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우리
달 현(泫)
밤하늘에 물든 현이
보이지 않네.
아무리 샅샅이 살펴도
보이지 않네.
없을 리가 없는데도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디를 간 건지 보이지 않네.
피곤해 잠들어 깨지 못한 건지
너만 기다리는 내가 불편해
모른 채 하는 건지
자꾸만 네게 채찍질하는 세상
무서워 피한 건지
현아. 현아. 현아.
내일은 네 얼굴을 보여주련?
내일은 그 자리에 있어주련?
네가 없는 밤하늘 너무너무 어두워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하니
별들마저 삐뚤어져
밤하늘 이불 한 겹 끌어와 모습을 감추었다.
현아. 현아. 현아.
내일은 꼭 네 얼굴을 보여주렴.
내일은 꼭 그 자리에 있어주렴.
만사 제쳐놓고 널 기다리는 누군가 있단다.
그 걸로는 널 위로할 수 없는 거니
그 걸로는 네 마음 돌릴 수 없는 거니
널 기다리는 내가 문제인 거니
현아.
부디 내일은 네 자리에 있어주길.
네가 비춰주는 한 밤의 길을 걸으며
나 고개 들지 않고, 눈 뜨지 않을 테니.
내일은 네가 마음 편히 빛을 내주길.
부디 앞으로는 마음 편히 웃어주길.
***
chapter 1
도현이 퇴근을 서둘렀다. 그가 오길 재촉하는 혁준의 문자가 몇 번이나 찍혔다. 이젠 그도 모자라 혁준이 아랑과 소연과 함께 한강 둔치에 돗자리를 피고, 잔을 부딪치며 찍은 사진과 배달시킨 치킨을 들고 찍은 사진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애들도 아니고 약 올리긴. 그러면서도 그가 다급히 짐을 챙겼다. 정환이 화장실에서 나오다 일찍이 퇴근 준비를 하는 도현을 보며 물었다.
“현 팀장 퇴근해?”
“네.”
“요새 일찍 가네? 애인 생겼어?”
“불금이잖아요.”
정환이 도현의 사무실 유리벽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핑계거리가 있다 이거지? 그럼 못 이기는 척 넘어가줘야지. 현 팀장도 불금은 포기할 수 없는 걸로.”
도현이 핏 웃으며 책상 정리를 끝내고 그에게 다가갔다.
“하필 불금에 오프내고 약을 올리는 친구가 있어서요. 퇴근 시간 꽉꽉 채우려니까 은근히 열 받내요.”
두 사람이 웃으며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도현이 남아 있던 이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저 먼저 갑니다.”
그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자 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던 누리와 그가 맞닥뜨렸다. 짧은 정적을 끝으로 누리가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누리가 어색하지 않게 뒤를 돌아 그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팀장님.”
“누리 씨도 주말 잘 보내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가 어색함에 낮게 한숨을 쉬었다. 차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지하철로 출근을 했던 그는 역을 등지고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일식집을 지나쳐 다시 횡단보도 앞에 서자 자꾸만 초조해지는 마음에 시간만 살피게 되었다. 신호가 원래 이렇게 길었나. 싶었을 때 초록불이 들어오자 그가 평소보다 보폭을 넓혀 강변 진입로에 들어섰다. 때마침 혁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
- 어디? 퇴근했어?
“했다. 어지간히 문자를 보내야지. 애냐?”
- 우리 마포대교 바로 아래다. 올 때 편의점에서 맥주 좀 사와라. 모자라.
전화기 너머 소연과 아랑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 물이랑 아이스크림도 사오래. 과자도, 모기약이랑. 그리고 나 담배 하나만 사다줘라.
도현이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담배 심부름까지 시키냐? 이거 완전 양아치들이네.”
전화기 너머 당사자들도 웃긴 지 웃음을 터트렸다. 도현이 멀리 편의점을 발견하고 방향을 틀었을 때 부산스러운 전화기 너머 다시 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소연이 날 더워서 아이스크림 빨리 녹으니까 편의점 나오면 튀어 오래.
“끊어.”
- 아랑이가 물 꼭 사오래!
“알았으니까. 끊어.”
편의점에 도착한 도현이 주문받은 물건들을 빠짐없이 계산하고 마포대교 아래를 향해 걸었다. 햇볕을 피해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다른 사람들 틈에서 유난히 큰 돗자리를 가진 이들이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가 혁준에게 담배를 던져주기 무섭게 소연이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봉투를 낚아챘다. 그가 아랑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도현이 무심하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다?”
