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로 미팅을 다녀온 정환은 내리 쬐는 햇볕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땀을 삐질 흘리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지독하다. 지독해.”
때 마침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팀원들에게 배부하던 누리가 서둘러 그에게도 한 잔을 건넸다.
“여기요. 매니저님. 커피 드세요.”
“땡큐, 누리 씨.”
에어컨의 보호 아래가 아니라면 서울의 여름은 지옥이었다.
“해마다 더워진다는데. 내년에는 어떻게 버티려나 몰라.”
희수가 거울로 제 얼굴을 살피며 말하자 민후가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추며 말했다.
“해가 지날수록 기술도 발전하겠죠. 견딜 수 없는 여름을 견딜 수 있게.”
“하긴, 그래도 너무 덥다.”
누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도현의 자리로 갔다. 유리 칸막이를 두드리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팀장님, 커피 드세요.”
“고마워요.”
도현이 다시 일에 집중하려다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잔 남는 건 뭐예요?”
모두에게 배부된 커피에도 누리가 들고 있는 쟁반에는 두 잔의 커피가 있었다. 누리가 그 중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이거 맥심이에요. 김 매니저님이 가끔 드시길래 혹시 하고 탔는데 오늘은 원두를 드시네요.”
도현이 잔을 바꿔 들었다. 프림 둘, 설탕 셋. 아랑이 떠올랐다.
“내가 마실게요.”
“팀장님 맥심은 안 드시잖아요.”
“그랬는데 한 번 먹어보려고요. 누가 먹는 거 봤는데 맛있어 보이더라고요.”
도현이 커피를 머금었다. 원두커피와는 다른 달달한 맛에 그가 핏 웃었다.
“애 같이.”
그의 낮은 목소리에 누리가 애써 등을 보였다.
해가 긴 여름은 사람들의 하루도 늘어뜨렸다. 오후 일곱 시가 되어도 여전히 하늘을 떠나지 않은 노을에 아랑이 말했다.
“해 참 길다. 어제보다 더 길어진 것 같아.”
우리 새 까치집에 있던 그녀를 태워 집 근처로 향하는 이유는 오늘이 혁준이 고대하던 날이기 때문이었다.
“혁준이는 오고 있대?”
“조금 늦는다는데 도로 상황을 보면 우리도 늦을 것 같다.”
거북이 기어가듯 안달이 난 차들이 시뻘건 눈을 부라리며 신호가 떨어지길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랑이 문득 전할 말이 떠올랐는지 그를 보았다.
“아, 나도 소연이한테 너랑 혁준이 얘기 했는데.”
“빵집?”
아랑이 여전히 고등학교 동창을 남 대하듯 부르는 그에 피식 웃고는 답했다.
“그래. 광화문 빵집 친구. 언제 한 번 보고 싶다네.”
“그래? 그럼 언제 한 번 보면 돼지.”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뭐야.”
그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이따 혁준이 만나서 날 잡아야겠다. 안 그래도 아까 전화 와서 꼭 안부 전하고 날 잡으라고 난리야.”
“부르지.”
“오늘 시부모님이 오시기로 했다나 봐.”
“아, 결혼 했다고 했지?”
“응.”
소연은 스물일곱에 결혼에 횟수로는 3년차에 접어든 신혼이었다. 능력 있지만 바쁜 남편 탓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배운 제과, 제빵 실력으로 광화문에서 작은 빵집을 연 지는 이제 2년 차에 접어들었다. 곧이어 차가 부드럽게 정차했다.
“우리가 늦었네.”
멀리서 케쥬얼한 옷차림으로 걸어오는 혁준은 옛 모습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특유의 개구진 미소는 여전했다. 아랑이 차에서 내리자 그가 가볍게 뛰어와 그녀를 신기한 듯 보았다.
“와! 진짜 신아랑이네?”
“반갑다.”
“진짜 오랜만이다.”
