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보령. 충청남도 안에 자리한 도시로 머드 축제 덕분에 꽤 유명해졌다. 서해안 교통의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 그 이름은 익히 들어봤지만 제대로 알진 못했다. 일몰과 일출 사진을 찍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바다가 가까운 지역 몇 군데를 후보지로 물색했고, 그 중에서 보령이 더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섬을 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령시에 속한 죽도는 섬 전체가 각종 휴양시설을 갖춘 관광단지로 조성되었는데 현재도 개발 중이다.
죽도 안에 자리한 상화원은 주변 전체를 하나의 정원으로 설계해서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놓았다. 서울에서 차로 달려 막히지만 않으면 대략 2시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위치로 수도권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다, 상화원에 딸린 숙소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원형 계단이 설치되어 하늘과 땅으로 연결된 경치를 그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렇게 눈도장을 찍었고 한 번은 꼭 가봐야지 했지만 어째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자꾸 미뤘다. 가족이나 지인과 같이 가려니 사진을 찍으려고 가는 것이 주목적인데 오히려 관광만 하다 올 것 같아 꺼려졌다. 상현을 꾀려고 하자 성인 남자 둘이서 거길 가려니 흥이 안 난다며 참가 인원을 더 모아보겠다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지연되었고 어느 순간 잊고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을까 믿어지지 않는다. 설마 했는데 은정 씨가 흔쾌히 좋아요, 라고 했을 때는 사실 속으로 조금 놀랬다. 그렇게 쉽게 허락할 줄 몰랐다. 이제 가기로 해놓고 나니 오히려 더욱 주저된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가장 큰 문제는 항상 직장에서 붙어 지내는 상현에게 적당한 구실을 둘러대는 일이다. 내가 어디에 가고 무엇을 하고 심지어 밥을 먹을 때 어느 식당에 간다는 것조차 내 가족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눈을 피하는 게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혼자서 사진 찍으러 간다면 뭐라고 할 일도 없겠지만 은정 씨랑 같이 간다는 사실을 숨기려니 은정 씨 친구 하나 씨까지 엮여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 씨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은정 씨가 동의했지만 그 두 사람을 동시에 속여야 하는 것이 상황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었다. 요 근래 들어 부쩍 가깝게 지내다 보니 조금만 틈을 보이면 바로 알아챌 것이 뻔했다. 꼭 무슨 범죄 계획을 꾸미듯이 은정 씨와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았다.
“아프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럼 문병 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 아프다고 하면요?”
“저랑 상현이는 서로의 가족을 잘 알고 지내서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어요.”
“하나도 저희 엄마랑 오빠와 친하게 지내서요. 아무래도 아프다는 핑계는 무리겠네요.”
“같은 부서에 근무하다 보니 일 핑계를 댈 수도 없어요.”
“하나도 제가 일하는 곳이랑 근무시간을 훤히 꿰고 있어서요. 심지어 저희 매니저 언니와도 친해요.”
“흠, 두 사람 다 사진 동호회 소속이라 사진 동호회 핑계를 대기도 그렇고. 아, 그럼 이건 어떨까요? 은정 씨와 제가 서로의 핑계거리가 대주는 겁니다.”
“서로의 핑계거리요?”
“네, 서로 구실을 만들어주고 나중에라도 상현이나 하나 씨가 물으면 상대방을 위해 거짓말을 해주는 거죠.”
“그럼 어떤 핑계거리요?”
“그건 이제 차차 생각해봐야겠네요.”
풋.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같이 은정 씨와 뭔가를 한다는 것이 쏠쏠한 재미를 준다. 인생의 새로운 활력소가 된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눈치 빠른 상현이가 이미 지적을 했었다.
“입 좀 다물고 다니시지?”
“뭔 소리야?”
“허파에 바람 들어갈 수 있어. 그럼 큰 일 나.”
“허파?”
“너 요즘 자꾸 실실 웃고 다니잖아. 무슨 좋은 일 있어?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질 않는다.”
“별 싱거운 소리 다 하네.”
