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우리>
외사랑
시간을 거슬러 너를 만난 그때로 돌아가리라.
돌아가 너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으리라.
너를 보지 않기 위해
네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네 향기에 취하지 않기 위해
멀리 멀리 돌아가리라.
네 마음을 바라던 것보다
내 마음을 바라는 것이니.
지금보다는 쉬우리라.
그러니 너는 지금처럼 나를 지나쳐주길.
chapter 1
다올 출판사 편집 회의.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하며 저마다 딴 짓을 하기 바빴다. 고 대표의 눈이 일제히 부서별 편집장들을 훑고 있었다. 그 중 고 대표와 가장 가까이 있는 문학 담당 최 곤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고 대표와 함께 다른 편집장들에게 눈치를 주는 고도의 전략을 펼쳤다. 그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맞은편 인문 담당 설이나 팀장은 테이블 아래로 애써 돈을 들여 꾸민 손톱들을 탁탁 부딪치며 어떻게 이 위기에서 벗어날까 머리를 쓰고 있었다. 늘 고 대표를 따라 그대로 시선을 틀어 다른 편집장들에게 일을 넘겨주는 고도의 전략은 그녀의 전유물이었는데 최 팀장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일이 꼬여 버렸다. 두 사람의 신경전뿐만이 아니었다. 회의실에 감도는 한 치의 양보가 없는 긴장감은 이번 일이 꽤 골치 아픈 일이라는 걸 알리고 있었다.
“다들 바쁜가 보군.”
고 대표가 심기가 불편한지 눈썹을 씰룩이며 깊은 콧바람을 내뿜었다. 누구든지 지원자가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고 대표 눈에 난 이가 이 귀찮은 일을 떠맡을 처지니 말이다. 고 대표의 선택은 로또 번호보다도 예측할 수 없으니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다.
편집장들이 희생양을 고르기 위해 다급히 눈짓을 주고받았다. 최 팀장과 함께 결혼한 유부남, 녀들이 1순위로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사회생활에서 결혼한 이들을 위한 배려는 미혼남, 녀들의 숙명이었다. 종교 소설을 담당하는 민호준 팀장과 어린이 서적을 담당하는 배준국 팀장도 빠르게 후보에서 빠졌다. 설이나 팀장과 함께 젊은 여성 팀장들이 슬그머니 성별을 앞세워 미소를 지어버리자 결국 여행, 에세이를 담당하는 도현과 서원만이 남았다.
도현은 애초에 이리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새롭게 선보일 분야인 시를 누가 맡냐. 이젠 자신과 동갑내기 서원, 둘 중에 하나였다. 서원이 도현을 향해 간절하게 눈짓을 보냈다. 그는 올 해 결혼을 앞두고 약혼식을 치른 반 품절남 이였다. 물론 결혼을 안 했으니 아직 완전히 출판사에서 품절남들이 누리는 혜택을 받진 못하고 있지만 애인이 없는 도현에게 어필하긴 충분했다. 꽤 까다로운 그의 애인은 그의 야근에 극도로 예민하다는 것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서원이 테이블 아래로 도현의 신발코를 건드리며 입을 뻥긋거렸다.
‘제발.’
귀찮게 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일을 떠맡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그리 호락호락하고 유들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기에 출판사 사람들도 꽤 어렵게 대하는 터였다. 그러니 자신에게 이 일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이를 어쩐다... 그가 난감해졌다. 서원이 다시 한 번 입을 뻥긋거렸다.
‘부탁할게.’
도현의 손에서 볼펜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오늘 회의에서 이 안건이 정리가 되어야만 다음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미 편집장들이 그를 뚫어져라 보며 그의 너그러운 이해심을 이끌어 내보려 안달이었다. 도현은 그런 모든 것이 짜증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까지 몰리니 그에겐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의 손에서 빠르게 회전하던 볼펜이 탁 소리를 내며 책상에 부딪혔다. 무뚝뚝한 그의 음성이 모두가 바라던 침묵을 깨고 한 줄기 동아줄이 되어 내려왔다.
“제가 맡겠습니다.”
“현 팀장이?”
다른 편집장들이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 대표가 의외라는 듯이 그를 보며 확인을 하는 듯 보였다. 도현은 그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볼펜을 들었다. 볼펜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습관적으로 휙 돌리며 말했다.
“네. 제가 맡겠습니다. 최 팀장님, 투고 원고들 오늘 중으로 넘겨주세요.”
“그래. 바로 넘겨줄게.”
곤이 냉큼 답했다. 이나는 고 대표가 섣불리 회의를 마무리 짓지 않자 눈치를 보곤 슬쩍 말을 꺼냈다.
“그래도 다행이네. 현 팀장 전에 있던 출판사에서도 시집 출간 많이 해봤다고 하지 않았어?”
도현이 미묘하게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 그 시를 피해서 다올에 왔는데 다시 그 시가 제 손에 쥐어질 처지이니 그의 마음에 드는 상황은 확실히 아니었다. 이나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고 대표는 더 이상 도현에게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현 팀장이 투고 온 원고들 검토해 보고 진행해보도록 해. 자문 구하고 싶은 게 있다면 최 팀장이랑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 청하고.”
“네.”
“오늘은 여기서 마치지.”
고 대표가 먼저 회의실을 나서자 편집장들이 그제야 어깨를 피며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도현의 옆에 앉았던 잡지 담당 나원이 그를 안쓰럽게 보았다. 회의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입을 딱 다물고 그를 힐긋거려 놓고 이제 와서 뒤늦은 편들기에 나섰다.
