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근처 식당가는 많이 보이는데 포장음식을 파는 곳이 마땅찮았다. 햄버거를 사가고 싶진 않고. 결국 초밥으로 정하고 몇 가지 종류를 골라 플라스틱 용기에 담았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미리 보아두었던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챙겼다. 이거 굳이 과자 같은 걸 사가서 애도 아니고 이게 뭐냐는 핀잔을 듣지 않을지 모르겠다. 여자들은 주전부리 좋아하지 않나?
결국 메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다. 은정 씨가 잠에 취해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자리로 돌아오니 그녀는 벤치 위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많이 지쳤을 거다. 늦었다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떠오른다. 예상치 못한 자신의 모습에 놀란 가슴을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도. 버스 안에서 화장도구를 놓쳐버리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그려보니 웃음이 나기도 했다. 신기하다. 이 여자 날 많이 웃게 한다.
꿀맛 같은 잠을 자는 그녀를 일부러 깨우고 싶진 않았다. 사온 음식을 내려놓고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참 사람 많다는 감탄이었다. 거의 부딪힐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채로 지나간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저리 바삐 움직이는지 한 번쯤이라도 고민을 해봤는지 모르겠다. 은정 씨가 참 곤하게 잔다. 숨을 쌕, 쌕, 거리며. 깨어나면 많이 무안해하겠지. 뭐라고 하면 그 기분을 덜어줄 수 있을지 여러 모로 고민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어딘가 막힌 벽 앞에 다다른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초밥을 하나 꺼내 들었다.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었는데 한 입 베어 물면 할 말이 떠오를 듯도 했다. 까만 소스가 묻은 장어초밥이었다. 달작지근 해보인다. 혀를 살짝 그 끝 언저리에 대보았다. 예상한 대로 단맛이 묻어난다.
“혼자만 먹기에요?”
그녀가 누운 채로 게슴츠레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일어났어요? 곤하게 자는 사람 깨우고 싶지 않았어요.”
끙, 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나서 앉는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네요. 죄송해요.”
“아뇨. 사과할 일은 아닌데. 여기 도착하기 전부터 급하게 오느라 많이 힘드셨죠?”
“다 제 잘못인걸요. 왜 굳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화장품은 꺼내가지고.”
시무룩해지는 그녀를 향해 초밥을 건넸다.
“음식은 같이 먹어야 맛이 나는데 말이죠. 야근 나가면 차에서 혼자 먹을 때도 많은데 그럼 그건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배고픔을 때우려고 그저 입으로 처넣는 것 같다니까요.”
“입으로 처넣어요?”
“아, 실례했습니다. 숙녀분 앞에서 처넣는다는 상스러운 말을 썼군요.”
사과하는 말에 재밌다, 는 얼굴로 연어초밥을 하나 집어든다.
“누구한테 숙녀라는 말을 들은 적은 처음이네요. 처넣는다는 거친 표현이었다면 숙녀는 너무 고상한 표현인데요.”
“뭐든 중간을 가기가 제일 힘들죠. 이거 은정 씨와 대화하려면 단어 선택부터 신경 써야겠습니다. 부담스러워서 말이 제대로 나오기나 할런지 모르겠네요.”
초밥을 한입 베어 물고 나서 내 말에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감탄을 내뱉는다.
“이 연어초밥 되게 맛있네요. 생선살이 아주 싱싱하게 느껴져요.”
“그런가요? 그냥 지나가다 보이는 아무 곳에서 산 건데. 포장음식을 사려니 딱히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더군요.”
“초밥 완전 좋아하는데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수준이에요. 어떤 곳은 재료가 오래된 티가 팍팍 나거든요. 어디서 사신 거예요?”
“여기서 보이진 않는데 저기 모퉁이를 돌아서 쭉 지나가면 한쪽 귀퉁이에 붙어있어요.”
“우리 거기 가보면 안 될까요?”
“그러죠. 은정 씨 잠도 다 깬 거 같은데.”