두 사람이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도현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혁준이 고심하고 고심해서 고른 고기집은 도현과 그의 단골 술집이었다. 도현이 에어컨 바람이 선선한 건물에 들어서며 가게 사장과 친근하게 인사를 하고 미리 세팅된 자리에 앉자 뒤이어 여전히 서로를 반가워하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혁준과 아랑이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 아랑이 넌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옛날 얼굴 그대로네.”
“무슨 소리야. 변한 거 많지.”
“아니야. 진짜 하나도 안 변했어. 내가 동창회 나가서 애들 얼굴 보자나. 도현이 이 녀석은 맨날 봐서 난 모르겠지만 다들 조금씩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데 넌 진짜 그대로다.”
“칭찬이지?”
“아무렴.”
도현이 자연스레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학교 졸업하면서 이 조합으로 사회에서 만나 술 마실 거라는 건 생각해보질 못했는데.”
혁준의 말에 아랑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희 둘이 화해할 줄도 몰랐어.”
아랑과 도현이 서로를 힐끔 보며 핏 웃었다.
“나도.”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던 혁준이 이내 초록 병을 들었다. 가볍게 병을 흔들어 뚜껑을 따자 아랑과 도현이 자연스레 제 앞의 잔을 들었다.
“일단 한 잔씩 받으시고. 아랑이 넌 주량이 어떻게 돼?”
아랑이 제 주량을 가늠하고 입을 때려 할 때 도현이 선수를 쳤다.
“얘 못해. 그니까 적당히 따라.”
그녀의 잔을 가득 채우려는 혁준에 도현이 제 잔을 들어보였다. 혁준이 그의 잔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혁준까지 잔을 채우고 그가 신이 나는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잘 마시든, 못 마시든 첫 잔은 원샷입니다. 친구들.”
세 사람이 동시에 잔을 꺾었다. 알코올의 묵직한 씁쓸함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도현이 잘 구워진 고기를 잘라 친구들이 집어먹기 편하도록 불판의 가상으로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이 고기를 집어 쓴 입을 달랬다.
“자자, 다들 빈 잔은 채워두시고.”
혁준이 다시 세 사람의 잔을 채우자 소주병은 금세 동이 나 있었다.
“나는 도현이가 네 얘기 하자마자 그거 떠오르더라.”
“뭐?”
“아랑의 1분.”
혁준과 아랑은 뭐가 그리 죽이 맞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거 싫어하는 애들 많던데.”
“난 좋았어. 점심 먹고 나서가 5교시인가?”
혁준이 도현에게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시간, 잠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잠시 마음 놓고 눈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평화의 시간이 아랑의 1분이었지. 네가 선생님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그 시간동안 넌 나의 영웅이었다.”
아랑이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기억났다! 언젠가 한 번은 선생님한테 걸린 적 있었지?”
“어? 그걸 기억해? 있었지! 어김없이 돌아온 아랑의 1분에 눈을 감았을 때 쌤이 ‘노혁준! 임마, 자냐?’ 그러셔서 느릿하게 일어나선 이렇게 말했었지. ‘아랑이의 시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눈을 감은 것뿐입니다.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쌤이 분필 날리지 않으셨어?”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 조용히 잔을 비우던 도현에 혁준이 그를 나무랐다.
“어허! 현도현 정 없게 혼자 비우냐. 받아.”
혁준이 다시 그의 잔을 채웠다.
“자, 건배!”
세 사람이 합을 맞춘 듯 고개를 탁 젖혔다. 혁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 그나저나 아랑이 넌 고등학교 애들이랑 연락하는 애들 없어? 동창회도 잘 나오다가 뜸했잖아. 왜 안 나와?”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되대?”
도현이 힐끔 아랑을 살피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랑이 괜찮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럼 애들이랑 아예 연락 안 해?”
“소연이. 소연이랑은 잘 만나.”
“소연이? 윤소연?”
혁준이 애써 삼켜 낸 알코올의 잔 흔적을 고기와 함께 삼켜내며 물었다.
“가만있어 보자. 걔가 미대 준비한다고 하던 애 맞지?”
“응, 맞아.”
