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도현이 바람을 맞혔던 혁준을 다시 부른 건 밤 10시가 다 되는 시간이었다. 근처에 사는 혁준이 도현의 오피스텔 단지 편의점 앞에 도착해 구석에 자리를 잡은 그를 보았다. 주변을 살피니 그의 여름 밤 청승은 그리 유난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에겐 낭만일지라도 그에겐 청승이 더 어울린다 혁준이 생각했다. 혁준이 그의 앞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이 밤에 웬 청승?”
“이 청승, 원래 네 전유물이었다.”
“먼저 온 놈이 주인인 거지.”
혁준이 캔맥주를 따고 그와 잔을 부딪쳤다. 알싸한 알코올이 목으로 넘어가자 괜스레 더위를 삼킨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뭔 놈의 날씨가 사람을 잡으려고 하나.”
“해마다 몇 사람 잡지. 곧 나도 잡히게 생겼다.”
더위라면 치를 떠는 도현이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맥주 캔을 비우는데 집중했다. 혁준이 먼저 캔을 일그러뜨리며 그에게 물었다.
“뭔 일 있어?”
귀신같은 놈. 도현은 늘 그와의 간단한 술자리에 불려나가기 일쑤였지. 자신이 이리 부르는 게 손에 꼽을 정도인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그리 생각했다. 혁준이 도현이 사다 놓은 맥주를 살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보던 도현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손에 들린 캔을 마저 비웠다. 마지막 한 방울을 털어 넘긴 그도 캔을 일그러뜨렸다.
“너 고등학교 동창회 나가지.”
혁준이 그를 힐끔 봄과 동시에 치익- 맥주 캔이 땄다.
“어. 근데 그건 왜? 10년이 지나서야 괜스레 생각이 나냐?”
“그런 건 아니고.”
“네가 그럼 그렇지.”
도현이 다음으로 뱉을 말이 쉽지 않은지 새 맥주 캔을 땄다. 혁준이 그를 따라 캔을 기울였다가 내려놓곤 그를 빤히 보았다. 톡톡 쏘는 알코올이 목을 내려가 속에서 뜨끈히 열을 내는 것을 가만히 느끼던 중 도현이 다시 불쑥 말을 걸었다.
“신아랑. 걔도 거기 나와?”
“아랑이?”
혁준이 아랑을 찾는 그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도현이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나오지. 너 아랑이 싫어하는 거 아니었냐? 네 입에서 고등학교 애들 중에 아랑이가 먼저 나올 줄은 예상 못했는데.”
나도 예상을 못했다. 아니, 어쩌면 조금 알고 있었을지도. 도현이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걔 진짜 시 쓰면서 살아?”
오징어 다리를 하나 집어든 혁준이 내려앉은 먼지를 후후 불어 때며 말했다.
“응.”
도현이 인상을 썼다. 무더운 여름밤엔 해가 져도 이리 후끈후끈 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속이 뒤틀렸다. 혁준이 물었다.
“왜?”
도현이 잠시 말이 없자 혁준은 꼴리는 데로 입을 닫는 그가 대수롭지 않은지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론 직장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2, 3년 전부터 쓰는 걸로 알고 있어.”
도현이 다시 그를 보았다. 혁준이 사실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랑이가 형편이 좀 안 좋았잖아.”
도현은 제 집 지하방에서 들려오던 단란한 가정의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늘 이 시간 즈음이면 잠에 드는 그의 방에서 지하방에서 올라온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그 집의 가장은 늘 이 시간까지 몸을 혹사했기에 가족들은 그를 기다렸다. 참 눈물겨운 가족애였다.
“너도 알지? 우리 대학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서 아랑이 아버지 돌아가신 거.”
도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살던 혁준이 정말 안 갈 거냐고 재차 확인에 확인을 하며 주었던 기회를 그는 망설임 없이 뻥 차버렸다.
“그때 아랑이가 너 못 봐서 많이 아쉬워했는데.”
혁준이 나무라는 듯 그를 쏘아보았지만 도현은 시선을 피했다. 지금에서야 그 날의 자신이 부끄러워지려했다.
“뭐, 쨌든 대학 휴학하고 어머니 일 돕다가 다음 해인가 전과했잖아. 글공부 해봤자 어머니 혼자 자기 뒷바라지 하는 것도 힘들고, 아랑이 성격에 가만히 받아먹지도 못하고. 내가 알기론 그마저도 졸업 못하고 중간에 기간제로 은행인가 취직해서 돈 벌다가 그만 둔 걸로 알아. 아랑이도 직장 그만 두면서는 동창회 잘 안 나오더라.”