잠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쑥스러운지 배시시, 라고 할 만한 웃음을 머금는다. 카메라 보러 와서 초밥에 더 흥분한 듯 보인다. 사람을 지배하는 3대 욕구가 식욕, 잠욕, 성욕이라더니 잠욕은 채웠고 이제 식욕을 채울 차례이겠지. 그 다음엔 성욕인가? 성욕? 이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세요?”
“고개요? 아, 저, 목이 결려서.”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둘러대고 괜스레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세요? 제가 하는 일이 나름 그쪽과 관련 있는데 봐드릴까요?”
“맞다. 스포츠 마사지 하신다고 그러셨죠?”
“네. 제 입으로 잘한다고 하긴 그렇지만 경력은 어느 정도 있어요.”
진짜로 목이 아픈 건 아닌데 이미 꺼낸 말을 도로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그렇더라도 이 번잡한 곳에서 마사지를 하긴 힘들 텐데.
“그래도 이런 곳에서 마사지 해주시긴 힘들지 않겠어요?”
주위를 둘러보더니 살짝 눈웃음을 짓는다.
“그렇죠. 그러면 초밥 먹고 잠깐 밖으로 나갈까요? 어디 공터 벤치 같은 곳도 괜찮아요. 풀 마사지를 해드릴 것도 아니고 목 근육만 풀어드릴 테니까.”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싫다고 딱 거절하기도 뭣하니까. 마사지를 받으면 살과 살이 맞닿을 텐데. 정말로 성욕의 차례인가? 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엉뚱하게 목이 결리다고 해서 이렇게 상황이 흘러버렸다고.
“목이 상당히 안 좋으신가 봐요? 자꾸 고개를 흔드시네요.”
“그게, ∙∙∙∙∙∙, 은근히 신경이 쓰여서요. 뻣뻣한 느낌도 들네요.”
뻣뻣하긴 무슨, 함부로 튀어나오는 거짓말에 참 뻔뻔하다고 감탄할 뿐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근육이라는 게 쓰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멈춰있으면 굳어버려요. 너무 무리하게 써도 탈이 나지만 쓰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해요.”
초밥집이 예상보다 많이 붐벼 어렵사리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많아서 주문을 하는 것도 경쟁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돌아가는 초밥이야 그릇째 들고 오면 되지만 음료수와 국물요리를 시키려고 손을 들어도 ‘잠시만요’ 하는 대답만 몇 번을 들으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사람 엄청 붐비네요. 하루 매출만 상당하겠는데요. 역시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해야 한다니까요.”
“은정 씨 하는 일도 장사의 일환일 텐데, 가게가 은정 씨 소유는 아니지만 옆에서 보다 보면 대강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울 수 있지 않나요? 잘 봐뒀다가 나중에 하나 차리시지 그래요?”
보기에 맛있어 보여 집어왔던 날치알 초밥을 한입 물었는데 와사비가 꽤 많이 들어있었는지 혀끝이 얼얼했다. 그런 표정을 은정 씨가 알아챘는지 살짝, 웃는다.
“와사비가 혀에 닿았죠? 물 드세요. 그나마 물은 셀프라서 다행이네요. 물까지 갖다 주길 기다려야 했다면 한참을 목마른 채로 있었겠죠.”
물을 들이켰는데도 얼얼한 느낌이 완전히 가시질 않는다. 자리를 잡으며 앉을 때 옆에 아무렇게나 밀쳐두었던 비닐봉지를 은정 씨가 열어본다.
“이런 건 언제 사셨어요? 차라리 단맛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로 이것저것 집어넣었는데 그 중에서 허니버터칩이라고 쓰인 과자봉지를 뜯어서 내게 건넨다.
“은정 씨도 같이 드시죠?”
“저는 초밥부터 먹을게요. 입 속에 넣고 잘 녹여보세요. 와사비 매운 맛이 가라앉게요.”
물보다 과자가 더 효과가 있는 듯했다.
“한결 나은데요. 잠깐 혀가 마비된 거 아닌가 싶었어요.”
“매운 맛을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와사비 잘못 먹으면 눈물 날 만큼 고생하니까 초밥 먹을 땐 빼고 먹기도 해요.”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럼 진우 씨 혼난 게 제 잘못이라는 거군요.”
