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많이 더웠던 올 여름이 이제 슬슬 물러갈 기미를 보인다. 조금이라도 선선해지는 공기를 느끼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특히 밤공기가 무더우면 잠을 설치게 되어 그게 가장 고역이었는데 밤에 선풍기를 켜지 않고도 잘 수 있어 그게 가장 감사하다.
진우 씨와 같이 보낸 시간이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정말 일어났던 일인지 아님 그저 내 상상인건지 자꾸 확인하게 된다. 이런 내 모습이 너무 바보 같다. 별 일도 아닌데. 같이 전시회 갔다가 점심을 먹었고 그리고∙∙∙∙∙∙.
손을 내려다봤다. 그의 목과 어깨를 어루만졌던 기억. 목이 아프다고 하기에 가지고 있는 기술로 좋은 일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시지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막상 하려니 은근 부담이 되었다. 초보도 아닌데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진 않을지, 제대로 아픈 곳을 풀어주기나 할런지, 하고 나서 오히려 상태가 나빠지면 어쩌나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긴장하며 마사지 해보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학생 때 실습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감독자 앞에서 할 때 이후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았던 그의 등 사진이 바로 앞에 있다. 곧은 어깨 아래 튀어나온 등뼈 주위를 눌렀다 당기는 모습을 상상하자 바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이상한 상상은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몸을 마사지 하는 생각만 할 뿐인데 화끈거리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뭔지. 가끔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는데 진우 씨와 엮이면 종종 그 빈도가 늘어난다. 텔레비전을 켜자 오래된 영화 특별주간이라며 앞으로 상영하게 될 옛날 영화를 죽 나열해준다. 그 중에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이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또 다시 피가 거꾸로 올라온다. 이거 중병이다. 내 직업이 항상 다른 사람의 살과 맞닿을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런 문구만으로 얼굴이 뜨거워진다면 당장 이직을 해야 할 판이다. 이럴 때 하나가 더욱 절실하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만 있어도 한결 마음이 편해질 텐데 그럴 수가 없다. 하나가 알게 되면 얼마나 놀려댈 것인지 안 봐도 척인데다 오히려 하나가 나서서 진우 씨와 나를 엮으려 할 게 뻔해 그건 생각하기도 싫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던가. 전화벨이 울려서 화면을 확인하니 하나의 번호가 뜬다. 살짝 침을 삼켜 입을 적시고 통화 연결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뭐해?”
“딱히 하는 건 없고. 뒹굴거리고 있지.”
“여유 부리고 좋네.”
“일 안 할 때 이런 여유라도 있어야지 아님 어떻게 일주일을 견디겠어. 참, 비행은 어땠어? 꼬장 부리는 이상한 승객 없었어?”
“∙∙∙∙∙∙.”
하나가 대답이 없다. 설마 이상한 승객을 만나기라도 한 건가? 그럼 괜히 그런 말을 꺼낸 게 미안해진다. 그냥 해본 소리인데.
“은정아. 우리 오랜 시간 베스트 프렌드였잖아.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벌써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어.”
“얘가 갑자기 목소리 낮게 깔고 왜 그런 소리를 해?”
“이제 너 없인 어떻게 사나 그럴 정도로 넌 이제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알지?”
“점점 무서워진다. 왜 이래?”
“그렇지만 사람이란 게 완벽할 순 없잖니.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렇지.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지.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너지만 나랑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
“살면서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소름끼치게 들린 적 없었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시지. 내 행동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 그런 거야?”
“기집애, 앙탈은. 이 공하나는 이은정을 너무 너무 아끼지만, ∙∙∙∙∙∙, 네가 대답하는 말이 듣기 거북할 때가 있어.”
“대답할 때?”
“응,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너한테 어떤 빅뉴스를 알려줘. 그럼 그걸 듣고 네가 놀라지. 그럼 꼭, 뭣이라, 라고 하면서 끝말 라에 옥타브가 왕창 올라가는 소리를 내. 그게 좀 듣기 거북할 때가 있어.”
“그거야, 무심코 나오는 소린데 그걸 어떻게 조절하라고. 잠깐만. 요것 봐라. 야, 공하나. 내가 그런 소리를 낼 때는 그게 반드시 빅뉴스일 때만이야. 너 나한테 긴히 할 얘기 있는 거지? 무슨 사고라도 쳤어?”
“은정아, 그 뭣이라 안 할 거지?”
“알았어. 얼른 얘기나 하라고.”
요 앙큼한 것이 뭔가를 속내에 두고 있다. 이렇게 뜸 들이는 건 하나의 평소 태도가 아닌데 이럴 정도면 필시 큰 건이 분명하다. 뭐지? 궁금해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실은 나, ∙∙∙∙∙∙, 비행 없었어. 너랑 같이 전시회 못 간 것 그 이유 때문이 아니야.”
“뭣이라!”
“이봐. 그 말 안 한다고 해놓고.”
“알았어, 알았어. 아니 누가 누구한테 성질이야. 그럼 이유가 뭔데? 감히 나한테 거짓말을 해.”
“그게, 그냥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어서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다 여겼는데, 일이 될 것 같아서 너한테 얘기를 하는 거야.”
“일이라니?”
“너랑 진우 씨랑 전시회 간 날. 아니, 그러고 보니까 너도 진우 씨랑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 보내고 좋았잖아.”
“말 돌리지 마라.”
“그러니까, 사실은, 나, 상현 씨랑 같이 어디를 갔었어.”
“상현 씨랑? 상현 씨 그 날, 조문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그것도 거짓말?”
“굳이 다른 이유를 댄 건 너랑 진우 씨가 불편해 할 수도 있다는 배려의 마음으로 그런 거야.”
“배려 좋아하시네. 그럼 상현 씨랑 너랑 어딜 간 건데? 둘이서 어디 좋은 데 가서 데이트라도 했어?”
“엉? 데이트? 아니 데이트라고 할 것까진 아니고.”
“맙소사, 데이트 맞구나. 아니, 언제 둘이서 그렇게 진도가 나간 거야. 전혀 티도 안 내더니. 상현 씨도 사람이 그렇다.”
