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하나 씨 부탁으로 은정 씨도 오기로 했다는 말에 그럼 중간에 만나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선뜻 그러자는 응답을 들었다. 그 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은정 씨가 보고 싶기도 했다. 약속한 장소에 차를 대고 은정 씨를 찾으니 저만치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를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시네요.”
은정 씨의 얼굴이 붉어진다.
“죄송해요. 항상 늦고.”
“아, 그냥 한 소린데. 신경 쓰지 마세요.”
웃어주니 그녀도 같이 웃는다.
“제가 다음엔 한 시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약속해요.”
“그럼 그 약속 지키나 보려고 만나야겠네요.”
“아, 그렇게 되나요. 제가 데이트 신청 한 거네요.”
이번엔 더 환하게 웃는다. 상현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저 은정 씨를 만나러 온 기분이 든다. 겸사 겸사다. 상현을 말리러 가는 김에 은정 씨도 보고.
“상현 씨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그 인간 욱하는 성격이 살짝 있거든요. 평소에는 사람도 잘 사귀고 대인관계가 무척 좋은 편인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아니다 싶은 일에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어 뜯어고치려고 하는 면이 있어요. 나쁜 녀석은 아닌데.”
“상현 씨 나쁜 사람 아닌 건 잘 알죠. 먼저 와서 말 걸어주시고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참 따뜻한 분이신 것 같던데. 이건 모두 하나 잘못이에요. 걔가 좀 더 처신을 잘 했어야 하는데.”
물어보기 살짝 주저했지만 일단 말 나온 김에 둘러대듯 넌지시 건넸다.
“하나 씨는 어쩌다 그 기장과 엮이게 됐어요?”
“아무래도 같은 직장에 다니니까 일 때문에 자주 얼굴 마주치고 그러다 친해진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유부님이라는 건 하나가 헤어지고 나서 말해주더군요. 그런 내막을 몰랐을 땐 내심 두 사람이 잘 되서 얼른 결혼까지 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꼬일 줄 몰랐죠.”
다음 말을 꺼내기가 뭣했다. 괜히 물어본 것 같기도 하다. 잠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은정 씨가 살짝 내 눈치를 본다. 내가 고개를 돌리니 얼른 시선을 창밖으로 향한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가 전해진다. 설익은 사과향과 딸기향이 섞여 묻어나온다.
“상현이 이 인간은 꼭 그런 식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기가 먼저 말을 걸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주고 그래요. 그런 상현에게 오지랖이 넓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웬만큼 정이 없으면 그러기가 쉽지 않죠.”
내가 주저리 꺼내는 말을 은정 씨가 집중해서 들어준다. 말을 들어주며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눈망울이 평소 말이 없는 나를 자꾸 말을 많이 하도록 만든다.
“이번 일도 하나 씨 생각해서 이렇게 열심히 나서는 거지 오히려 자기 일이었다면 이렇게 흥분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게요. 상현 씨 사람이 너무 좋으셔서 인생 힘들게 사시는 게 아닌가 걱정되네요. 하나한테 단단히 일러줘야겠어요. 스스로 단속 잘해서 다른 사람 힘들게 하는 일 없도록 하라고. 상현 씨한테 더욱 잘하는 것도 잊지 말라고 해야겠네요. 상현 씨 같이 좋은 사람 또 만나기 힘드니까 후회할 일 만들지 않, 게, 요.”
운전 중이라 생각이 흩어져서 그랬는지 묘하게 은정 씨가 건네는 마지막 단어가 띄엄띄엄 떨어져서 잦아드는 것처럼 들렸다. 은정 씨 목소리가 흔들렸던 듯했지만 방향을 트느라 금세 주의가 운전에 쏠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슬쩍 주변을 살피는 척 은정 씨를 보니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지 고개가 아래를 향한 채로 발끝을 쳐다보고 있다. 어떤 말을 꺼낼까 고민하다 하나 씨가 다니는 직장의 간판을 발견했다.