“뭐, 그런 결론도 괜찮은 것 같네요.”
같이 웃고 있는 사이 주문했던 음료수와 매운 어묵탕이 나왔다.
“어묵탕부터 드시지 마시고 음료수 먼저 한 모금 마시세요. 안 그래도 매운 와사비 드셨는데 불에다 기름 끼얹는 격일 수 있어요.”
은정 씨가 챙겨주니까 묘하게 나이가 어려지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 말을 들어본 지가 한참 되었다. 이 만큼의 나이와 위치에 다달아 어느새 지시하고 가르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가게를 내보라고 하셨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 제가 정산을 할 때도 종종 있거든요. 경력이 쌓이면서 돈이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 지는 눈에 점점 들어오고 운영하는 방법도 곁눈질로 보면서 많이 익히긴 했는데, 이게 새로운 가게를 하나 차리려면 초기 자본금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제일 중요한, 목을 어디에 잡는가에서 시작해서 꾸준하게 가게 인테리어를 바꿔야 하고 직원관리도 해야 하고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요. 모르겠어요. 내 가게를 가져본다고 상상하면 정말 기분 좋긴 한데 엄두가 안 나네요. 그냥 직원으로 평생 살아볼까 싶기도 해요.”
“제가 지나가는 말로 차려보라고 했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왜 창업하는 사람 열 명 중에 일곱 명은 망한다잖아요. 무엇을 하든 은정 씨만 행복하다면 그게 제일 좋지 않겠어요.”
“진우 씨는 지금 하시는 일 만족하세요?”
“만족이요?”
앞에 놓인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셨다. 은정 씨는 핑크빛이 도는 레모네이드를 시켰는데 맛이 궁금했다. 은정 씨는 핑크색에 열광하는 여자일까? 핑크색 옷만 입고 핑크색 물건만 모으는 여자도 있다던데 도무지 그런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핑크에 끌려본 적도 없지만 색은 색일 뿐이고 한 가지 색보다는 다양한 여러 가지 색을 접해야 질리지도 않고 좋을 텐데 굳이 한 가지에만 집착하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그게 어떤 일을 하든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요. 생각보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땐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마음이 맞지 않는 상사랑 싸우고 난 후나 바빠서 며칠간 집에 들어가지도 못할 땐 이 박봉 받으며 왜 이렇게 사나 후회가 들죠. 그렇지만 어려운 사건 해결하고 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거나 친한 동료들과 술 한 잔 할 때면 뿌듯하기도 해요.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니까요. 그래서 아직까지 그만두지 못하고 다녀요. 은정 씨도 그런가요?”
“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그렇죠. 그렇지만 전 어찌 보면 다소 절박해요. 사회 나와서 처음 가졌던 직업이자 지금까지 유일하게 가져본 직업이라서 만약 이 일을 그만두면 다른 일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네요. 어찌 보면 그만둘 용기가 없는 거겠죠.”
“저도 그런 걸요. 이거 아니면 다른 일 해본 적이 없으니까. 굳이 스포츠 마사지를 직업으로 택한 이유가 있어요?”
“저는 여고를 다녔는데 왜 여자애들이 공부 더 열심히 하잖아요. 다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나질 않고 몇 시간이고 공부에만 전념하는데 전 그러지를 못했어요. 제가 안 좋은 버릇이 있는데요, 뭔가 한 가지에 집중하려고 해도 자꾸 생각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요. 국어를 공부하다보면 수학시간에 배웠던 도형이 떠오르다가 아침에 먹었던 음식이 생각나기도 하고 갑자기 영어시간에 배웠던 문장이 궁금한 거예요. 결국 학교 다닐 땐 공부로는 바닥을 기었죠. 대신 나름 운동신경이 괜찮았어요. 그렇다고 특출난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나름 다른 애들보다는 잘했죠. 남들 다 가는 대학은 가야겠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체대를 가게 됐죠.”
“아, 체대 나오셨군요.”
내가 쓰윽, 훑어보는 시늉을 하자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손을 젓는다.