“걔도 동창회 잘 안 오던데. 이거 이거. 안 오는 것들끼리 따로 뭉쳤었구만?”
시끌벅적한 고기집의 구석 세 사람의 대화는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걔도 부르지.”
“오고 싶어라 했는데 오늘 시부모님이 오신다고 했대.”
혁준이 동창회에서 얼핏 들은 소연의 소식이 떠올랐다.
“아아, 걔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청첩장도 많이 안 돌렸더라?”
“남편이 사업을 해서 엄청 바쁘셔. 결혼식도 간단하게 했어.”
“이야, 윤소연 팔자 폈네.”
“팔자피긴 남편이 바빠도 너무 바빠서 맨날 혼자 있는데. 지금 광화문에서 빵집 하잖아.”
혁준이 잔을 들자 아랑과 도현도 잔을 들었다. 세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언제 한 번 넷이 모이자.”
“안 그래도 소연이가 날 잡아놓으라고 난리야.”
“그래? 그럼 되도록 빨리 봐야지. 친구 섭섭하게 하면 안돼.”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였다. 화장실을 간 아랑이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하고서야 수십 통 찍힌 소연의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그녀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찍힌 소연의 전화가 불과 5분전이었다.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 아랑! 어디야?
“나 오늘 도현이랑, 혁준이 본다고 했잖아.”
- 무슨 일 있어서 오면 온다, 안 오면 안 온다 말이라도 해주면 좀 좋아? 어머님, 아버님께서 갑자기 안 온대. 남편도 급하게 회사 갔고. 새벽이나 돼야 온단다. 심심해 죽겠어. 파했어?
“아니, 아직. 올래?”
소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 어딘데?
“여기 혁준이네 집 근처인데. 물어볼게.”
아랑이 서둘러 화장실을 나서 얘기 중인 두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랑이 잠시 핸드폰을 때고 둘에게 물었다.
“소연이 연락이 왔는데. 지금 오고 싶다는데.”
혁준이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위치가 어떻게 돼?”
“위치? 좀 복잡한데. 줘봐, 내가 설명할게.”
아랑이 소연에게 잠시 설명을 해주곤 핸드폰을 혁준에게 넘겼다.
“어. 윤소연! 나 노혁준이야. 그래. 우리가 널 끼워줄게. 여기 위치가 어떻게 되냐면? 차 있지? 여기 주소가...”
혁준이 주변이 시끄러운지 잠시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왜인지 전화가 길어지는 것을 보곤 아랑이 고개를 돌렸다. 도현이 말했다.
“노혁준 신났네.”
“원래 사교성이 좋잖아.”
도현이 코웃음을 치며 술잔을 기울였다. 아랑도 잔을 들자 그가 술을 꿀떡 넘기며 말했다.
“적당히 마셔라.”
“그럼, 조절하지. 그렇게 대책 없진 않아. 집도 멀고.”
곧이어 혁준이 돌아왔다.
“야. 윤소연 우리 동네 사는데? 10분 거리. 얘네 집 거기야. 그 연예인들 산다는 아파트.”
“아... 그래?”
도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소연에게서 또 다시 전화가 왔고, 아랑은 혁준에게 전화를 넘겼다. 그는 또 다시 가게 밖으로 나갔다. 아랑이 시간을 살피니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막차 시간 때문에?”
도현의 물음에 아랑이 옷깃을 내리며 말했다.
“응. 아직 여유 있어.”
때마침 혁준과 소연이 시끌시끌하게 오고 있었다. 혁준만큼이나 성격이 시원 털털한 소연은 대뜸 도현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야! 진짜 현도현이네? 난 또 아랑이가 헛소리를 하나 했네.”
소연까지 합세하자 네 사람이 앉은 테이블이 시끌시끌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 자자, 건배!”
보기보단 술에 약한지 소연은 목까지 벌게져 있었다. 혁준은 내일이 주말이라며 천만 다행이라는 듯 끝을 달릴 준비를 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쉴 새 없이 술이 오갔다. 아랑은 분위기에 취해 잔을 놓고 싶지 않았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