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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노래 1부(부제: 비창)
작가 : 소피스트
작품등록일 : 20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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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자매
작성일 : 19-09-08     조회 : 40     추천 : 0     분량 : 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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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자 매

 

  웅장한 제일교회 안은 엄숙히 기도를 올리는 신자들로 경건함이 흘렀다. 신자들 중에는 유진이의 부모님과 희연이의 가족도 있었다. 김신남 목사는 차분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희연은 김신남 목사를 잘 알았다. 상의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김신남 목사를 찾아와 조언을 구했기에 목사님하고는 친분이 꽤 두터웠다. 그래서 지금도 희연은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경건하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한편 어머니와 함께 예배당에 앉아 있던 나연은 언니와는 반대로 목사님의 말씀이 시작될 때부터 고개를 숙인 채 잠을 자고 있었다. OB라고 쓰여 있는 야구 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인 채 목사님의 말씀을 수면제 삼아 꿈나라에 빠져 들고 있었다. 열성적이면서도 차분한 김신남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나연이 옆에 앉은 채 여사가 나연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넌 애가 정말 왜 그러냐? 목사님이 좋은 얘기해 주시는데 허곤날 잠이나 퍼 자고.”

  “제가 자고 싶어서 자는 게 아니에요. 제가 자는 건 다 목사님 책임이라고요. 정말 수면제가 따로 없다니까요.”

  “어휴, 정말.”

  예배가 끝난 후 유진이 부모님과 희연이 가족은 교회를 나왔다. 교회 앞으로 환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어머님, 유진이는 오늘도 안 나왔나 봐요?”

 희연이 강 여사에게 물었다.

  “그 녀석이 좀 그렇잖니? 하나님 같은 건 안 믿는다고 그러면서 교회엔 도무지 나오려고 하질 않으니?”

  “그래요? 그래도 한 번쯤 나오면 좋을 텐데......”

  “누가 아니라니? 교회에 나오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면 아버지도 좋아하고 그러실텐데. 도무지 아버지가 좋아하실만한 일은 할 생각을 안 하니 말야.”

 강 여사는 답답하다는 투로 혀를 찼다.

  “희연아, 나연이 하고 먼저 들어가거라. 우린 어디 가서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희연이 아버지인 한 장관이 말했다.

  “예”

 희연이 대답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김신남 목사가 두 자매의 앞으로 걸어왔다.

  “목사님, 오늘 말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감동적이긴? 난 졸려 죽는 줄 알았건만.”

 나연이가 언니 말에 토를 달았다.

  “너는 목사님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김 목사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언제쯤 사탄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런지.....”

 희연은 성호를 그었다.

  “하나님이 보살피고 계시니까 그런 날이 오겠지.”

  “둘이서 아주 날 사탄으로 몰아 붙이는군요. 이런 자린 빨리 뜨던지 해야지.”

  나연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목사님, 점심 드셨어요?”

  “아니. 아직.”

  “그럼 저랑 같이 점심 드시러 가지 않으실래요? 오랜만에 제가 대접할게요.”

  “그래.”

 김 목사는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띠었다.

 

  유진이 부모님과 희연이 부모님은 제일교회에서 가까운 데 있는 가우초(스페인어로 목동이라는 뜻)라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실내에 도는 고풍스런 분위기와 부드럽게 흘러 나오는 낭만적인 라틴 음악이 그들의 입맛을 한껏 돋우어 주고 있었다.

  “유진이는 오늘도 교회에 안 나온다 한 거야?”

 희연이 아버지인 한영식 장관이 와인을 한 잔 한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 장관은 3당 통합을 성사시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 놈 얘긴 꺼내지도 말게. 그 놈이 언제 내 말 제대로 들은 적이 있어야지. 작년에도 그랬지 않나? 저한테 회사 물려 줄려고 그렇게 경영학과에 가라고 했건만, 한사코 지 가겠다는 영문과에 가고 말았잖아? 누구 닮아서 그렇게 고집은 센지. 난 이제 그 녀석 포기했다고.”

