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욕실. 진우 씨가 예약해둔 숙소에 딸린 욕실. 이 안에 들어오고 얼마간 시간이 흘렀는데 선뜻 밖으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계속 여기에 머무르고 있으면 이상한 여자로 생각할 텐데 그래도 밖으로 나가기 망설여진다. 진우 씨가 날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뭣이 그리 두려울까.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제발 부탁이다.
오늘 저녁에 입으려고 일부러 괜찮은 옷을 골라서 가져왔더니 이게 몇 번 빨면서 줄어들었는지 거의 배꼽티가 되었다. 옷을 밑으로 당겨서 내려도 자꾸 속살이 비친다. 진우 씨는 지금 밖에서 무얼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어떻게 차창을 내릴 용기가 났을까? 둘 사이 어색한 공기가 무겁게 느껴져 바깥 바람이라도 들어오면 나을까 싶어 진우 씨에게 창문을 열어도 되냐고 물었었다. 별 것 아닌 그런 행동이 지금 생각하니 무척 대담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혼란스러워서.
유부초밥과 김밥을 맛나게 먹을 장소가 어디 있을까요, 라고 물었던 그. 다시 만나자는 제안이잖아? 아, 머리 아파. 뭘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지. 그저 현실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될 텐데. 진우 씨와 같이 사진 찍으며 좋은 시간 보내려고 보령에 왔다. 더도 덜도 아니고. 다음에 유부초밥과 김밥을 먹기 위해 만나면 그건 확실한 데이트가 되겠지. 그래, 그건 그거고 지금은 사진에만 집중하자. 사진 찍으러 왔으니까 사진만 잘 찍으면 되는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떨리는지 그런 내 모습이 한심하다.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면, 그러면, 자연스럽게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되는 것일까? 그도 나와 같이 받아들일까? 이런 질문, 나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차마, 묻진 못하겠지. 이런 고민 속에서도 유부초밥과 김밥을 맛있게 먹을 만한 장소가 어딘지 자꾸 휴대폰으로 찾아보는 걸 그만둘 수가 없다. 벌써 이렇게 앞서가다니. 그러다 김칫국만 마시며 배를 채울 수도 있는데. 여전히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지만 이제 나가지 않으면 평생 이 욕실에 갇힐까 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가자. 정말 못 봐줄 괴물 같은 얼굴은 아니잖아. 그렇지만 거울에 비친 좁아터진 양미간은 항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눈썹을 확 다 뽑아버릴까?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푼 다음 서둘러 밖으로 나왔었다. 주말이라 차가 막힐 걸 예상하고 일찍 출발했는데도 교통량이 많아 길에서 한참을 허비했다. 거기다가 보령 근처까지 와서 휴대폰 지피에스를 이용해 숙소를 찾으려 했지만 내 폰과 진우 씨 폰 모두 신호를 제대로 잡지 못해 연결됐다 끊기기를 반복했다. 진우 씨가 미리 예약해놓은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일몰과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해 왔는데 일몰을 놓친다면 일의 절반을 이루지 못한 거나 다름없다. 급한 김에 요기는 내가 준비해온 음식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바로 사진 찍을 준비만 해서 숙소 밖으로 나왔다.
진우 씨도 나도 딱히 장소를 정하고 출발한 것이 아니어서 일단 주변을 훑어봐야 했다. 해가 지면서 하늘이 어둑해지는 동시에 공기가 점점 차가워졌다. 긴 팔 옷을 준비해왔는데 그만 급하게 나오느라 숙소에 두고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았다. 이러다 또 진우 씨 옷을 빌려 입게 될까 미리 걱정이 앞선다. 그는 하얀 상의 셔츠 위에 얇지만 보온이 잘 돼 보이는 짙은 남색 재킷을 걸쳤다. 그는 준비성이 참 좋다. 위험한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까? 그에 비하면 난 덤벙대고 어디 갈 때 꼭 뭔가를 빠뜨리고 나오기 십상이다. 그런 모습이 좋은 인상을 주는데 마이너스가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사람의 습성이란 참 고치기 어렵다. 아무리 챙겨도 왜 꼭 하나는 빠지는지 모르겠다.