“얘가 엄한 사람 잡으려고 그래. 상현 씨는 잘못한 것 없어.”
“아이고, 이것 봐라. 이제 상현 씨 편도 드네. 눈에 콩깍지 쓰이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네가 딱 그 꼴이구나.”
“얘는, 내가 언제.”
욱, 속이 미식거렸다. 도대체 저 살랑거리는 말투는 뭐란 말인가. 전혀 하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아예 대놓고 나 연애한다고 알리고 다니는 게 차라리 낫지 저렇게 미적거리며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는 하나는 감당이 안 된다.
“너 상현 씨한테 하는 말투 나한테는 하지 마라. 근처에만 있었어도 주먹 날라갔다.”
“언제부터 이렇게 호전적으로 바뀐 거야. 상황이 그렇게 돼버렸어. 하루만 시간을 내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아무래도 하루보다 더 갈 것 같아. 그런 김에 너한테는 알리는 게 나을 듯해 말 꺼낸 거야. 거짓말 한 건 미안해.”
괘씸하긴 했지만 좋은 소식이 반가웠다. 그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부남 기장과 엮였다고 들었을 때보다 훨씬 좋았다.
“우리 고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던 절친이잖아. 그런 사이를 이런 일로 틀어버릴 순 없지. 마음 넓은 내가 용서해준다. 대신 다음에 만나면 밥 사고 상현 씨랑 있었던 일 모두 털어놓고. 알았지?”
“흐흐, 고마워. 내가 아주 비싼 밥을 산다, 사.”
“상현 씨랑 좋았어?”
“아니, 뭐, 첫 데이트인데, 그런데 상현 씨 보기보다 은근 로맨틱하더라.”
그 다음에 딸려 나올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현 씨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가 펼쳐졌다. 건성으로 듣긴 했지만 그렇게 흥분하는 하나의 모습에 참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현 씨, 좋은 사람인 것도 같고.
“그렇게 하고 돌아왔어.”
“다음 데이트 날짜는 정한 거야?”
“상현 씨도 바쁘고 나도 비행 스케줄이 있으니까 맞춰봐야 해서 아직.”
말꼬리가 내려간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다는 건데.
“그거야 맞추면 되는 거고. 그래서?”
“어?”
“너 할 말 더 있잖아. 입에서 나오려다 주저하는 거 바로 알겠어. 뭔데?”
“아니, 굳이 말해야 하나 싶긴 한데. 상현 씨가 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줬거든.”
“고맙네. 요즘엔 매너 없는 남자도 얼마나 많은데.”
“헤어지면서 그 사람 차로 가다 다시 되돌아와서.”
“되돌아와서.”
“첫 키스했어.”
“뭣이라!”
“그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지금 그게 문제야? 첫 데이트에 첫 키스라니 너무 빠른 거 아냐? 이러다 다음 데이트 때는 아예 같이 자겠다.”
“우리가 무슨 조선시대 연애 하냐? 요즘엔 다들 속전속결이잖아.”
“그래도 나름 확신이 서고 진도를 나가야지. 아주 전속력으로 달리려고 불을 지피는구나. 그만큼 상현 씨가 좋아?”
“모르겠어. 어제는 정말 예의 바르고 젠틀한 남자 그 자체더라고.”
“첫 데이트였잖아. 사람은 모르는 거야. 네가 천기장 배려 많이 한다고 입에 달고 칭찬했었잖아.”
“여기서 그 사람 이름은 왜 꺼내냐?”
“미안. 조심하라고 하는 얘기지.”
하나가 나무라자 나도 무안했다. 무심코 말이 나왔다.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에 또 상처 입지 말라는 뜻에서 한 얘기였지만 더 조심했어야 했다. 하나는 겨우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조만간 같이 밥 먹자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전화를 끊고 나자 하나와 상현 씨가 사귄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하나 입으로 얘기를 들을 땐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라 제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이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는 꼭 잘됐으면 좋겠다. 하나가 다시는 마음 다치지 않게.
그나저나 그럼 진우 씨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거지?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되면 우린 그 언저리 들러리가 되는 건가? 아니, 이젠 하나와 상현 씨 둘만 만날 일이 잦아질 테니 진우 씨와는 볼 일이 별로 없을 수도 있겠다. 이은정, 서운해? 모르겠다. 서운한가? 그래도 사진 모임에서 자주 볼 텐데. 괜히 휴대폰을 들어 이리저리 눌러댔다. 어디 딱히 전화할 데는 없고 찾아볼 정보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탁.
갑자기 벨이 울리자 놀라서 그만 폰을 손에서 놓쳐버렸다. 얼른 바닥에 떨어진 폰을 주워들었다. 진우 씨였다. 머리가 하얘졌다. 벨이 계속 울리는데 받기가 망설여진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면 되지 달리 할 말은 없잖아. 그렇게 고민할 일은 아닌데 정말 이럴 땐 내 자신이 한심하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네라니. 최소 여보세요, 라는 말은 해야지.
“은정 씨?”
“아,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맙소사, 좋은 아침입니다, 라니. 아침 방송하는 리포터냐?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많이 피곤했을 텐데 오늘 힘들지 않던가요?”
너무 피곤해서 벤치에 누워 퍼질러 잠도 자고 말이죠. 지금 생각해도 그 와중에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일어나는 게 힘들긴 했어요. 이제 겨우 정신 차리고 일어나 앉았어요. 진우 씨는 괜찮아요?”
“저야 덕분에 좋은 시간 보내서 오늘 기분 좋게 일어났습니다. 원래 쉬는 날인데 급하게 일이 생겨서 잠시 출근했다가 이제 들어가는 길이에요.”
“쉬는 날에도 마음대로 쉬질 못하니 어떡해요? 힘드시겠어요?”
“저희 하는 일의 특성 상 쉬는 날에도 항상 대기모드라 어쩔 수가 없네요. 가끔은 하루쯤 전화기 꺼놓고 지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그래도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오히려 너무 조용하면 걱정된다니까요.”
“직업병이네요, 정말. 후후후.”
후후후, 라고 웃어버렸다. 원래 그렇게 웃지 않는데 꼭 이럴 때 그런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여자로 보지 않을까? 왜 항상 잘 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엉망이 돼지? 긴장해서 그런가?
