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 괜찮아요? ”
눈을 뜬 내 앞에는 이나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이나…? ”
손가락을 움직여보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움직여졌다.
“ 도담…. 도담은요? 도담 그 사람 어디 있어요? ”
나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자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도담이 누구예요? ”
도담을 만난 그곳은 모든 물건이 다 똑같은 색깔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깨끗한 빛의 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회색빛으로 물든 교도소 내 어떤 방 하나였다. 내 기억 속 일관된 하나의 색 한가운데 위치했던 도담이 앉았던 자리는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분명 여기에 있었다고요! ”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번뜩 죽었던 35번을 다시 만났던 그 장소가 떠올랐다. 푹신하고 아늑한 이불에 감겨 까만 천장에 노란 점들이 박혀 있던 그 방. 내가 기억하는 도담의 방은 36번의 방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지만 딱 하나가 똑같았다. 노란 점. 도담은 나와의 대화 중에도 자신이 들고 있던 펜으로 계속 까만 종이에 노란 점을 찍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던 그때의 나에게 마치 일부로 보여주려는 듯 점을 찍고 있었다. 꿈을 꾼 것 같은 이 기분은 과거 한번 느꼈었던 기분과 같았다.
“ 이영. 괜찮은 거 맞죠? 뭐 머리가 아프다거나 그런 거라면 지금 빨리 말해요. ”
이나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 아…. 아직 정신이 다 안 돌아왔었나 봐요. ”
나는 이나의 눈에 괜히 내가 이상해 보일까 봐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 이영. 몸이 너무 약한 거 아니에요? 이 정도 감정 후유증이야 별거 아닌데. 저 봐요. 저. ”
이나는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도담과 함께 있었던 그곳에서 이나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정신도 못 차리고 있었는데 지금 이나는 다친 곳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멀쩡했다.
“ 감정 후유증? ”
“ 네! 지금 이거 감정 후유증이래요. 감정 시간에 느낀 감정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을 때 오는 부작용! ”
이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말해줬어요? ”
나는 이나에게 이 단어를 알려준 사람이 도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이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세게 붙잡고 말했다.
“ 아니 누가 말해준 건 아닌데…. 그냥 저기 적혀져 있던데요. 또 왜요? ”
이나는 내가 누워있던 침대의 위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방금 느꼈던 고통은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때 느끼는 부작용입니다. 그러니 괜히 조절도 못 할 감정 느끼려 하지 마시고 조심히 사세요. 당신들이 느낄 기분 좋은 감정은 꿈이 아닌 현실입니다. 다룰 수 없다면 시도하지 마세요. ]
내가 누워있던 침대가 있는 벽면에 까만 종이에 노란 펜으로 글씨가 적혀져 있었다. 말투, 까만 종이에 노란 펜 이건 신호였다. 자신은 내 꿈 속의 사람이 아니라는 신호. 그 종이는 내가 만난 마도담, 36번은 그저 내 꿈 속의 무언가가 아닌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내가 만난 두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전혀 다른 공간에 있던 두 사람이 나에게 같은 분위기와 느낌을 주었는지 그리고 까만 종이에 그려진 노란 점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옆에서 쫑알거리는 이나의 말은 듣지 못한 채 방으로 걸어왔다.
“ 그럼 그렇게 하는 거죠? ”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나의 팔을 붙잡고 이나가 말했다.
“ 네? 아…. 네. ”
나는 이나의 말을 듣지 못했지만 왠지 여기서 못 들었다고 말하면 하루가 피곤해질 것 같아서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 그럼 저녁 먹고 같이 공원에 가서 같이 그 사람들 찾아봐요! ”
이나는 이 말을 남기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 그 사람들…? ”
나는 이나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여 그냥 방에 남아 있기로 하고 침대에 누웠다. 다른 방, 다른 장소 하지만 같은 노란 점. 나는 이상하게 노란 점에 계속 눈길이 갔었다. 마치 내가 봐야만 하는 것처럼 끌렸다. 선명하고 또렷했던 노란 점. 선명하지 않았던 내 정신이 그 노란 점만 보면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35번과 마도담.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라기엔 말투, 행동, 성격이 너무 달랐고 생김새도 너무 달랐다. 또,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기엔 풍기는 분위기, 내가 느낀 느낌이 너무도 같았다.
“ 하…. ”
생각하면 할수록 더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뒤척거리다가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
잠에서 깨 눈을 뜨자 이나가 침대에 가만히 앉아 넋 놓고 있었다.
“ 뭐 하고 있어요? ”
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이나에게 물었다.
“ 그 사람. 공원에 있을까요? ”
“ 그 사람이라니요? 누구…? ”
“ 오늘 저녁에 같이 찾으러 가자고 했잖아요. 급식실에서 우리 둘 앞에 앉아있던 그 사람들. ”
벽을 보며 넋 놓았던 이나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 네? ”
나는 급식실 남자 이야기가 나오자 딸꾹질이 났다.