그가 앞서서 걸어가며 풍경이 제대로 걸리는 장소를 서너 군데 발견하고는 어디를 선택하면 좋을지 물었다. 사진을 찍기 위한 장소를 고를 때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그에 맞춰 이것저것 재보니까 선택의 폭이 두 군데로 좁혀졌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
“어디로 갈까요?”
“진우 씨 생각은 어때요?”
“구석 시선을 가리는 나무만 아니면 저기도 나쁘지 않겠는데요. 이쪽은 전면이 탁 트이긴 했는데 각도가 살짝 아쉽네요.”
“어차피 완벽한 곳은 없으니까 감수할 건 감수해야지 않겠어요. 저는 둘 다 괜찮아 보여요.”
“은정 씨가 고르세요.”
“진우 씨가 골라요.”
“제가 먼저 선택권을 드렸지 않습니까. 얼른 마음을 정하시죠.”
서로 정하라며 티격태격하니 꼭 사춘기 아이들 같다.
“그럼 동전 던질게요. 앞면이면 오른쪽, 뒷면이면 왼쪽이요.”
“아니 그런 게 어딨습니까? 그건 사기죠.”
“사기라뇨? 그게 어째서 사기라는 거죠?”
“본인이 선택할 일을 동전한테 미루다니요.”
대답하기 앞서 웃음이 터진다.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눌러가며 말을 이었다.
“동전한테 미루는 게 아니라 잠시 우연의 힘을 빌리는 것뿐이에요. 지금 우리가 결정을 못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진우 씨와 입씨름하다 그 옆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안녕.”
내가 말을 걸자 대답은 않고 가만히 나를 보기만 한다. 진우 씨도 그 아이를 발견하고 살짝 놀라는 눈치다.
“꼬마야. 너 거기서 뭐하니?”
“저, 꼬마 아닌데요. 벌써 여섯 살이에요.”
진우 씨가 어이없다는 미소를 짓는다. 내가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었다.
“그래, 여섯 살이야? 보기보다 어른이네. 이름이 뭐니?”
“언니부터 먼저 자기소개를 하셔야죠.”
요즘 애들은 참 의뭉스럽다더니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구나. 예의가 없었네. 언니는 이름이 이은정이야. 너는?”
“엄마가 아무한테 이름 말해주는 거 아니랬어요.”
이번엔 진우 씨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막상 난 난감해졌는데 그게 고소하다고 웃는 건가? 눈을 흘기니까 슬그머니 소리를 줄인다.
“그 말도 맞네. 그런데 너는 언니 이름 알았잖아. 너도 알려줘야 공평한 거 아닐까?”
“음∙∙∙∙∙∙.”
잠시 고민을 한다. 알려줘야 하나 그러지 말아야 하나. 그런 아이의 모습이 너무 귀엽다. 생각에 빠졌다 싶더니 내 손에 든 디지털 카메라를 발견하고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어, 그거 카메라에요?”
“응. 디지털 카메라. 예쁘게 생겼지? 언니가 모양이 예뻐서 산 거야.”
“무지 예뻐요.”
아이가 카메라를 이러저리 둘러보는 사이 진우 씨가 옆으로 다가온다.
“은정 씨, 그런 여자로 안 봤는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실속보다 외모를 따지는 사람.”
풋. 미소를 감추며 그의 어깨를 툭, 때렸다.
“아야.”
“엄살 떨지 말아요.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았거든요. 요즘은 전자제품이 전부 상향 평준화 되서 성능은 다 거기서 거기라구요. 그러다 보니 선택은 아무래도 디자인을 보고 했을 뿐이에요. 이왕이면 다홍치마잖아요.”
“어쨌든 외모 보고 골랐다는 얘기는 변함이 없네요.”
“진우 씨 말 대로면 누군지 나한테 선택받은 사람은 엄청 외모가 좋을 건가 봐요.”
그가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는다. 뭐야, 꼭 무슨 칭찬이라도 들은 것 같잖아.
