 더 심각해지니까 그냥 입 다물고 눈 감고 자. ”
도담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무언가를 작성하며 대답했다.
“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지? 아무리 오류라도 이렇게 오랜 감정 시간을 견디긴 힘들 텐데. ”
도담이 무언가를 작성하다 펜은 놓고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 그걸 어떻게…? ”
나는 오류란 말을 듣고 도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오류가 여기까지 온 것도 신기한데 감정까지 꽤 다룰 줄 아는 건가. 이제 정말 끝나려는 건가. ”
도담은 바로 내 앞에 서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있는 힘껏 바동거렸다. 차라리 입도 움직일 수 없으면 덜 답답할 것 같았다.
“ 오류의 존재야 뭐... 내가 알아야지 누가 알라고.”
도담은 말을 하다가 멈췄다.
“ 왜 말을 멈춰요? ”
나는 드디어 도담의 팔을 잡았다. 겨우 팔 하나 움직였을 뿐인데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고 정신은 오락가락했다.
“ 오호.... 오류는 약도 잘 안 드는 건가? ”
도담은 무서워하기는커녕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 그냥 모르는 게 나을 거야. 아마도 네가 달의 희망이라지? ”
눈앞이 흐려지고 도담의 얼굴이 여러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 달의 희망…? ”
도담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누르고 나는 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