“보지 마세요. 아무리 찾으려 해도 근육 하나도 없어요. 체대 가서도 운동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흥미도 없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학과 과목 중에 스포츠 마사지가 있어 배우게 됐어요. 그나마 그게 가장 재미있었어요. 재미있으니까 열심히 하게 되고 나중엔 일부러 찾아가며 공부하고 준비했죠. 사람이 살면서 재미있는 일을 해야 된다고 하는 말이 맞는 게, 그렇게 흥미를 갖고 더 알아보려고 노력하다 그쪽 분야의 사람도 많이 알게 되고 그러던 중 누구 소개로 지금 일하는 가게 사장님한테 면접까지 보게 돼서 지금까지 왔어요. 돌아보면 신기해요. 내가 스포츠 마사지사로 일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거든요. 뭐든 몰입하면 그 안에서 길을 발견하게 되지 않나 싶어요. 진우 씨는 어릴 적부터 경찰이 되고 싶었어요?”
“보자, 어릴 때라고 하면 얼마나 어릴 때죠?”
“초등학교, 중학교, 아님 고등하교?”
“그거 선택의 폭이 너무 넓은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그 중에 하나겠죠.”
“그런가요?”
가져왔던 초밥 접시들을 모두 비웠고 매운 어묵탕만이 남았다. 초밥 더 먹겠냐고 물으니 은정 씨가 마다한다. 나도 어느 정도 배가 불러 이 정도로 마무리해도 되지 싶었다.
“어릴 때부터 범죄수사극이나 추리소설 같은 걸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애들에 비해 유별나게 좋아하고 그런 수준은 아니었어요. 꼭 경찰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제가 행정학과를 나왔거든요.”
“행정학이면 공무원이랑 많이 관련 있는 거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많이 생각하죠. 너 졸업하면 공무원 되겠구나, 뭐 그런 식으로 말이죠. 근데 요즘 세상에 공무원 되긴 어디 쉽나요. 시험도 여러 번 봤는데 다 떨어지고 계속 시험 직종을 바꿨어요. 지방직, 국가직, 심지어 법원서기직 이런 것도 봤는데 그러다 경찰 공무원까지 오게 됐죠. 그것도 처음부터 되진 않았고 이러다 나이 들어 고시촌에서 실직자로 살겠구나 싶을 즈음 어렵사리 경찰 공무원 시험에 붙었어요. 그러니 사명감을 갖고 경찰이라는 직업을 갖게 됐습니다, 라고 하긴 그렇죠.”
“사명감이라. 솔직히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다들 우연히 자기 앞에 놓인 길에 선택과는 상관없이 발을 대어보거나, 부모나 주변 아는 사람들이 가진 직업에 접해보면서 어슬렁거리다 불쑥,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한 번 시작하면 벗어나기 힘들 때가 많고요.”
앞에 놓인 음식 그릇들이 거의 다 비어간다. 아이스티를 바닥까지 보이게 마셔서 끝을 내자 은정 씨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이제 좀 사람 같은지 봐야겠어요.”
“잠들기 전보다 훨씬 나으세요.”
“그럼 그 전엔 완전 보기 흉했다는 말이네요.”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일어선다. 앞에 놓인 그릇을 보고 언제 이렇게 많이 먹었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얘기를 나누며 먹을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배가 부를 만도 하다. 초밥 접시가 꽤 높이 쌓였는데다 매운 어묵탕도 거의 바닥까지 비었고, 포장해서 사왔던 음식들도 모두 먹어치웠다.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내용에 빠져 듣다 주섬주섬 집어먹었다. 이거 다음부터 은정 씨랑 같이 식사를 할 땐 주의해야겠다. 끊임없이 먹어대는 돼지저팔계로 생각하면 곤란하니까.
“우와, 저기 쌓여 올라간 초밥 접시 봐요. 우리가 먹기는 많이 먹었네요. 제가 푹 자고 났더니 배가 고팠군요.”
“아니요, 은정 씨가 아니라 제가 많이 먹었죠. 몸매 관리도 생각해야 할 나이인데 먹는 양 줄이기는 쉽지가 않네요.”