“언니, 그거 한 번 만져봐도 돼요?”
“이름 가르쳐주면 만지게 해줄게.”
“아니, 이제 어린 아이랑 흥정까지 하십니까? 은정 씨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내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자꾸 생각보다 주먹이 먼저 나간다. 그가 이번엔 가만히 있지 않고 내 주먹을 피한다.
“게다가 폭력적이기까지. 이거 큰 일 날 분이네.”
“지금 진우 씨가 날 자꾸 약 올리고 있잖아요. 제가 평소 힘 쓰는 사람도 아닌데 ”
“어허, 이제 거짓말까지 하십니까?”
“거짓말이요?”
“은정 씨 직업이 뭐죠? 그거 하려면 힘 많이 써야 할 텐데.”
듣고 보니 그 말은 맞다.
“대답 잘 하니까 더 얄미워요.”
“뭐라구요?”
“얄밉다구요.”
“거, 참, 바른 말 한 것뿐인데 그런 걸 가지고 밉다니 어쩌나?”
노려보니까 얼굴 한 가득 웃음을 머금는다. 미워하고 싶은데 그리 밉지가 않다.
“언니, 제 이름 황이슬이요. 황, 이, 슬. 만져봐도 돼요?”
아이가 이름을 말하는 중에도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엄청 마음에 들긴 했나 보다. 무슨 귀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내가 건네는 카메라를 받아 든다.
“여기 까만 색 테두리가 번쩍거려요. 이거 어떻게 보는 건데요?”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진우 씨가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보는 거라며 눈 앞 가까이 가져다준다. 그 자세가 능숙하다. 나중에 애 생기면 잘 보겠어. 아니,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여기에 눈을 가까이 대고 봐.”
“보여요, 보여.”
아이가 카메라를 들어 하늘을 봤다, 땅을 보기를 반복한다. 많이 흥분했던지 양볼이 빨갛게 물든다.
“이 카메라로 뭐 찍으실 건데요?”
“일몰이랑 일출 찍으러 왔지.”
“일몰이랑 일출이요?”
“해가 뜨는 모습과 지는 모습을 찍으려는 거야.”
부녀 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둘이 금세 친해졌다.
“어디서요?”
“지금 고르는 중인데, 저기 왼쪽으로 갈지 아님 반대로 오른쪽으로 갈지 여기 아줌마가 결정을 못해서 말야.”
“아줌마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숙녀분께서 마음을 못 정해서 큰일이야.”
한 소리 하려는데 이슬이가 먼저 왼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을 꺼낸다.
“저기는 물 들어오는 자리거든요. 땅이 물러서 오래 못 서 있어요. 가시려면 저기로 가세요.”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잘 됐네. 결정장애 있으신 숙녀분은 마음 편하게 따라오시면 될 듯요.”
“결정장애요? 선심 써서 선택권을 드리려고 한 건데 그렇게 말하시면 오해죠. 게다가 오른쪽 저기로 가려고 이미 마음을 정했었어요.”
“그러십니까?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굳이 머뭇거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죠.”
“선택권을 드리려고 선심 쓴 거라니까요.”
그가 말을 멈추고 킥킥, 거리며 웃는다. 그런 그를 보고 나도 따라 웃었다. 어린 아이들 말다툼 하듯이 티격태격 거리니까 참 유치하게 느껴지는데 그게 조금 더 그 사람과 가까워진 기분이 들게 한다.
“저도 봐도 돼요?”
이슬이 동그랗게 눈을 치켜뜨고 묻는다. 진우 씨에게 의사를 묻듯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보고 싶으면 따라와도 좋아. 그렇지만 사진 찍을 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해야 한다.”
이슬이 진우 씨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나에게 사진기를 건네더니 앞서서 걸어간다. 진우 씨가 그런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입술 위로 올린다.
“참 똘똘해 보이는 아이네요. 이런 시간에 혼자 부모님 기다리는 걸까요?”
“그러게요. 이제 곧 컴컴해질 시간인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여요.”
