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려 목욕 타월을 흔들다 문득 손길을 멈췄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머리 한 곳에서는 어서 사진을 확인해보자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와 같이 있을 때는 확인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돌아오는 내내 주저리 떠들어대는 하나를 보면서 괜히 부끄러운 일을 한 듯 가슴이 조마했다. 속에서 뛰는 심장소리를 하나가 다 듣고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샤워부터 하고 보자고 카메라를 한쪽에 밀어뒀지만 몸에 비누칠을 하면서도 궁금함이 가지실 않는다. 가슴 한쪽이 근질거려 손동작이 급해졌다. 머리를 제대로 말렸는지도 모른 채 카메라의 온 스위치를 켜고 메뉴 버튼을 눌렀다. 가장 마지막에 찍었던 사진이라 금방 찾았다. 약간 비스듬히 기울었지만 목 뒤에서 시작해 어깨를 지나 등에서 끝나는 모습이 보기 좋게 찍혔다. 마음에 들었다. 인쇄해서 포스터처럼 벽에 붙여둬도 좋겠다 싶었다. 정말 그럴 리는 없지만.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얼굴이나 잘 빠진 다리 같이 앞모습이 마음에 든 적은 종종 있었지만 뒷모습에 이렇게 빠져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그 사람은 흰색과 검은색을 골랐을까? 내 자신이 무채색을 많이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두 색의 대비에 마음이 이렇게 흔들릴 거라 예상해본 적 없다. 흰색과 검은색을 바탕으로 두고 절묘하게 어우러진 어깨와 등의 곡선. 건드려보고 싶었다. 무심코 카메라 화면에 손가락을 대보다 흠칫, 동작을 멈췄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처음 본 사람의 뒷모습을 가지고 이해할 수 없게 마구 감정이 흔들리다니. 살아오면서 뜨거운 사랑 같은 건 해본 적 없었다. 학교 다닐 땐 무미건조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고 지냈다. 남들은 다 거쳐 간다는 사춘기를 특별한 문제없이 지나쳤다. 아버지나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었다고 하소연하는 학급 친구들을 여러 명 봤지만 난 오히려 엄마 얼굴 보기 힘들었다. 아빠 돌아가시고 혼자 힘으로 오빠와 나를 키운 엄마. 늘 바빴고 집에 없었다. 네 살 터울의 오빠는 여동생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올케 언니를 만나기 전까지 여동생과 엄마를 포함해서 여자와 같이 뭔가를 하기 위해 시간을 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어릴 적 내게는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하나가 더욱 소중했다. 가족 수가 많은 집안에서 자란 하나는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살갑고 정이 넘쳤다. 나와 달리 매사에 표현을 잘 하고 감정이 직설적이다. 뒤끝이 없고 세상을 대할 때 옳고 그름이 확실했다. 나를 참 잘 챙겨줬고 친자매 같을 때가 종종 있었다. 어쩔 땐 가족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하나를 평생지기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결국 피를 나누지 않은 남이고 언젠가 각자 가정을 꾸리게 돼서 소원해지더라도, 현재는 소중한 리스트 최우선이자 세상에서 가장 위안이 되는 존재다. 그런 하나에게도 오늘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을 꺼낼 자신이 없다. 처음 본 사람의 상반신 뒷모습 사진이라니. 그걸 왜 찍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이러다 말겠지 싶다. 어떤 면에선 오히려 신기하기도 하다. 내 안에 이런 감정이 숨어있다는 걸 새삼 발견하게 돼서.
사진 동호회 모임을 다녀온 다음날 아침이면 일찍 잠이 깬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와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활력을 찾는다. 저릿하게 쑤시던 어깨도 아직 통증이 느껴지긴 하지만 조금 나아진 듯하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 여유를 가지고 준비할 수 있어 참 좋은데 보통 땐 알람을 맞춰놔도 매번 늦는다. 계획한 시간에 쉽게 일어나지질 않는다. 항상 오 분만, 십 분만 그러다 늦어버린다. 나름 상쾌한 기분으로 영업점에 들어섰는데 신입인 소라가 손님 대기용 의자에 앉아 울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옆에 매니저 언니가 팔짱을 낀 채 서 있다.
