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외로 나가는 버스에서 하나와 나란히 앉아 서로가 준비해온 음식을 들쳐봤다. 치킨까스를 발견한 하나의 입술 위로 미소가 걸린다.
“치킨까스네.”
“완전 좋아 죽는구나. 그래, 치킨까스다. 특별히 널 위해 준비했지. 나 말고 이렇게 챙겨줄 사람이 누가 있기나 해.”
“왜 이러셔. 나도 나름 정성을 다했다고. 이 유부초밥 직접 만들었다니까.”
‘직접 만들었다’는 하나의 말에 괜히 가슴 한 편이 뜨끔하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아 김이 올라오는 노란 유부초밥이 용기 안에 가지런히 놓였다.
“네가 초밥왕이잖아. 심사숙고해서 유부초밥으로 정했다고.”
“맛있겠다. 제대로 만들었네. 만든다고 고생했겠다.”
내가 저자세로 나오자 하나도 말이 부드러워진다.
“아니, 그렇게 감동할 건 아니고. 다 널 생각하는 마음이야.”
하나는 열었던 뚜껑을 덮더니 내가 준비한 치킨까스에 코를 가까이 댄다.
“냄새 정말 좋다. 왜, 있잖아, 학교 다닐 때 점심시간 전에 미리 도시락 까먹곤 했었잖아. 우리 나이에 그러면 안 되겠지?”
내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둘러앉아 먹을 텐데 우리만 가져온 음식이 동나 봐. 지선이 보기 부끄러워서라도 안 돼.”
“그럼 치킨까스 한 조각만 안 될까?”
슬쩍 뻗어오는 하나의 손등을 짝, 소리가 나도록 매섭게 때렸다.
“아얏!”
하나가 빠르게 손을 움츠린다.
“아직 사진 찍는 거 시작도 안 했어. 우린 시식 동호회가 아니라고.”
“으휴, 이은정. 누가 손 쓰는 일 하는 사람 아니라고 할까 봐 손맛이 되게 맵네.”
“꿈도 꾸지 마셔.”
슬쩍 뒤를 돌아봤다. 가장 뒷좌석 끄트머리에 앉은 남자. 흰색과 검은색이 제대로 대비된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맞춰 입었다. 그 복장에 어울리도록 일부러 고른 건지 머리에 눌러 쓴 것도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흰색의 모자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흰색만 들어간 것도 검은색으로만 채워진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흰색과 검은색이 함께 어울리면 그에 푹 빠져버린다. 들고 다니는 휴대폰도 흰색으로 고른 후 검은색 케이스를 덧씌웠다. 그 전에는 반대로 검은색 휴대폰에 흰색 케이스였다. 사진을 찍을 때도 항상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를 고집해 컬러로 찍지 않고 흑백사진만 찍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무채색녀라고 부른다. 짙은 파스텔톤 칼라만을 고집하는 하나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 어울려 다니는 걸 주변 사람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신기해할 따름이다. 그 다음으로 그의 어깨선과 등 근육이 보였다.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지면서부터 사물을 보는 관점에 변화가 왔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보는 습관이 생겼다. 내 자신이 근육질 이성에 끌린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하얀 셔츠 위로 드러나는 이 남자의 넓은 어깨가 제대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곧게 양 옆으로 뻗은 선을 타고 내려와 등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을 보고 있자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남자가 고개를 든다.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옆에서 하나가 그런 내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뭐해? 누구 찾는 사람 있어?”
정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굴 찾기는. 여기가 어디쯤인가 하고 봤어.”
“높이 올라있는 산이 보이는 걸 보니까 거의 다 왔을 거야. 이렇게 바깥 공기 마시러 나오니까 좋긴 좋다. 그지?”
“어, 응. 살면서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창밖을 둘러본다. 그런 내 행동에 겸연쩍은 시선을 보내던 하나는 고개를 돌려 가방을 뒤지더니 디지털 카메라를 꺼낸다. 조리개를 열고 카메라 렌즈를 점검하며 부드러운 렌즈용 천을 꺼내 조심스레 닦는다.
“있잖아. 예전에는 그저 사진 찍는다는 자체가 좋았거든. 사진 찍는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도 좋았고. 그랬던 게 이제는 내가 남기는 사진 자체에 관심과 애정이 가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카메라도 더 좋은 걸 사게 되고 찍는 법도 연구하고. 변해가는 내 모습이 참 신기할 때가 있어.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든다니까.”
하나가 입술을 오므려 애틋한, 웃음을 짓는다.
“그런 게 사진의 매력이 아닌가 싶어.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을 보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힘을 가졌다는 거. 단순히 피사체를 인쇄지에 찍어 기록을 남긴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과정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갈 수 있게 하는 가능성. 그 매력은 알면 알수록 헤어나지 못하게 돼.”
“나도 요즘에는 이 동호회를 발견했다는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게다가 나랑 함께 다니잖아. 완전 대박 난 거지.”
“그 대박은 네가 난 거지.”