“ 제가 제 앞에 앉았던 사람 궁금하지 않으냐고 물어보니까 이영도 고개 끄덕였잖아요. 그리고 더 찾아보잔 말에도 알았다고 대답하고. 기억 안 나요? ”
“ 아. 맞아요. 그랬지. 찾아봐요. 저녁 먹고 나서였죠? ”
조금 더 이나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이런 말인 줄 알았다면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 지금 밥 먹으러 가요. ”
저녁이라는 나의 말에 이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밥을 먹자며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섰다.
“ 벌써…? 그래요. 가요…. ”
어쩔 수 없이 나는 이나를 따라 나갔다. 이나의 걸음은 오늘따라 유달리 빨랐고 나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느렸다. 도대체 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이나가 만난 사람을 모르나 그냥 나는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은 대화하기 너무 부담스러웠기에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이나와 함께 배식실에 가던 중 방송이 나왔다.
[ 감정 시간 시작합니다. 삐--- ]
하루에 세 번 있는 감정 시간 중 두 번이 밥을 먹을 때 나왔다. 감정 시간이라는 방송이 나오자 나는 후유증을 겪고 싶지 않았기에 조심하기로 다짐했다. 이나와 나는 배식을 받고 각자 아침에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았다. 이나는 다시 한 번 그 사람이 와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밥을 먹던 중 문득 감정 시간은 끝났는데 어떻게 이나는 계속 저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격정적인 감정은 잠시 느껴지고 사라지지만 평소 조그마한 감정은 잔잔하게 계속 느껴왔던 나와 비슷하게 이나는 계속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감정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지는 않았으나 오늘 아침 이나의 앞에 앉았던 그 사람을 보고 나서 이나의 눈동자가 무언가 달라진 것은 누가 보든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영. 강이영씨 맞죠. ”
이나를 바라보던 내 시야를 누군가 다시 막았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장면. 고개를 들어 누군지 바라보니 역시 한도원. 아침에 만났던 그 사람이었다.
“ 아. 네. 한...도원씨 맞죠? ”
하…. 밥. 빨리 먹어야겠다.
이나는 내 쪽을 바라보며 부럽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나의 앞에는 아직 아무도 앉지 않았고 내 앞에 한도원이 앉고 나서부터 이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 점심. 혹시 드셨어요? ”
도원은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 아니요. 사정이 있어서 못 먹었어요. ”
나는 도원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도원의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이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이 사람이 나한테 계속 말을 거는데에도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다.
“ 무슨 사정이요? 어디 아파요? ”
사정이 있었다는 나의 말에 도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 여기. 왜 그래요? 볼이 빨개요. 의무실 가봤어요? ”
도원은 손을 뻗으려다 놀라는 나를 보고 다시 손을 거뒀다.
“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정 후유증이 와서 잠시 쓰러졌어요. ”
나는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도원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 아. 감정 후유증…. 도대체 무슨 감정을 느꼈길래 후유증이 왔어요…. 그거 심장이 너무 두근거릴 때 오는 건데. 감정에 너무 충실했을 때 부작용 같은 거랄까. ”
도원은 웃는 나를 보며 안심한 듯 다시 밥을 먹었다.
“ 심장이 두근거릴 때? ”
나는 아침 식사 때 무슨 감정을 느낀 것일까. 이나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던 사람에게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 심장이 두근거렸다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다가오는 도원에게서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는 말이 더 맞았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다짐했지만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 도원을 보며 2번이 생각났었다. 2번이 생각나자 나에게 다가오는 도원이 두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도원과 2번이 겹쳐 보인 탓에 도원이 하는 모든 말이 듣기 거북하고 부담스러웠다. 내가 느낀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적대감. 또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이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쓰러질 정도로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은 내가 아직 2번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 네. 심장이 두근거릴 때. 아침에 무슨 일 있었어요? ”
“ 글쎄요. 도원을 만난 것 빼고는 없었는데. ”
“ 큼. 크흠. 크헥. 네…? ”
내 말이 끝나자 도원이 사레가 들린 듯 손으로 가슴을 때리며 콜록거렸다.
“ 아침에 후유증 오기 전에 있었던 일. 도원을 만난 것 말고는 없다고요. ”
나는 차마 도원에게서 내가 죽였던 그 사람이 겹쳐 보여서 두려움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뭐 제대로 말하자면 두 번밖에 안 만난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저를 만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라는 거죠? ”
갑자기 도원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아차. 도원은 나의 말을 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착각한 것 같았다.
“ 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두근거림이 아니라 아…. 그 뭐랄까 그 다른 두근거림이었는데.. ”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휘적거렸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더듬거렸다.
“ 그럼 뭐에요? 무슨 두근거림이었어요? ”
도원은 격하게 부정하는 나를 따라 일어났다. 도원의 볼은 누르면 바로 터지기라도 할 듯 빨갛게 익어있었고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 그게…. 지금은 말 못해요. 나중에 제가 마음의 준비가 다 되면 말씀 드릴게요. ”
도원이 일어나자 나 또한 도원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조심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 마음의 준비요?? ”
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