“아니, 언니 무슨 일이에요? 소라야, 왜 울어?”
그렇게 묻는 나를 보고 소라가 더 서럽게 운다.
“그렇게 펑펑 울 일은 아니잖아. 더 주의하라고 충고하는 거야.”
매니저 언니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성가시다는 표정이다.
“은정아, 소라 좀 달래 봐. 널 보니 어째 더 우냐? 누가 보면 내가 심하게 나무란 줄 알겠다.”
“소라야,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소라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끅, 끅, 소리를 뱉으면서 숨을 바쁘게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한다. 말을 들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듯하다. 매니저 언니가 기다리다 못해 대신 설명을 해준다.
“너도 알잖아. 고명자 고객. 한 성격 하잖아.”
“아, 그 사모님요?”
소라가 연신 훌쩍거리면서 그 사이에 끼어든다.
“사모는 무슨. 흑, 흑. 완전 예의도 없고, 끅, 사람 함부로 무시하고, 흐윽, 흑.”
“넌 울음이나 그쳐, 이것아. 어제 얘한테 서비스 받았잖아. 그러고 나서 나한테 한 마디 하더라고.”
“소라가 실수라도 했대요?”
“딱히 잘못한 건 없어. 손을 잘못 놀렸거나 실언을 한 것도 아니고. 근데 소라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톤이 사람 불쾌하게 한다나.”
“흐윽, 내가 말실수를 했다면 억울하지도 않아. 끅, 꺽, 이제 하다하다, 말하는 톤을 가지고, 흐읍, 트집을 잡냐고.”
“내가 너한테 뭐라는 게 아니잖아. 공손하게 손님 대하라고 주의를 주는 건데 얘가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뜨리네. 말 꺼낸 사람 무안하게.”
소라를 달래주고 싶긴 한데 어떤 말을 꺼내질 망설여진다. 이럴 때 자칫하면 위로의 말이 오히려 기분을 더 상하게 한다. 고객을 다루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손님이 흔하고 속히 말하는 진상 고객은 어떻게 다뤄야 할지 그저 난감하다. 그렇다고 그걸 매번 감정적으로 대하면 이 직업을 오래 견뎌낼 수가 없다.
“매니저 언니. 제가 잠시 옆에 있을게요. 언니는 들어가서 일 보세요.”
매니저 언니가 설레 고개를 젓더니 나한테 눈짓을 보내고 안으로 들어간다. 울고 있는 소라 옆에 앉았지만 잠시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 얘기나 꺼내는 것보다 조용히 같이 있어주는 게 나을 듯했다.
막 일을 시작했던 초창기 시절이 떠오른다. 여러 번 울었었다. 일하러 오는 게 꼭 도살장에 끌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하면서 이 악물고 버티니까 이제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굳은살이 박였다. 그런 기억이 있기에 울고 있는 소라가 더욱 안쓰러웠다. 너도 얼마나 더 흔들리고 다치고 깨져야 단단해지겠니?
시간이 지나면서 소라의 우는 소리가 잦아든다. 손에 든 손수건이 완전히 젖었다. 건너편에 있던 화장지 상자를 집어 통째로 건넸더니 몇 장 뽑아들어 코를 푼다. 눈가랑 코 주위가 빨갛다. 휴, 휴, 반복해서 숨을 뱉더니 아직 젖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억울해서 그래요. 실수를 했거나 못할 말을 했다면 저도 머리 굽히고 사과할 용의가 있다고요. 그렇지만 제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잖아요. 살면서 말투 갖고 누구한테 얘기 들은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런 걸로 불평하니까 기가 차요. 그건∙∙∙∙∙∙, 아니잖아요. 차라리 입 다물고 아무 말 않고 마사지만 할까요?”
바로 대답을 않고 손을 내려다봤다. 소라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딱히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몰랐다.