“흠, 은정 씨.”
“예에.”
예에, 는 또 뭐야? 좀 조신해져라, 이은정.
“돌아오는 이번 금요일에 바쁘세요?”
“금요일이요?”
머릿속에서 번뜩, 신호가 전해지자 좌뇌와 우뇌가 공전을 하며 휘리릭, 돌아가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린다. 금요일에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던가? 일 끝나고 나면 딱히 할 일은 없지 싶은데. 이럴 때 너무 빨리 대답해도 없어 보일 것 같고 그렇다고 늦게 대답하면 싫은 내색을 보이는 걸로 오해할 거다. 속으로 다섯을 세었다. 이것, 참 어렵다.
“저녁에 딱히 정해진 약속은 없는데요.”
“많이 좋아하는 일본 사진작가가 있는데요, 금요일에 작가전을 연다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네요. 주변 지인 중엔 사진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상현이는 자꾸 시간이 없다고 바쁜 척을 해요.”
‘그게 다 이유가 있어요.’
입 언저리까지 말이 나올 뻔 했지만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나랑 상현 씨가 직접 알리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해주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다. 언제까지 진우 씨한테 비밀로 하고 있어야 하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금세 눈치 채지 않을까? 직업이 경찰이잖아.
“그래요? 저야 좋죠. 유명한 사진작가인가요?”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은 아닌데 그가 찍는 사진의 구도를 참 좋아해요. 은정 씨도 한 번 보시면 나름 흥미롭다고 여기실 겁니다. 일단 시간이 되신다고 알고 표를 예매할게요.”
“그럼 제가 끝나고 저녁이라도 살까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가자고 한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아니에요. 그래도 사게 해주세요. 그래야 마음이 편하겠어요.”
너무 고집부리나? 그냥 감사하다고 해버릴까? 갑자기 슬슬 가슴 한 쪽에서 익숙한 걱정이 밀려온다. 꼭 약속이 생기면 미리부터 드는 생각. 그 날 뭐 입고 가지?
“은정 씨 편하신 대로 하셔도 되는데 진짜로 부담 가지지 마세요. 사진 좋아하는 사람끼리 즐거운 시간 보내자는 것뿐입니다.”
“감사해요. 사진전 보는 것 너무 좋아해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옷장을 열었다. 둘러본다고 딱히 달라질 상황도 아니다. 약속이 생겼다고 쇼핑하러 가기도 그렇고. 왜 살 때는 예뻐 보이던 옷들이 옷장으로 들어가고 난 후엔 그 후광이 사라지고 마는 걸까? 이거 모든 옷들엔 3일간만 지속되는 특수효과라도 장치된 거 아냐? 딱 3일만 멋있어 보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현실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효과.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옷을 사러 가고. 한숨이 나온다. 금요일까지 머리 싸매고 뭘 입을까 코디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답답하다. 결국 결론은 거기서 거기일 텐데.
아침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수학여행 가는 날 아침이라거나 명절 연휴 첫날 같은 가슴 설레게 하는 기대가 있을 때만 일어나는 일. 달력으로 눈이 갔다. 어제까지 뭘 입고 갈지 결정을 못하고 있다 결국 다짐했다. 더 이상 옷장 들여다보지 않기로. 꺼내놓은 것 그대로 입고 가기로 했다. 백 퍼센트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게 최선이다,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계속 고르기만 하다간 지난 번처럼 늦어서 뛰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는 건 상상하기도 싫다. 이번에는 아주 여유 있고 편안한 상태로 나가야지. 삼십 분 먼저 나가서 기다리자고 다짐했다. 약속은 정확히 지키는 여자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한 번 늦었다고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기를.
저녁에 약속이 생기면 그걸 고대하면서 기다리느라 하루가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오늘따라 유독 시계 초침이 천천히 나아간다. 일찍 나가려고 소라에게 가게 마무리를 미리 부탁했다. 아직 넉넉하게 시간이 남았는데도 슬슬 조바심이 난다. 그때 늦었던 기억 때문일까. 아주 호되게 당했지. 전부 내 잘못이었기에 누굴 탓할 수도 없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향한다. 승객이 많긴 했지만 아직 퇴근시간보다는 일러서 엄청 붐비지는 않았다. 진우 씨를 보는 게 좋긴 좋은데 자꾸 긴장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전화벨이 울린다. 설마 진우 씨가 벌써 도착했다고 전화한 건 아니겠지? 아직 약속한 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 휴, 아니다. 하나의 전화였다.
“응, 하나야, 지금 어디야? 나는 지하철. 주변이 시끄러워 네 말 잘 안 들릴 수도 있겠다.”
“∙∙∙∙∙∙.”
처음엔 주변 소음 때문에 하나가 하는 말을 놓친 줄 알았다. 휴대폰을 귀에 바짝 대고 집중하는 데도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만 코를 훌쩍이며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하나야. 내가 하는 말 들려?”
“으흐흑.”
하나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분명 우는 소리였다.
“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너 우는 거니?”
“은정아아아.”
은정아, 라는 말의 마지막 글자 ‘아’가 길게 이어진다. 그러더니 제대로 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야.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괜찮아?”
하나한테 집중하느라 역에 도착한 열차를 놓쳐버렸다. 하나는 한참을 울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럴 땐 실컷 울게 놔두는 게 상책이다. 하나가 겨우 진정이 됐는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를 다시 부른다.
“은정아.”
“응, 무슨 일인데? 지금 회사야?”
“아니, 명동.”
“명동?”
사람들이 붐비는 명동 한복판에서 하나가 울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 개자식, 천진환.”
하나가 한동안 언급하기도 싫어했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예감이 좋지 않다.
“그 사람이 왜?”
“나, 오늘 저녁에 상현 씨 만나기로 했거든.”
그래서 진우 씨한테는 바쁘다고 한 거네.
“이제 계절이 바뀌는데 당장 입고 나갈 만한 옷이 없는 거야.”
어째 너랑 나랑 똑같니. 우린 왜 항상 입을 만한 옷이 없을까?