서로 자기가 더 많이 먹었다며 짧게 논쟁을 벌인 후, 그녀가 자신의 가방과 비닐봉지를 들고 일어선다.
“아무튼 제가 더 많은 먹은 이유로 초밥은 제가 계산했어요.”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먹기도 많이 먹어서 돈도 많이 나왔을 텐데요.”
“왜요. 진우 씨가 초밥 포장한 거랑 간식거리도 사왔잖아요. 이건 당연히 제가 내야죠. 괜찮아요.”
“마사지 받을 건데 밥까지 사시면 어떡합니까?”
“운 좋게 무료 서비스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제대로 할 것도 아니고 그냥 어깨랑 목 근처만 해드릴 건데요.”
넓게 자리 잡은 쇼핑몰을 나와 주변에 있는 한적한 곳을 찾으려니 곳곳에 벤치는 많았지만 모두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 그 다음으로 넘어가다가 거의 길 끝나는 곳까지 와서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오히려 잘 찾았다 싶은 게 벤치가 네 개나 널찍하게 사방으로 놓여있고 위에는 간이지붕도 덮여서 햇살이 바로 들어오지 않게 막아주었다.
“이쯤이면 괜찮겠는데요.”
“앉을 자리를 찾느라 꽤 걸었는데 결과적으로 좋은 데를 찾은 것 같네요.”
마사지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고 앉아야 하나 내심 걱정이 든다. 은정 씨가 나를 보며 밝게 웃어준다.
“마음 편하게 하시고 저한테 등 돌리고 앉으세요. 원래 마사지 처음 받으러 오시는 분들 의외로 긴장 많이 하세요. 어떤 분은 너무 경직돼서 긴장부터 풀어드리기 위해 오래 걸릴 때도 많아요. 돈 내고 시술받는 것도 아니니 부담 없이 친한 친구나 가족한테 안마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마음을 편하게 하라고 말은 하기 쉬울지 몰라도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편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몸이 더욱 경직된다.
“원래는 마사지 받을 때 상의를 모두 탈의하는 게 좋지만 야외에서 그렇게 하긴 곤란하니까 그냥 입으신 채로 할게요. 그다지 차이는 없을 거예요.”
‘탈의’라는 말이 왠지 꺼림칙하게 다가오는 건 ‘성욕’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내 불충한 사고가 아직 머리 한 귀퉁이에 잔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차, 싶었다. 은정 씨 직업이 스포츠 마사지사이고 목을 봐주겠다고 해서 그러자고 하긴 했는데, 달리 말해 그녀의 손이 내 목과 어깨를 주물러댈 것이라는 건데∙∙∙∙∙∙.
가슴 저 바닥에서부터 훅, 하고 부담감이 올라왔다.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어떤 변명이라도 둘러대고 사양하려 했는데 말캉한 감각이 전해진다. 귀와 목뼈 사이 옴폭하게 들어간 목 언저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쓸어내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흠칫, 고개를 움츠렸다.
“어떤 고객분은 빗자루로 쓸어내는 느낌이 들었다며 벌떡 일어나시기도 하세요. 마사지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처음 시술을 받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차차 익숙해지거든요. 괜찮으니까 그저 몸에 힘을 빼고 계세요.”
손바닥이 위로 올랐다가 밑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처음엔 약간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몸을 비틀었는데 은정 씨 말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손의 접촉에 익숙해졌다. 경력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능숙한 손놀림이 한 치의 주저 없이 목과 어깨 근육 언저리를 짚어댄다. 손가락에 들어간 힘이 너무 약하지도 그렇다고 억세지도 않다. 딱 적당한 정도. 힘 조절을 어찌 그리 잘하는지 신기했다. 부담감과 조심스러움에 움츠러든 상태로 있다 근육을 짚어가는 은정 씨의 손놀림에 그 움츠림이 조금씩 사그라진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오른손 엄지와 둘째손가락, 다음엔 왼손 엄지, 오른손 중지와 약지, 그런 식으로 손가락이 짚어가는 자리를 따라간다. 내 살과 그녀의 살이 닿는 부분. 그러다 문득, 너무 불손한 생각은 아닌가 죄책감이 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자 그런 생각조차 놓아버리고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밀려올라갔다 내려오기도 하고 당겨졌다 풀리는가 하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밀어내는 동작도 있었다.
