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동물의 연예
작가 : 모험
작품등록일 : 20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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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 그의 등장
작성일 : 19-09-04     조회 : 373     추천 : 0     분량 : 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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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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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공기가 찬 늦은 가을. 굽이굽이 봉우리가 진 지리산 중턱 언저리. 이날따라 안개가 자욱하다.

 

 이른 새벽이지만 그는 분주하다. 평소 같으면 해가 중천에 달해서야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동굴에서 나올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겨울이 오기 전 몸을 불려놔야 하는데 저녁때만 되면 나타나는 '그놈' 때문에 요새 통 배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단단히 이를 갈고 큰 사냥감을 찾기 위해 일찌감치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한숨 섞인 신음을 길게 지어보았다.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몸뚱어리에 비해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왜냐하면 저번 주 찾은 커다란 노루의 흔적. 자신의 표시로 그 흔적을 지워가며 포위하듯 몰아넣은 '칠선계곡'으로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칠선계곡. 그곳은 맑은 물과 잘 익은 과일, 밤과 도토리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설사 노루를 잡지 못하더라도 통통하게 살 오른 생선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동굴을 벗어나 '칠선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으로 향하는 길 그의 무거운 걸음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숲이 반응한다.

 

 쿵. 쿵.

 

 땅을 울리는 육중한 소리에 작은 동물들과 새들이 푸드덕 거리며 도망친다. 동시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이 그의 걸음걸이를 좀 더 역동적으로 만들었다.

 계곡으로 향하며 주위를 살펴보니 감과 밤이 제법 잘 익었다. 그는 노루를 찾겠다는 생각은 잊은 채 육중한 상체를 들어 곧 떨어지기 직전의 잘 익은 감 하나를 따 단숨에 입에 집어넣었다. 사람 주먹보다 커다란 감도 언제 삼켰는지도 모르게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맛있었는지 하나 더 따 먹으려던 찰나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즉시 행동을 멈추고 귀 기울여 위치를 확인해봤다. 다시 한번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노루다.

 오늘의 기분 좋은 예감이 딱 맞았다. 보통 노루보다도 커다란 걸 보니 요 며칠 따라다녔던 그놈인가 보다. 저놈 하나 잡아다가 맛있는 과일과 버섯, 생선과 곁들인다면 일주일도 누워서 뒹굴뒹굴할 수 있을 것이다. 먹는 상상만으로도 그의 입에서 기다란 침이 떨어졌다.

 

 부스럭.

 

 다시 한번 들리는 소리에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놈도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했는지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 그는 몸을 둥글게 말듯이 웅크리고는 앞발에 뿌드득 힘을 주었다. 멀리서 보아도 위협적인 몸은 자연스레 부풀어 올랐고 날카로운 발톱은 더욱 크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사실 그의 힘은 동족 누구보다도 강하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어미는 자신의 반도 안 되는 자식의 힘이 자신을 능가할 때 기쁨의 포효를 질렀었다. 그가 이 산의 왕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힘을 주기 시작하자 노루도 연신 숨죽여 주위를 살펴본다. 야생의 감이 위기에 처한 현실을 알려준 듯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해서 경계했다. 노루 역시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흔적을 지우며 며칠간 따라오고 있었다는 것을..

 곧 그는 경계 중인 노루를 향해 매우 조심히 또 조용히 접근한다. 그의 기척을 느끼고 도망치기 직전까지 접근해야 한다.

 

 한 발. 한 발..

 

 바쁘게 움직이는 노루의 쫑긋한 귀를 바라보며 아주 조심히 접근하던 순간. 노루가 눈치챘는지 고개를 홱 돌려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찰나, 그는 모든 힘을 뒷발에 싣고 잔뜩 움츠린 채로 땅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뒷발에서 으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의 눈빛이 사나운 맹수로 변하고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날카롭다 못해 공포스러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잔뜩 힘이 들어간 뒷발을 박차며 뛰어오른다.

 

 "크르릉!"

 

 첫 도약 질 한 번이 내는 땅 울음과 거친 숨이 숲에 울려 퍼질 때 그는 이미 노루의 바로 뒤까지 쳐들어왔다. 노루는 곧장 그의 반대편으로 혼비백산하며 달아났고 그는 그 뒤를 바싹 뒤쫓았다. 무겁고 느릿느릿한 그가 이렇게 빠를 수 있었던가. 나무 이리저리 번갈아 뛰며 도망치는 노루와 달리 그는 자신의 키보다 작은 나무들은 그대로 부딪쳐 넘어뜨리며 전진해 갔다. 부딪힌 나무가 산산이 부서지며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숲에 울려 퍼진다.

 

 쾅! 쾅!