“굳이 명동에서 옷을 사려던 건 아니고 요즘 어떤 게 유행인가 보기만 하려고 했어. 그러다 그 자식이 자기 마누라랑 걸어오는 걸 발견했거든.”
그 많고 많은 장소와 시간 중에 거기서 하필 그 사람을 만나다니 그것도 참 악연이다. 그 사람 마누라한테 호되게 당하기라도 한 걸까?
“많이 놀랐어. 어딘가로 피해버릴까, 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 인간 마주치기도 싫었으니까. 회사에서도 일부러 피해 다니는데 이런 데서 마주쳐야 하다니 아주 끔찍하더라. 거기다 옆에는 마누라까지 대동하고 있었고. 다행히 그 여자는 이것저것 둘러본다고 정신이 없었거든. 그러다 그 자식이랑 눈이 마주쳤지.”
하나가 말을 이을 때까지 기다렸다.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옛정이라는 게 있잖아. 그냥 시선을 피해버리면 무안할까 봐 인사를 건넸어.”
“인사를 했어?”
“살짝 목례를 했던 것도 같고 미소를 지었는지도 모르겠어.”
“너도 애가 속이 좋다. 그 사람을 보고 미소가 나와?”
“지금 생각하면 내가 미쳤지.”
“그랬는데?”
“아는 체도 안 하더라. 날 발견하고 놀랬는지 눈만 동그랗게 뜨다가 옆에 있는 마누라를 보는 거야. 엄청 눈치를 살피더라고. 그딴 인간한테 그렇게 마음을 줬다니 나도 바보지.”
“그 사람 행동에 열 받고 분해서 우는 거야?”
“아니. 그렇게 끝났으면 지나다 개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을 일이었어. 좀 어이도 없고 해서 그렇게 지나쳤어.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근처 골목으로 들어가서 어디로 갈까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그 개자식이 따라 온 거야.”
“뭣이라!”
“그 말 안 하기로 하지 않았어?”
“지금 그게 문제야? 그 인간이 왜 따라왔는데?”
“뒤에 누가 서 있길래 돌아봤는데 나도 너무 놀랬어. 저 사람이 왜 저기 있지 싶더라. 설마 아직 마음이 남아서 이러나 그랬는데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뭐라는 줄 알아?”
“뭐랬는데?”
“지금 자기 스토킹 하는 거냐고 묻더라. 옆에 지 와이프 있는 거 안 보이냐고. 아님 일부러 그걸 알고 접근한 거냐고 그러더라.”
“세상에.”
“또 이런 식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이 악물고 몰아붙이는데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어. 일방적으로 지 할 말만 하고 싹 돌아서서 가버리는데, 그러는데, ∙∙∙∙∙∙, 흐흑.”
하나가 다시 울기 시작한다.
“은정아아아아. 내가 정말 분하고 억울해서, 으흑, 그 자식한테 그런 대접을 받다니, 어어엉. 은정아아아아.”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했다. 울음이 터지니까 멈추기 힘들다.
“나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서 지금 서 있을 수도 없어. 어떡하니, 은정아.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상현 씨를 만나.”
퍼뜩, 그제야 진우 씨를 만나기로 한 약속이 생각났다. 일부러 일찌감치 서둘렀기 때문에 아직 약속시간까진 여유가 있다. 여기서 명동이 그리 먼 곳도 아니다.
“명동 어디쯤이야? 내가 갈게.”
명동에 도착해서 하나를 찾는 건 쉬웠다. 그런 몰골로 명동에 나타날 사람이 흔하진 않으니까. 눈물에 화장이 번져서 얼굴이 가히 중국 경극에 나오는 사람 같다. 우선 응급처치로 대강 닦아내고 근처 카페로 들어가 화장실로 끌고 갔다. 제대로 화장을 고쳐주려 해도 자꾸 우니까 소용이 없다. 결국엔 나도 지쳐서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공하나. 너 자꾸 울면 오늘 약속 못 나간다. 이런 모습으로 나갈 거 아니잖아? 분하고 억울한 거 알겠는데 이제 진정해. 상현 씨가 네 이상한 모습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설명할래? 네 과거 다 까발릴 거야?”
몰아붙이니까 효과가 있다. 숨을 골라가며 억지로 울음을 참는다.
“어떡해? 상현 씨 날 완전 이상한 여자로 볼 거야.”
“그러니까 빨리 조치를 취하자고. 널 이상한 여자로 보지 않게.”
얼굴과 머리는 엉성하게라도 꾸며놨는데 하필 흘러내린 화장이 지금 입고 있는 옷에 얼룩덜룩 자국을 남겼다. 옷 사러 일찍 나왔다고 하나가 말했지만 지금 그런 상태로 혼자 옷을 사러 가게 할 수가 없었다.
“명동에서 쇼핑할 건 아니지?”
하나가 미안한 말투로 답한다.
“여기 가격이 세잖아. 둘러보기만 하려고 했지.”
이제 겨우 슬쩍, 웃는다.
“가자. 빨리 움직여. 나도 오늘 약속 있단 말이야.”
“무슨 약속? 누구랑?”
“어? 아, 그게.”
할 말을 생각해내야 하는데.
“은정이 너, 나 말고 새 친구 사귀니?”
“무슨 소리야?”
“요즘 어째 소원해진 것 같아서.”
“그, 그, 그거야. 네가 상현 씨 만나고, 그러고 바쁘니까, 그, 그렇잖아. 내가, 그, 내가 바쁜 게 아니라 네가 연애한다고 바쁘잖아.”
말을 왜 더듬는지. 침착하라고. 빨리 주의를 돌려.
“상현 씨 만날 시간 다 되어가잖아. 서둘러.”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들켰나?
“왜?”
“고마워서.”
휴.
“고맙긴. 이럴 때 친구가 필요한 거지. 언제 필요하겠냐?”
“역시 너밖에 없다. 내가 다음에 꼭 한 턱 낼게.”
“한 턱 안 내도 되니까 빨랑 추스르고 상현 씨 만나도 안 부끄럽게 제대로 갖추기나 하자고.”
근처 가까운 곳 어디 동대문이나 가자고 했더니 꼭 문정동으로 가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문정동?”
