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은 저번보다 일찍 연락을 해온 아랑에 의아했다가 제 손에 들린 열편의 시에 그녀를 빤히 보았다. 눈에 띠는 시들이 있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어린 시절 아버지가 목마를 태워주면
저는 하늘로 손을 뻗었습니다.
꼭 닿을 것만 같았습니다.
내 생에 하늘과 가장 가까웠던 때가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버지의 어깨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이유가.’
지난 여름밤 한강 둔치에 돗자리를 피고 문득문득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그 순간 아버지를 떠올렸다.
‘하늘을 우러러
열
단단한 어깨에 올라 목마를 탔습니다.
스물
세상이 이상해 그 넓은 어깨에 숨었습니다.
서른
세상에 놀라고
사회에 데여
잠시 쉴 곳이 필요해 찾았습니다.
그 어깨를 내게 내주지 말지.
그 마저 내게 내주고 이 무게를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그녀에게 아버지란 하늘이었다. 그곳에 계신 아버지에게 전하는 그녀의 진심이었을까. 도현이 이젠 제게 시를 보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아랑을 보았다. 요거트 스무디를 휙휙 젓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왜?”
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번 것까지 해서 중간 점검 해볼 거야. 어떤 주제가 모자란 지 확인해보고 알려줄게.”
“응.”
도현이 손목에 시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밥 먹고 갈래?”
“아니. 오늘 소연이 쉬는 날이라 같이 집 알아보기로 했어.”
“아직 못 구했어?”
“따져 볼 게 많네.”
“계약 끝나간다며.”
“그 안에 구해야지.”
아랑도 시간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무디, 잘 먹을게.”
도현이 애지중지 음료를 챙기는 아랑을 보며 따라 일어났다. 카페를 나오니 인도에서도 아지랑이가 보일만큼 살인적인 더위에 곧바로 인상이 쓰였다. 에어컨의 보호 아래 벗어난 지 얼마나 되어서 애써 바른 선크림이 녹아내려 쓸모가 없어진 듯했다. 그가 신호를 기다리며 시원한 음료로 간신히 더위를 몰아내는 아랑을 보며 물었다. 그의 입엔 진하게 커피 향이 맴돌고 있었다.
“그건 무슨 맛으로 먹어?”
“약간 시큼 달콤하면서 분유 맛 나.”
“애 같이.”
아랑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취향 존중 부탁드립니다. 친구님.”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 출판사에 도착해 도현이 그녀에게 말했다.
“혁준이가 조만간 한 번 보자네. 너 시간 괜찮아?”
“응. 난 아무 때나.”
“참 자유롭다?”
아랑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소연이도 그렇게 말하는데. 너희 출판사랑 계약하기 전까지는 나도 간간히 일하면서 시 썼는데 엄마한테 계약했다고 했더니 지금부터라도 지원해줄 테니 마음잡고 해보라고 해서. 하란다고 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외동딸 흉내 중이야.”
발랄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핏 웃었다.
“어머니는 잘 지내셔?”
“응. 나 직장 그만두고 부턴가? 세월이 몇 십 년 흐르니까 어느새 그게 경력이 되더라? 우리 엄마 돈 잘 벌어. 대박 났어. 도너츠 맛 집으로. 전국에서 찾아온대.”
“잘됐네.”
아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실한 사람들에겐 그렇게 복이 가나봐. 들어가. 너도 밥 먹어야지. 갈게.”
“그래.”
엘리베이터에 오른 도현이 역으로 내려가는 아랑을 빤히 보았다.
도현은 식사를 끝내고 온 팀원들과 아랑의 시를 차례로 살피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저마다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할 때마다 감탄하기 바빴다. 누리만이 조용히 자신이 맡은 파트를 정리하곤 도현에게 가져갔다.
“아랑 작가님이요.”
도현이 말없이 그녀에게서 원고를 받아들었다.
“작가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슬프기만 해요.”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누리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시요. 작가님 시. 작가님이 쓴 사랑에 관한 시들은 전부 혼자 하는 사랑이에요.”
도현이 누리의 시선이 제 손에 들린 원고에 있자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외사랑
시간을 거슬러 너를 만난 그때로 돌아가리라.
돌아가 너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으리라.
너를 보지 않기 위해
네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네 향기에 취하지 않기 위해
멀리 멀리 돌아가리라.