“거의 다 온 것 같긴 한데 주차할 곳을 찾아야겠는데요.”
“하나 만나러 여기 몇 번 와본 적이 있어요. 방문자 주차장이 저기 아래로 내려가면 있거든요.”
혼자 왔으면 헤맸을 텐데 은정 씨가 일러준 대로 방향을 잡으니 어렵지 않게 방문자용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었다. 항공회사 본사라 그런지 처음 온 사람은 길을 잃기 쉬울 정도로 건물의 크기가 컸다.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은정 씨를 앞에 세우고 그 뒤를 따랐다. 은정 씨가 1층 안내소로 가서 하나 씨의 이름을 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하나 씨가 나타났다. 은정 씨와 통화한 후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상현 씨 만났어?”
“아니, 아직. 혹시나 싶어 천기장 찾으러 가봤는데 외출하고 없더라고.”
“외출?”
“방문객이 와서 같이 나갔다고 하던데.”
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상현이랑?”
“그걸 모르겠어요.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방문객이 아닌 이상 굳이 방문자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거든요. 누구랑 나갔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네요.”
하나 씨의 표정이 어둡다. 뭔가 일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게 역력하다.
“어쩌죠, 진우 씨? 천기장 그 인간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는데 상현 씨가 괜한 실수라도 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찾아야죠. 같이 나갔다고 하는 걸로 봐서 우격다짐으로 끌어낸 건 아닐 테고 일단 누구랑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겠어요. 하나 씨, 그 천기장이라는 자에게 연락이 닿을까요?”
내 말에 하나 씨의 얼굴이 새초롬해진다. 별로 달갑지 않은 부탁을 받은 모습이랄까. 손에 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하나 씨를 은정 씨가 재촉한다.
“하나야. 네가 그 인간이랑 말도 섞기 싫은 마음은 알겠는데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상현 씨 생각을 해야지.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전부 상현 씨를 위해서라고.”
“그, 그래. 그렇지. 알어, 안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나 씨는 좀 더 주저한다. 그러더니 단축 번호를 찾기 위해 화면을 건드린다.
“뭐야, 너. 행동은 그렇게 하면서 아직 그 인간 번호를 단축 번호키에서 삭제하지도 않았어?”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정말이야. 내가 요즘 이런저런 일로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잖아.”
하나 씨의 말투를 딱히 변명조라고 집어서 말하긴 그랬지만 당황하는 모습은 티가 확실히 났다. 아직 미련이 남았나? 하나 씨가 다급하게 전화번호를 찾아내서 통화 연결을 시도하자 잠시 후 전화기에서 신호음이 들린다.
“여보세요.”
“흠, 아, 저기, 천진환 기장님?”
“네, 그런데요. 어, 하나 씨. 아니,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또 연락을 하는 겁니까. 사람이 귀가 있으면 알아들어야지 말이야.”
전화 건너편에서 옆에도 들릴 만큼 큰 소리를 질러댄다. 하나 씨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싹, 바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정도로 발개진다. 하나 씨가 더 이상 말을 잇기 전에 은정 씨가 하나 씨 손에서 전화기를 낚아챈다.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를 켜고 조심스레 인사를 건넨다.
“저기, 진환 씨. 안녕하세요, 저 은정이에요.”
“어어, 예, 은정 씨. 안녕하세요.”
“네, 저어, 혹시 지금 어디세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제가 어디 있냐구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는 길입니다.”
“급한 일이요? 실례지만 동행이 있으신가요?”
불쾌하다는 반응이 바로 나온다.
“그건 왜 물으시죠?”
“네? 저, 그게요, ∙∙∙∙∙∙.”
은정 씨가 나를 본다. 딱히 할 말이 없는 거겠지. 이럴 땐 뭐라고 한다. 다급하게 은정 씨 귀에 대고 속삭였다.