“소라야. 언니가 이 일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그런 고객이 있었다. 신규를 되게 싫어하는 거야. 물론 신규니까 일이 서툴고 어눌하겠지. 그렇지만 그 고객은 그런 걸 용납하질 않았어. 내가 손님을 고를 위치도 아니고 그 고객한테 걸리면 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거야. 아마 내가 걸릴 거란 걸 미리 알았으면 아프다고 하고 일부러 나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런데 있잖아.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고객도 나름 익숙해진다. 그렇게 되니까 이제는 누가 걸려도 자신이 생기는 거야. 내가 그런 손님도 상대했는데 이쯤이야 하면서 말야.”
머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끄집어냈는데 하고 나서도 잘한 건가 의심이 든다. 소라는 손에 든 휴지로 코 주위를 문질러댄다. 흘러내린 콧물을 닦아내고 가슴 가장 아래 남아있던 깊은 숨을 모두 뱉어내더니 무릎에 힘을 줘 끙, 하고 일어선다.
“세수라도 할게요. 아직 개장도 안 했는데 완전 몰골 엉망이네요.”
“어, 그래. 개장 준비는 내가 할게. 필요한 만큼 시간 보내다가 나와.”
문을 열고 들어가던 소라가 나를 부른다.
“은정 언니. 언니가 싫어했던 손님 아직 여기 다녀요?”
데스크에 놓인 컴퓨터를 켜며 대답했다.
“아니, 그 손님 여기서 일하기 전에 다니던 곳 손님이야.”
“다시 볼 일 없어 속 시원했겠네요?”
“웬걸. 길에서 지나다가 마주쳤잖아.”
“우와, 어떻게 됐어요? 속 시원하게 한 대 때려주고 도망치지 그랬어요? 히히.”
소라가 웃자 나도 같이 웃었다.
“날 알아보지도 못하더라. 우리는 고운 정 미운 정 들인 손님이라 누가 누군지 쉽게 기억을 하는데 손님한테는 그저 그런 똑같은 유니폼 입은 직원 중 한 명이었나 봐.”
“그럼 그 마귀할멈도 날 제대로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네요.”
“널 꼭 집은 게 아니라 그 날 운 나쁘게 걸렸던 직원 아무개에게 화풀이를 했던 거겠지. 그게 너였던 거고.”
소라가 입을 샐쭉 오므렸다 내민다. 문을 닫으며 살며시 건넨다.
“언니, 고마워요.”
“뭐가? 내가 해준 게 있어야지.”
아침에 한바탕 있었던 소란이 지나가자 그 날 하루는 평탄하게 지나간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예약 손님이 많지 않았고 소란을 피울 만한 고객도 없었다. 거의 문을 닫을 때쯤 하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많이 바쁘셨나?”
“아니 나쁘지 않았어. 손님이 밀리지도 않았고. 어디야?”
“오늘 비행은 안 했지. 회사가 정해준 곳에 가서 일일 친절교육 받고 왔어.”
“너네도 친절 갖고 뭐라 그러냐?”
“친절이 왜?”
허탈한 웃음이 입 안에서 새어나왔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럼 하루 편히 보냈겠네.”
“편하긴. 의자에 앉아서 계속 듣고 있으려니 나중엔 그것도 힘들더라.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도 일하는 것보다 낫겠지. 불평하지 말고 감사히 생각하라고.”
“사진 모임 이번 주말에 바다로 간다네.”
“여름이고 해서 한 번쯤은 물 있는 곳으로 갈 것 같더라니. 동해야 서해야?”
“대천.”
“괜찮네. 대천 해수욕장 유명하더라.”
“해수욕장 쪽으로 갈진 모르겠어. 맨날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면서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은 피하잖아. 그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사람들 많아 시달리는 것보단 낫겠지 뭐. 그럼 수영복 가져가, 아님 말어?”
피식, 전화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에 해수욕 하러 가자 해도 싫어하는 애가 사진 모임에 수영복 가져오려고?”
“그냥 해보는 소리야.”
“상현 씨도 올까? 경찰은 바쁘니까 자주 못 나오겠지?”
말이 막혔다. 상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떠오르는 건 그 사람 얼굴이다.
“생각해보니 수영복 가져가야겠다. 사진 모임에 무슨 수영복이냐 싶었는데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 같기도 해.”