이슬이 끝자락에 도달해서 흥분한 강아지처럼 주변을 돌아다닌다. 땅에 떨어진 플라스틱 조각을 들여다봤다 땅을 뚫고 올라온 덩굴을 발로 차보기도 한다. 어째 멀리서 온 우리보다 더욱 신이 났다.
“아무래도 혼자 있다 갑작스런 동행이 생기니까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요.”
“안 됐다. 많이 심심했을까요?”
“저기 하늘이 붉어지는데요. 서둘러야겠어요.”
“지지대를 저기쯤 세울까요?”
큼직한 돌을 주워 지지대를 지탱할 수 있게 무더기를 만들었다. 옴폭하게 홈을 파서 그 사이로 지지대를 집어넣자 그가 렌즈 방향을 조정하며 구도를 맞춘다. 난 옆에서 진우 씨가 사인을 주면 바로 셔터를 누를 만반의 자세를 갖추고 기다렸다. 어느새 이슬이 뒤로 와서 우리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본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궁금한 모양새다.
“이슬아.”
누군가 아이를 불러 세 명이서 한꺼번에 뒤를 돌아봤다. 짧은 파마 머리의 중년 여성이 먼 거리에서 손짓을 한다.
“엄마.”
“너 거기서 뭐하냐? 얼른 가서 밥 먹자.”
이슬이 엄마를 향해 뛰어가다가 멈춰서 우리를 쳐다본다.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우리 내일 아침에 해 뜨는 사진 찍을 건데 보러 올 거야?”
“아침 언제요?”
시간을 생각해놓지 않아서 할 말이 없었다. 말하기 곤란할 때만 진우 씨에게 매달리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래도 진우 씨를 봤다. 진우 씨가 살짝 어깨를 갸웃거린다.
“해 뜨기 전에 나와야 하거든. 대략 5시쯤?”
이슬이 고개를 흔든다.
“너무 일찍이요. 나 못 일어나요.”
“그럼 내일 못 보겠네.”
진우 씨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이슬이 팔을 들어 우릴 향해 흔든다. 작별 인사라는 뜻일까? 그러곤 엄마를 향해 열심히 뛰어간다. 엄마에게 안기자 엄마가 그런 이슬의 등을 두드리더니 우리가 누군지 묻는다. 두 모녀가 걸어가는 동안 쉴 새 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어릴 때 생각이 나네요. 해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친구들이랑 놀고 있으면 부모님이 데리러 오곤 했죠.”
“저도 그런 기억이 있어요. 어쩔 땐 집에 가기 싫어서 도망 다니다 혼나기도 하구요.”
해가 수평선 언저리에 걸쳤다. 빨갛게 하늘이 물들어가고 조금씩 먼 거리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은정 씨, 준비 됐어요?”
“네, 언제든지요.”
렌즈를 보며 셔터를 누르는 도중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광경에 가슴이 턱, 하니 막혀 숨이 가빠진다. 사진 촬영을 하러 온 게 주목적이었지만 그 황홀한 모습은 여기 온 목적마저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사람을 빨아들였다. 빛이 왜곡되면서 색감이 탁해지는 동시에 하늘 전체가 붉은 색감을 띄며 번져 나가는 것이 정말이지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 들게 한다. 세상이 낮과 밤을 바꿔가는 순간, 그 조화로운 변화는 신성하고 신비로운 느낌으로 하늘과 땅을 잠식해갔다. 눈을 통해 들어와 머리를 지나 전신으로 퍼져가며 나를 매료하는 압도적인 풍경에 심지어 경외감마저 들었다. 누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혼을 묶고 경배하겠다는 선택.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불빛에 달려드는 벌레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어쩜 이런 맥락과 닿아있는 것이 아닐지.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게 만드는 무언의 광기에 휩싸여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자동차처럼 멈출 수 없이 달린다. 바로 이런 게 중독이겠지. 이 순간이 멈추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 끝이 없기를 바랐다. 바다 위로 솟구친 붉은 빛이 뿜어내는 효과는 대단했다. 언제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나 싶게 가슴 깊숙이 저릿한 기운이 퍼져 전신이 마비된 듯했다. 심지어 카메라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마저 움직일 수 없었다.