“차라리 경찰이 찾아왔다고 하세요. 취조할 일이 생겼다고.”
경찰이라는 말을 꺼내자 은정 씨 눈이 동그래진다. 소리가 전해지지 않게 전화기를 멀리 떼어낸다.
“그럴까요? 경찰이라고 해도 될지.”
“그 편이 나을 겁니다. 열 명 중 아홉은 경찰이라는 말만 들어도 조심하고 저자세가 되거든요. 그 천기장이라는 자도 일단 들어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설명은 차차 하는 거죠.”
은정 씨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화기를 가까이 댄다. 하나 씨는 그저 우리가 하는 행동을 옆에서 보고만 있다. 은정 씨가 경찰이라는 말을 꺼내자 건너편에서 의외라는 말투로 반응한다.
“아니 오늘따라 경찰에서 왜 자꾸 나를 찾는 거지? 지금 나도 경찰서에서 나온 분이랑 있어요.”
그 말에 우리 세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본다. 이건 뭐 보지 않아도 알겠다. 상현이 같이 있는 것이다. 은정 씨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전화기를 건네라고 손짓을 했다. 은정 씨는 무슨 위험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나에게 하나 씨의 휴대폰을 조심스레 건넸다.
“아,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영등포경찰서에서 나온 남진우라고 합니다. 잠시 천진환 씨에게 여쭤볼 말이 있어서요. 혹시 지금 다른 형사와 같이 계십니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떠름하다.
“네, 그렇습니다. 제 기억에는 이렇게 형사분들이랑 대화를 나눌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죠. 제 직무와 연관된 겁니까? 아님 저희 가족이랑?”
“먼저 묻겠는데요, 혹시 지금 같이 계신 형사 이름을 아시는지요?”
“저한테 본인 소개를 하긴 하셨는데 이름을 처음 들어선 기억하기 쉽지 않죠.”
“그럼 괜찮으시면 잠시 전화기를 그 형사한테 건네주시겠습니까? 제가 잠시 통화를 했으면 하는데요.”
“네, 그러지요.”
계속 떨떠름한 목소리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자기를 찾아대니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저를 바꿔달라고 했다구요?”
“네.”
건너편에서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이건 분명 상현의 목소리다.
“지금 운전 중이니 나중에 통화하자고 하시지요.”
거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박상현 형사님! 어서 전화기 받으시지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안 봐도 뻔하다. 둘 다 상대방을 살피고 있겠지. 전화기를 피하고 싶은 상현이와 전화기를 건네야 할 천진환 기장. 결국 상현이 전화를 받는다.
“음, 왜?”
“왜냐고?”
“나 운전 중이야.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해.”
한바탕 고함을 지르려다 자제했다. 지금 이 순간 상현을 놓치면 찾기 더욱 어려워진다. 달래듯이 말투를 바꿨다.
“운전 중이야? 어디로 가는데?”
“갑자기 목소리는 왜 그래? 너답지 않게 많이 상냥하다.”
욱, 하고 속에서 올라온다. 한 소리 하려다 억지로 집어넣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어디야?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멀쩡한 시민 납치하는 거면 일 엄청 커진다.”
“멀쩡한 시민?”
옆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살짝 낮춘다.
“저 인간이 멀쩡한 시민이야? 한 여자의 가슴을 짓밟아놓고. 너도 아까 들었지? 하나 씨한테 하는 말투.”
“알았어, 알겠는데, 지금 방법은 옳은 게 아니잖아. 하나 씨 복수를 해주려면 제대로 방법을 찾아서 해야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완전 막무가내잖아.”
“내가 무슨 토막 살인이라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살짝 손만 봐주겠다는 거야. 다시는 하나 씨 괴롭히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게.”
“토막 살인이요?”
상현이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옆에 있던 천기장이 ‘토막 살인’이라는 말은 어떻게 들었나 보다. 다급하게 묻는 말이 들린다.
