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가 살펴봤는데 진짜 그렇더라고.”
“그래? 미처 몰랐네.”
“미처 몰랐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안주로 나온 전을 잘게 찢었다.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몰랐다 치고, 다 아프기만 해. 왜 예쁜 건 안 써? 네 사랑은 예뻤던 적 없어?”
아랑이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하자 도현이 머쓱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우리 나이면 연애 안 해봤을 리 없잖아.”
“그런가... 그렇지?”
“답하기 곤란한가.”
도현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곤란한가 보네.”
그때 서빙을 온 시진이 두 사람의 테이블에 슬쩍 소주 두 병을 올려두고 갔다. 도현이 그를 보니 그가 눈을 찡긋 거리곤 멀어졌다. 도현의 몸이 천천히 제자리로 올 때 쯤 아랑이 말했다.
“나는 연애를 못 했어.”
그녀가 말하기로 결심했는지 자세를 두 번 고쳐 않곤 말했다. 어느새 창밖은 어두컴컴해졌다.
“남자는 몇 번 만나봤는데 길게는 안 만나지더라. 그 사람들한테서 느낀 감정으로 쓴 시가 없어.”
아랑이 잔을 비우자 도현이 바로 새 소주병을 땄다. 그녀의 잔을 채우자 아랑이 곧바로 또 잔을 비웠다.
“너, 급해.”
“줘, 듣고 싶으면.”
도현이 느릿하게 반잔을 채웠다. 그것마저 비운 아랑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없었던 것 같아. 그냥 예의만 차리면서 안부만 주고받았던 거지.”
도현이 테이블로 팔을 올려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나 봐?”
“인생에 남자도 몇 없었어. 사실 기대 좀 하고 입학한 대학 얼마 안 있어서 그만 두고 내내 시골 시장 통에만 있었는데 뭘 바라. 더군다나 얼굴 다 아는 마을 은행에서 일했는데. 도망치듯이 집을 나오고 나선 좀 힘들어서 남자한테 기대볼까 했는데 막상 필요할 땐 없더라.”
“하늘이 도왔네.”
아랑이 핏 웃었다. 도현이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곤 제 잔을 비웠다.
“그럼 그 아픈 사랑은 다 어디서 났어?”
그녀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나오긴 하더라.”
“마음에 드는 놈들은 아프게만 하고, 정작 필요해서 누구라도 붙잡고 싶을 땐 아무도 없고?”
아랑이 입을 꾹 다물곤 그를 흘겼다.
“뼈를 때리네.”
“술 들어가면 이래. 미안.”
도현이 서둘러 물을 한 컵 가득 따라 비웠다.
“그러는 넌? 이젠 현도현 연애 이야기 좀 들어보자.”
아랑이 두 팔을 테이블로 올려 꽃받침을 하곤 눈을 빛냈다.
“별 거 없어. 대학 때 잠깐. 첫 직장에서 잠깐. 우연히 소개 받아서 잠깐. 셋.”
“끝?”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잠깐이 얼마나인데?”
“대학 때 만난 사람은 학기 초에 만나서 군대에서 끝났고, 첫 직장에서는 1년 안 돼서 끝났고, 우연히 소개 받은 사람은 한, 두 달? 연애에 관심도 없고, 다올로 옮길 때라 내가 너무 무관심했는지 먼저 끝내자고 하더라.”
“나빴네.”
“사랑이 없었을 뿐이지. 누구처럼.”
아랑이 그를 흘겼다. 술이 들어간 도현은 그답지 않게 짓궂어졌다. 이내 그가 담담하게 현실을 대변했다.
“요즘 세상에 사랑하기 힘들어.”
“그래도 사랑이 없으면 너무 삭막해지잖아.”
“사랑이 없긴 왜 없어? 일이랑 하면 돼지.”
그가 잔을 든 손, 검지를 펴 그녀를 가리켰다.
“넌 시랑 하고.”
아랑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네가 일을 사랑하고, 내가 시를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 사람의 품이 그리워지게 돼있어. 한 번씩 미치도록 외로워서 괴로울 때 없었어?”
“없을리가.”
“거봐,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야.”
“본능을 외면해야 하는 시대에 태어났으니 어째.”
아랑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자세를 세우고 말했다.
“진짜 그런 세상인가?”
“인간의 본능이라며.. 사랑이. 그런 사랑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돼. 아니,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누는 건데. 내 온 에너지를 상대방한테 쏟아도 영원을 보장받을까, 말까 한 게 사랑이야. 그 사랑 한 번 하려면 시간, 돈, 환경. 따져볼 게 많잖아. 현실은 그게 잘 안 되고.”
“그러네.”
아랑의 어깨가 축 쳐졌다.
“일이랑 사랑을 하면 그나마 경력, 노하우, 위치. 뭐라도 남지.”
“이젠 사랑에도 손익을 따져야 하는 시대구나.”
우울해진 아랑이 창밖을 보며 저 컴컴한 어둠이 제 사랑의 미래일까 가늠해봤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새 까치집의 밝은 야외 조명에도 별들이 조금 눈에 띠었다. 도현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손해 없는 사랑도 있어.”
아랑이 다시 그를 보았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뭔데?”
“자기 자신이랑 하는 사랑. 나랑 하는 사랑은 손해 볼 게 없지.”
“도현아.”
아랑이 나직히 그를 불렀다.
“왜.”
“너 원래 그렇게 말을 잘했어?”
그가 소주병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만능 해결사.”
두 사람이 다시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랑이 그의 어깨 너머로 시진과 미형을 보곤 황급히 말했다.
“땡땡. 뒤에 봐.”
그가 뒤를 돌아 그들을 보았다. 자연스레 제게 다가온 시진의 허리에 팔을 두른 미형.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밖으로 이끄는 시진이 보였다. 잠시 문 앞에 선 그들은 낮에 쏟아졌던 소나기가 무색하게 밤에도 아지랑이가 보인다 누가 말해도 의심치 않을 더위 속에서도 서로를 놓지 않았다.
“저분들은? 저분들도 이것, 저것 따지고 그랬을까?”
“시대적 오차 범위는 감안해야지.”
“감안해도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도현이 다시 창밖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밤하늘을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도현의 입가에 외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저 분들은 패스. 특이 케이스. 이름 바 연구 대상이야.”
아랑이 그의 말에 웃기도 잠시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두 사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