“도현 씨. 괜찮겠어요?”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 괜찮아도 어쩌겠어요. 이미 엎질러진 일인데 잘 해봐야죠.”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우리 다 같이 도와줄게.”
도현은 설 팀장의 제안에 눈길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가 짐을 챙겨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곤이 혀를 찼다.
“하여간 까칠하긴.”
그런 곤을 보며 이나가 혀를 찼다.
“하여간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가만두질 않지.”
며칠 전 곤의 제안으로 선 자리에 나갔던 설 팀장이 상대에게 큰 실망을 하고 여전히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틀리진 않은 듯 보였다. 정작 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무슨 소리요?”
설 팀장이 퉁명스럽게 답하며 시치미를 땠다. 그녀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잘 관리된 몸매를 한껏 어필하는 원피스 끝을 살짝 끌어내리곤 머리를 등 뒤로 흩날리며 회의실을 나갔다. 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무래도 찜찜한 마음에 코웃음을 쳤다.
도현은 회의를 끝내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제 책상에 놓인 새로운 원고들을 발견했다. 그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서원이 다가와 그의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문학 팀에서 가져왔더라. 하여간 최 팀장, 이런 일은 속전속결이지.”
도현이 그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원고를 살폈다.
“아무튼 고맙다. 친구. 너 아니었으면 나 진짜 연말까지 신간 준비에, 결혼 준비에 피똥 쌀 뻔했다.”
“아직 안심 하지마. 언제든지 내 손을 떠나서 네 손에 갈 수도 있으니까.”
“겁주긴.”
도현이 시선을 들어 서원을 보았다. 귀찮은 일에서 벗어난 기쁨에 그의 표정이 밝았다. 도현이 말했다.
“한가해? 시 좀 읽어볼래?”
“나는 시 알레르기가 있다.”
서원이 서둘러 몸을 부르르 떨며 그의 책상에서 멀어졌다. 도현이 핏 웃으며 다시 투고된 원고를 살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설이 아니라 시라는 점이었다. 그가 한 장, 한 장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다올에서까지 자신이 시를 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시 분야가 런칭되기 전부터 출판사로 투고된 작품들도 살펴야 하니 그 시를 다 읽으려면 시 좀 읽었다 소리는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 제 손에 들린 시를 빤히 보던 그가 잠시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마법의 상자가 열릴 기미가 느껴졌다.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짧은 한숨과 함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때 신입사원 고누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그녀가 들고 온 종이 뭉텅이를 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뭐예요?”
“아, 문학 팀에서 어제 온 원고라고 빠트렸다고 전해 달라셔요.”
그가 또 다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네. 그럼...”
누리가 그를 힐끔 살피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현은 읽던 원고를 마저 읽고 잠시 의자로 몸을 눕혔다. 괜스레 잠이 오지 않은 지난밤, 잠을 설쳤더니 피곤함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일을 알고 있었던 것 마냥 잠을 이루지 못한 건지... 도현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눕혀졌던 그의 몸은 금세 바로 일어났다. 일분일초가 빠듯했다. 눈을 감고 있느니 서둘러 원고들을 읽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원고들을 살피고 있었다. 영 꽂히지 않는 원고들은 한쪽으로 빼내며 눈에 띠는 원고들 먼저 읽어 볼 작정이었다. 누리가 방금 전 놓고 간 원고를 들었을 땐 그가 낮은 한숨과 함께 망설이다 페이지를 넘겼다.
‘어느 잠 못 이루는 새벽
꿈속에 내가 현실의 나와 부딪힐 때의 고통은 크다.
요즘 나는 잠이 늘었다.
일어나고 싶지 않다.
꿈속에 내가 현실의 나보다 더 멋지고, 행복해 보여서
꿈을 꾸고 싶다.
꿈을 꾸고 싶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만 내 꿈을 깨운다.
더 빨리... 더 빨리...
그렇게 날 깨워선 어느 순간 꿈을 가져간다.
피로에 지쳐 꿈이 사라지는 순간
현실 속의 나는 그저 외롭기만 하다.’
도현의 고개가 약간 기울었다. 지난 밤 그가 잠 못 이룬 새벽, 고독하기만 하던 사위에 외롭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젠 그 고독함마저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기며 익숙해졌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를,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어제 새벽에 했던 생각이었다. 아니,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글이 되어 눈앞에 와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그가 다시 한 페이지를 넘겼다.
‘시간
오래도록 너를 볼 땐 빨랐다.
오래도록 나를 볼 땐 느리다.
네가 있는 나의 시간은 너무나 빠른데
네가 없는 나만의 시간은 왜 이리 안 가는지.’
도현이 페이지를 다시 물러 작가를 확인했다.
아랑.
그 짧은 두 글자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좋아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달가워하지 않는 이와 같은 이름이었다. 이런, 다 좋았는데. 하지만 그가 그렇게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쳐 일을 처리할 사람은 아니었다. 종이깃을 매만지던 그가 다시 한 번 작가의 이름을 되 뇌였다.
“아랑...”
그 이름에 그의 미간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이름 아래로 연락처와 메일 주소 등 작가의 개인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름엔 필명 아랑. 그리 적혀있었다.
“흠...”
그가 고뇌했다. 그러다 원고를 탁 내리곤 제 책상에 쌓인 다른 투고 원고들을 살폈다. 아직 살펴 볼 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제 손에 들린 원고를 보았다. 아직은 일러. 그가 손에 들린 시를 반대편에 놓고 다른 원고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결정은 냉정하게 내려야 하지만 과정은 신중해야 했다. 그의 손이 빠르게 괜찮은 시들을 골라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