명동에서 멀긴 해도 거기에 자주 가는 단골이 있단다. 옷을 빨리 고르게 도와줘 시간을 절약해줄 거라고 한다. 문정동이면 진우 씨와 약속한 장소에서 더욱 멀어진다. 그렇다고 겨우 하나의 주의를 돌려놨는데 약속이 있다고 다시 말을 꺼내기도 그렇다.
“알았어. 서두르기나 해.”
하나는 지하철 안에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바로 전까지 그렇게 서럽게 울더니 어느새 조곤조곤 말을 꺼내다 생글거리며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게 하나의 매력이다. 뒤끝 없고 금세 자기 페이스를 찾는 것.
“나 얼굴 괜찮아?”
괜찮기는. 울어서 팅팅 부었는데.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하겠다.
“응. 얼룩덜룩 화장 번진 것 정리하고 다시 칠해놓으니까 볼만 해. 남자들 원래 무신경하잖아. 계속 웃기만 해. 상현 씨가 무슨 일 있었는지 모르게.”
“휴. 재수 옴 붙으려고 그랬는지 하필 거기서 그 인간을 만날 게 뭐니. 하루 완전 망칠 뻔 했다니까.”
“그 사람 때문에 피해보면 너만 억울하니까 다 잊어버리고 상현 씨랑 좋은 시간 보낼 생각에만 집중하라고.”
슬쩍 시계를 봤다. 문정동까지 갔다가 나와도 될 만큼 아직 여유는 있다.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해서 여유 있게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건 아마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하다. 늦지만 않으면 되겠지.
늦지만 않으면 되겠지 싶었는데 하나가 문정동에서 은근히 꾸물거린다. 쇼핑할 때 이것저것 재보고 고르는 거야 누구나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런 처지에 그렇게 행동하는 하나를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님 속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건 너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니?”
“너 드러내놓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도 상현 씨 앞에서 너무 천박해 보이면 그렇잖아.”
“이건 어때? 아주 조신해 보이네.”
“그건 좀 심심하다.”
속에서 뭔가 훅, 하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까딱하면 한 소리 할 뻔 했는데 그래도 조금 전까지 울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나였기에 그럼 안 되지 싶어 억지로 참아 눌렀다. 목소리에 힘을 줘서 서두르는 느낌이 나지 않도록 말을 뱉었다.
“너 그러다 상현 씨 기다리게 만들겠다. 빨리 결정하는 게 어때?”
“그렇긴 한데 어째 결정을 못 하겠어.”
가게 열한 군데를 돌았고 최종 후보로 원피스 4개와 투피스 2개가 골라졌다. 이미 들렀었던 가게에 다시 들어가 옷을 확인하기를 반복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만 없을 것 같아 하나의 손에서 옷을 뺏어 들었다.
“이게 가장 예뻐 보여.”
“그래?”
재차 확인해주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귀에 익숙한 벨소리가 울린다. 하나의 폰이다.
“상현 씨야. 어떡하지?”
“뭘 어떡해? 얼른 받아서 지금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하면 되잖아. 지금 이 고생하는 것도 다 상현 씨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건데. 빨리 받아.”
여보세요, 라고 대답하는 첫 마디가 살짝 떨린다. 상현 씨, 라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낼 때까지는 좋았다. 얼른 보내서 둘이서 좋은 시간 가지게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상하게 말을 이어갈수록 하나의 목소리가 점점 흔들렸다. 속으로, ‘얘가 좋은 날 왜 이래,’ 하며 다그쳐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차마 대화하는 중간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하나 씨, 괜찮아요?’, 라며 묻는 상현 씨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에게까지 들렸다. 그게 하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신호였나 보다.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하더니 호흡이 가빠졌다. 멈추기에는 늦었다. 툭, 묶어놓았던 매듭이 풀리듯이 울음이 터져 나온다.
“하나야, 상현 씨 다 듣게 울면 어떡해?!”
상현 씨이이이, 라며 끝소리를 질질 끌면서 끅, 끅, 거리더니 아예 목 놓아 운다.
“하나 씨, 왜 그래요? 하나 씨? 하나 씨?”
이제 옷이고 뭐고 없다. 옷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본다. 걱정스런 눈길로 점원이 다가온다. 미안하다고 얼른 사과하고 하나를 억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하나 씨, 지금 어디에요? 하나 씨? 하나 씨?”
하나는 엉엉, 울면서 반복해서 불러대는 상현 씨에게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한다. 결국 그 손에서 전화기를 뺏어들었다.
“상현 씨, 저 은정인데요.”
“은정 씨, 지금 하나 씨랑 같이 있어요?”
“아, 예.”
“무슨 일이에요? 하나 씨 왜 그래요?
“저기, 뭐, 별 일은 아니고, 약간 사정이 생겨서요.”
“지금 거기 어디에요? 내가 바로 갈게요.”
당장 달려올 것 같은 기세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상현 씨에게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다. 문정동에 있다며 근처 케이크와 커피를 같이 파는 가게 이름을 불러줬다. 하나가 제대로 울어대기 시작해서 가게로 바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한참을 울게 놔뒀다 진정되자 가게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상현 씨가 곧 오기로 했어.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 사람 전화기 건너편에 두고 울면 어떡하냐? 상현 씨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어머, 어떡해. 날 완전 이상한 여자로 보겠지?”
“지금 네 얼굴 보면 그 생각 완전히 굳혀질 걸.”
네 얼굴이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는다. 휴,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걸 또 반복해야 하나 싶어 답답했지만 상현 씨가 바로 온다는데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화장실을 따라 들어가 거울 앞에 세우고 일단 눈물로 번져버린 자국부터 지우기 시작했다.
“미안해, 은정아. 상현 씨 목소리 듣는데 그만 감정이 북받쳐서.”
울먹거리며 입을 우물거린다. 또 울어버리면 이젠 진짜 끝이다.
“한 번만 더 울어 봐. 확 그냥 두고 가버릴 테니까.”
내 목소리에 날이 선 게 느껴졌는지 하나가 얼른 입을 다물고 숨을 참는다.
“이게 뭐냐고. 겨우 고쳐놨는데 고스란히 엉망이 됐잖아.”
“그, 그게∙∙∙∙∙∙.”
