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빵을 찾으러 마지막 손님이 다녀가고서야 소연이 털썩 아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소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녀가 한집에 있었는데 아무 일이 없었다. 그것도 근래에 단둘이 자주 만난 남녀가.”
“친구라니까.”
소연이 콧방귀를 끼었다.
“친구는 개뿔.”
태연하게 소연이 내준 머핀과 차로 늦은 점심을 대신하던 아랑이 별안간 제 손 아래 있던 다이어리를 낚아채는 소연에 버럭 소리쳤다.
“야!”
소연이 다이어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걔는 아니? 신아랑 사랑 시에 주인공이 자기인 거?”
아랑이 엉덩이를 살짝 들어 소연의 손에 들린 다이어리를 다시 뺏어 들었다.
“옛날 일이야. 옛날 첫사랑 생각하면서 시 쓰는 게 뭐가 이상해? 영감일 뿐이야. 이상하게 몰고 가지마. 우리 완전히 친구로 자리 잡았으니까.”
“친구... 정말 친구가 하고 싶었어? 고딩 때도 친구가 하고 싶었던 거였어?”
“그만해. 손님 온다.”
딸랑이는 종소리에 소연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랑이 방금 전까지 자신을 추궁하던 소연이 밝은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냥하게 손님 배웅을 마친 소연은 다시 그녀 앞으로 자리했다. 그녀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곧바로 다음 손님이 들어서자 소연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그래도 이미 발을 들인 손님을 내쫓을 수 없으니 그녀가 다시 미소를 띠웠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손님들이 나가자마자 'close.' 푯말로 바꾸곤 정문을 닫았다. 그런 소연을 보며 아랑이 혀를 내둘렀다.
“너처럼 마음 편하게 장사하는 사람, 대한민국에 너 하나일 거다.”
“됐고, 진짜 친구야?”
“몇 번을 말해. 진짜 친구야.”
숙취 때문인지, 자꾸 추궁하는 소연 때문인지 아랑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지자 소연이 잠시 추궁을 멈추었다.
“어제 아니, 정확힌 오늘 새벽에 혁준이랑 집에 같이 갔잖아. 가면서 얘기를 좀 해봤거든.”
“뭘.”
“너랑 현도현.”
“너희도 참... 할 얘기가 그렇게도 없디?”
소연이 조심스레 의자를 앞당겨 앉으며 말했다.
“도현이 좋아하지?”
“아니래도.”
“어제 저녁 내내 현도현을 보는 네 눈, 나만 이상하게 여긴 게 아니던데.”
아랑이 머핀에 꽂힌 포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소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참 지고지순한 첫사랑이다.”
아랑의 빈 찻잔을 힐끔 본 소연이 부엌에서 예쁜 유리 주전자를 들고 와 찻물을 채워주었다. 기가 죽은 듯 많이 낮아진 아랑의 목소리가 찻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끝이 나자 이어졌다.
“도현이도 알까?”
“모르는 것 같던데.”
다행이다. 아랑이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녀가 포크를 내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어째 네 사랑은 제자리냐.”
아랑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차, 맛있다.”
“말 돌리긴.”
아랑은 자신을 안쓰럽게 보는 소연의 시선을 피해 태연하게 다이어리를 펼쳤다. 새벽 늦게까지 도현의 집에서 어색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고마운 존재였다. 아랑이 느릿하게 볼펜을 매만지다가 하얀 백지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시작도 안 해보려고?”
“시작은 무슨...”
“무슨 사랑을 시작도 안 해보고 마음을 접냐. 자고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다.”
아랑이 슬쩍 소연을 보았다.
“네 말대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10년 동안 그 나무, 한 번이라도 찍어 본 적 있냐?”
“얄미워 죽겠네.”
아랑이 다시 다이어리로 시선을 내렸다.
“한번 찔러나 봐라.”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라고?”
“골키퍼도 없는데 뭐가 문제야. 골키퍼가 있어도 비집고 들어가는 마당에. 우리 남편 봐라. 버젓이 있는 골키퍼 재끼고 들어와선 내 손에 반지 끼웠잖아.”
“그래, 너 잘 났다.”
소연이 힐끔 아랑의 다이어리를 보며 말했다.
“자꾸 만나다 보면 정 들게 마련이고, 정 들다 보면 갑자기 심쿵할 때가 있고, 그러다 보면 서로 이성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거지.”
아랑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어 소연을 보았다.
“너 명동 성당 앞에 가봤어?”
“갑자기 명동 성당은 왜?”
“아님 한강이나.”
“그니까 왜.”
“하긴 꼭 그런데 아니더라도 요새 서울 길바닥 어디서나 볼 수 있지.”
“그러니까 뭘?”
아랑이 때마침 창밖으로 내려앉은 비둘기 한 쌍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소연이 고개를 돌려 창밖 비둘기를 보았다.
“비둘기.”
소연이 팔짱을 끼곤 의자 뒤로 등을 기대었다.
“저 비둘기들 우리한테 정 주디? 자주 보고, 먹을 것도 주고, 귀엽다, 예쁘다 해도 정 주디?”
“현도현이 비둘기냐? 새대가리도 아니고 눈치껏 때 되면 알겠지.”
“그러니까 문제지. 친해진 것 같아서 다가가면 쟤네 어떻게 해? 푸드득 다 날아가 버리잖아.”
아랑이 핏 웃고는 다시 다이어리를 보았다. 하늘이 장난을 치는 건지 왜 그 페이지가 보인 걸까. ‘첫사랑’ 제목만큼이나 아련한 기억이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 제게 뻗어졌던 단 한 번의 손길, 스쳤던 시선들, 다른 이들에게 보였던 그 웃음에 뛰던 심장이 여전히 느껴졌다.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허무하게 날리고 싶진 않아.”