“뭐가 오랜만이야.”
일주일. 두 사람은 일주일간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땐 갑자기 왜 못 왔어? 너 오기만 기다렸는데.”
도현이 누리의 고백에 어색한 자리를 피할 유일한 해결책으로 그녀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을 떠올렸다. 소연이 그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살피더니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현도현! 빵빠레 왜 안 사왔어.”
“말을 해야지.”
소연이 하는 수 없이 봉투를 다시 뒤적이며 다른 걸 집어 들었다.
“나 빵빠레 아니면 안 먹는데... 뭔 놈의 요거트 아이스크림은 왜 이렇게 많아. 아주 종류별로 다 사왔네.”
소연이 그 중 하나를 아랑에게 건넸다. 도현이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급한 일이 뭐였는데.”
“어? 어... 엄마가 연락이 와서. 잠깐 내려갔어.”
“왜. 무슨 일 있으시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랑이 서둘러 제 뒤에 있던 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제 엄마가 싸준 도너츠였다.
“네 몫이야. 잔뜩 싸주려는 거 일 있어서 집에 못 들어간다고 하니까. 그만큼으로 줄은 거야.”
“왜?”
“응?”
그가 봉투를 받아들며 무심하게 말했다.
“주시는 대로 받아오지.”
“혼자 사는데 이런 거 쌓여봤자 안 먹잖아.”
도현이 말없이 도너츠를 꺼내 먹으며 말했다.
“맛있네.”
소연이 아이스크림 하나를 크게, 크게 베어 물어 하나를 금세 해치우곤 손을 뻗어 꽈배기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야. 오랜만에 먹으니까 진짜 맛있지 않냐? 아랑이네 도너츠 완전 대박이야. 느끼하지가 않아. 어렸을 때 먹은 그대로야. 학교 끝나고 아랑이 따라 가면 공짜로 먹었던 딱 그 맛. 전국에서 찾을만해.”
도현이 손에 묻은 설탕 가루를 털어내며 물었다.
“오늘 왔어?”
“응.”
혁준이 도현의 어깨를 살포시 짚으며 일어났다.
“담배나 한 대 피자.”
그의 말에 도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는 두 사람을 아랑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 때라.”
아랑이 황급히 눈을 때며 아이스크림 봉투를 깠다.
“노을 본 거야.”
“웃기고 있네.”
소연의 말에 그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곤 입 안을 얼리는 냉기를 꼭 머금었다. 핸드폰을 보던 소연이 대뜸 그녀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어때? 여기 괜찮지?”
아랑이 핸드폰 속 여름날 피서를 보여주는 사진을 보며 물었다.
“진짜 가게?”
“가야지. 난 한 입으로 두 말 안 한다.”
도현이 오기 전까지 세 사람은 여름이 가기 전 놀러가기 위한 휴가 이야기를 하며 잠시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여행 계획을 세우던 그 때처럼 잔뜩 들떴었다. 아랑은 비록 가지 못해도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시원한 계곡물과, 푸르른 산 속의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걸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우리 남편 아는 사람이 하는 곳인데 아까 문자 넣어봤더니 오케이래. 내일 주말이니까. 가자.”
“내일?”
“응. 왜, 일 있어?”
“아니, 일은 없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소연은 무슨 문제라는 듯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때고는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돌아오는 혁준과 도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어때? 괜찮지?”
“여기가 어디야?”
“강원도 쪽인데 차타면 다 금방이지. 어때?”
“좋은데?”
혁준이 핸드폰을 도현에게 넘기자 그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에게서 핸드폰을 돌려받은 소연이 뿌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케이. 내일 어때?”
혁준이 놀라 되물었다.
“내일?”
“일 있어?”
“아니, 일은 없는데...”
소연이 혁준에게서 도현으로 고개를 틀었다.
“넌?”
“없어.”
소연이 활짝 웃었다.
“좋아. 다 프리하네.”
혁준이 소연에게 물었다.
“우리 셋이야 프리하지. 넌 프리하냐? 유부녀가?”
소연이 자신을 보는 세 사람을 차례로 살피곤 의미심장하게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내며 웃었다.
“프리하지. 애도 없는데. 더군다나 남편 중국으로 출장 갔다. 오늘.”
“남편이 허락 하냐?”
“우리 남편 쿨하고 멋진 남자야. 유학파라 사고방식 열려 있고.”