“제가 지금 토막 살인이랑 연관된 겁니까? 누가 죽었어요?”
“잠시만요. 지금 업무 차 통화중입니다.”
업무 차 통화는 무슨. 이 인간 배배꼬인 심사를 어떻게 달래지?
“상현아, 이러지 말고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일단 어디로 가는지부터 말해 봐.”
“그건 알아서 뭐하게?”
상현이 일부러 옆에서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키운다.
“잠시 천진환 씨에게 협조를 부탁한 겁니다. 같이 경찰서로 가서 필요한 정보를 질문할 계획이구요.”
“너, 영등포서로 가는 건 아니지?”
다시 목소리가 잦아든다.
“거기 가면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겠냐? 당연히 거긴 아니지.”
“그럼 어디로 가는데?”
“잘 생각해 봐. 바빠서 끊는다.”
“야, 박상현! 상현아!”
통화가 끊긴다. 하나 씨와 은정 씨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젓자 두 사람 다 낭패한 기색이다.
“천기장이랑 상현 씨가 같이 있는 건가요?”
“네.”
“지금 어딘가로 이동하는 중인데 영등포서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어디로 가는 거죠?”
“그걸 말해주질 않네요.”
“아, 어떡해.”
하나 씨에게 다시 전화해보라고 하려다 멈췄다. 계속 성가시게 굴면 상현이 더욱 흥분하게 될까 염려가 된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빨리 따라잡아야 하는데. 이 자식,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하나야, 진정해.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어떻게 이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냐고. 지금 상현 씨랑 천기장이랑 같이 있다는데. 꼭 시한폭탄이 터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야. 어쩌죠, 진우 씨?”
“빨리 상현이가 향하는 곳을 알아내야죠.”
“어디 짐작 가는 곳이 없으세요?”
“영등포서로 가는 게 아니라면∙∙∙∙∙∙.”
상현이 함께 경찰서로 가서 질문할 거라고 했었다. 그렇지만 영등포서로 가는 건 아니다. 그 천기장이라는 인간을 아무 데나 데리고 가서 겁을 줄 건 아닐 테고 어디로 간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을 만한 곳? 설마 거기?
“일단 차로 가시죠.”
“어디로 가는데요?”
하나 씨가 다급하게 묻는다.
“저랑 상현이가 첫 발령 받은 곳이 있어요. 갓 경찰학교를 졸업한 뒤 새파란 신입으로 처음 일했던 곳인데 한참 차를 타고 들어가야 나오는 시골에 위치한 파출소입니다. 거기서 다른 곳으로 차출된 지 오래됐지만, 가끔 생각 날 때면 상현이랑 같이 들러 친하게 지낸 직원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술도 한 잔 걸치곤 하지요. 거기 일하는 분들이랑 정이 많이 쌓여서 말이죠.”
말을 하는 동시에 빨리 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도록 손을 저어 재촉했다. 두 사람 다 내가 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집중하며 종종 걸음을 뗀다.
“그럼 상현 씨가 그리로 향했다는 말씀이세요?”
하나 씨를 보니 침착해야 한다는 은정 씨의 말은 전혀 효과가 없어 보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하고 초조한 안색이 짙어진다.
“아무래도 그리로 가면 상현이가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쉽지요. 모두 가족같이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 그 천기장이 희대의 악당이라고 상현이 자기 식대로 설명하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같이 흥분해서 몰아세워줄 겁니다.”
설명은 거기에서 멈췄다. 어서 차로 가는 게 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상현을 따라 잡아야 일이 커지는 걸 막을 수가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이야 어쩔 수 없는 거고.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하나 씨는 나를 향해 질문을 멈추질 않는다. 불안해서 그런지 말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그나마 진정이 되는 듯하다. 그런 하나 씨를 위해 계속 말을 받아주었다. 하나 씨가 쉼 없이 떠들어대는 가운데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던 은정 씨가 차가 잠시 멈췄을 때, 무심코 바깥 풍경을 보며 툭, 말을 꺼낸다.