그런 줄 몰랐다. 나름 몸이 가벼워진 것 같고 가끔씩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릴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상현이가 지적을 할 만큼 그렇게 웃고 다니는 줄 몰랐다. 이러다 정신줄 놓을까 걱정이긴 한데 그렇다고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점점 중독되는 기분. 너무 심해지면 좋지 않겠지만 지금 이 정도면 딱, 좋다. 더도 덜도 말고 이 만큼만.
“야, 그때 어떻게 됐어? 하나 씨 막 울면서 뛰쳐나왔잖아? 안에서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네.”
“참, 빨리도 묻는다. 나름 그 인간 겁을 준다고 했는데도 영 안 먹혀들잖아. 윽박질렀다가 달래도 봤다가 나중에는 말도 안 되는 법률용어 둘러대면서 형량까지 들먹였지. 감옥 얘기가 나오니까 그제야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군. 그러면서 이런저런 변명을 둘러대기 시작하는 거야. 막판에는 모든 잘못을 하나 씨한테 돌리는데 욱하고 올라오더라. 확,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는데 하나 씨가 분했는지 그 자식 이야기를 듣다가 울음을 터뜨리더라고.”
상현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깐다. ‘어라, 갑자기 왜 이래?’, 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잠깐 기다려주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어색하게 말을 뱉는다.
“여자들 울면 당황스럽잖아.”
“당연하지.”
“밖으로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문을 열어줬는데 하나 씨가 말도 없이 달려가는 거야. 앞에 앉아있는 그 기장이라는 작자는 신경 쓰이지도 않더군. 그저 하나 씨 따라잡으려고 같이 달렸어.”
“그리곤?”
허, 이 자식 또 말이 없다. 설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눈을 피한다. 이렇게 수줍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너 꼭 그러니까 날 무슨 범죄자 취조하듯이 대한다. 내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그런 적 없는데. 지금 네가 스스로 찔려서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잖아.”
“찌, 찔리긴 내가 뭘 어쨌다고.”
“왜 목소리는 커지는 건데?”
“목소리 안 커졌거든!”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흘끔거린다. 상현이 내 팔을 잡아끈다.
“여긴 사람들 시선이 있으니까 잠깐 저리로 옮기자.”
“네가 소리 질러서 그렇잖아.”
“내가 언제 소리 질렀다고!”
하, 자꾸 성질을 낸다.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게 군다.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굳이 이런 으슥한 곳으로 오다니 얼마나 심각한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이제 말할 준비 다 됐냐?”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려고 팔을 접어 가슴팍에 모으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이, 그러니까 괜히 부담스럽잖아.”
상현이 다시 시선을 피하며 뭉그적거리자 그만 한숨이 나온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됐어.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 나중에 준비되면 말 들어줄게.”
당황한 녀석이 내 팔을 잡아끈다.
“어, 야, 잠깐만. 인간, 성질머리 하고는. 알았어, 알았다고. 그게 말이야.”
한 번만 더 질질 끌어봐라. 그냥 가버린다.
“하나 씨가 많이 의기소침해 있더라고.”
“그렇지 않겠어? 이렇게 벌어진 일, 어떻게 보면 하나 씨 자신이 초래한 거잖아.”
“그래도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건 없잖아.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어. 상황이 그렇게 꼬인 게 분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속을 엄청 끓이더라고. 나라면 더 했을 거야. 열 받아서 펄펄 뛰었겠지.”
나라면 그 지경이 되도록 두진 않았겠지.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아 잠자코 있었다.
“하나 씨를 위로해주려는 생각뿐이었어. 그러다 차에서 함께 밤을 보냈지.”
“뭐?”
얼굴을 붉힌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 인간이 수줍어 해? 김상현이?
“뭘 그걸 다시 묻고 그러냐?”
“의도적이었냐?”
“그게 아니라 위로해주려는 거였다니까.”
“어, 허, 잘한다. 그 시골까지 가서 결국 그럴 목적이었군.”
“목적은 무슨!”
마침 지나가던 장현철 경사가 상현의 욱, 하는 목소리를 듣고 멈춘다.
“어이, 자네들 거기서 뭐하나? 설마 두 절친 사이에 싸움이 난 건 아니겠지?”