혁준이 캔맥주를 따 마시며 말했다.
“그러니까. 유학파에 능력 있고, 쿨하고, 멋진 남자가 왜 너랑 결혼을 했을까?”
“이게!”
소연이 애써 들었던 팔을 내리며 다시 한 번 한 사람씩 확인을 받아냈다.
“내일 가서 1박 하고 일요일 날 오는 걸로. 이의 없지? 이 산장은 누나가 해결할 테니까. 현도현.”
도현이 그녀를 보았다.
“너 차 끌고 오고, 너도 끌고 와.”
지목당한 혁준이 놀란 듯 다시 되물었다.
“왜? 사람 넷밖에 안 되는데?”
소연이 그를 쏘아 보자 그가 뒷주머니에서 울리는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연의 말에 동의했다.
“차 두 개로 움직이는 게 낫겠다. 내가 가지고 갈게.”
도현이 무심하게 맥주를 비우며 말했다.
“그냥 하나로 움직여. 뭐 하러.”
“아니, 내일 운전이 하고 싶을 것 같아.”
“그럼 네 차로 가든가.”
“내 차에 갑자기 문제가 생기게 될 수 있잖아.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지.”
도현이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하세요.”
소연이 서둘러 의견을 모았다.
“그럼 내일 현도현 오피스텔 앞에서 보자.”
“콜.”
네 사람은 이후 느긋하게 휴식을 만끽했다. 먹을 거 풍부하고, 앉을 자리 넉넉하니.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굳이 음악을 틀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귀를 기울이면 이 시간 즈음에 어울릴 노래하나 찾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좀 어두컴컴해지자 소연이 먼저 일어날 채비를 했다.
“나 먼저 간다. 유부녀의 숙명이야. 일찍 오는 남편의 저녁상. 노혁준, 에스코트해라.”
같이 일어나려는 도현과 아랑에게 돌아올 것이라며 떠난 두 사람에 도현과 아랑은 단 둘이 남았다. 아랑은 제가 안쓰러워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소연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그때 도현이 핸드폰으로 혁준의 메시지를 보았다. 곧바로 그에게 전화한 도현은 이내 알았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사고 났대.”
“사고?”
“응. 이제 우리 집에 걸어가야 할 판이다.”
“어쩌다가?”
“오는 중에 신호 받아서 대기 중이었는데 뒤에서 냅다 박았나봐. 심한 건 아니고 콩 하고.”
“다치진 않았대?”
도현이 심각한 아랑의 표정에 핏 웃었다.
“콩 하고 박았대잖아. 상대 과실이고, 보험 불렀으니 알아서 하겠지. 노혁준은 내버려두고 우리 걱정이나 하자.”
“왜?”
“집에 걸어가야 할 판이잖아.”
아랑이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네 차는?”
“수리 맡겼어. 내일 찾아.”
아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그에게 말했다.
“조금만 걸어가면 지하철 역 나오거든요? 걱정 마세요. 지금 이 시간에는 막차 끊길 걱정도 없으니까.”
“알아.”
“장난치긴.”
아랑을 물끄러미 보던 도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짐 챙겨.”
“왜?”
“좀 걷자. 이 시간에 지하철은 지옥철이니까. 인천까지 내내 서서가면 힘들 거 아니야. 시간 좀 때우게.”
그가 다리를 가리켰다.
“우리 지금 마포대교 아래 있잖아. 그냥 가긴 섭섭하지.”
아랑이 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여한 돗자리를 반납하고 쓰레기도 정리하고 나니, 혁준의 가디건만이 남아 있었다. 도현이 옷을 집어 들고 그녀와 다리 위로 올라갔다. 환상적인 노을은 모습을 감췄지만 가로등 불빛으로 은은히 거리를 비추는 밤의 마포대교도 낭만적이라 할 수 있었다. 도현이 대뜸 멈춰 서서 말했다.
“이런 거에 감동을 받았다는 거지?”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아랑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야.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어때?’
그녀가 말했다.
“심금을 울렸지.”
그가 핏 웃으며 말했다.
“재밌네.”
“그지? 읽다보면 어느새 저 끝일 걸?”
이번엔 아랑이 그의 길을 막아서며 글귀를 가리곤 말했다.
“이거 완전 너야.”
그녀의 손이 거둬지자 짧은 단어가 눈에 보였다.
‘무뚝뚝.’
그가 또다시 핏 웃었다.