 박준범 회장이 넋두리를 했다.

  “아직 젊어서 그런 걸 거예요. 조금 더 지나면 유진이도 박 회장님의 뜻을 알게 될 거에요. 그리고 사실 유진이가 뭐 이렇다 할 말썽을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한 장관 부인인 채미진 여사가 유진이를 변호해 주었다. 사실 그 말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유진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 온 아버지를 못 마땅해 했으나 그렇다고 아버지한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적은 여지껏 한 번도 없었다.

  “회사는 어때? 잘 되가?”

 한 장관은 화제를 돌렸다.

  “응, 덕분에. 너한테 늘 고맙지 뭐.”

  “내가 해 준 게 뭐 있다고? 그나저나 얘들이 빨리 졸업해야 할 텐데. 그래야 결혼 시키고 우린 좀 편히 살 수 있을 거 아냐?”

  “그러게 말이에요.”

  강영미 여사가 동의를 하며 말했다. 그들은 이미 아이들이 졸업하는 대로 유진이와 희연이를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나연은 집으로 돌아오더니 가방을 챙겨 가지고는 집을 나와 학교로 갔다. 일요일이었지만 해야 할 공부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희연은 김신남 목사와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종업원이 오더니 두 사람의 주문을 받아가지고 돌아갔다. 얼마 안 되서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두 사람은 경건히 기도를 올렸는데 희연은 금십자가 목걸이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기도를 올렸다. 그 금십자가 목걸이는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안 계신 희연이 할아버지가 희연이가 초등학교 4학년 이었을 때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 때부터 희연이는 그 금십자가 목걸이를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히 간직해 오고 있었다.

  기도를 끝낸 후 두 사람은 수저를 들었다.

  “유진인 잘 지내냐?”

 김 목사가 물었다.

  “예. 오늘 교회에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목사님도 유진이 못 본지 꽤 됐죠?”

  “한 석 달 쯤 되 가는 것 같은데. 언제 한 번 오라고 해. 내가 보고 싶어 한다고.”

  “예. 아, 목사님 손자 분 화요일에 출소하죠?”

  “응. 앞으로 제발 사고 좀 안 쳤으면 좋으련만.”

  두 사람은 식사를 끝마치고 나왔다.

  “이제 집에 돌아가는 거니?”

  “예. 가는 길에 잠깐 유진이네 집에 들렀다가 가려고요.”

 희연은 김 목사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발길을 돌렸다.

 

  희연은 청록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철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담장은 낮았지만 담장 위로는 철조망이 촘촘하게 쳐져 있어 사람이 넘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철조망에선 왠지 무언가를 지키려는 욕망이, 그리고 남을 배척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희연은 벨을 눌렀다. 주방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던 가정부인 소민이 거실로 나와 인터폰을 받았다.

  “누구세요?”

  “저예요. 희연이.”

  ‘삐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자 희연이는 안으로 들어갔다. 넓고 잘 정돈된 정원 가운데로 길이 나 있었고 곳곳에 있는 수목들이 정원을 한껏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정원 주변에 잘 배치된 조각상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미를 뽐내며 자랑하고 있었다. 희연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민이 희연이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유진이는요?”

  “도련님은 2층에 있는데 불러줄까요?”

  “아니에요. 제가 올라갈게요.”

 희연은 계단을 올라갔다.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섰으나 유진은 소리를 못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희연은 유진이가 눈치 못 채게 가까이 걸어가서 유진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책상 바로 옆에 놓인 다이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었는데도 유진은 굳이 책상에 원고지를 올려놓고 글을 쓰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이미 잉크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또 글 쓰는 거야?”

 그제서야 유진은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어?”

  “방금. 근데 아직도 손으로 글을 써? 컴퓨터로 치지?”

  “나 기계에 질색인 거 너도 잘 알잖아. 이게 편해. 교회 갔다가 오는 길이야?”

  “응. 교회 같다가 목사님하고 점심 먹고 나서 오는 길이야. 너도 나오지 그랬어?”