“오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체할 새도 없이 튀어나온 신음소리. 당황해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은정 씨가 살포시 미소 짓는다.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움직인다.
“부담 가지지 마세요. 마시지 받는 분이 내시는 그런 소리가 제가 잘하고 있다는 신호거든요. 그 정도는 약과에요. 심하다 싶을 만큼 소리를 내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심하게 내는 소리는 어떤 거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물어보긴 그랬다.
“으으, 거기, 지금 눌렀던 데가 상당히 아픈데요.”
“흠, 어깨 아래 근육이 많이 뭉치셨네요. 보통 사무직종에 근무하는 분들이 많이 겪는 증상인데. 주로 외근보다는 사무실에서 서류정리 많이 하세요?”
“평소 그렇지는 않은데요. 사실, 요즘 한창 지난 과거 사건 재정리 기간이라 서류작업을 많이 하긴 했어요. 아, 거기도 은근히 저릿저릿 하네요.”
“아프고 뭉친 느낌이 드는 곳은 조금 더 힘을 줘서 눌러줄 필요가 있어요.”
아프다고 하는 데를 더 힘을 줘서 누르니 통증이 심해졌다. 어릿한 느낌이 마시지 받는 부위 주변으로 퍼지고 저절로 눈이 찌푸려진다. 안 좋은 부위를 그렇게까지 눌러야 하냐고 물어보려는데 어느 순간 통증이 가시는 느낌이 들고 근육이 이완되기 시작했다. 손과 맞닿는 자리에서 장애물처럼 거치적거리던 불편함이 사라진다. 솔직히 마사지를 받아본 적 없고 마사지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되지도 않았다. 평소에 운동 열심히 하면 되지 저런 걸 굳이 돈을 내고 받으러 다녀야 하나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은정 씨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마시지 받는 시간을 위해 돈을 내라면 낼 수도 있겠다는 심정이다. 사우나를 가면 열기 때문에 몸이 이완되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이건 손에서 전해지는 힘과 마찰로 인해 같은 효과를 보고 있었다. 어깨와 상체에 집중하던 손이 갈비뼈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참, 거기∙∙∙∙∙∙.”
미처 내가 말을 다 꺼내기 전에 손이 옆구리 주위를 훑으며 나아간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불쾌감에 반사적으로 은정 씨의 손을 붙잡았다. 놀라서 동그래진 눈이 나를 바라본다.
“어머, 제가 너무 힘을 줬나요? 이 일이 숙달된 후론 잘 안 그러는데 옛날 초창기 시절 버릇이 나왔나 봐요. 마사지사가 제일 주의해야 할 부분이 고객이 불쾌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하는 건데요. 죄송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은정 씨 마사지 기술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방금 손이 닿았던 데가 예전에 칼을 맞은 적이 있는 부위라서요. 상처가 아물긴 한참 됐는데 아직도 은근히 민감하네요.”
“칼을 맞아요?”
“이 일을 하다보면 거친 인간들을 상대해야 할 때도 자주 있죠. 항상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일이라는 게 다 그렇죠.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은정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제가 미리 물어봤어야 했는데. 원래 마사지 시작하기 전에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과거 병력이나 피부질환 등 꼼꼼하게 체크해야 하거든요. 아무리 대강 해드리는 거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간과했어요.”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저릿한 느낌이 들었을 뿐입니다. 아무렇지 않아요.”
은정 씨가 일부러 마사지까지 해주는데 괜히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기분 나쁘지 않도록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르는 중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뭔가가 당겨지길래 반사적으로 놓지 않으려 버텼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어 손을 봤다. 아차, 아직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은정 씨가 손을 빼내려 하는데 내 손은 무심코 놓아주지 않으려 버티고 있었다. 얼굴을 향해 피가 거꾸로 올라오는 것 같다. 이 상황을 모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은정 씨가 묻듯이 나를 본다. 은정 씨, 제가 이상한 놈은 아닙니다. 손을 잡았던 걸 생각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어떤 타이밍으로 놔야 하나 주저하다 하필 은정 씨가 다시 힘을 줄 때 놓아버렸다. 갑자기 손이 풀려나자 당기던 힘 때문에 가속도가 붙어 쑥, 은정 씨의 몸 전체가 뒤로 넘어간다. 내 등 위에 손을 얹기 편하게 벤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던 그녀가 뒤로 물러나면서 앉고 있던 지지대를 벗어났다.