“내가 언제.”
아랑이 코를 찡긋 올리곤 못나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글귀를 손으로 가리켰다.
‘너 자신을 알라.’
도현의 입가에 외보조개가 띠워졌다. 그녀가 그와 마주 선 채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내가 도움을 좀 주지.”
“무슨 도움.”
“너 자신을 아는데. 그거 어려운 거다. 사양하지 않아도 돼.”
도현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그녀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점점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서울의 밤하늘이 별을 띠우기 시작할 시각이었다. 그 아래 두 사람이 마포대교를 거닐고 있었다.
“먼저, 이겁니다.”
도현이 자신과 그녀 사이에 들어온 글귀를 읽었다.
‘얼굴을 들여다 본 적 있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랑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키웠다.
“정말?”
“매일 아침 세수하면서 보는 게 내 얼굴이지 뭐야.”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다시 잘 읽어봐. ‘들여다’ 이게 중요한 거야. 들여다 본 적 있어?”
도현의 입가에 띠워졌던 외보조개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팔짱을 풀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없어.”
아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안타까운 표정을 보였다. 그는 그녀와 하는 이 유치한 장난이 꽤 흥미로운 듯 그녀를 따라 다시 한 걸음 내딛었다.
“어쩜 좋을까요, 다음.”
그가 고개를 돌려 글귀를 읽었다.
‘눈동자는 무슨 색인가요?’
그가 곧바로 답했다.
“검은색.”
“땡!”
아랑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재미는 그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천진난만한 아랑의 미소에 도현도 픽 짧게 웃었다.
“네 눈은 오동나무 기둥처럼 연하게 회색빛을 머금은 고동색이야.”
“어렵게 말하면 넘어가 줄줄 알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도 순순히 한 걸음 내딛어졌다. 그녀가 다음 글귀로 눈짓을 하자 그가 시선을 옮겼다. 그가 귓불의 생김새를 묻는 질문에 제 귓불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 엄지 반절만 해.”
아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반칙이야.”
“엄격하네.”
“다음.”
그가 다음 질문이 입술의 생김새를 묻자 저절로 입가에 손끝을 가져갔다가 서둘러 내리곤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게 뭐라고 눈치를 보는지.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치자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렵네.”
“당연하지. 그만큼 자기 자신한테 소홀했다는 거지.”
“인정. 다음.”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먼저 글귀를 확인한 도현이 눈썹을 올리며 아주 흥미로운 듯 그녀를 보았다.
“말해보시죠. 작가님.”
아랑이 미처 예상을 못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겼나요?’
아랑에게 돌아간 질문에 도현이 여전히 흥미롭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랑이 말했다.
“음... 내 눈은 좀 밝은 편이라고 하더라. 약간 갈색? 그리고...”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올라와 긴 머리를 매만졌다. 도현의 눈치를 보던 그녀가 슬쩍 머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도현이 말했다.
“반칙.”
아랑이 인정하는 듯이 웃으며 손을 내렸다.
“손이 가게 되네. 그래도 나는 하나는 맞췄다.”
“맞추긴.”
“눈, 맞췄잖아.”
도현이 가만히 거리를 좁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 눈은... 꿀 색이야. 병에든 짙은 꿀 말고 한 숟가락을 펐을 때 보이는 맑은 꿀 색.”
그의 손이 불쑥 그녀의 머리 안으로 들어와 귓불을 살폈다.
“귓불은 엄청 작네, 얇고. 입술은... 입술도 작아. 자세히 보니까. 윗입술, 아랫입술 두께가 비슷하다?”
저도 모르게 좁힌 그녀와의 거리. 그가 느릿하게 시선을 맞췄다. 마주친 시선에 두 사람 모두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랑이 괜한 기대가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 기대감에 괜한 참견이라는 걸 알면서도 묻고 싶었다. ‘누리 씨랑 어떻게 됐어?’ 그 말을 섣불리 뱉어버리면 찾아올 어색함을 알기에 그녀는 입을 더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도현이 그 짧은 정적을 누리와 있을 때와 비슷한 어색함이라 단정 짓곤 서둘러 살짝 굽혔던 허리를 폈다.
“추워?”
“어?”
그가 들고 있던 혁준의 가디건을 건넸다.
“볼이 차다. 입어. 내 건 아니지만.”
어색했던 정적을 그가 슬며시 몰아내고 있었다. 아랑은 그저 그를 따라 고맙다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