“말하지 마. 너 오늘 하루종일 무슨 말만 꺼내면 울어버리잖아. 차라리 입 꾹 다물고 조용히 있어.”
하나가 바쁘게 손을 움직여대는 나한테 모든 걸 맡기고 살며시 눈을 감는다. 그게 훨씬 나았다. 다시 울음이 터지고 화장해놓은 게 번져버리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상현 씨가 하나를 보러 온다고 하니 괜히 더 신경이 쓰인다. 작은 손놀림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평소 같으면 이미 마무리 했을 텐데 몇 배는 시간이 더 걸린다. 이마에서부터 시작해서 겨우 입술까지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하나 씨, 은정 씨, 혹시 안에 있어요?”
“상현 씨?”
여자 화장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상현 씨 모습은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언제 벌써 도착했지? 경찰이라 교통신호도 무시하고 막 달린 건가? 하나가 놀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만 쳐다본다.
“네, 상현 씨. 저희 안에 있어요. 금방 나갈게요.”
“예, 예. 죄송합니다. 찾는데 안 보여서 가게 점원에게 물어보니 여자 두 명이 화장실로 급하게 들어갔다고 해서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여자 화장실 앞에서 말을 나누는 상현 씨도 머쓱한 기분이 들었을 거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하나가 더욱 얄미워졌다. 모든 걸 망쳐놓은 장본인 같았다.
“빨리 서둘러. 상현 씨, 밖에서 기다리잖아.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게 하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어쩌지, 은정아? 이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열은 받았지만 새초롬한 표정으로 은근히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는 하나를 보니 화를 내기도 그랬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딱히 방법이 있겠어? 그냥 상현 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로 설명해.”
“모든 걸 그대로?”
“상현 씨를 전화기 맞은편에 두고 울어댔는데 딱히 둘러댈 말이 있어? 차라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직하게 말해.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 이렇게 이식질고 해버리면 나중에 두고 찜찜할 일도 없을 거고.”
하나가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나를 끌어안는다.
“얘가 왜 이래?”
“고마워, 은정아. 네가 옆에 있어 정말 다행이다. 너 없었으면 어땠을까 끔찍하기만 해.”
머쓱해져서 하나를 다독거렸다.
“얼른 나가자. 상현 씨 기다리잖아.”
상현 씨가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앞에 시켜놓은 음료수 컵 안에 담긴 얼음이 녹으면서 생긴 물방울들이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하나 씨,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이럴 때 내가 하나가 아닌 게 정말 다행으로 느껴졌다. 나 같으면 물어보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큰 벌을 받을 준비를 하는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하나는 내가 아니라서 용케 미소를 지으며 상현 씨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 옆에 앉은 내가 더 안절부절 못하는 듯했다. 하나는 미안하다면 사과하는 말로 이야기를 꺼내더니 차근히 명동에 갔던 이유를 대고 나서 천진환 기장을 만났던 일을 풀어나갔다. 그 사람과의 과거를 설명하는 하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상현 씨는 명동에서 하나가 당했던 일을 듣다 그만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낸다.
“아니, 그런 개∙∙∙∙∙∙, 아휴, 죄송합니다. 말이 함부로 나오네요.”
상현 씨가 나를 보며 사과를 한다. 굳이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도 똑같이 욕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욕먹을 만한 사람이죠.”
“그래서 하나 씨는 당하고만 있었어요? 한 대 패주기라도 하지요. 아니지. 그건 하나 씨 같은 여자분이 할 일이 아니지요. 하, 이거, 내가 다 열 받네요.”
상현 씨가 화를 내주자 하나는 그게 좋았나 보다. 덩달아서 말을 받으며 속에 담겼던 분을 풀어낸다. 두 사람이 그렇게 열을 올려 대화하는 걸 보고 있으니까 나름 어울리는 그림처럼 다가온다. 연분이라는 게 있기는 하겠지. 둘이서 오랫동안 잘 지내기를, 아니 결혼까지 해서 한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상현 씨 앞에 놓인 음료수를 보다가 나도 뭔가 마실까 싶어 메뉴를 찾았다. 그러다 벽 위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약속시간이 지나 있었다. 상현 씨가 온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하나의 화장을 고쳐주느라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급하게 하나와 상현 씨가 주고받는 말을 잘랐다.
“상현 씨, 죄송한데 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하나야, 너 그럼 상현 씨랑 좋은 시간 보내고.”
“어, 은정아. 가려고?”
서두르느라 제대로 하나에게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상현 씨에게도 건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나중에 봐. 상현 씨, 그럼 하나 부탁하고 저는 이만 갈게요.”
“네, 은정 씨. 그럼 다음에.”
상현 씨가 반쯤 일어나서 목례를 한다. 그걸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부리나케 지하철역을 향해 달렸다. 왜 나는 진우 씨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뛰어야 하는 걸까? 교통카드를 꺼내려는데 익숙한 벨소리가 난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신호다. 설마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가는 열차인가? 혹시 모르니까 서둘렀다. 바로 앞에 두 사람이 줄을 서고 있어 그 옆으로 비켜섰는데 그만 누군가 끼어든다. 한 마디 해주려다 그만 뒀다. 이 와중에 모르는 사람과 다투면 나만 손해다. 그 사람이 지나가고 카드를 판독기에 댄 후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삐익, 거리는 소리가 난다. 닫힌 채 열리지 않는 개찰구 문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
“왜 이러지?”
언제부터 있었는지 두 사람이 내 뒤에서 기다린다. 다시 판독기에 카드를 대자 같은 소리가 난다.
“충전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충전요?”
맙소사. 카드 잔액이 백 원이다. 언제 이렇게 떨어졌지?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오히려 모든 게 더뎌진다. 평소엔 쉽게 꺼내지던 지갑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충전을 하고 개찰구를 통과해서 계단을 두 개씩 밟아가며 아래로 뛰어내렸더니 바로 앞에서 열차가 역을 떠나고 있었다.