“∙∙∙∙∙∙.”
“은정 씨, 듣고 있나?”
“으, 음. 얘는 무슨 수영복이냐. 해수욕장 갈 것 같지도 않다며. 그냥 짧은 반바지나 입고 와. 물 나오면 발이나 담그게.”
“어허, 수영복 얘기 꺼낸 당사자가 누군데. 너도 잊지 말고 가져와. 나만 가져와서 괜히 사람 민망하게 하지 말고.”
“사진 찍으러 가는데 수영복이 왜 필요한데.”
하나는 내가 하는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수영복 안 가져오면 절교할 거라며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불쑥 그 사람이 다시 떠오른다. 그 사람 앞에서 수영복 입은 모습이 겹쳐진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껴 고개를 드니 매니저 언니가 앞에 있다.
“누구 전환데 얼굴이 붉어져?”
“네? 아니에요. 얼굴이 붉어지긴요. 그냥 친구한테서 온 전화에요.”
“너 요즘 연애 하니?”
매니저 언니의 눈이 게슴츠레해진다.
“어휴, 연애는 저 혼자 하나요? 좋다는 사람도 없는데.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문 닫을 준비 할게요 .”
매니저 언니가 말을 더 꺼내려는데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피했다. 폐장하기 위해 정리하는 척하며 쓸데없이 타월을 양껏 들고 복도로 나왔다.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방이 비어있으면 사람이 없다는 표시가 나도록 일부러 문을 열어둔다. 문을 닫은 후 방에 마련된 간이침대 위에 들고 온 타월을 내려놓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이번 주말에 그가 올까? 수영복을 가져가? 옆에 놓아둔 타월을 한 장 집어 그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 앞에서 수영복 입은 내 모습은 왜 상상하는데. 이건 병이야, 병. 타월에서 얼굴을 떼니 희멀건 벽이 바로 보인다. 주말을 기다리면서 보내는 일주일은 길게 느껴질까?
예상과 달리 그렇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며 도시락 쌀 준비도 하지 않았고 수영복을 가져가야 할지 말지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모임 날짜가 다음 날로 다가왔다. 그저 생각 없이 계속 미뤄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가 찼다. 무슨 일주일이 이렇게 빨리 가? 시간이 평소보다 더 빨리 흘렀다. 모임 사람들한테 약속한 대로 3단 찬합을 싸려면 이것저것 사야 할 것도 많은데 가슴이 답답했다. 다음에 싸오겠다고 미루면 민우가 난리 칠 텐데.
모임 사람들과 툭탁거리는 모습을 혹시나 그 사람이 본다고 생각하니 오늘 일 끝나고 당장 마트로 향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다른 직원들한테 미안하게 손에 일이 안 잡혀 영업점 폐장하는 걸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고 나왔다. 괜히 마음이 급했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게 이제야 후회가 된다. 수영복을 새로 하나 사? 수영복 생각을 하니 얼굴이 뜨거워진다. 해수욕장에 가도 해변 가에만 머무르지 수영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자꾸 수영복에 집착하는 내 모습이라니. 그래도 하나가 뭐라 할 테니까 장만해야겠지. 수영복 코너로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줄곧 식품 코너에만 머물렀다. 더 이상 살 게 없을 때까지 미적거리다 결국 수영복 코너로 왔다.
하나 핑계를 댈 필요는 없잖아. 수영복이 필요한 것일 뿐. 지금 가지고 있는 수영복을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네. 오래 되기도 했고 지금 사놓고 두고두고 입으면 되잖아. 그건 그렇고 비키니는 나한테 안 어울리겠지? 그냥 원피스로 할까? 절대 그 사람과는 상관없다고 다짐했다. 단지 새 수영복이 필요한 것일 뿐. 가져갔다가 안 입으면 그 뿐이었다. 사자, 사.
계산원이 수영복 바코드를 찍는 동안 시선을 피했다. 무슨 죄 짓는 것도 아닌데 가슴 한 구석이 영 편치 않았다. 이래서는 모임에 나가서도 편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가지 말아버릴까 하고 살짝 자문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일주일을 기다리면서 보내는 내 유일한 낙인데 그걸 포기할 순 없지. 그 사람 나란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를 텐데 내가 왜 이러나 몰라.