“싸움이라뇨. 그런 거 아닙니다. 그렇지, 김상현?”
등을 세 번 두드려줬다. 처음엔 살짝 건드렸다 마지막엔 힘을 줘서 때렸더니 눈썹을 찡그린다. 그래도 장경사 앞에서 차마 아픈 티를 내지 못하고 억지로 웃음을 짓는다.
“저희야 항상 베스트 프렌드죠. 이렇게 좋은 동료 관계를 사내에서 본 적 있으세요? 그치, 남진우?”
내 팔을 툭, 툭, 두 번 건드린다. 처음엔 슬쩍 건드린다 싶더니 두 번짼 제대로 팔꿈치를 쳐올렸다. 뼈가 있는 부분을 건드려 얼얼했다. 어라, 이거 장난이 아닌데.
“그럼요. 너무 친해서 탈이죠. 남들이 자꾸 질투한다니까요.”
등을 두 번 툭, 툭, 건드리다 옆구리를 세게 한 대 갈겼다. 목구멍에서 헉, 하고 올라오는 소리가 나한테도 들렸다.
“허허, 하여튼 다 큰 성인들끼리 짓궂게 장난은. 두 사람은 그런 순수한 면이 보기 좋다니까.”
장경사가 손을 흔들어 보이고 가던 길을 간다.
“그렇죠? 보기 좋죠?”
상현이 내 목을 휘어감는다.
“순수해? 이 자식이. 장난이 심하면 장난이 아니라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너 어째 팔 힘이 약해졌다.”
목에 감긴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자세를 낮추면서 허리춤을 끌어안고 숨쉬기 어렵게 졸랐다. 녀석의 얼굴이 붉게 변한다.
“어쭈, 제대로 해보자는 거지?”
힘 겨루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장경사가 다시 얼굴을 내밀더니 미팅에 대해서 말을 꺼낸다.
“아, 참, 있다가 미팅 있는 거 알지?”
우리 두 사람은 금방 팔을 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미팅이요?”
“요즘 골목 시장 근처에서 여자만 골라서 퍽치기하고 핸드백을 훔쳐가는 놈이 있다네. 여럿 당했다나. 관심 사항으로 올라와서 긴급 미팅한다고 하니 참석하라고.”
“그거 고약하네요. 힘없는 여성을 상대로 그따위 짓이나 하고.”
“만만해 보이니 더 그러는 거지. 있다 미팅에서 보자고. 둘이서 사랑 싸움 그만하고.”
장경사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사라진다. 그 뒤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님 서로 경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발짝 떼자 상현이 움찔, 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하, 뭘 그렇게 경계하시나? 이제 슬슬 겁이 나나 보지?”
“겁은 무슨. 항상 미리 준비하는 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거든. 도전하려면 얼마든지 덤벼 봐. 미래는 준비된 자의 몫이거든.”
웃음이 터져나왔다. 상현이도 같이 웃는다.
“꼴깝 떤다. 이제 미래까지 들먹이냐? 너 요즘 운동 안 하지? 움직임이 둔해졌어.”
“둔해지긴. 너야말로 내가 감아대자 풀고 나오지도 못했으면서.”
“참, 나, 이 인간. 끝이 없네.”
내가 상현의 어깨를 툭, 툭, 건드리자 내 팔을 휘어감는다. 나도 질세라 무게중심을 앞으로 밀어댔다. 상현이랑 그렇게 한바탕 했던 게 벌써 며칠 전이다. 지금 나는 차 안에서 은정 씨를 기다리고 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아직 멀었다. 미리 약속한 장소에 차를 댔다. 은정 씨가 차를 주차하기 쉬운 곳에서 만나자고 배려해주어 편하게 주차할 자리를 잡았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꾸 손에 땀이 맺힌다. 긴장하는 걸까? 떨리진 않는데. 아님 떨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은정 씨랑 같이 동행하는 길이 그저 행복하고 즐거울 거라 기대했는데 이렇게 긴장하게 될 줄 예상 못했다. 싫은 일 뿐만 아니라 좋은 일도 스트레스가 된다더니 내 스트레스 수치가 머리 꼭대기까지 근접했다. 자꾸 백미러를 보며 머리 모양새를 한쪽으로 넘겼다 다시 되돌리기를 반복한다. 오늘따라 그 형태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날카로워진 신경을 진정시키려 휴대폰에 저장해둔 잔잔한 발라드 음악을 틀었다. 야간 잠복근무 시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을 때 듣던 음악인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 몰랐다. 멜로디가 조금씩 귀로 흘러들어오자 들썩거리던 머릿속 이미지들이 속도를 늦춘다. 은정 씨를 볼 때쯤엔 잠잠해져 있기를. 그러다 살짝 얕은 잠에 빠졌는지 고개를 떨궜다 싶었는데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창 밖에서 은정 씨가 웃고 있다. 첫인사를 어떻게 건넬까 궁리했었는데 조는 모습이나 보이고 아주 시작이 좋다.