“아, 하필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마를 향해 저절로 손이 올라간다. 이번엔 정말 내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지하철에 오르니 승객수가 상당히 많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어야 했고 출근시간에 걸려 복잡한 지하철을 탈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사람 많은 곳에 들어서니 땀이 솟아난다. 손수건이라도 꺼내서 땀을 닦으려다 멈췄다. 설마 지난 번 버스에서처럼 물건들이 온통 쏟아지진 않겠지? 지하철이 버스처럼 흔들릴 리가 없겠지만 그때 겪은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조심스러웠다. 손수건만 얼른 꺼내서 목 근처를 훔쳐냈다. 너무 번들거리지 않아야 할 텐데.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타네.
약속장소 근처에 있는 역에서 내려 빠져나오다 발견한 전광판 시계를 보니 만나기로 한 시각보다 한 시간 반이 늦었다. 맙소사, 한 시간 반? 내가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면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에 대고 마구 욕이라도 퍼부었을 것이다. 맞아, 휴대폰. 조바심이 나서 정신없이 서두르다 보니 휴대폰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부재중 전화 3통. 남겨진 메시지 3개. 첫 번째 메시지를 확인했다.
“흐음, 흠, 은정 씨? 혹시 길이 엇갈린 건 아닌가 싶어서 전화합니다. 아직 이십 분밖에 안 지났으니까 늦는 거면 조급해하지 말고 오세요.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십 분밖이라고 해주다니 진우 씨 정말 좋은 사람이다. 만약 나였다면 이십 분 되기 전에 벌써 혼자 가버렸다. 두 번째 메시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녹음됐다.
“은정 씨, 다시 접니다. 오늘 오시는 것 맞지요? 날짜를 헷갈리신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금요일 보기로 했는데 오늘 금요일 아닌가요?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시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조금 더 기다려 보겠습니다.”
금요일 맞아요. 정말 미안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지난 번 만났을 때 늦은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한 시간 반이 늦었다. 다시는 나랑 약속을 잡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계속 뛰었다.
“안녕하세요, 은정 씨. 남진웁니다. 이거 아무래도 오늘 못 오시는 것 같네요. 그런데 연락도 닿지 않고 어떤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요.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 오신다면 그건 괜찮은데 어디에서 사고라도 당하신 건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 어떻게 전화통화라도 된다면 안심할 텐데. 은정 씨, 가능할 때 전화라도 한 통 주시겠어요? 저는 그럼 그만 기다리겠습니다.”
화라도 냈다면 덜 미안했을 텐데 화는커녕 끝까지 나를 걱정해주니 더욱 미안했다. 한 시간 반이나 지났는데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만나기로 한 장소를 지나 바로 사진작가전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어떻게 사과하는 말을 전할까 살짝 고민하다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발은 계속 움직이는 채로.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통화중이었다. 혹시 상현 씨한테 전화해서 내 욕이라도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난 할 말이 없다. 벌써 두 번이나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기다리게 했는데 욕을 먹어도 싸다.
금요일이라 그런 건지 아님 워낙 유명한 사진작가인지, 작가전이 열리는 곳은 아주 많이 붐볐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다른 사람의 어깨에 부딪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3층으로 된 갤러리 전체를 혼자만의 작품으로 채운 것 같은데 1층부터 3층까지 관객들로 북적거렸다. 갑자기 그 작가가 부러웠다. 난 내 사진을 주위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조차 부담스러운데 이 작가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사진을 보려고 일부러 멀리서 찾아와준다니 얼마나 좋을까. 아님 그런 것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감흥이 없으려나. 참, 사진전을 부러워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지. 진우 씨는 어디에 있는 걸까? 연신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반복하며 빽빽하게 들어선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다. 복도와 복도를 연결한 계단을 올라가서 2층과 3층까지 둘러봤지만 진우 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너무 붐벼서 지나가다 놓친 걸까? 아님 그 사람 이미 떠났나? 보고 싶었던 작가전이라고 했으니 일찍 떠나진 않았을 텐데. 한 시간 반이나 기다리다 너무 열 받아서 작가전에는 오지도 않고 돌아가버렸을 수도. 아, 할 말이 없다. 그저 미안하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며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이 사람, 저 사람 훑었지만 진우 씨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직원의 시선만 덤으로 받았다. 입구를 지나서 나오는데 맥이 탁 풀리고 허탈했다. 사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둘이서 작가와 사진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하는데. 밖을 나와서도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하나는 지금 상현 씨와 있다. 그런 상황에 전화해서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우 씨가 이미 상현 씨에게 전화해서 내 험담을 늘어놓았다면 더더욱 피하고 싶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전화기를 들여다봤다.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해볼까? 한 번만 더?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그땐 나도 모르겠다. 긴장한 채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역시 통화중. 무슨 통화를 이렇게 오래 하는 거야? 아니지, 지금 내가 짜증낼 입장은 아니잖아. 상현 씨랑 내 험담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있을 수도 있겠지. 결국 집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딱히 이런 기분에 혼자서 어디를 가기도 그랬다. 이은정, 역시 넌 혼자가 어울리는 건가? 네 주제에 누군가와 좋은 시간 보내기는 과분하기만 하겠지. 지하철은 복잡한 퇴근시간을 지나 한산해져 있었다. 내리기 전 몇 정거장을 남겨두고 빈자리가 나오기도 했다. 역을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 길이 왜 그렇게 멀어 보이는지.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을 것 같아 편의점에 들렀다. 술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캔 맥주 세 개에 마른 오징어와 쥐포를 샀다. 오징어와 쥐포는 굽기도 귀찮을 테니까 그냥 생으로 먹어야겠다. 아니지. 오징어는 그렇다 쳐도 쥐포는 생으로 먹을 수 없지 않나? 굽는 김에 같이 굽던가. 어이가 없다. 이런 상황에도 오징어와 쥐포를 구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니.
맥주와 안주거리가 든 비닐봉지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걷다 보니 처량한 기분이 가슴 윗부분에서부터 들기 시작해서 목을 타고 올라와 머리까지 도달했다. 심수봉 노래가 생각났다. 누가 듣기라도 할 거라는 걱정은 들지도 않았다.