집에 와서 자려고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멀뚱하게 눈을 뜨고 한참을 천장만 바라봤다. 투시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닌데 옷장 안에 걸어둔 수영복이 어떻게 걸려있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모로 누웠다 다시 옆으로 돌아눕는다. 시간이 몇 시인지 알면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을까 일부러 시계가 있는 곳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빨리 잠이 들면 좋겠는데 그럴수록 머릿속이 더욱 또렷해진다.
대천은 두어 번 가봤을 것이다. 나름 그곳을 좋아해서 정기적으로 찾는 사람을 여럿 봤다. 내게는 여느 해수욕장과 마찬가지다. 특별한 기억은 없다. 여름이면 항상 붐비는 장소고 바캉스 가기 좋다는 정도. 물 근처로 가기나 하려나. 그러고 보니 바다 사진을 찍은 기억은 별로 없었다. 풍경 좋다고 하는 산은 자주 다니면서 여기저기 들렀는데 왜 바다에는 가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다양한 모습을 속살 안쪽에 간직한 숲과 비교해서 물이 주는 느낌은 단조롭고 어디를 가든 큰 차이가 없어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실상 그 농밀한 매력을 알게 되면 바다에 더 끌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지만 아직 그런 기회를 잡지 못했다. 어쩌면 그 사람과 엮여 바다에 대한 색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려나? 역시나 이상한 상상. 끝이 없네.
아예 눈을 가리려고 팔을 들어 덮었다. 눈을 뜨지 말자. 속으로 양이나 세자. 하나, 둘, 셋. 어, 저 양은 왜 색깔이 다르지? 검은색 바탕에 흰색 얼룩이네. 그 사람이 입었던 복장과 비슷한 대비. 에이, 또 그 생각. 자꾸 뒤척인다. 바다에 가면 뭘 보게 될까? 물론 물을 보겠고 백사장이 있겠지. 감은 눈 안쪽이 뿌옇게 번진다. 슬슬 잠이 오는 걸까? 그리고 뭘 보려나. 음, 비치 파라솔이랑∙∙∙∙∙∙.
흐음. 갑자기 눈을 떴다. 베개 아래로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언제 이렇게 환해졌지? 자연스런 동작으로 시계를 봤다. 으악, 거짓말? 항상 이렇다.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아 설치게 되면 꼭 다음날 아침에 늦게 일어나게 된다. 퍼뜩, 알람을 맞춰놓지 않고 잤다는 게 떠올랐다. 내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그 사람, 제대로 시간도 못 맞추는 나를 보고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아악, 또 그 사람 생각이야. 지금 엉뚱하게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나가기 급급했다. 머리는 감고 나서 말릴 생각도 못했다. 화장은 베이스만 바르고 나머지는 가는 동안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나마 3단 찬합 도시락을 엊저녁 미리 준비해놓은 게 위안이었다. 그마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면 아예 아프다고 하고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나에게서 곧 전화가 올 텐데,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어디야?”
“어, 어, 나가는 중.”
“나가다니. 설마 집에서 나오는 중은 아니겠지? 지금 여기 다 모였어. 지선이는 오늘 아빠랑 시간 보내느라 못 오나 봐. 미란이 언니 화장 완전 예쁘게 하고 왔다. 딸이 없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바뀌지? 크크. 얼른 와.”
차마 집에서 나오는 중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지? 늦잠 잤다고 하면 난리가 날 거고. 에라, 모르겠다. 배낭을 등에다 바짝 붙이고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하나야. 저기 앞에 무슨 사고가 났나 봐. 버스가 꼼짝도 안 해. 차들이 안 움직여. 하필, 오늘 이런다니.”
“그래? 곧 시외버스 들어오는데 어쩌지? 그럼 다들 보내고 나 혼자 기다릴게. 너 기다리다가 전부 같이 늦어버리면 너무 미안하잖아.”