“은정 씨, 사진 안 찍고 뭐 해요? 금방 해가 질 텐데.”
“네, 네. 저, 그게, 풍경이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죠.”
그때부터 하나라도 더 찍으려 셔터를 눌러댔다. 각도를 조절하여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바꾸면서 찍고 또 찍었다. 진우 씨는 움직임이 많은 사진사였다. 카메라 자체의 위치를 연신 옮겨가며 화면을 포착하고 장면에 이리저리 변화를 준다.
태양의 모양새가 점점 흐릿해지더니 최종적으로 한줌의 빛이 된다. 하늘에 걸린 빛덩어리가 가운데는 옴폭 들어가고 위와 아래는 좌우로 길게 퍼진 형태를 갖추었다. 진한 노란색이 정중앙에 위치하고 양쪽 가로 향할수록 노란색이 빨갛게 바뀌며 붉게 물든다. 그 아래 바닷물 위로는 더 이상 노란색은 보이지 않고 오롯이 붉은 빛깔만이 남아 그 전체를 드리운다. 하늘과 바다의 색이 달라 그 조도의 차가 뚜렷하다. 남은 빛을 마지막까지 뿌려대는 해의 필사적인 모습과 달리 바다는 이미 탁하게 어두워져서 평화롭고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 그런 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멀리서부터 점점 탁한 색이 침범해온다. 빛이 물러가면서 그 자리를 검은 막이 짙게 드리운다.
갑자기 진우 씨가 내 오른쪽 어깨 위를 건드린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턱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신호를 준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 전혀 기대치 않았던 색감이 눈에 들어온다. 비온 뒤 갠 하늘에서나 볼 수 있는 무지개색을 띤 옅은 구름이 하늘에 걸려 있다. 이 시간에 이런 광경을 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진우 씨가 미소를 지으며 반복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우리 복 받았습니다. 해가 질 때 구름이 하늘에 남아있었나 봐요. 일몰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스펙트럼 현상이에요. 해가 지면서 빛의 색이 바뀔 때 구름에 비치면 저렇게 빨주노초파남보 다양한 색깔이 떠오른다네요.”
그저 보는 것만으로 눈이 시렸다. 현실감이 사라지고 지금 내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잊어버렸다. 몸 속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열려버린 기분이었다. 몸이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진우 씨가 열심히 셔터를 누르다 내가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고 멈춰 있자 의아한지 나를 둘러본다. 그러더니 곁으로 다가왔다.
“은정 씨, 풍경에 완전 빠지셨네요. 그래도 지금 한 시가 아까운 찰나인데 어서 사진 찍으셔야죠.”
그가 자신의 카메라는 내버려둔 채 고맙게도 내 곁으로 와서 셔터를 눌러준다. 한순간 정신을 차린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 괜찮아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어서 진우 씨 사진이나 찍으세요.”
“그러다 제대로 몇 장 건지지도 못할 것 같은데. 이리 줘보세요.”