“그대 내 앞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눈물이 핑 돈다. 울 일은 아니지.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애처럼 왜 그래. 다 내 스스로 망쳐놓고. 그 다음 구절이 뭐더라. 노래 가사를 생각해내려는데 집 근처 다다른 곳에 어둑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시커먼 남자의 형상이 골목 어귀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요즘 여성혐오범죄가 많다던데 설마 나를 노리진 않겠지? 그래도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으니까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골목 한 편으로 붙어서 걸었다. 조금만 지나가면 집이니까 여차하면 그대로 뛰어들 준비도 했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온몸의 신경은 곤두새운 채로 종종걸음을 쳤다. 문 바로 앞까지 도달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은정 씨?”
진우 씨?! 번쩍, 황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진우 씨? 진우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어, 어, 어∙∙∙∙∙∙.”
머릿속이 텅 비었다. 아니 하얗게 차올라서 어떤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아 반복해서 어, 라고 너무나 멍청하고 어리숙하게 버벅거렸다.
“은정 씨 맞군요. 혹시 집을 잘못 찾았나 싶었어요.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고 메시지를 남겼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말이죠. 그럼 안 되는 거 아는데 요즘 사회가 하도 흉흉하기도 하고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들어 가만 있을 수가 있어야죠. 은정 씨 집주소를 알아내려고 사진 모임 회장님한테 연락을 드렸더니 이분 저분 알아보시고 미란 씨라는 분 연락처를 주셨어요.”
미란 언니와 통화를 했나 보다. 언니는 집에 놀러왔던 적도 있으니까.
“은정 씨, 오늘 만나기로 한 거 기억하죠? 무슨 일 있었어요? 약속장소에서 계속 기다렸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설명을 하고 싶은데, 정말 간절하게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데, 내가 얼마나 설레면서 오늘을 기다렸고 일부러 일찍 나와서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으려고 했었다고 막 쏟아내고 싶은데, 오히려 그럴수록 가슴 밑바닥에서 튀어나오려던 말들이 막혀서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어, 어, 그게, 그게요.”
막힌 말들을 뱉어내려고 용을 쓰니까 몸이 배배 꼬이는 느낌이 든다. 연단에 올라 선 연설가처럼 손을 들어 휘젓는데 진우 씨가 빤히 보고 있는 게 느껴져 전신에 불길이 닿은 것처럼 열이 난다. 휘익, 바람이 불어 주변을 흩어버리며 지나간다. 쓰레기 봉지가 날리고 뭔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같다. 내 앞머리가 눈을 가리며 흘러내린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눈을 찔러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려 손을 들려다 멈췄다. 그 사람의 손이 먼저 움직여서 앞머리를 가만히 넘겨주었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진우 씨가 나를 내려다본다.
“나랑 만나기 싫었던 건 아니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까 답답해서 고개가 먼저 반응한다. 왜 간절할수록 몸은 따라주지 않을까. 하려는 모든 말을 쏟아내고 싶은데 나오려는 말들이 너무 많아 어느 한 곳에서 막혀버렸는지 입에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내 피부에 닿는 그 사람 손이 차다. 밤공기가 차가운 시간에 나를 오래 기다려서 그렇다면 내가 너무 미안하다. 할 수만 있다면 가만히 내 손에 쥐고 덥혀주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미, 미안해요. 하나가 문정동에 꼭 가야 한다고 해서.”
“하나 씨가 문정동에요?”
앞뒤 없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걸 이해할 리가 없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그게, 진우 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하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평소 그러질 않는데 어떻게든 말을 뱉어내려고 하니까 손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무대에 선 웅변가들이나 가수들이 크게 팔을 휘젓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머릿속으로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보려고 조합을 하자 손이 멋대로 앞으로 나아간다. 자칫하면 진우 씨를 건드릴 것처럼. 그러자 진우 씨가 내 손을 살며시 잡아준다. 아직 손이 차다. 생각하고 있던 문장들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의 손을 내 두 손으로 포개서 덮고 문질렀다.
“손이 많이 차네요. 밖에서 오래 기다리셨어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게 된다.
“미안해요. 만날 때마다 늦어서 기다리게 하고. 보고 싶었던 사진도 보지 못하고 이런 어두운 곳에서 추위에 떨게 만들고.”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더니 울컥한 기분이 든다. 그러면 안 되는데 눈시울이 젖어든다. 이런 상황에 진우 씨한테 우는 모습마저 보인다면 오늘은 그걸로 최악이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의 손을 문지르던 내 손을 어느새 그가 쥐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그의 입술이 주저하듯 달싹인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 그렇지만 이미 입에 걸려서 다시 집어넣을 수 없는지 말을 꺼낸다.
“오지 않는 은정 씨를 기다리면서, ∙∙∙∙∙∙, 사진전에 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 않았어요. 은정 씨가 오지 않으니까 그걸 견디기 힘들더군요.”
살면서 그렇게 집중했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꺼내는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으면서 받아들였다.
“내가 오늘 정말로 보고 싶었던 건 사진이 아니었어요. 은정 씨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나 봐요.”
머리가 점점 텅 비어간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빛으로 꽉 들어찬 것 같다. 진우 씨가 하는 말을 귀로 듣긴 하는데 머릿속에서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질 못한다. 진우 씨가 보고 싶었던 게 나라고?
“살면서 누군가 그렇게 간절히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요. 은정 씨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은정 씨 사는 곳 주소를 알아내고 찾아왔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 입술 위로 포개진다. 입맞춤을 해본 경험이 있지만 이건 뭐랄까 키스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처음 해보는 키스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키스를 잘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님 그라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몸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 중 하나가 입술이라던데 내 몸의 가장 민감한 곳이 그의 가장 민감한 곳과 닿자 온몸으로 그 감각이 확 퍼져나간다. 가장 불쾌했던 입맞춤은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마구 집어삼키는 입술이었는데 그는 조심스레 날 살피고 배려하면서 다가왔다. 키스 자체보다도 날 배려해주는 그의 태도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내가 준비가 될 때까지 한 발짝 물러나 기다려주는 마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몸을 앞으로 밀면서 그의 입술을 눌렀다. 내 혀가 살짝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간 듯도 하다. 놀란 듯 그가 잠시 멈췄다 더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곤 생각이 멈췄다.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몸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고 끌어당겼다. 내 주변의 시간이 멈췄다. 이 세상에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