서로 상대방이 대박 났다며 우기는 동안 버스가 종착역에 도착한다. 하나가 일어서는 사람들에 맞춰 나가려다 나가는 줄에 제대로 끼어들지를 못한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힐 뻔하며 어색하게 사과하고 머뭇거리다 거의 줄 마지막쯤 끼어든다. 그런 하나를 보며 차라리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에 일어설까 생각하며 그대로 앉아있는데 하나가 얼른 나가자며 잡아끈다. 얼떨결에 줄 가운데 들어섰다. 하나가 바로 앞에 있고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과 살짝 부딪혔다 떨어진다. 사과를 하려고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하얀색 셔츠가 보인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눈을 살짝 치켜뜨자 흰 모자 챙 아래로 코 윗부분까지 볼 수 있었다.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눈이 마주쳤다면 가슴이 뜨끔했을지 모르니까. 파르스름한 면도 자국이 볼 가운데까지 올라있다. 아침에 면도를 해도 벌써 저렇게 자라나? 뜬금없이 든 생각을 지우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살짝 목례를 한 것 같다. 아님 모자에 가려 내가 사과하는 행동을 보지 못했을지도.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자 그 뒤를 따라 바짝 붙었다. 뒷사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어 다행이었다. 솔직히 돌아보고 싶었다. 날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닐까 뒤꽁무니가 무지 근질거렸다. 하지만 돌아보면 눈이 마주칠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고. 버스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자 모임 회원들이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게 보였다. 슬쩍, 주변 풍경을 구경하듯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뒤를 확인하니 그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함께 온 동행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인다.
‘바보 같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긴장은 왜 하고?’
방금 내가 한 생각 때문에 무안한 기분이 들어 얼른 그것을 떨쳐버리려 하나의 팔짱을 꼈다.
“우리말고도 관광객이 꽤 되는 것 같아.”
“나름 풍경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래. 그래서 오늘 모임도 여기로 정한 거고. 해질 무렵 펼쳐지는 노을빛이 끝내준다더라. 늦게까지 남아있기로 한 것도 그 해지는 모습을 담기 위한 거라니까 제대로 된 작품 한 번 찍어보자고.”
“석양이라, 좋지. 솔직히 그건 아무리 못 찍어도 폼이 나더라. 얼마나 보기 좋을지 벌써 기대되네.”
하나랑 대화를 나누면서 눈이 자연스레 뒤를 향한다. 뒤따라오는 그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전신을 훑는다.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는 언제나 보기 좋아, 라고 떠올리다 왜 자꾸 이래, 속으로 나무라며 얼른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자꾸 주의가 산만해지는 스스로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진인데, 아픈 어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나왔는데 왜 여길 왔는지 그 목적을 잊고 있다. 열심히 말을 건네는 하나한테도 미안하다.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도 머리 한 부분이 통제 불능이다. 눈길이 아차, 하는 사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만약 내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걸 대강 흘려버린다면 기분이 나쁠 거다. 그걸 인지하고 있지만 마음과 머리가 계속 따로 논다.
“너 오늘 어째 이상하다. 벽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컨디션이 안 좋아? 어깨가 많이 아픈 거야?”
다행이다.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응. 어제 제대로 걸렸다니까. 살집이 꽤 있는 손님이었는데 평소에 하는 정도의 두 배가 넘게 힘을 줘야했으니 말 다 했지. 그 손님 끝내고 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어쩌냐. 그럼 그것도 직업병이네. 하여튼 돈 벌어먹고 살기 힘들어요. 지난 번 비행 때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스튜어디스인 하나는 비행기 타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을 직업으로 정했을 때 가졌던 꿈은 어느새 무색해졌고, 먹고 살기 위해 좁은 공간을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니는 일이 이제 신물이 날 정도란다. 그 하소연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비행기 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웬만큼은 안다. 하나에게 미안해서 일부러 과장되게 반응해줬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진상 고객? 아님 재수 없는 기장이랑 붙었어?”
“아니, 이번엔 어이없는 신규 직원. 요즘 것들은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니? 선배 대할 줄은 모르고 무조건 편한 일만 찾는다니까. 그러니까 말야.”
하나에게 미안하게 또 그만 그를 찾고 만다. 어떻게든 집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자세를 꼿꼿이 해 시선을 맞추다가도 눈이 가끔씩 뒤로 돌아간다. 다행히 하나는 알아채지 못하고 언덕을 올라가는 내내 말을 멈추지 않는다. 정상 근처에서 모임 회장이 따로 갈래가 나뉜 길로 일행을 이끈다.
“평소대로 사람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갑니다. 특히 여기는 관광객이 많이 붐빕니다. 사진 찍는 데 집중하려면 최대한 멀리 가세요. 산 정상보다 시야가 낮아지긴 하겠지만 넓게 앞이 펼쳐져 피사체를 건지는데 별 어려움은 없으리라 봅니다.”
이제 그는 지나갔겠지, 하고 뒤를 돌아보다 그만 딱, 눈이 마주쳤다. 아직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하나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불쑥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사진 모임 회원이었어?”
“뭐? 그 신입이 왜 사진 모임에 나와? 여기 들어온다면 내가 도시락 싸가면서 말린다.”
“어? 그, 그래. 아니, 우리 모임 회원 아니지?”
“뭐야? 너 딴소리 한 거야? 누구 얘기 한 거였어?”
“딴소리라니? 아니, 혹시 그 신입이 여기에 있나 해서.”
“그럼 내가 나간다. 정말 재수 없는 애라니까.”
그동안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모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는 사람도 여럿이지만, 가입했다 금방 탈퇴하는 사람도 많아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인사할 일 없이 스쳐가는 회원이 부지기수다. 그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몸에 걸친 옷 때문인가? 그가 사진 모임의 회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괜스레 가슴이 콩콩, 거리는 걸 느낀다. 이런 자신이 우습지만 통제가 되질 않는다. 아, 오늘 사진을 망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하나가 몰라야 할 텐데. 들키면 얼마나 놀릴까? 어쩌면 말 걸어보라고 설레발을 칠지 모른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분명 오늘 처음 봤다. 오늘 하루만 무사히 지나가자. 그럼 그런 기분이 가라앉고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반복해서 먹다 보면 질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