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테이블 의자를 빼 앉은 그에 아랑이 말했다.
“도현이가 이모랑 삼촌이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 해서요.”
“우리의 사랑은 세기 말까지 기록될 러브 스토리지. 그런데 어느 부분이 그대들을 웃겼는고?”
아랑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삼촌이랑 이모가 두 분 닮은 자식 낳을까봐 무서워서 자식을 안 낳은 부분이요.”
시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지! 그건 아주 재치 있으면서도, 섬뜩한 현실이었어.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네.”
그가 도현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그럼 우리 단골 친구 분께서는 어떤 부분이 감명 깊었나. 실례가 안 된다면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몰래 캐물은 그대에게 정중히 물어봐도 될런지.”
그의 능글맞은 말투에 도현의 입가에 외보조개가 띠워졌다.
“물론이죠.”
“오! 미형아! 이리와. 감상평이야!”
그가 멀리 제 아내에게 손짓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형이 호기심에 가득 차 다가왔다.
“우리 러브 스토리에 아주 큰 감명을 받았대.”
부부는 닮는다더니.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호탕하게 어우러졌다. 도현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분위기 유지 할까요, 진지하게 갈까요?”
시진이 황급히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우리 아주 진중한 사람들이에요.”
도현이 고개를 작게 저으며 웃었다. 그럼에도 시진은 여전히 진중한 모습을 보이려 표정을 유지했다. 도현이 잠시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 말했다.
“일단 부러워요. 두 분 모두 두 분의 인생을 사신 것 같아서.”
미형도 의자를 끌고 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진이 틀어놓은 음악이 배경음악처럼 잔잔하게 깔리니 도현은 음악에 취해 두 사람과 눈을 맞추며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충분히 세상과 타협하고, 포기하고, 물러설 수 있는 일들이 있었음에도 끝끝내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지킨 부분은 특히 감명 깊었어요.”
시진이 감동을 받은 듯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부여잡았다. 미형이 다정히 도현의 어깨를 쓸었다.
“고마워요. 괜히 울컥 하네. 우린 칭찬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서. 어색하기도 하고.”
미형의 손이 떠나간 그의 어깨를 시진의 투박한 손이 턱 얹혀졌다.
“고맙소. 그런데 친구, 우린 아직 멀쩡히 살아 있어. 우리 인생 아직도 창창하다고. 물론 내 귀가 인생 잘 사신 것 같다는 말을 ‘인생 잘 살고 계시군요.’라고 잘 해석해 들었소. 이 친구 참 괜찮은 친구야.”
그의 투박한 손이 도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유쾌한 분위기를 잃지 않으려 잘 포장한 그의 능글맞은 말과는 달리 그의 손길에서 도현은 그가 진심으로 제게 고마워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아무렴. 남자는 남자끼리 통하는 법이지.”
시진과 미형이 자리를 지키며 함께 수다를 더 떨다 손님이 들어서서야 네 사람의 시간이 마무리 되었다. 어느새 노을이 북촌의 한옥들을 느릿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건 어때?”
도현이 아랑이 급히 써서 건넨 시를 보았다.
‘끝없는 끝
우린 모든 것이 끝나길 바라지만 끝은 없다.
우린 그 끝없는 끝을 바라기에 괴로운 것일까.’
도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좋은데. 이건 인생 쪽으로 빠져야 할 것 같은데.”
아랑이 맥이 풀리는지 머리를 콩 테이블에 박았다.
“그런 것 밖에 생각이 안나.”
“우리 아랑 시인 큰일이네.”
“세상에 관한 시, 전할 말.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
그녀가 푸- 숨을 내뱉다가 입을 꾹 닫았다. 도현이 그녀에게 벌써 세 번째 리필 된 커피를 밀어주었다. 아랑이 인상을 썼다. 쓴 커피를 목으로 넘기며 불을 한껏 부풀렸다.
“정말 세상을 꼬집어 주고 싶네.”
“그래. 뜨끔하게 꼬집어 줄 시를 써줘.”
아랑의 어깨가 다시 축 가라앉았다.
