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후의 차를 타고 먼저 출발한 팀원들을 뒤로 하고 도현은 보조석과 뒷좌석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뭐해? 안타?”
“어? 아... 나 그냥 걸어가도 돼.”
도현이 운전석에 오르며 말했다.
“그냥 타. 괜히 직원들 마주칠라.”
여전히 망설이는 그녀에 그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나 바빠. 얼른.”
결국 아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가려했다.
“앞에 타.”
그녀가 서둘러 돌아와 보조석 문을 열었다.
“앞에... 타려고 했어.”
뻔히 어디에 타야 그가 덜 싫어할지 망설이던 것을 알아챈 지 오래인데 그녀가 애써 변명을 해보았다. 도현은 굳이 그 변명을 나무라지 않았다. 광화문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정적이 계속 될 줄 알았지만 의외로 도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왜 하필 광화문이야?”
“응?”
“둘러댄 거잖아. 아니야?”
아랑이 그가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다른 직원들도 알았을까 걱정했다. 자신이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나이를 먹어서도 그리 표가 많이 난다면 사회생활에 있어서 조금 곤란했다.
“맞아. 근데 둘러댄 김에 집 좀 알아보려고.”
“집?”
“응. 곧 지금 살고 있는 집 계약이 끝나거든. 너희 출판사랑 계약도 했으니까. 서울로 와 볼까하고.”
지금까지는 서울에 없었다는 말이야? 도현이 미묘하게 얼굴을 구겼다.
“지금은 인천에서 살아. 근데 서울 집값 너무 비싸더라.”
말이라고. 도현이 핏 웃었다. 마치 갓 서울로 올라와 방을 알아보는 대학 새내기 같은 그녀의 푸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녀가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왜?”
그는 답을 하지 않고 되려 질문을 했다.
“광화문에 가면 가격이 내려가?”
“그건 아니지. 소연이가 근처에서 작은 빵집을 해. 소연이 알지?”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몰라.”
“소연이가 집구하는 거 도와주거든. 이왕이면 자기랑 가까운데 살라고.”
“같이 살면 되잖아.”
“소연이 결혼했잖아. 몰랐어?”
그는 혁준을 제외하고는 학창시절 친구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오래 간다던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졸업을 하며 인연을 끊었다. 혁준이 몇 번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그의 거절이 너무나 완강했다. 친구를 남겨두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린 날의 한 자락이 자꾸만 들춰질 것 같아서였다.
“저기 도현아... 그때 말이야. 너 힘들 때.”
그 시절 친구들은 이렇게 아랑처럼 옛 기억을 들춰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얘긴 하지 말자.”
아랑은 그와 오해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오해를 풀기도 전에 서문을 막아버리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랑은 신호만 풀리면 곧바로 도착하는 광화문 광장에 초조해졌다.
“도현아. 우리말이야.”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귀를 기울였다. 살짝 고개를 틀어 그녀를 보았다. 초조한지 손톱을 가만 두지 못하곤 이내 두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만나 거 기회 삼아 다시 시작해 보면 어떨까?”
다시. 그녀는 자신과 무엇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걸까. 도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열아홉에 못 했던 친구 말이야. 나 너랑 친구 하고 싶어.”
도현이 그녀를 향해 완전히 고개를 틀었다.
“그때보단 성숙해진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서.”
아랑이 어색해진 차 안에 말을 덧붙였다.
“나 직장 그만두고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거든. 설령 다시 돌아가더라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꼭 하고 싶은 거, 되돌리고 싶은 거, 바로잡고 싶은 거. 그거 다 하고 돌아갈 생각이야. 근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너와의 관계도 기대하게 되네?”
“나랑 뭘 하고, 되돌리고, 바로잡으려고.”
“어?”
도현이 눈짓으로 다시 되묻곤 바뀐 신호에 차를 몰아 교차로를 지나 비상 깜빡이를 키고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그냥 어렸을 적...”
“별로야.”
도현은 열아홉을 떠올리긴 추호도 싫었다.
“너랑 친구가 되지 못했던 일을 되돌리고, 바로 잡고,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
아랑이 도현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가 느릿하게 버튼을 눌러 잠긴 문을 열었다.
“난 썩 내키지 않아. 여기서 길 찾을 수 있지?”
“아... 응. 태워줘서 고마워.”
아랑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섣불리 내리지 못한 채 그녀가 망설였다.
“도현아.”
이렇게 그와는 정말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건지. 현도현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왜 이 틈도 주지 않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아직도 내가 싫으니?”