“맞아. 먼저 가시라고 해. 아니, 하나야. 너도 같이 가. 대천까지 가는 건 별 문제 없을 거야. 가서 연락할게. 대천 가서 만나면 되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진짜 그래도 돼? 혼자 오면 외롭고 심심할 텐데.”
“외롭기는 내가 무슨 애냐? 버스 혼자 타는 게 대단한 일이라고. 걱정 말고 가셔. 대천에서 보자고.”
거짓말이 너무 술술 나와서 가슴 한쪽이 은근 뜨끔하다. 늦잠 잤다고 하면 각종 잔소리와 함께 어젯밤에 뭐 했냐고 닦달을 할 거다. 그렇다고 밤새 말도 안 되는 생각하다 잠을 설쳤다고 솔직하게 말하진 못할 거고 그러다 눈치 빠른 하나가 뭔가 있다는 걸 알아챌지도 모른다. 그 이후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차라리 지금 둘러대고 말지.
미리 일행을 보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면 미안한 마음에 가는 내내 안절부절 못했을 것이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대합실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못했던 화장도 마저 하고 사진기도 점검했다. 혹시 두고 온 물건은 없나 확인한 후 가져온 도시락을 한 번 더 단단히 동여맸다. 만약 내용물이 엎어지기라도 한다면 노력해서 만든 정성이 말짱 도루묵이 될 거다. 그런 불상사는 미리 막아야 하니까. 도시락을 챙기고 배낭을 그 옆에 잘 기대놓고 이제 휴대폰이나 확인할까 들여다보려고 할 때였다. 눈에 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상현 씨네. 그럼 그 사람도?’
상현 씨 바로 뒤에 따라왔다. 뭔가 미안한 얼굴이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나누는 대화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일부러 다리를 앞으로 빼서 상체를 아래로 뉘었다. 최대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오늘 대천 가려고 일부러 근무 시간도 바꿨는데 괜히 나 때문에 늦었네. 갑자기 보고일지 제출하라고 할 줄 누가 알았겠냐. 급한 건도 아니었는데.”
“어디 그런 일이 하루 이틀이어야지. 됐어, 그만 미안해도 돼. 아침 먹기 전이니까 요기 거리나 사.”
“아무거나 골라. 내가 내니까.”
“아, 그래? 매점 확 통째로 털어버린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그 사람의 입모양을 봤다.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웃는구나. 상현 씨랑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인 것 같은데 웃는 모습이 경찰이라고 하긴 너무 순박하다. 동네 근처 철물점 주인이라고 하면 어울리겠다. 웬 철물점 주인? 그럼 난 철물점 주인 같은 남자한테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예인 같은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근처까지 왔다. 들키지 않으려고 거의 눕듯이 상체를 뒤로 젖혔다. 옆에 있던 요구르트를 손에 든 여자애가 이상하다는 듯이 내려다본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지만 그걸 이리 오라는 신호로 잘못 봤는지 천천히 다가온다. 아니 왜 이리로 와. 그게 아니고 저리 가라고.
바로 곁으로 와서 눈을 아래로 부라린다. 부리부리한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의자 위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며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게중심이 아래로 향해서 양쪽 팔걸이를 제대로 지지해서 힘을 쓰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분명 근처까지 온 두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여자애는 자칫하면 닿을 만큼 가까이 왔다. 이게 뭐람. 왜 이러고 있냐고. 너는 또 뭐고.
두 사람이 나누는 말소리가 조금씩 멀어진다. 다행이다. 어딘가로 가는구나. 어, 어. 마음을 놓았던 탓인지 몸에서 힘을 빼니까 허리 근처에서부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아, 조금만 견뎌. 조금만. 어떻게든 지탱해보려던 의지와 달리 속수무책으로 아래로 떨어진다. 앞으로 쭉 뻗었던 다리가 구부러지면서 엉덩이가 먼저 바닥에 닿고 뒤이어 상체가 바닥 위로 착지한다.
쿵. 주변에 있던 사람 모두가 쳐다보는 듯했다.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냈는데 모를 리 없다. 게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요상한 자세로 추락이라니! 지금 다른 사람의 시선은 걱정되지 않았다. 오직 저 두 사람. 반사적으로 그들이 있던 방향을 살폈다. 천천히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걸 봤다.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얼굴을 가려야 했다. 덥썩, 바로 곁에 있던 여자애를 껴안았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나고 나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다급했다.