“아니요, 그럼 제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가 내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내 카메라를 잡으려고 한다. 그에게 자꾸 신세만 지는 것 같아 어떻게든 그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최대한 손에 힘을 주고 놔주지 않았다. 너무 힘을 줘서 붙잡은 부분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진우 씨가 손에서 힘을 빼고 나를 본다. 나는 혹시나 그가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다시 내 카메라를 잡을까 싶어 힘을 준 채 그대로 있었다. 그가 반대편 손을 카메라가 아닌 내 목 언저리 아래를 향해 집어넣는다. 그가 하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진우 씨가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졌다. 한 번 겪어봤던 입술이지만 매번 느낌이 다르다. 처음에는 차가웠던 듯 느꼈지만 이번에는 살짝 뜨거웠다. 살을 델 만큼은 아니라도 온기가 훅 전해진다. 이전엔 어쩔 줄 몰라 그저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내 스스로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나 싶게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진우 씨가 움찔, 몸을 사리는 게 전해진다. 나를 이상한 여자라 볼까, 망설였지만 이미 시작하니 그 다음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약간 벌어지자 혀가 느껴진다. 짧게 멈칫, 하던 진우 씨는 조금 더 세게 입술을 부딪혀온다. 그가 양손을 움직여 내 허리께를 붙잡고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그의 몸과 내 몸이 밀착한다. 입술로만 전해지던 그의 온기가 몸 전체로 전해진다. 그의 몸은 열기가 가득해서 차가운 밤바람에도 불구하고 나를 열에 들뜨게 만든다. 자세를 지탱하기 위해 팔을 뻗으니 한 손은 그의 어깨 위로 올라가고 다른 손은 가슴에 닿았다. 생각보다 그의 가슴이 단단하다. 평소 운동을 많이 했는지 근육이 솟아오른 것이 느껴진다. 그가 가슴 언저리에 있던 내 손을 잡아 허리 아래로 내린다.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손에 닿자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반쯤 열린 눈이 내 반응에 나를 한 번 훑어보고 완전히 감긴다. 더 이상 그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 상관치 않아 보인다. 그의 입술이 내 턱을 지나 아래로 내려와 목 언저리로 가서 닿는다. 힘을 줘서 깨물었다 느슨하게 미끄러져 귓불까지 도달한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짙은 자극이 뭉게뭉게 가슴팍 밑바닥에서 피어오른다. 전신이 그 열기에 점점 취해간다. 이성이 흐트러지고 있다. 저 하늘 위에서 아래로 늘어뜨리는 붉은 색조가 그 취기를 더욱 끌어올린다. 술이나 약에 취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단계에 이르게 될까? 중독될까 무섭다. 그렇지만 지금 시작해버리니 그 끝이 너무 궁금하다. 이제 멈출 수는 없다.
그가 몸을 더욱 밀착시킨다. 훅, 열기가 그의 몸 곳곳에서 번져온다. 그가 나를 원하는 만큼 나도 그를 원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수동적인 태도는 싫었다. 내가 원하고 내 몸이 바라는 걸 알려주길 바라면서도 혹여 너무 나가는 건 아닌가 조심스런 마음이 함께 공존했다.
그의 뒷머리 위로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아래로 내려가며 그의 등에 손이 닿자 무심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와 등의 골격. 처음 나의 시선을 받아들였던 부위. 로맨틱하게 눈이 마주쳤다거나 미소에 빠져버렸다가 아니라 뒷모습에 홀렸던 나. 그의 단단한 어깨 근육을 지긋이 눌러본다. 탄탄하게 자리 잡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런 순간에도 직업병이 도진다. 마사지 하듯 손가락을 주변으로 돌려가며 힘을 줬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쇄골을 훑으며 근육이 이완되도록 원을 그리자 그가 얕은 신음소리를 낸다. 일부러 조금 더 힘을 주며 긁어 올리자 진우 씨가 살짝 눈을 치켜뜨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턱을 살짝 당기더니 양손을 내 허리께 옷 안으로 집어넣어 조금씩 더듬어 올라온다. 브래지어 끈에 손이 닿자 탁, 튕기듯 연결부위를 풀어버린다. 이 사람, 능숙한데,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가 가슴을 움켜쥔다. 아, 현기증이 난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다. 입으로 뱉어내는 뜨거운 열기가 목에 닿을 때마다 내 몸의 체온이 한 뼘씩 올라가는 듯하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올라갈 때까지 견딜까? 그가 내 다리 사이로 몸을 더욱 밀착해오는 순간 자세가 흐트러져서 서 있던 균형을 잃고 말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더니 그만 카메라 지지대를 건드려 그대로 넘어간다.
타악.
그 소리에 우리 둘의 동작이 멈췄다. 그저 거친 숨만 반복해서 들이켰다 내쉰다.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도 지금 상황을 머리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겠지. 조금씩 그의 숨소리가 잦아든다. 열기로 가득 찼던 내 머릿속도 식어간다. 그가 눈을 떠서 나를 본다. 내게 뭔가를 묻는 눈빛일까? 모르겠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번도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이 없으니까. 왜 이런 일은 연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일어나는지 원망스럽다.