“어, 어.”
어떻게든 균형을 잡기 위해 허공에서 팔을 휘젓는 그녀를 향해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잡았다, 라는 안도감에 일단 만족했다. 은정 씨가 땅 위로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를 붙잡은 나도 엉거주춤 균형을 잡고 두 발을 땅 위에 지탱하고 있었다. 은정 씨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서두르다 보니 적당히 거리를 두고 붙잡을 여유는 없었다. 팔에 잡히는 대로 잡아당겼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이 코에 닿을 거리에 있었다. 향긋하게 기분 좋은 샴푸 냄새가 났다. 살짝 땀 냄새가 묻어나오기도 했지만 그리 싫지 않았다. 내 가슴에 얼굴이 완전 밀착된 그녀의 몸이 경직된 것을 팔에 닿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잡아당겨 안을 수도 없었으리라. 은정 씨의 등을 두르고 있는 팔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현실적이지 않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응, 생각보다 재미없더라.”
대화 소리가 들려 눈을 드니 절친한 사이인지 바짝 붙어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두 여자가 보인다. 은정 씨는 그들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랐는지 다급하게 나를 밀어낸다. 나에게서 떨어지길 원하는 그녀를 마음으론 이해했지만 몸은 자세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넘어지려는 그녀를 다급하게 겨우 붙잡아서 팔로 두르고 있었는데 그만 은정 씨가 밀어내자 어색하게 땅 위에 지탱하던 발이 엉키는 듯했다. 그녀를 둘렀던 팔이 완전히 풀어지지 않아 같이 넘어갔다. 결국 우리 둘 동시에 땅 위로 엎어졌다. 터억, 하고 소리가 울린다. 내가 조금 더 빨리 땅에 닿았던 것도 같지만 별로 차이는 없었다. 은정 씨가 땅에 닿는 걸 보면서도 어찌 해줄 도리가 없었다. 내가 먼저 땅 위에 누워있었으니까 손을 뻗어봤자 헛수고였다.
안 봐도 뻔하다. 우리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지나갈 그 여자들. 은정 씨가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설마 얼굴을 다친 걸까? 여자에게 얼굴은 아주 중요한 부위일 텐데. 피라도 보이면 어쩌나 염려가 돼서 찬찬히 살피는 중에 얼굴을 가렸던 손가락 사이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멋쩍어서 눈을 돌렸다. 이거 땅바닥에 누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녀가 손을 내린다. 이젠 눈을 돌리면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더 쳐다보지 못하겠다. 화가 나서 날 노려보고 있을까? 맙소사,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었지?
“큭.”
어라, 웃는 소리다.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뭐예요?”
입술이 일그러진 채로 있지만 화가 난 게 아니라 억지로 웃음을 참는 모습이다.
“얼굴은, 왜 손으로 가리고 있었어요? 어디 다친 건 아니죠?”
“창피해서요.”
말이 막혔다. 그녀의 눈이 먼저 웃기 시작하고 따라서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음이 번진다는 건 정말 맞는 말이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내 머릿속 어딘가 시작 스위치를 눌렀는지 내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한 번 터지니까 멈추기 어렵다. 뭐가 그리 우스운 일인지 저 아래 깊은 복막을 울리며 마구 흘러나온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서 웃어댔다. 일어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웃고 있는 동안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그렇게 눈물을 통해 보는 파란 하늘이 젖어있다. 젖은 하늘색은 마른 것과 다르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옅게 번져 탁하면서도 더 따뜻한 색감이 든다. 하늘을 보며 마음껏 웃은 날이었고 새로운 파란색을 발견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