  “난 무신론자잖아.”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나오는 거 어렵지 않잖아? 그럼 아버님께서도 좋아하셨을 테고, 목사님도 너 보고 싶어 하던데.”

  “너 오늘은 꼭 전도하러 온 것 같다.”

  “전도는 무슨? 그냥 한 번 해 본 말이야. 그 소설 내가 좀 봐도 돼?”

  “아직 미완성이야. 다 쓰고 나면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줄게.”

  “약속한 거야. 다 쓰고 나면 나한테 제일 먼저 보여줘야 돼?”

  “그래.”

  “근데 제목이 뭐야?”

  “우리들의 이야기.”

  “제목이 아주 좋은데.”

  “좋긴? 마땅한 제목이 안 떠올라서 그냥 갖다 붙였을 뿐인데. 그만 내려가자. 세 시간 동안이나 글을 썼더니 배가 슬슬 고파오는데.”

 유진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며 일어섰다.

  “세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글을 쓴 거야?”

 희연은 깜짝 놀랐다.

  “응.”

  “글 쓰는 것도 좋지만 좀 쉬어가면서 해. 그러다 몸 상하면 어쩌려고 그래?”

 희연은 진심으로 걱정을 했다.

  “넌 가끔가다 꼭 누나 같은 말을 하더라. 나보다 석 달이나 늦게 태어났으면서.”

 거실로 내려 온 유진과 희연은 주방으로 들어가서는 소민이 상을 차린 식탁 옆에 앉았다.

  “아가씨도 밥 떠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전 먹고 왔어요.”

 유진은 밥을 떠 먹었다. 희연은 그런 모습을 행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유진이 수저를 든 지 몇 분 지나지 않았을 때 거실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유진은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은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누구야?”

  “준석이, 이따 저녁에 술 마시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갈 거야?”

  “응.”

  “술 마시는 것도 좋지만 많이 마시지는 말아. 저 번에도 아버님이 너 집에 업고 들어왔다고.”

  “또 누나 같은 소리만 한다.”

  “그래서 싫어?”

  “그런 게 아니라 내 걱정 그렇게 할 시간이 있으면 니 몸이나 걱정하라는 거야.”

  “난 멀쩡해.”

  “멀쩡하긴? 허곤 날 감기나 걸리면서. 감기 이제 다 낫긴 한 거야?”

  “응. 이젠 괜찮아.”

 유진이 식사를 다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희연도 일어났다.

  “난 그럼 가 볼게.”

  “그래.”

 주방에서 나온 희연은 거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소민 아주머니한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유진이의 집을 나왔다.

 

  날이 저물었다. 교정안의 가로등에도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둠이 내려앉자 학교 도서관을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나연이도 공부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을 나왔다. 아직은 초봄이어서 그런지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연은 옷을 좀 두껍게 입고 올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 하면서 몸을 좀 떨었다. 교정을 걷다가 나연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민이 언니를 우연히 보았다.

  “안녕하세요. 언니.”

  “안녕. 너 지금 바쁘니?”

  “아뇨.”

  “그럼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할래?”

  “술이요?”

  “응, 저번에 내가 얻어 먹었으니까 이번에 내가 사야지.”

  “좋아요. 저도 뭐 특별히 할 일 없었는데. 근데, 재수 오빤 어디 갔어요?”

  “재수? 그 머저린 왜 찾아?”

  “찾는 게 아니라 재수오빠랑 항상 같이 다녔잖아요.”

  “야, 그건 그 머저리가 날 쫓아다닌 거라고.”

  “언니가 쫓아다닌 게 아니고요?”

  “뭐야?”

  “농담이에요. 농담.”

 나연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요일인데도 학교 옆 시장바닥은 시끌벅적했다. 시장에 줄지어 서 있는 술집들에선 사람들이 유쾌하게 얘기를 주고 받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사람이 뜸하게 있는 술집을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소주와 감자탕 안주를 시켰다.

