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걸, 한 여름 낮의 소나기라 하는 건가.”
정환의 말에 팀원들 모두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쏟아질 듯 먹구름이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 민후가 퇴근길이 걱정인지 창가에 바짝 다가서 하늘을 걱정스레 보았다.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비가 ‘나 온다.’ 하고 오고, ‘나 간다.’ 하고 가냐.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읽겠어. 같은 사람 속도 못 읽는데. 차라리 시원하게 한 바탕 쏟아져주면 더위는 좀 가시겠네.”
인터넷으로 날씨를 알아보던 누리가 말했다.
“다음 주부터 또 폭염이라는데요?”
화장실에서 나오던 희수가 그 소리에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아.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 길가다 삼겹살 구워도 바싹 익을 판이야. 진짜 너무 더운 거 아니야?”
“비 떨어져요.”
한두 방울 창문에 묻어난 빗방울을 보며 민후가 허탈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제자리에 앉아 점점 친구들을 몰고 오는 빗방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마안가 쏴아- 하고 녀석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환이 하늘에서부터 이어진 빗줄기를 보며 말했다.
“빗줄기 한 번 굵다. 걱정 마, 민후. 나 오늘 마포 넘어가야 하니까. 태워줄게.”
민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의 얼굴과는 달리 누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누리와 희수가 동시에 턱을 괴며 말했다.
“전 차라리 그냥 더운 게 나아요. 비와서 꿉꿉한 것 보다.”
“나도 그래. 근데 올 여름 너무 더워.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 열사병으로 쓰러진다고 매일 뉴스에서 떠들어 대드라.”
짙은 먹구름과 쏟아지는 장대비를 보니 쉬이 지나갈 비가 아닌 듯 했다. 팀원들과 다르게 뒤늦게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밖을 내다본 도현이 가만히 비 오는 서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가에 사람들이 가방을 머리 위로 들고 뛰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가방을 품에 안고 손바닥을 올려 비를 막아보려 애를 쓰다 근처 건물 안으로 피신을 하고 있었다. 이따금 오늘따라 유달리 하늘을 읽고 싶었던 이들이 행운처럼 미리 준비한 우산을 펼치고 다른 이들과 다르게 느긋이 무더운 여름의 비를 만끽하기도 했다. 아직 퇴근 시간까지는 넉넉히 시간이 남았음에도 먹구름 탓인지 어서 빨리 퇴근을 해야 할 것만 같이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지고 있었다. 도현도 조금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런 날에는 파전에 막걸리인데.”
정환의 말에 민후가 그를 보았다.
“어? 매니저님 그럼 이따가 퇴근하면서 한 잔 할까요?”
“아서라. 우리 어무이 나 오기만 눈이 빠져라 기다린다.”
“아쉽다.”
“대신 다음 비 오는 날에는 필히 날을 잡자.”
도현이 머리를 막 의자에 기대었을 때 책상에 놓인 그의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그가 뒤로 손만 뻗어 핸드폰을 집어 확인하자 아직 저장되지 않은 아랑의 번호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 밖에 비와. 봐봐. 얼마 만에 비야.
그녀가 밖인지 수화기 너머 빗소리와 그녀의 음성이 어우러진 채 들려왔다.
“알아. 보고 있어. 그런데?”
- 이런 날에는 친구와 함께 파전에 동동주지.
방금 전 정환에게서 나온 말을 그녀에게서 들으니 색달랐다. 노총각의 고유물처럼 느껴지던 것이 청춘의 낭만으로 느껴지려 했다. 머리를 살짝 숙이고 들어서야 하는 고소한 기름 냄새 가득한 가게에 정환이 있느냐, 아랑이 있느냐. 머릿속으로 두 사람을 각각 앉혀보니 그는 저절로 아랑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을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에 막걸리야, 동동주야?”
- 당근, 동동주지!
도현이 핏 웃으며 물었다.
“어딘데.”
- 지금은 청계천인데 우리의 만남은 북촌에 있는 내 아지트에서 이루어지길 바라.
“바라는 것도 많다.”
- 쨌든, 콜?
“콜.”