“미안해.”
“주제를 정해놓아서 더 힘든가 보네.”
“조금.”
“이거 괜히 미안해지네. 네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새장에 가둬놓은 기분이야.”
아랑이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왜 그러냐는 듯이 눈으로 물었다.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었어.”
“내가 요새 시인하고 어울리거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자 건물 정원에 설치된 조명이 탁 켜졌다. 카페에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조명이 켜진 창밖 정원을 보았다. 도현이 정원 구석에 자리한 나무 가지 사이 새집을 보곤 물었다.
“왜 여기 가게 이름이 우리 새 까치집이야?”
“서울을 상징하는 새가 까치야. 까치는 예로부터 사랑을 연결해주는 새로 알려졌어. 견우와 직녀에 나오는 새도 까치잖아. 그런 뜻이야.”
아랑이 빈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우리 새 까치집. 서울 새 까치집. 서울의 사랑을 연결해주는 까치의 집. 그런 의미래.”
아랑이 끄적이던 것을 멈추고 가게 이름과 함께 앙증맞게 그려진 일러스트들을 만족스럽게 보곤 도현에게 보였다. 때마침 시진이 술과 안주거리를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일하는데 배고프면 서럽다. 술이 고프면 머리가 안 돌아가고. 오늘 24시간 영업. 먹고 해.”
“역시 이래서 여긴 단골이 많아. 자, 받으세요.”
아랑이 들고 있던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시진이 가만히 들여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잘 그렸네.”
“오늘 술값입니다.”
당당한 아랑의 말에 시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참으로 술값 한 번 비싸게 쳐준다. 모자라는 거 있음 말하고.”
“네.”
두 사람은 잠시 원고들을 창가로 올려놓은 뒤 술잔을 기울이기로 했다.
“삼촌 말 들었지? 술이 고프면 머리가 안 돌아간대.”
슬쩍 술잔을 내미는 아랑에 도현이 핏 웃고는 소주병을 땄다.
“오늘 신아랑 머리에서 본전 뽑고 간다.”
“우리 편집자님 기대에 부흥하겠습니다.”
아랑이 그의 잔을 채운 뒤 두 사람이 힘차게 잔을 부딪쳤다. 그 바람에 아까운 술 몇 방울이 골뱅이 무침 위로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깨끗이 첫 잔을 비운 아랑에 도현이 물었다.
“어때, 머리가 좀 돌아가?”
아랑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을 음미하듯 두 눈을 감고 말했다.
“효과가 있어.”
그가 핏 웃으며 다시 아랑의 잔에 술을 채웠다.
“나 소주엔 약해.”
“그럼 천천히 마셔.”
아랑이 홱 두 번째 잔을 비워내곤 스스로 잔을 채웠다.
“알코올이 가져다주는 무의식의 흐름에서 찾아내는 인생의 고찰. 오늘은 세상을 고찰해야지.”
그렇게 세 잔을 연속으로 비운 아랑이 서둘러 안주를 집어 먹으며 쓴 입을 달랬다. 그리곤 서둘러 수첩과 볼펜을 들었다.
“술이 효과가 있긴 한가 보다?”
“만능 해결사지.”
그녀가 멀리 손님들과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시진과 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현이 그녀를 따라 뒤를 힐끔 보곤 잔을 채웠다. 그가 막 소주 병을 내려놓았을 때 아랑이 갑자기 고개를 홱 숙이곤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도현이 그녀를 주시하며 잔을 비웠다. 그가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아랑이 종이 한 장을 뜯어 그에게 건넸다.
‘내가 잃어버린 것
세상사는 게 힘들어
내 생긴 대로 살아보려 했지만
세상이 이젠 내 생긴 대로 살아지지 않더라.
난 자꾸 내가 아닌 나로 가면을 쓰더라.
그래서 이젠 진짜 내 모습이 뭔지 모르겠어.’
도현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급히 먹은 소주 세 잔이 그녀의 볼을 붉게 물들였다.
“세상 들어가면 그냥 넘어가 줄줄 알았지.”