“은정 씨, 지금 도착하셨어요?”
“사실 조금 전에 도착했는데 곤하게 주무시길래 잠시 기다렸어요. 그래도 너무 늦게 출발하면 안 될 것 같아 깨웠는데 많이 피곤하세요?”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그냥 음악 듣고 있었어요. 어서 타세요.”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해도 표시가 다 날 텐데 어쨌든 그렇게 말하고 넘겼다. 은정 씨가 굳이 뭐라고 하진 않는다.
“아니 뭘 그렇게 싸오셨어요?”
“별 거 아니에요. 혹시나 싶어 유부초밥이랑 간단한 간식거리 준비했거든요.”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한다.
“이렇게 차 얻어 타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숙박료는 얼마 나왔어요? 우리 반반씩 내요.”
“아닙니다. 제가 가자고 했는데 그건 제가 내야죠. 은정 씨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 아니에요. 당연히 제 몫은 제가 분담해야죠. 그러지 마세요. 그럼 제가 죄송하잖아요.”
“괜찮습니다. 하룻밤인데다 지금 성수기도 아니라서 부담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차를 출발시키고 나서 잠시 숙박료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은정 씨가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을 사기로 하고 일단락 했다.
“은정 씨도 그런 면에선 은근히 고집이 있네요.”
“죄송해서 그러죠. 이렇게 진우 씨와 동행해서 편하게 가는데 숙박료까지 책임지시면 제가 너무 미안해서요.”
“유부초밥이면 됩니다.”
은정 씨가 미소 짓는다.
“겨우 유부초밥이요?”
“초밥 엄청 좋아해요. 그거면 이렇게 운전기사 노릇에 숙박료까지 지불한 가치가 있을 듯한데요.”
허허. 웃고 나니 내 자신이 실없어 보인다.
“그럼 다음엔 아예 찬합 가득 유부초밥을 만들어와야겠는데요. 김밥 좋아하세요? 김밥도 잘 만들어요. 아주 배부르게 먹을 만큼 준비해 올게요.”
은정 씨가 같이 웃어주며 답한다.
“유부초밥과 김밥을 맛나게 먹을 장소로 어디가 좋을까요?”
내 물음엔 답을 하지 않고 밖을 내다본다 싶더니 묻는다.
“저기 창문 열어도 될까요? 오늘 바깥 공기가 좋아 보이네요. 잠깐 바람을 쐬고 싶어요.”
“편하신 대로요.”
창을 내리더니 살짝 고개를 내민다. 바람에 날려 앞머리가 살랑, 흔들린다.
“진우 씨와 상현 씨는 참 친해 보여요? 그런 친구를 갖는다는 건 정말 행운이죠.”
“은정 씨와 하나 씨도 아주 좋은 단짝으로 보이는데요. 은정 씨도 행운아라는 말이군요, 그럼.”
잠깐 사이를 뒀다 말을 이었다.
“살아오면서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은 제게 질문을 하면서도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질문에 답하는 사람은 저인데 제 답변이 듣는 사람 귀로 들어갔다 나오면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대답으로 바뀌어있는 걸 종종 발견하곤 했어요. 그럼 더 이상 그 사람과 말을 섞기가 싫어지죠. 인생에서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관계를 엮으며 살 수 있겠어요. 그런데도 제 성격이 워낙 고지식해서 그런지 그렇게 계속 단절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주변에서 자주 듣는 충고가 대인관계 폭을 넓히라는 건데 그게 참 바꾸기가 어려웠어요.”