 

 노루의 눈은 바쁘게 갈 길을 찾지만, 이미 공포에 질려 초점을 잃었다. 하지만 살겠다는 본능으로 요리조리 나무를 피하며 안간힘을 다해 질주했다. 생의 마지막을 직감한 동물의 필사적인 탈출일 것이다. 반면 노루를 쫓는 그의 움직임은 괴수와 같다. 뒤쫓는 한발 한발에 어마어마한 힘이 실려 있었다. 아마 노루는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돌진해오는 소리에 더한 압박감을 받았을 것이다.

 

 쾅! 쾅!

 

 조금씩 격차가 줄어든다. 둘 다 사정거리에 들어왔다는 것을 직감할 정도로 좁혀졌다.

 

 그때였다. 계곡 근처 갈림길에 인접한 노루가 어느 방향으로 도망갈지 아주 잠시 머뭇머뭇한 찰나의 순간. 그는 최후의 도약질과 함께 앞발을 들고 뛰어올랐다. 노루의 등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덤프트럭이 초고속으로 달리다 제동장치를 잃고 승용차를 덮치는 것만 같았다. 평소보다 두 배는 날카롭게 솟은 발톱이 퍽! 소리와 함께 그대로 노루의 등에 박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반대쪽 앞발이 목덜미를 치자 기다란 목이 나가떨어지듯 뒤틀려 버린다. 단 한방이다. 노루는 단 한방에 몸이 찢기는 고통도 모른 채 죽었다.

 

 "쿠오오오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다 기쁨의 포효를 질렀다. 그의 외침에 숨어있던 작은 동물들이 사방팔방 달아나 버리고 숲이 흔들렸다.. 그의 존재는 이 숲, 그리고 지리산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이내 그는 너덜너덜해진 노루의 목덜미를 덥석 집어 물고 상체를 일으켰다. 육중한 그의 몸이 떠오르는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동족에 비해 월등히 커다란 그의 키는 3m에 근접했고 몸무게는 200킬로를 가뿐히 넘었다. 상체를 드는 행동 하나만으로 위압감뿐만 아니라 공포감마저 불러일으켰다. 거칠게 몰아쉬는 콧김과 아직도 분이 덜 풀린 듯 매서운 눈빛. 온몸을 뒤덮은 검고 억센 털. 사람 머리통만 한 양발 사이, 아직도 빠르게 숨 쉬는 그의 가슴에 유난히 하얗고 기다란 가슴 털이 검은 털과 대비되어 포근하고 깨끗해 보였다.

 

 그렇다. 그는 지리산 마지막 왕인 반달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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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르릉. 따르릉.

 

 아직 어두운 방 안.

 요즘 시대 답지 않은 탁상시계 알람이 울리자 이불 속에서 사람의 것이라 보기 힘든 검은 털로 뒤덮인 커다란 손이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곤 알람시계를 부수듯 내리치자 바닥으로 떨어져 내 뒹굴었다.

 

 "흐아아아아암.."

 

 아직 아침이라기엔 이른 새벽. 아까 그 큰 손의 주인공은 육중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평소라면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그답게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그동안 준비해온 프로젝트 제안 발표 날이라 일찌감치 서둘렀다.

 

 삐꺼덕..

 

 그가 몸을 일으키자 육중한 무게 때문인지 침대에선 아픈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바닥에 내디딘 발에는 손과 마찬가지로 복슬복슬한 털이 덮여 있었다. 다시 한번 찢어질 듯이 하품을 하곤 터벅터벅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쏴아아아아아.

 

 따뜻한 물이 몸에 닿자 사방팔방 뻗쳐있던 머리카락과 털들이 얌전하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은 유난히 곱실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커다란 덩치 때문인지 마치 나무에 물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아.."

 

 아침 샤워에 몸이 녹는 기분이다. 회사고 뭐고 욕조에 뜨거운 물이나 받아 더 누워있고 싶지만.. 오늘 있을 일을 머리에 떠올려봤다. 매우 중요한 발표가 있어 걱정이 되어야 하지만 괜스레 웃음이 난다.

 

 '흐흐.. 끝나고 집에서 흑맥주에 통닭 한 마리 해야지..'

 

 발표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오늘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만 남아있나 보다. 거의 한 달..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이 부장'의 시달림에 그 좋아하는 맥주도 치킨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 상사를 떠올리니 갑자기 가슴 한쪽이 먹먹해 온다.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은 것도 아닌데 서둘러 샤워를 마무리하고 옷장에서 옷을 꺼낸다. 한국 성인 남자답지 않은 시커멓고 무수한 털이 가슴을 덮고 있지만 한가운데 난 반달 모양의 흉터가 검은 털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해 보인다. 떡 벌어진 가슴과 볼록한 배는 살이 찐 듯 나왔지만, 결코 살로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근육인 듯 단단하지만, 결코 근육으로만 보이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냥 크다. 굉장히 큰 몸뚱어리를 가졌다.

 

 전생에 사람이었다기보단.. 마치 곰이었을 것 같은 그의 가장 가슴 뛰는 한 달이 오늘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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