“아이고, 이것아. 아이고, 아이고.”
안고 있던 여자애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무의식적으로 아이랑 상봉한 엄마처럼 보이려고 했던 의도였을까.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불쑥, 아이를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아니, 이봐요. 당신 누구야?”
멍하니 말이 들리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 엄마쯤 되려나? 중년 여자가 놀란 눈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네? 아, 그게요.”
말하는 중간에도 어느새 시선은 두 남자가 있던 방향을 본다. 없다. 별 일 아니려니 하고 갔겠지. 설마 내 얼굴을 봤을까?
“괜찮니? 저 이상한 여자가 너한테 무슨 짓 안 했어?”
요구르트를 든 여자애가 괜찮다고 하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끙, 기합을 주고 나서 힘겹게 일어섰다. 새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 바지 자락을 툭, 툭, 쳐댔다.
“아니요, 그게, ∙∙∙∙∙∙,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배시시. 분명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려 웃었던 것인데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중년 여자는 아이를 가깝게 끌어당기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세상에 별 미친 것들 다 보겠네.”
아이는 끌려가면서도 자꾸 나를 흘끔거린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 구경하듯이.
“아니, 미친 여자가 아니라요.”
말을 꺼내려다 그만뒀다. 그걸 변명하려 하다니.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서둘러서 짐을 들고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설마 못 봤겠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창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칠 뻔했던 장면만 떠오른다. 머리 안쪽이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찬 채로 버스 기사에게 표를 건네고 무작정 뒷자리로 향했다. 가장 뒷자리는 하나랑 둘이서 버스 탈 때마다 선호해서 앉는 곳이다. 좌석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져 있으니까 승객이 많지 않을 때는 종종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고 맘 편히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았다. 그래서 버릇처럼 버스를 타면 항상 가장 뒷자리로 향한다.
가운데를 지나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는데 그 두 사람이 뒷자리 한쪽에 앉아 사온 음식을 나눠먹고 있는 게 보였다. 우뚝, 서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 이상할 것 같았다. 발은 계속 걸어가는데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지. 동일한 목적지잖아. 같은 버스를 탈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야지, 이 바보야. 그들과 내 사이에 이제 좌석이 세 열 남았다. 계속 가다 보면 뒷좌석까지 도달할 것이다. 가는 내내 그 두 사람과 같이 뒷좌석에 앉아 있을 것을 상상하니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걸음을 멈춰야 했다. 두 사람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기를 바랐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이미 좌석 한 열을 지나쳤다. 뒤돌아설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러면 괜히 시선을 끌 것 같아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또 한 열을 지나치고 뒷좌석 바로 앞 열까지 이르렀다. 아직 그들은 먹는 데 열중하고 있다.
복도 쪽 자리에 준비해온 도시락과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재빨리 창가 쪽 자리로 넘어가서 주저앉았다. 가슴이 빨리 뛰는 걸 느낀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 조심했다. 살짝 눈만 돌리자 음식을 들고 있는 손이 보였다. 삼각김밥과 바나나 우유. 애들 입맛인가? 창밖을 보는 척 하다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그만 상현 씨와 눈이 마주친다. 얼른 눈을 피했지만 이미 늦은 걸 직감했다.
“저기, 안녕하세요. 지난 번 모임에서 만났던 분 맞으시죠?”
잠시 3초쯤 멈췄다 대답했다.
“어머어.”
어머어라니. 그만 새된 소리를 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네요. 모임 가세요?”
“아, 맞구나. 이 버스 타고 대천 가세요? 저희도 마침 그리로 가는 길인데. 식사는 하셨어요? 대강 끼니를 때울 겸 이렇게 먹고 있습니다. 혹시 같이 드실래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고개가 어색하게 돌아가는지 거울이라도 있으면 지금 내 행동을 비춰보고 싶다. 얼마나 바보 같을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집에서 먹고 출발했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드세요.”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면 좋겠는데 먹기는커녕 머리도 못 말리고 왔어요.’