진우 씨가 손에서 힘을 뺀다. 천천히 내게서 물러난다. 나를 놓아주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내 얼굴을 보기 민망한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목이 타는 듯이 혀로 입술을 축인다. 꿈을 꾸다 현실로 돌아오려니 시간이 걸렸다. 흐려졌던 초점이 맞춰져간다.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두 사람, 그저 숨을 가다듬고 있다. 차가운 밤공기가 이제 현실로 다가온다. 열기가 빠져나간 몸을 냉기가 채우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어떻게든 몸을 덥혀보려고 두 팔을 들어 감싸 안았다. 통제할 수 없게 몸이 떨린다. 그가 헛기침을 하더니 넘어진 지지대를 다시 세우고 사진기를 들어 그 위로 올렸다. 어디 부서진 곳은 없나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안심하는 얼굴을 한다.
“어디 부서진 데는 없어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는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서 묻는다.
“은정 씨, 많이 추워요?”
“견딜만 해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차가운 기운이 몸 깊숙이 파고들자 덜덜 몸이 떨린다. 상의를 벗는 그의 동작을 보며 그를 멈추고 싶었다. 괜찮다며 거절하려 했지만 어느새 어깨 위를 덮은 그의 재킷에서 전해오는 온기가 너무 달콤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떨림이 서서히 잦아든다.
“밤공기가 많이 차갑네요. 해도 저버렸고 이제 그만 돌아가지요.”
“네, 그래요.”
그렇게 숙소로 돌아왔고 지금 욕실에 갇혀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누가 문을 잠그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발을 묶었다. 사람 인기척이 들렸다. 진우 씨 발소리? 그래, 심호흡 한 번 제대로 하고 나가야지.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직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거실 건너편에 위치한 유리문을 발견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베란다로 통할 수 있다.
세, 상, 에! 어둑해진 밤하늘 위에 수놓아진 별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 못하겠다. 나도 모르게 문 가까이 다가갔다. 어쩜 저렇게 밝게 빛날까.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붙잡았다.
“여기는 공기가 맑아서 별 보기 참 좋아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이 가깝게 느껴지죠. 이렇게 많은 별이 바로 눈앞에 있다니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입니다.”
뒤돌아보니 그가 뒤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내가 아닌 머리 위 하늘을 향했다.
“밤풍경이 좋을 거라 예상은 했었는데 이건 기대 밖이네요. 별을 아주 그냥 하늘에다 마구 뿌려놓았어요.”
“그렇죠? 너무 아름다워 현실 같지가 않죠.”
“밖으로 나가요.”
그가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으려다 내 손을 건드린다. 찰나였지만 잠시 그가 멈췄다가 이내 유리문을 열고 내가 먼저 나가도록 기다려준다. 미소를 지어보이고 밖으로 나섰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차가운 기운이 머리를 맑게 해줬다. 밤하늘 아래 서니 그 모습이 가까이 펼쳐져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듯했다. 도무지 현실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처음엔 내가 하늘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계속 걸어가면 언젠가 닿겠다는 그런 거리감. 그러다 얼핏 별빛이 일렁거리자 이번엔 밤하늘이 땅 위로 꺼지진 않을까 염려가 됐다. 이성이 마비되는 순간. 몸 곳곳의 감각이 생생해지고 눈으로 받아들이는 풍경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촘촘한 별들이 무리를 짓는다. 저건 무슨 별자리더라? 황홀경이라는 단어. 지금 이 순간 가장 어울리는 말. 너무 아름다워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가끔 숨을 참아야 할 만큼 압도적으로.
진우 씨, 지금만큼은 우리 둘이서만 여기 존재하고 있어요. 가슴이 벅차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진우 씨도 그래요? 이 밤, 저 별들에 휩싸인 우리만의 시간이 끝나지 않고 그대로 흘렀으면 좋겠어요. 진우 씨도 그런가요? 아님, 나 혼자만의 바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