  “재수 부를까?”

  “언니 마음대로 하세요.”

  “아냐. 오늘은 그냥 우리 둘이 마시자.”

  “그래요. 그럼.”

  술이 나오자 그들은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술을 마셨다.

  “공부하러 학교 왔던 거야?”

  “예. 언니는요?”

  “나야 놀러왔지. 근데 왜 저번에 나보고 언닌 참 좋겠어요 라고 말한 거야?”

  “예? 언제요?”

 나연은 분명 그 말을 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왜 저번에 야구 같이 보러 갔던 날 내가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줬을 때 그렇게 말했잖아.”

  “제가 그랬어요? 전 기억 안 나는데. 그냥 취해서 한 말이겠죠. 제가 원래 좀 대책 없는 인간이라서.”

  “그런 거였던 거야?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그 말에 신경 썼잖아?”

  “언니도 의외로 소심하네요. 취중에 한 말에 다 신경을 쓰고 말이에요.”

  “그런가?”

  “자, 한 잔 해요.”

  “좋지.”

  둘은 잔을 부딪쳤다.

 

  민이와 나연이 술집에서 술을 마신지 1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유진과 준석이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네 사람은 서로를 보고 놀랐다. 유진과 준석은 민이와 나연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가서 합석했다.

  “오빠가 어쩐 일이에요?”

 나연이 유진이한테 물었다.

  “난 준석이가 술 사 준다고 해서. 근데 둘이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연이 종업원을 불러 소주 잔 두 개와 소주병 하나를 갖다 달라고 했다. 곧 종업원이 소주 잔 두 개와 소주병 하나를 가지고 와서 네 사람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그나저나 정말 이해가 안 된다니까. 너 정말 금하그룹 외동아들인 건 맞냐? 어떡해 과일 가게집 아들인 준석이한테 술을 얻어 먹냐? 니가 사줘야 하는 게 정상 아냐?”

  “그건 언니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유진 오빠는요. 부모님이 그렇게 경영학과 가라고 했건만 경영학과 안 가고 영문학과 가서 찍혔다고요. 그래서 우리 언니가.......”

 나연은 하려던 말을 갑자기 멈췄다. 나연이 저도 모르게 하려고 한 이야기는 언니가 유진이한테는 절대로 얘기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왜 말을 하려다 말아?”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 그것보단 오빠는 내가 어디가 2% 부족하다는 거에요?”

 나연은 준석이한테 얼굴을 돌리며 따졌다.

  “응?”

 준석은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재수 오빠가 그러던데요. 오빠가 나는 2%로 부족하다고 했다고.”

  “아, 그 말이었어?”

  “분명히 말하지만요. 전 오빠같은 바람둥이랑 사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요.”

  “잠깐 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너 지금 나연이가 니 여자친구로 2% 부족하다고 했다는 거야? 어째 사내 녀석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지 분수들을 모를까?”

  “역시 언니가 뭘 좀 아는군요.”

  “당연하지. 자 한 잔 하자고.”

 민이와 나연은 가볍게 잔을 부딪힌 후 술을 마셨다.

 

  네 사람은 꽤나 오랫동안 술집에 있었다. 탁자에는 빈 술병 여덟 개가 한쪽 구석에 쳐박혀서 줄 서 있었다.

  “오빠, 지금 몇 시나 됐어요?”

 나연이 유진이한테 물었다.

  “10시 반.”

 유진이 시계를 보고 나더니 대답했다.

  “예? 난 이제 죽었다. 오빠가 좀 살려줘요.”

  “응?”

  “오빠는 누구보다 제 사정 잘 알잖아요? 지금 가면 또 늦었다고 아버지한테 종아리 맞을 거라고요.”

  “스무 살이 다 된 처녀를 아직도 때려?”

 민이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집이 좀 보수적이라서요.”

  “난 너 장관 딸이라 행복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은 거 같구나.”

  “전 언니같은 사람을 부러워 하죠.”