- 아싸! 우리 새 까치집. 못 찾겠으면 전화해.
그가 통화를 끝내고 늘어졌던 몸을 고쳐 앉았다. 괜스레 기다려지는 마음이 밀려오면서 퇴근이 서둘러지려 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비가 사람들을 몰아낸 듯 북촌의 거리가 한가로웠다. 도현은 아랑이 일러준 비밀 공간(주차비 걱정 없고, 딱지 때일 걱정 없는 그런 곳 말이다.)에 주차를 하곤 근처 편의점에서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우산을 하나 사서 나왔다. 우산을 펼치고 일찍이 사람들이 다녀간 거리를 거닐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낭만이 이런 것일까.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저마다의 음과 리듬을 가지고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 사이로 주머니가 진동하자 그가 전화를 받았다.
- 어디야?
“가고 있어.”
- 나 앞에 나와 있어.
“뭐 하러.”
- 너 길 못 찾을 까봐. 어! 너 보인다.
도현이 시선을 들자 멀리 오르막길 끝자락에 위치한 한옥에서 그녀의 작은 머리가 톡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가 빗줄기 너머로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도현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화를 끊었다.
무더운 여름날 가끔 찾아오는 비는 달궈진 열기를 미처 다 식히지 못하고 급히 떠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되려 숨이 턱턱 막히는 한증막 속에 있는 것처럼 꿉꿉함에 옷이 눅눅해져 기분이 좋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아니, 매번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런 것에 기분 나빠할 틈이 없었다. 아랑의 앞에 선 도현은 아직 그치지 않은 비 때문이리라 여겼다. 그가 나무에 깊게 새겨진 간판을 보았다.
‘우리 새 까치집’
아랑의 어깨 너머로 슬쩍 보이는 가게의 분위기가 예상 외였다. 도현이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이 직접 깎아 만든 테이블과 의자, 수납장. 심지어 술잔과 음식을 담아낸 접시도 주인의 손길이 닿은 듯 보였다. 창가의 구석자리 아랑이 그가 올 시간에 맞춰 주문을 끝내어 곧바로 잔을 기울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카운터를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지어진 가게의 특성상 왼편 공간에 자리를 잡은 건 두 사람 뿐이었다. 도현이 창 너머로 오른편 공간으로 보이는 곳에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손님들이 있는 것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중요한 건 어째서인지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자, 일단 한잔 받으시오. 친구.”
그 어색한 호칭에 도현이 코웃음을 치며 잔을 들었다. 잔에 찬 술 위로 밥알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도현이 그녀의 잔을 채웠다.
“일단 한잔?”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친 뒤 단숨에 첫 잔을 비웠다. 그때 지하에서 올라온 주인이 아랑의 테이블로 왔다.
“드디어 왔어?”
아랑이 수줍게 답했다.
“네.”
도현이 제 테이블로 온 부스스한 머리 군데군데 보이는 희끗한 흰머리를 가지고, 어울리지 않게 맨들맨들한 턱을 소유한 푸근한 인상의 시진을 보았다.
“맨날 혼자 와서 청승을 떨더니. 이 놈이 그렇게 애타게 짝을 기다리더라고요.”
그때 시진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린 미형이 등장했다.
“청승이라니, 낭만이지. 남자들은 말을 해도 꼭. 반가워요.”
볼륨이 잘 산 커트 머리의 미형은 시진보다 훨씬 젊어 보이지만 실은 동갑내기였다. 그녀는 늘 젊음의 비결을 나이를 잊고 사는 것이라 말했다. 우리 새 까치집의 인테리어 곳곳엔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볼 수 있는데 그 시절 그녀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 속 한 장면, 장면이 마음을 간질인다. 지금도 그녀는 왕년에 5월의 여왕이었다며 조심스레 그 날을 추억하기도 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이모.”
시진과 미형이 반대편에 있는 손님들을 살피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잔을 채운 아랑이 서둘러 목을 축였다. 도현이 그런 그녀를 보며 느릿하게 제 잔을 채웠다.
“급하다?”
“오늘 잘 들어가네.”