네 마음을 바라던 것보다
내 마음을 바라는 것이니.
지금보다는 쉬우리라.
그러니 너는 지금처럼 나를 지나쳐주길.’
도현이 페이지를 넘겼다.
‘미운 사람의 못난 사랑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그냥.
네가 날 싫어하는 이유도
그냥.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듯이
네가 날 싫어하는 이유도 모르는 게 맞는데
아는데도 아픈 건 왜일까.’
도현이 그제야 누리의 말에 공감했다. 그녀의 사랑은 아프고, 아팠다. 스물아홉. 그녀에겐 그렇게 아픈 사랑들만 있었을까. 누리가 그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왔다.
“공감이 돼서요.”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아랑의 시에 가있었다. 다 아는데도 아픈 건 여전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그 이유까지 아랑이 찾아내 주었으면 싶었다.
“성공이네요.”
“네?”
도현이 뿌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읽는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라면 많은 사람들이 찾겠죠.”
“그렇죠.”
정환과 민후가 차례로 선별한 시를 가져오자 누리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도현이 손에 들렸던 아랑의 시를 내려놓자 그 위로 정환과 민후가 선별한 원고 뭉텅이가 올려졌다. 희수까지 그 위로 선별 작업을 끝내고 원고를 놓자. 도현이 슬그머니 맨 아래에 있던 아랑의 사랑을 위로 올렸다. 그렇게라도 부디 그녀의 사랑이 무겁지 않길 바랐다.
“비가 오는 날만 찾기로 한 거야?”
아랑과 도현이 막 그친 비에 우산을 털며 우리 새 까치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미형의 말에 아랑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연이에요.”
도현과 아랑이 처음 마주 앉았던 그 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근래에 더위가 꽤 살인적이었다는 데 동의한 자연이 잠시 비를 내려주고 다시 해를 보내주려 하고 있었다.
“내리려면 팍 쏟아질 것이지. 오줌 지리는 것도 아니고, 이럴 거면 안 오느니만 못해.”
시진이 가게 뒤편에서 나오며 서둘러 카운터의 선풍기로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그러다 늘 아랑이 앉던 자리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어라? 이게 누구신가. 우리 단골손님과 그 단골의 친구 분 아니신가.”
도현이 시진의 손을 맞잡으며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시진이 두 사람이 앉은 창 너머로 어느새 쨍쨍 내리 쬐는 해를 보며 말했다.
“술잔을 기울이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커피 마시러 온 거예요.”
아랑의 말에 시진이 눈을 꿈뻑 거렸다.
“네가 여기 커피도 마시러 오냐?”
“아, 삼촌!”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장난이다, 장난.”
도현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비즈니스 상 오긴 했지만 해가 지면 술상이 필요할 것도 같습니다.”
“당연히 해 들어가면 내드려야지.”
시진이 또 다시 호탕하게 웃고선 카운터로 향했다. 도현은 그의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뒤를 돌아 계량 한복 바지와 검은 면티를 입은 채 제가 만든 테이블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가는 시진을 보았다. 아랑이 그를 힐끔 보고 물었다.
“뭐 마실래?”
“그냥 아메리카노.”
아랑이 손을 들어 미형과 눈을 맞췄다.
“이모! 아메리카노 하나, 옛날 커피 하나요.”
미형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였다. 그제야 도현이 자시 몸을 돌렸다.
“커피 안 마시잖아.”
“오늘은 밤을 샐 각오를 했으니까.”
“옛날 커피는 뭐야?”
“프림 둘, 설탕 셋.”
잠시 후 원두 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문을 마친 아랑은 세 부로 나뉜 제 시 원고를 살폈다.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말. 셋 중 하나가 현저히 부족했다. 그녀가 볼을 부풀리며 고민에 빠졌다. 떠오르는 시상은 온 통 사랑에 가까우니 큰일이었다. 급히 도현에게 SOS를 청하니 그는 뜬금없이 그녀에게 우리 새 까치집에 가자고 했다. 그곳만큼 낭만적인 공간이라면 달아났던 영감님이 도로 뛰어 올 거라며 말이다.
“저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대?”
아랑은 도현이 시 분량보다 시진과 미형에게 더 관심을 보이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들으면 깜짝 놀랄 걸?”
도현이 그들을 다시 힐끔 살피곤 아랑을 보았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턱을 괴자 멀리서 미형이 커피를 들고 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두 사람 앞에 잔을 내려주곤 다정한 미소와 함께 멀어졌다.