  “나도 니가 그렇게 부러워 할 처지는 못 돼. 난 유노동 무임금의 표본이니까.”

  “예?”

  “우리 아버진 내가 뭐 잘못하면 벌로 자동차 수리하라고 하거든. 근데 늘 무임금이야.”

  “언니랑 나는 별로 축복받은 인생은 아닌 것 같군요. 전 유진 오빠랑 같이 갈게요.”

  “우리도 가야 하니까 막잔 하고 같이 일어나자.”

 준석이 말했다.

  네 사람은 막잔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집을 나와 민이와 준석은 버스를 타러 갔고, 나연과 유진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나연과 유진은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우리 집에 가서 저 변호해 줘야 해요.”

  “응?”

  “그러니까 오빠가 같이 술 마시자고 해서 늦은 걸로 해 달라고요. 그럼 제 다리는 무사할 거에요. 알았죠?”

  “알았어.”

  유진이 가볍게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채 여사는 속을 태우며 나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연아, 나연이 정말 어디 갔는지 모르겠니?”

  “예. 신부님하고 점심 같이 먹고 나서 집으로 오니까 없던데요.”

  “하여튼 내가 이 년 때문에 못 산다니까. 어디 있는지 전화라도 해야 될 거 아냐? 또 아버지한테 얼마나 혼날려고.”

 채 여사는 속을 태우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벨소리가 울렸다. 채 여사는 재빨리 인터폰을 들었다.

  “나연이니?”

 채 여사는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어머니.”

 문이 열리자 나연은 유진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 워낙 큰 탓에 대문에서 현관까지의 거리가 꽤 되어서 5분 후에야 두 사람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에는 어머니와 언니가 서 있었다. 채 여사는 유진을 보고 좀 놀랐다. 유진은 채 여사한테 공손히 인사했다.

  “유진이, 니가 웬 일이냐?”

  “어머니도. 뻔한 걸 가지고 뭘 물어보세요. 또 방패막이로 쓰려는 거 다 티 나는데.”

  “언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방패막이라니?”

 나연은 한껏 목소리를 높이고 말하고 나서는 어머니한테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기를 바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끔 일 때문에 아버지가 집에 안 들어올 때가 있었으니까.

  “아버지 안에 계세요?”

  “들어가 봐. 안방에 계시니까. 들어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나연이는 한가닥 기대가 무너져 버리자 가슴이 쿵하고 무너져 내려앉는 느낌었다. 그러나 곧 마 음을 가다듬고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연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야?”

  “12시 5분이요.”

 나연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딨다 오는 길이야?”

  “유진 오빠가 술 마시자고 해서 같이 마시다가 늦었어요.”

 한 장관은 나연이의 꼼수를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연이를 쏘아 보았다.

  “정말이에요. 유진 오빠 밖에 있는데 들어 올라고 할까요?”

  “됐어.”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진은 예의를 갖춰 한 장관한테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

  “제가 같이 술 좀 마시자고 해서 늦게 됐어요.”

  “거 봐요. 제 말이 맞잖아요?”

  “됐어. 됐으니까 그만 나가 봐.”

  나연은 무사히 위기를 넘긴 게 기뻐서 만면에 웃음을 띄고 방을 나왔다. 희연은 그렇게 나오는 나연을 보더니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넌 정말 언제 철들래?”

  “언니, 내 몸 속에 철은 이미 들어있어. 원소기호로는 Fe라고 하지.”

  한 장관과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던 유진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미안해. 나연이 말 너무 들어주고 그러지 말아.”

  “괜찮아.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뭐.”

  “도대체 언제 철들려고 그러는 거지......”

  “언니, 언니 벌써부터 치매야? 내 몸 속에 철은 들어 있다고 방금 전에 말했잖아? 원소기호로는 Fe라니까.”

 나연이의 우스갯소리에 채 여사와 희연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유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 그럼 들어갈게.”

  “응.”

  “오빠, 들어가세요. 오늘 고마웠어요.”

  “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유진은 채 여사한테 인사를 한 후 희연이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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