“진우 씨가 어린 아이도 아니고 충고를 듣는다고 하루아침에 성격이랑 태도가 바뀌진 않겠죠.”
“상현이는 달랐어요. 제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지요. 제가 하는 말을 자기 안에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원하지 않으면 굳이 충고를 건네지도 않아요.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하니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그 녀석과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좋고 가슴이 답답할 땐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도움이 됐어요.”
“그게 바로 베스트 프렌드의 정의가 아닐까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좋은 사람.”
“그렇겠죠. 게다가 직장 동료라서 업무로 인한 어려움을 겪을 때 든든한 지원군이 된답니다.”
“그러네요. 저도 하나가 직장 동료였다면 일하는 게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은정 씨가 하는 말을 들으며 마사지사로 일하는 하나 씨와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은정 씨를 상상해봤지만 둘 다 그다지 어울리진 않는다.
“진우 씨는 보령에 가본 적 있어요?”
“아니요. 저도 처음입니다. 가보자고 생각은 자주 했었는데 어째 기회가 닿질 않았어요. 은정 씨가 이렇게 같이 가줘서 겨우 시간을 낸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언제가 될지 모르게 계속 미뤄두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은퇴하고 나서일 수도 있었겠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같이 웃었다. 사람마다 웃는 소리의 톤이 다르다고 하던데 그녀의 웃음소리는 듣기 딱 적당하다. 아직까지 은정 씨가 웃을 때 거슬린 적이 없다.
“이렇게 운전하고 가셔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일몰 사진 찍으러 나가야 할 텐데 힘들지 않으시겠어요? 게다가 일출 사진 찍으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구요.”
“보령까지야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요. 명절 때 운전해야 하는 거리에 비하면 이건 뭐 동네 근처 드라이브 가는 정도네요.”
“고향이 어디세요?”
“해남입니다.”
“어? 거기 땅끝 마을 있는 곳이잖아요?”
“그렇죠. 다들 그걸로 많이 알죠.”
“거기 가려면 정말 땅 끝까지 운전해서 가시는 거네요.”
“그렇죠. 우리나라 최남단입니다.”
은정 씨랑 얘기하다 한눈을 팔았는지 분명 미러로 확인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차가 불쑥 시야에 들어온다. 사고가 날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는데 갑작스런 등장에 놀라서 핸들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가 왼쪽으로 쏠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은정 씨가 흔들리는 차 안에서 몸이 한쪽으로 쏠리자 다급히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휘젓는다. 천천히 핸들을 돌리며 기어 위로 손을 내리자 기대했던 것과 뭔가 다른 감촉이 느껴진다. 은정 씨가 기어를 붙잡고 있었다.
“죄송해요. 그만 손이 그리로 향했네요.”
“제가 놀라게 해드렸죠. 원래 난폭운전자는 아닌데 그만 옆에 있던 차를 보지 못했네요.”
내 손이 그녀의 손을 덮고 있다. 손을 빼내려는지 위로 올리는 힘이 느껴지는데 의도적으로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에 대해 힘을 주고 버텼다. 그녀의 당황스런 시선이 전해진다. 이건 그저 반동이었다. 그녀가 힘을 빼고 잠시 가만히 있다. 내 운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기어 위에 놓인 그녀 손 위를 덮고 있는 나의 손. 어쩐지 어색하고 우스꽝스런 자세. 그녀의 손을 모아 쥐었다. 약간 매끄럽고 촉촉하게 땀이 배어나와 물기가 느껴진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녀가 가만히 손을 내맡기고 있다. 퍼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녀의 삶이 나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내맡겨질 수 있을 거라는 기시감. 나 때문에 땀에 젖은 경험을 해야 할지도 모를 거라는 죄책감이 불쑥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감정은 언제나 이중적인 건가. 그녀의 피부에 닿으며 느끼는 감촉이 너무 달콤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해 은정 씨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불편했다. 그저 한 가지 강렬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나 때문에 그녀가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정말 그것만은 진실한 내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