“이제 얘기해봐.”
아랑이 제 원고를 내려놓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카운터에 있던 미형과 시진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자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삼촌네 집은 원래 부잣집이었대. 삼촌은 부잣집 막내아들. 공부까지 잘해서 서울대 법대를 다녔는데 친구들하고 봉사활동 차원에서 시골로 농활을 신청했다나봐. 거기서 우연히 풍물을 접하게 됐는데...”
도현이 예상치 못했는지 아랑의 말을 끊고 되물었다.
“풍물?”
“응. 장구랑 꽹과리.”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롱은 익숙치 않은 진한 커피로 목을 축이곤 말했다.
“그때 장구랑 사랑에 빠지게 됐대.”
“사모님이 아니라 장구?”
“응. 이모를 만난 건 그 다음이야.”
도현이 빨대를 물어 커피를 마셨다.
“계속해봐.”
“정말 피가 갑자기 팍! 솟으면서 하루 종일 치라고 해도 칠 수 있을 것 같더래. 나한테는 삼일 연속 잠도 안 자고 친 적도 있다고 했는데 그건 좀 부풀린 것 같아. 이모가 그러는데 삼촌이 하는 말은 알아서 한 번은 거르고 들어야 한대.”
“그래서?”
“그래서 집에 가서 자기는 장구를 쳐야겠다고 했대.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막내아들이 이제 곧 졸업하는 법대를 그만두고 장구를 치겠다고 하니.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뒤집어 졌겠네.”
“뒤집어지다 뿐이겠어. 어머니가 울고, 불고. 아버지는 딱 일 년. 하던 공부는 마무리 하라고 난리를 치는 걸 보고선 부모님이 죽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는 거야. 그래서 그 날 저녁에 편지 한 장 써놓고 단번에 집을 나왔대.”
도현의 눈이 조금 커지자 아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삼촌이랑 같이 풍물과 사랑에 빠진 친구들 몇이랑 집을 나와서 곧장 인사동에 지하방을 얻으셨대. 그 뒤부터는 주구장창 밤, 낮으로 장구고, 꽹과리고 두드려댄 거야. 밤, 낮으로 두드려대니까 나중에는 주민들이 민원을 넣어서 내쫓길 판까지 처했었는데 그때 국악 쪽에 연이 있던 사람 하나를 만나서 부족한 인원이랑 악기를 구해서 풍물패를 만드신 거야. 그 뒤로는 전국으로 공연을 하러 다니면서 사셨대. 이모랑은 풍물패에서 만났다고 하셨어.”
“사모님은 뭐 하시던 분이었는데?”
“이모도 어렸을 적엔 집이 잘 살았는데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형편이 많이 어려우셨나봐. 이모 어머니께서 열여덟에 이모를 낳아서 부모 사랑도 잘 모르면서 컸대. 그런데 이모는 이상하게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이 예쁘다, 예쁘다 하고. 하고 싶은 걸 굳이 참아야 하는 지 이해를 못했다는 거야. 그런데도 장녀라서 부모님은 이모가 빨리 자리를 잡길 바랐나봐. 마지못해 동네 분 도움 받아서 삼양 섬유 공장에 들어 가셨대. 당시에 대기업이었으니까 엄청 좋은 일자리 구한 거지. 연말 보너스가 200%가 나오고 그랬다니까. 그러다가 스물일곱에 이 정도 부모 뜻 따라서 살아줬고, 돈 벌어 줬으니까. 남은 인생은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겠다고 집을 나온 거야. 운이 좋게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모이는 다문이란 찻집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삼촌이 있는 풍물패 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하게 됐대. 두 사람은 같이 풍물패로 활동하다가 ‘당신이 내 인연인 갑소.’, ‘그런 갑소.’하고 연애했대.”
때마침 시진과 미형이 카운터로 돌아왔다. 미형이 가만히 카운터에 앉자, 시진은 기둥을 따라 높게 쌓인 레코드 판을 뒤적였다.
“자식은 없으셔?”
“응. 두 분 다 자기 같은 자식 낳을까봐 무서워서 안 낳기로 했대.”
도현과 아랑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의 웃음 뒤로 시진이 고른 음악이 가게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들? 손님이 없어서 심심한대. 그 재미있는 이야기 나도 좀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