해물이 잔뜩 들어간 큼지막한 파전을 젓가락으로 찢은 아랑이 시진 표 양념간장을 콕 찍어 한 입 가득 먹었다. 도현이 그녀를 따라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들이 맛깔났다.
“삼촌이 음식을 잘하셔. 네 입맛엔 어때?”
“맛있어.”
“다행이다.”
우리 새 까치집의 위치는 북촌의 지붕들이 조금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그칠 기미가 없는 빗줄기를 바라보다 도현이 물었다.
“시, 쓰고 있어?”
“노력 중이야.”
지난 번 선별을 끝내고 아랑은 마음에 들지 않는 시들을 가차 없이 뺀 뒤 시간을 달라했다. 첫 시집인 만큼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도현은 아랑이 제외한 시들을 여전히 파일로 정리해 사무실에 두었다. 제가 읽기에 부족함이 없던 시들이 막판에 중요한 자리를 채워줄 거라 생각해서였다. 물론 아랑에겐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지금도 노력 중이야.”
아랑이 검지와 중지를 붙인 채 제 관자놀이에 대고 창가로 몸을 틀었다.
“영감을 받기 위해.”
도현이 픽 웃자 아랑이 서둘러 손을 내리며 말했다.
“진짜야! 난 오늘 일하는 중이라고.”
“비 오는 날 파전에 동동주 마시면서?”
“낭만이 있어야 감성을 충족시킬 수 있고, 그 감성이 영감을 불러오니까.”
“일하는데 나는 왜 불러?”
아랑이 그에게 잔을 들어보였다.
“낭만의 조건에 마음 터놓을 친구는 필히 있어야 하거든.”
도현이 잔을 들자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팔을 뻗었다. 도자기로 구워진 잔이라 소리가 청명하게 나진 않았지만 기분만큼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낼 수 있었다.
“그 많은 친구들은 어디 두고?”
아랑이 그의 질문에 느릿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별안간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예나 지금이나 현도현, 정곡을 찌르시네.”
아랑이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도현은 그녀가 제 말에 씁쓸해졌음을 알았다. 혁준에게서 들었던 그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직장을 그만두고부터 동창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그녀. 뭔가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많던 친구 다 보냈고. 지금은 소연이랑만 얼굴 보고 지내. 아!”
그녀가 그를 콕 집어 가리켰다.
“이젠 너까지 둘이네.”
“왜?”
그가 넌지시 물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슬며시 창가로 시선을 피하는 아랑에 도현이 제 잔을 비웠다.
“마음 터놓을 친구, 마땅히 없어서 날 불렀나 보다? 허수아비로?”
아랑이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하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좋아. 한번 툭 내려놓고 얘기 하지 뭐.”
도현이 창가로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얘기가 무척이나 흥미로울 것 같아 기대에 차 있었다.
“애들하고는 잘 지냈어. 일 년에 두 번 있는 동창회도 빠짐없이 나가고. 한 3년 전인가? 그때부터는 안 가지게 되더라.”
“왜?”
“나도 모르겠어.”
도현이 상체를 기울여 테이블에 턱을 괴고 그녀를 보았다.
“3년 전에 뭐 했는데.”
“흠... 직장을 그만뒀지.”
그녀가 장난스레 씨익 웃었다.
“직장은 왜 그만뒀는데?”
“그냥... 다시 시 쓰고 싶어서.”
“시 쓰고 싶다는 사람이 그간은 어떻게 참고 직장을 다녔대.”
아랑이 제 술잔에 남은 잔술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엄마 때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때마침 시진이 적절한 레코드 판을 골라 다시 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침을 내려놓자마자 가사 없는 재즈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 돌아가신 거 알아?”
알고 있었기에 도현은 담담하게 그녀를 보았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 그 모습에 아랑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네가 날 진짜 싫어하는 구나... 하고 알았어.”
“미안.”
“괜찮아. 우리 그땐, 어렸잖아.”
나이만 스무 살. 아직 열아홉의 어린 티를 완전히 벗어내지 못한 시기였다. 여전히 자존심을 세우고 고집을 부리면서도 어른이 되었다며 바락바락 세상을 비웃던 열아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