그는 그녀가 미처 직접적으로 물어올 줄 몰랐는지 당황한 듯 했다.
“알고는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힘들다. 그때 풀지 못한 걸 십 년이 지나서 푸르려니 쉽지 않은 건 당연한 거지. 알았어. 그래도 우리가 나이를 먹었긴 먹었나 보다. 이젠 확실히 하는 게 쉬워졌네.”
그녀가 차 문을 열었다.
“이번일은 정말 고마워.”
문 닫히는 소리도 사람 따라 다른지 사뿐히 닫힌 문에 그가 멍하니 창 너머로 그녀를 살폈다. 고마워? 이번일? 그때 전화가 울렸다. 지우 작가의 전화에 그가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지우 작가의 화를 풀어내고 간신히 그를 배웅한 도현이 시간을 보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나마 오후를 이렇게 때워서 감사할 일인가. 누군가의 화를 받아내며 하루의 반나절을 보낸 건 그리 기분 좋진 않았다. 그리고 그의 기분을 더 가라앉게 만든 건 아랑의 말 때문이었다.
‘이번일은 정말 고마워.’
아무리 생각해도 며칠 전 혁준에게 혹시나 들었던 걱정이 씨앗이 되어 싹을 피운 것 같았다. 언제 발 빠르게 자리를 잡은 건지. 그래. 열아홉에 잘한 건 없다 쳐도 그렇게 치졸한 인간으로 보였을까. 그는 아랑이 분명 자신이 좋지 않은 추억에 그녀를 내치려 갈등했다 생각했을 거라 결론을 내니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그도 어린 시절이 충분히 미성숙했다는 데 동의하는 입장이라 주변에서 자꾸만 치졸한 인간으로 만드니 섭섭할 따름이었다. 그가 출판사로 돌아가던 중 핸들을 틀었다. 핸드폰을 힐끔 거리며 망설이던 것도 잠시 그가 저장되지 않은 그녀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얼마 안가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 도현이?
곧바로 그의 들려오는 그의 이름엔 의아함이 묻어났다.
“어디야.”
그가 그녀의 답을 듣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광화문이야?”
- 아니, 한강이야. 집 가기 전에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가 전화를 끊고 한강을 향해 목적지를 틀었다.
해가 긴 여름의 노을을 한강 둔치에서 보노라면 낭만이 가득했다. 아랑의 시처럼 빛이 별을 비추기 전 물을 비추며 모두의 하루에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주차를 마친 그가 차에서 내리며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미처 그녀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어디야.”
- 나 물빛 공원인데...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었다. 도현이 서둘러 강변 진입로에 들어섰다. 저 멀리 돔 형식의 물빛 공원임을 알려주는 건물이 노을에 빛나고 있었다. 여름 날 노을을 감상하기 위해 둔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위에 물놀이를 하는 어린이들과 자전거를 타며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텐트를 치고 와 별똥별 구경까지 할 심산인 사람들의 옆으로 돗자리를 피고 배달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오랜만에 휴식을 맞는 청춘들이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현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공원 광장에서 버스킹을 하는 한 청년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 아랑을 단번에 찾아냈다. 그가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자 그녀가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진짜 왔네?”
“그럼 가짜게?”
“그러니까... 현도현이 날 찾아 왔네.”
도현이 아까와는 달리 두 볼이 붉으스름해진 아랑을 보곤 그녀의 옆에 놓인 캔맥주를 보았다.
“술 마셨어?”
“이런 분위기엔 좀 마셔줘야지.”
아랑이 기타 선율에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얼마나 마셨어?”
“아직 한 캔도 안 비웠어.”
“아직 한 캔도 못 비웠으면서 사놓긴 많이 사놨다?”
그녀가 민망한지 웃으며 서둘러 들고 있던 맥주를 비웠다.
“그러라고 한 말은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아. 근데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날 찾아오고.”
도현이 그녀 뒤로 손을 뻗어 맥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랑이 저도 모르게 척추를 바로 세우며 어색해 할 때 맥주를 집어든 그의 팔이 다시 등 뒤를 스쳐갔다. 그가 캔을 따자 치익- 소리가 나며 가볍게 김을 내뿜었다. 도현이 미처 흩어지지 못한 김까지 삼켜버렸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드네.”
“무슨 일인데?”
“이번일 정말 고마웠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아랑이 의아한 듯 눈을 굴렸다. 그제야 몇 시간 전 그와 헤어질 때 자신이 했던 말이라는 걸 기억해내고 말했다.