아랑이 또 다시 끄적이기 시작하며 말했다.
“완전히 연관이 없진 않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차이는 조금씩 있는 거야. 시는 그런 거야.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에서 입맛에 맞는 뜻을 찾는 게 재미라면 재미지.”
“혼날라고.”
아랑이 입술을 비죽이며 다시 종이를 뜯어 그에게 건넸다.
‘무제
세상 모든 이들이 행복함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기쁨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사랑함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리 기도하면 제 몫도 있는 거지요?’
아랑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급히 제목을 써넣었다.
‘욕심이 지나치다하여.’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한참 전에 채워 두었던 잔을 비우곤 다시 엎어 놓았다.
“또 세상 들어갔네. 너 자꾸 머리 쓴다?”
도현이 두 종이가 날아가지 않게 빈 술잔을 올려 테이블에 놓았다. 아랑이 걱정스레 물었다. 제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고작 그런 것인데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예 아니야?”
“사무실가서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가능성이 없진 않네.”
그녀가 또 다시 끄적였다. 도현이 그녀가 건네는 종이를 의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무제
행복을 만끽했다면
슬픔도 만끽해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도현이 빈 술잔을 들어 종이를 고정해 놓곤 소주병을 들었다.
“세상. 세상. 세상. 쓰리 아웃. 잔 들어. 벌칙주야.”
아랑이 웃음을 터트리며 제 잔을 들었다. 아랑의 잔 가득 술이 채워졌다.
“원 샷입니다. 작가님.”
“네. 편집자님.”
그녀가 입 안 가득 술을 머금곤 간신히 목으로 넘겼다.
“쓰다, 써.”
그녀가 서둘러 물로 입을 행구었다.
“어제 엄마랑 통화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네 얘기가 나왔어. 언제 한 번 같이 오라더라.”
도현이 말이 없자 아랑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도너츠 싸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아. 조만간 얼굴 보러 갈 생각이라 갈 때 네 몫까지 챙겨 올게.”
“그래. 감사하다고 안부 전해드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할 법도 한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레코드 판이 정적을 채워주고 있었다. 이따금 다른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함께 두 사람의 테이블로 넘어오자 도현이 담담하게 잔을 채우며 물었다.
“아직 그 집에 사셔?”
“이사 한지 한참이지. 아빠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서 방 뺐어. 엄마 가게 뒤로 공간을 내서 그리 이사했어.”
도현이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랑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주머니는... 아직 그 집에 사신다고 하던데...”
“응.”
“연락은 자주해?”
“명절. 생신. 어버이날.”
“애썼네.”
도현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런 이름 붙은 날이라도 마지못해 전화를 하던 것을 칭찬 받을 줄은 몰라 의아했다.
“어떻게 살면 가족들 안부 물을 시간이 없는지. 미루고 안 하다 버릇하면 일 년 내내 생각지도 못하는 거 있지? 어느 날 엄마가 전화 와서 살았냐, 죽었냐 물으면 그때서야 아차 싶어. 그래도 현도현은 꼬박꼬박 자식 노릇 잘 했네.”
그가 기대 못한 칭찬에 피식 웃었다. 자식 노릇. 자신과는 거리가 먼 칭찬거리였다. 술을 털어 넣자 이상하게도 쓰게 느껴졌다. 남들보다 한참이나 모자라 칭찬은 기대도 안 한 일에서의 칭찬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뭘 하느라 그렇게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건지. 미뤄두었다고 하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인지하지 못한 사실에 더 씁쓸해졌다. 일? 우정? 사랑? 뭐 때문에 그랬을까. 더 이상 못나기 싫어서인지 도현이 아랑을 보았다. 그에겐 잠시 다른 이야기 거리가 필요했고, 앞에 있는 그녀가 그 주제를 물고 있었다.
“네 시 말이야.”
“내 시?”
두 사람 다 잔잔하게 다가온 취기를 머금은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누리 씨가 그러는데 네 사랑은 다 혼자 하는 사랑이라더라.”
아랑이 그를 빤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