도현은 그녀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은 사람들과는 섞일 수 있을지언정 사회와는 섞이기 힘들었다. 그러니 배가 고파도, 삶이 힘들어도 글을 써야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 생각했던 건 아마도 까마득한 어느 어린 날이었을 것이다. 잠시 사회에 데인 그녀가 결국 제 길을 찾은 걸까. 도현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혁준이 맥주 캔을 테이블에 탁탁 쳤다. 도현이 그를 보았다.
“왜 그러냐고. 아랑인 왜?”
도현이 서둘러 맥주로 목을 축였다.
“우리 출판사에서 걔 시를 봐서.”
혁준의 눈이 커졌다.
“아랑이 시?”
“응.”
“확실해?”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별소리. 그게 있었어.”
혁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별소리? 그게 뭐야? 아랑이가 그런 것도 읊어줬었나?”
“낮에도 별이 보고 싶을 땐, 나는 물을 찾습니다. 기억 안나?”
일주일에 다섯 번 있는 국어 시간에서 세 번은 그녀가 읊어줬던 시였다. 도현이 어떻게 기억을 못할 수 있는지 혁준을 이상하게 보았다. 도현이 말해준 시를 중얼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던 혁준이 기억이 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기억났어. 별도 비추고, 물도 비추면서 왜 나는 안 비춰 주냐. 뭐, 그런 거였지?”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혁준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젖었다.
“그 시가 있었어?”
“어.”
“그럼 아랑이가 맞네! 계약하기로 한 거야?”
“아직. 채택이 돼야지.”
혁준이 새끼손가락 길이만큼 남은 오징어를 낼름 입 안으로 넣으며 말했다.
“야. 친구 찬스 한 번 해줘라.”
“찬스는 무슨.”
“그래도 네가 그 업계에서는 나름 능력 좀 있다 아니야.”
도현이 얼굴을 굳혔다. 도현은 뭔가의 우위에 있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혁준이 말을 덧붙였다.
“칭찬이야.”
그런 혁준이 미웠지만 일부러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그는 별 말 하지 않았다. 가로등 불에 벌레가 잔뜩 꼬였다. 이따금 길을 잃은 벌레들이 팔뚝에 부딪혀오자 혁준이 제 팔뚝을 가볍게 쓸며 물었다.
“승산은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밀고 가서 출간을 해봐도 괜찮겠다하는 작품을 고를 정도의 안목을 가졌으니 다올의 스카웃 제안을 받은 것이니. 도현은 그런 사정까지 알지 못하는 혁준에게서 시선을 내려 아직 따지 않은 캔을 제 앞으로 끌었다.
“야.”
혁준이 그를 나직히 불렀다. 뭔가 의심스러운 눈초리. 그에 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혁준이 실없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뭔데.”
“별 거 아니야.”
도현은 그를 한번 노려보곤 캔을 기울였다. 몇 캔 째인지 모르지만 취기가 살짝 도는 것이 슬슬 자리를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때 혁준이 의자를 바짝 끌어와 테이블에 상체를 기울였다.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다.”
도현이 그를 보았다.
“네가 그렇게 치졸한 놈이 아니잖아.”
도현은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싶었다. 뭐든 이미 운을 땐 말로 유추하자면 제게 썩 기분 좋을 말은 아닌 게 확실했다.
“혹시 너 옛날 일 때문에 일부러 색안경 끼고 아랑이 시집 출간 안 해주고 그러진 않을 거지?”
짧은 정적 후에 도현의 무뚝뚝한 음성이 들렸다.
“그런 놈으로 보이냐?”
혁준이 괜히 머쓱해져 짧은 머리를 박박 쓸었다.
“아니, 그냥 혹시나 해서. 네가 아랑이를 좀 싫어했어야지.”
“지나간 일로 사람 앞길 막을 치졸한 놈으로 보여?”
“그런 게 아니라. 상황을 보면 어쨌든 아랑이 시집을 출간 하는데 네 힘이 들어갈 수 있는 위치니까. 네 위치가.”
도현이 남은 맥주를 땅으로 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우는 건 네가 해라. 먼저 간다.”
“야? 삐졌냐?”
도현이 뒤도 안 돌아보고 제 집으로 향했다. 혁준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착잡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말한 일을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중요한 건 그에게 아랑의 시가 퍽 마음에 들었으니까.
“타고나긴 했어.”
아랑의 능력은 인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뭔가 꺼림직함이 남아있었다. 정확히 알아야 떨쳐내든 할 텐데. 기분은 여전히 가라앉았고 당장 그 기분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샤워가 제격이었다. 일단 오늘의 모든 걱정과 잡생각들을 씻어내고 이부자리에 파고들고 싶었다.
다음날 도현은 인기 작가 지우의 신간 준비로 사진을 정리하며 팀원들을 살폈다. 모두가 도현이 한 차례 검토를 끝내고 복사된 원고를 들고 있었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어떻게 네 사람이 똑같이 한 사람의 원고를 읽고 있는 것일까.
‘불완전한 모든 것.’
도현은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