“우와, 벌써 저렇게 익었네. 곧 추수해도 되겠는 걸.”
“야, 넌 이런 상황에서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상현 씨가 걱정되지도 않아?”
“어, 미안. 난 그냥 눈에 들어와서 한 말인데.”
“어떡해. 상현 씨가 이번 일로 문책이라도 받게 되면 난 평생 악몽에 쫓기게 될지도 몰라. 내가 미안해서 평생 발 뻗고 자기라도 하겠어.”
“네가 왜? 상현 씨한테 일부러 그렇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상현 씨가 스스로 나서서 이러는 건데 네가 죄책감 들 일은 아니지.”
“그래도 나 때문에 이러는 건데, 내가, 내가, 어떻게∙∙∙∙∙∙.”
하나 씨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뚝, 뚝, 사이를 두고 천천히 흘러내린다. 이럴 때 그나마 은정 씨가 같이 있어 다행이다. 나 혼자 하나 씨 옆에 있었다면 정말 난감했을 것이다. 그런 하나 씨의 우는 모습을 못 본 척 앞만 보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은정 씨가 하나 씨를 달래기 위해 티슈를 건넨다.
“왜 울고 그래? 아직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잖아? 빨리 상현 씨만 따라잡으면 아무 일 없을 거야.”
“너무 늦으면 어쩔 건데. 너, 무, 늦으면, 어으흑∙∙∙∙∙∙, 내가 미안해서 어쩐다니.”
통곡까지는 아니고 작게 탄식을 하는 정도에서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은정 씨가 운전에 방해된다며, 내 핑계까지 대며 어떻게든 하나 씨의 울음을 멈추려고 달랜 게 효과가 있었다. 울음이 크게 터지진 않았지만 한동안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지다 겨우 멈춘다. 은정 씨가 하나 씨 등을 조심스레 쓸어준다. 하나 씨는 은정 씨가 건네준 티슈를 코에 대고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다. 다들 말이 없이 조용히 있길래 분위기를 달랠 겸 은정 씨를 향해 답했다.
“벼가 잘 익긴 했네요. 금방 추수할 시기가 오겠어요.”
“그렇죠. 식혜 담그면 맛나겠어요.”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한 소리를 하려던 하나 씨가 은정 씨와 눈을 마주친다. 은정 씨가 반쯤 미안하고, 반쯤 짓궂은 표정을 만들자 그걸 보던 하나 씨가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뭐야, 왜 나만 심각한 건데. 다들 진지하게 상황을 받아들여주세요.”
“진우 씨야 열심히 운전하고 있고 우리야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이왕 가는 길인데 기분 좋게 가자, 응?”
빨개진 눈으로 하나 씨가 밖을 보더니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는다.
“벼가 잘 익긴 익었네, 정말.”
무슨 기가 막히게 웃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까르륵, 은정 씨가 웃음을 터뜨리자 하나 씨도 함께 웃어댄다. 나도 그 웃음에 전염되어 실없이 미소 지었다.
“하나 씨, 지금 엉덩이에∙∙∙∙∙∙.”
“지금 무슨 말 하실지 알거든요. 굳이 그런 건 상기시켜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하나 씨가 더 신나게 웃는다. 은정 씨도 덩달아 같이 웃고. 어느새 다 같이 어딘가로 놀러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상현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그 녀석 잘못이다. 굳이 이렇게 사고만 치지 않았어도 넷이서 어딘 가로 같이 놀러 가면 이보다 훨씬 좋았을 거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는데 일이 잘 마무리되면 좋겠다. 그럼 오늘 하루 시작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은정 씨와 좋은 시간을 보낸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을 테니까. 상현아, 제발 사고 치지 말고 있어라. 괜히 좋은 하루 망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