상현이 미소를 짓더니 손에 든 음식을 마저 입에 넣는다. 그 사람이 상현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손에 땀이 맺힌다.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뭔가 말을 건네야 하나 싶지만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나를 완전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면 어쩌지? 날씨 얘기라도 할까? 맙소사, 날씨라니. 나이 먹은 할머니 같잖아. 정말 큰 맘 먹고 몸을 돌렸는데 이번엔 그 사람이랑 시선이 엉겼다. 순간 흠칫, 몸이 굳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그렇지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비어버린다는 게 이런 걸까? 그 사람도 가만히 보기만 한다. 억지로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분명 웃으려고 한 거였는데 이상한 표정이 만들어졌다. 설마 썩은 미소? 이게 뭐야. 풀어, 풀어.
그 사람의 시선이 나를 보고 있다. 서로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눈길이 공중에서 엉켜서 한동안 떨어지질 않는다. 머리 안에서 전기가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몸 한가운데로 내려가더니 그곳에서 시작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 손끝과 발끝까지 전달된다. 온몸이 저릿해진다. 분명 잠시였지만 아주 긴 시간을 그렇게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있던 것처럼 느꼈다. 바나나 우유를 들이켜 목에 걸렸던 김밥을 내려 보낸 상현 씨가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개시킨다.
“여기는 남진우라고 합니다. 같이 일을 시작한 동기에요. 좀 무뚝뚝하긴 한데 알고 보면 좋은 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아니, 부탁은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아, 네.”
뒷말을 기다렸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상현이 덧붙인다.
“여기는, ∙∙∙∙∙∙, 에, 그게 죄송합니다. 지난 번에 인사드리고 얼굴은 익혔는데 제대로 통성명은 못했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 예, 괜찮아요. 이은정이에요.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거 아예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박상현입니다. 은정이란 이름 참 예쁘네요.”
상현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허리를 구부려 손을 내민다. 나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그와 악수를 나눴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진우 씨와도 악수를 나눠야 하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상현 씨가 맞잡았던 손을 빼려는데 생각에 잠겼던 내가 그만 손을 제 때 놓질 않아 앞으로 몸이 기울었다. 상현 씨가 아차, 싶어 손에서 힘을 빼자 그때야 내가 손을 놓는다. 앞으로 기울었던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왼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붙잡았는데 허공에 떠 있던 오른손이 불쑥, 진우 씨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얼핏 봐선 진우 씨에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다. 진우 씨는 멀뚱히 앞으로 내밀어진 내 손을 내려다본다. 아악, 이게 뭐하는 짓이야. 왜 오른손이 거기로 나갔지? 상현 씨가 툭, 진우 씨의 어깨를 친다.
“하, 이 친구. 원래 주변머리 없는 건 알았는데. 너 뭐 하냐, 매너 없게. 숙녀분이 악수를 청하는데 그러고만 있을 거야?”
“저, 그게 아니라, ∙∙∙∙∙∙.”
뒤로 손을 빼려고 했는데 진우 씨가 내 손을 움켜쥔다. 강한 힘이 전해져서 놀란 눈으로 진우 씨를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바로 고개를 돌렸을 그 상황에서 가만히 그의 눈을 주시했다. 진우 씨의 눈빛이 참 맑고 깊다는 생각을 했다. 상현 씨가 다시 진우 씨를 툭, 툭, 건드린다.
“너는 내가 악수하는 법도 가르쳐줘야 하냐. 손을 잡았으면 가볍게 흔들어야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은정 씨가 너 아주 저능아로 알겠다.”
상현 씨가 지시하는 대로 진우 씨가 천천히 손을 흔든다. 나도 그 흔들림에 따라 같이 손을 움직였다. 진우 씨와 손을 맞잡은 채로 눈을 맞추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옆에서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그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단단한 붙들림이 싫지 않았다.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버팀목처럼 느껴졌다.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아주 오래 그렇게 붙잡은 채로 있을 수 있다면 오늘 하루를 그대로 망쳐도 좋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