“아... 불편 했을 텐데도 계약 진행해줘서 고맙다고. 출간까지 계속 불편할 텐데도...”
“역시나.”
도현이 맥주를 들이켰다.
“내가 그런 놈으로 보였어?”
아랑이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언제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울상이 되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 보기 껄끄럽긴 하잖아. 일하는데 계속 불편할 텐데도 네가 감수하고 일을 진행한다는 거니까. 고마워서... 나한테 이번 계약이 어떤 의미인데, 고마운 마음에...”
“내가 그렇게밖에 못 산건지. 나름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 좀 헷갈리기 시작하네.”
“미안해.”
익숙하게 흘러나온 그녀의 사과에 그가 뜨끔해졌다. 왜 자신과 그녀는 열아홉 그때와 다르지 않은 건지... 지금 그녀와 있는 곳이 한강 둔치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열아홉 그녀와 함께했던 교실이 아니라. 늘 먼저 사과를 건네던 그녀를 무시하던 날과는 좀 다른 마음이 드는 걸 봐서는 노을 지는 풍경을 보는 지금이 이십대의 끝자락이 맞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사과할 필요까진 없어.”
“내 말에 기분 상했으면 사과해야지.”
“꼭 너 때문만은 아니야.”
“어쨌든 오늘은 내 잘못이 있었잖아.”
그가 아랑을 힐끔 보다가 눈이 마주칠 것 같자 시선을 틀었다. 캔을 기울이며 말했다.
“여전하네.”
“뭐가?”
“미안하다 소리 입에 달고 사는 거.”
그녀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그녀가 말이 많아졌다.
“맞아. 사는데 사과할 일이 뭐 그렇게 많은지. 있잖아, 방금처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상대가 상처 받을 때.”
“상처까진 아니었어. 그냥 좀 거슬렸을 뿐이지.”
“그냥 좀 거슬려서 날 찾아왔어? 난 ‘어금니 물어. 한 대만 치자.’ 결판을 내러 오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과장된 표현에 그도 웃음을 터트렸다. 왼쪽 아랫입술 부근에 깊게 페인 외보조개가 그의 미소를 한층 근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랑이 신기한 듯 그를 빤히 보았다. 물론 그의 미소는 금방 사라졌지만 아랑은 그 여운에 젖어 있었다.
“웃네.”
도현이 그녀를 보았다.
“너 웃는 거 처음으로 본다. 다행히 웃을 줄은 아네.”
그녀가 괘씸하단 듯이 눈을 흘기자 그가 다시 한 번 픽 웃었다. 아랑의 시선이 저 멀리 노을에 빛나는 물 표면에 닿아있었다.
“본의 아니게 내 말이 상처를 줄 때 말이야. 어릴 때는 상대가 잘못들은 거다 탓했었는데, 이제는 내 잘못인걸 알아.”
그녀가 맥주 캔을 하나 들었다.
“좀 억울해도 상처 받았다는데 사과해야지. 나 때문이라는데.”
“남 탓에서 네 탓으로 바뀌었네.”
“응.”
그녀가 코를 찡긋거리며 답하곤 가는 손가락으로 캔을 땄다.
“오늘 노을 죽인다.”
도현이 말없이 그녀를 따라 노을에 물든 한강을 바라보며 동의했다.
“내가 한 말이 거슬려서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지?”
“치졸한 놈으로 몰리긴 처음이라. 찝찝해서.”
“아이고, 미안합니다.”
그가 캔을 비우고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언제 내가 그런 놈이 됐는지 모르겠는데 바로잡아 보려고.”
“응?”
아랑이 그를 보았다.
“해보자. 친구.”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치졸한 놈까지 됐는데 유치한 놈은 되기 싫거든. 스물아홉에 왜인지 아직도 열아홉 그때처럼 삐쳐있는 기분이 들어서 별로야. 그때의 나를 삐졌다는 말로 규정짓긴 싫은데 남들이 보기엔 딱 그 수준일 것 같아서. 다른 말은 안 떠오르고. 혹시 아냐? 좀 더 괜찮게 포장할 만한 단어.”
아랑이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볼게.”
“시 쓴다는 애가 이런 것도 못 찾아?”
“그렇게 팍팍 떠오르면 얼마나 좋아. 영감이라는 게 왜 있겠어?”
“되도록이면 빨리 찾아. 하루 빨리 삐진 스물아홉 유치한 놈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아랑이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도현도 제 말이 웃겼는지 외보조개를 띄우며 웃었다.
“시작이 좋네.”
그녀가 말했다. 그도 말했다. 나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