애써 괜찮은 척 미소를 짓고 다른 일에 열중하는 아랑의 모습이 소연은 더 안쓰럽기만 했다. 어쩌면 열아홉 외면당했던 첫사랑의 아픔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걸까. 그저 시를 쓰기 위해 떠올리는 지나간 추억으로 여기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리고 소연은 어제서야 아랑이 지나갔다던 그 사랑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떻게 해.”
소연의 말에 문장을 끝맺어가던 볼펜 끝이 우뚝 멈췄다.
“좋아 미치겠는 걸, 어떻게 할 거냐고. 그거 사람 환장하는 거다. 저질러나 봐야지. 후회 없게.”
하얀 종이가 욕심을 부리며 볼펜의 먹물을 자꾸만 빨아 당기고 있었다.
“네 마음 어떤지는 모르고, 상대방 챙기다 병나. 너부터 챙겨, 너부터.”
“나... 챙기는 거야. 이게.”
“눈앞에 두고 어쩌려고.”
“지켜보려고. 지켜보면서 천천히 친구로 자리 잡으려고.”
소연이 초점을 잃은 아랑의 눈을 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눈앞에 없어도 아른거리는 놈이랑. 친구, 그거 하겠냐?”
도현은 아랑의 시집에 실릴 시 선별이 끝나자마자 곧장 그녀에게 연락했다. 메일로도 주고받을 수 있는 일들을 핑계 삼아 수다를 떨자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때마침 근처라며 출판사로 온다는 아랑에 도현은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는 팀원들을 보내고 텅 빈 회의실로 들어섰다. 오늘도 내리쬐는 강렬한 여름 볕에 에어컨 온도를 맞추고 나왔을 땐 사무실로 들어서는 누리와 마주쳤다.
“식사하러 안 가셨어요?”
“갔다가 돌아왔어요.”
도현이 무심하게 그녀를 지나쳐 휴게실로 들어가 커피를 내렸다.
“왜요? 뭐 놓고 갔어요?”
“팀장님한테 할 말 있어서요.”
“저한테요?”
도현이 의문이라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어느새 휴게실 문 앞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누리에 어떤 상황인지 가늠해 보려는데 삐- 기계음이 울리며 커피를 가져가라 알렸다. 얼음을 동동 띠우고,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랑이 올 시간이 거의 다되었다.
“아랑 작가 오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에요?”
“네.”
단호한 누리의 말에 도현이 난감한 듯 목을 매만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 책상으로 가요.”
그가 급히 아랑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혹여 누리와 이야기 중 도착할 그녀가 뻘쭘해 할까 회의실로 가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메시지를 보내고 누리를 이끈 채 제 책상으로 가기 위해 바닥의 턱을 올라섰다. 팀장이라고 그의 책상은 천장과 이어진 유리 칸막이로 문은 없지만 나름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누리가 그의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그가 간단하게 준비된 2인용 소파로 손짓했다.
“앉아요.”
도현은 그리 말하면서도 그녀가 할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부서에서 가장 젊은 그녀가 직장 상사에게 남들 몰래 상의할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퇴사. 나름 주요 직책을 맡으며 다올까지 왔지만 누군가의 퇴사에 조언이나, 의견을 내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어떤 답을 주어야 할까 난감했다. 내심 스물아홉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제게 그런 고민이 없었다는 것은 운이 좋았다고 느껴졌다.
“할 말이 뭐예요?”
이미 그녀의 답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는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태연하게 물었다. 누리가 망설이자 도현은 그녀의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조금이라도 어른스럽고, 오래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알릴 수 있을까 그 고민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도현이 잠자코 기다리다가 커피를 머금으며 그제야 누리 몫의 커피는 미처 챙기지 못함을 알았다.
“커피 한 잔 마시고 할 까요?”
누리는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그가 그저 예의상의 미소를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녀가 말했다.
“제가...”
도현이 어색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랑 작가님의 시에 공감 간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나요?”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지난번 선별 작업 때 그녀의 사랑을 맨 위로 들어 올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모르고 싶었지만 도현은 어렵지 않게 앞으로 듣게 될 그녀의 고백을 자신이 완전히 잘못 유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요새 짝사랑을 하거든요.”
불편함. 그의 얼굴에 그 감정이 숨겨지지 못했다. 같은 부서의 젊은 여직원이 잔뜩 긴장한 채 할 말이 있단다. 퇴사 이야기는 확실히 아닌데 느닷없이 짝사랑을 한단다. 도현이 손에 들린 커피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난감함에 그가 관자놀이를 지그시 매만졌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나름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욕심이 커지더라고요. 그러다가 아랑 작가님 시를 봤는데...”
누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도현은 그 떨림까지 전해지는 고요한 사무실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너무 아파서요. 제 사랑도 그렇게 아프게만 남겨 두고 싶진 않았어요. 거절당할까 무서워 입도 뻥끗 못하는 것보단 전 저를 좀 챙기고 싶어서요.”
누리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제가 팀장님 좋아해요.”
정적이 흘렀다. 피차 민망한 상황을 만들긴 싫었지만 뭐라 답을 해야 할지 찾질 못했으니 이 정적을 피할 수가 없었다. 누리는 제 입에서 망설이고, 망설이던 그 말이 터져 나오자 오히려 마음이 후련했다.
“좀 더 보태자면... 꽤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다시 이어진 정적을 깬 건 그의 핸드폰이었다. 아랑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 도현아. 어쩌지... 나 급한 일이 생겼어. 확인해달라고 한 거 내가 꼭 확인해야하는 일이면 메일로 보내줘. 너 퇴근 전까지 연락 줄게.
그녀의 메시지를 빤히 읽던 그에게 누리가 물었다.
“거절이신가요?”
그가 누리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