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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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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18
작성일 : 19-09-23     조회 : 471     추천 : 0     분량 : 1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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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미란 언니가 오랜만에 들렀다. 사진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 모임 장소로 함께 가려고 일찌감치 나서서 집으로 와주었다.

 “김밥 만드는 거야? 맛있겠네. 양이 꽤 많아 보인다.”

 “이왕 만드는 김에 다 같이 나눠먹으려고 일부러 많이 준비했어요. 지선이는 오늘 같이 안 와요?”

 “민우랑 종진이가 뭘 사주기로 했다나. 둘이서 지선이 데리고 나갔다가 선물 사주고 모임 장소로 오기로 했어. 애 버릇 나빠진다고 그러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들어야지.”

 “지선이가 예쁜 짓 많이 하니까 좋아서 그러죠. 그 애교에 안 넘어가는 남자 없다니까요.”

 “누굴 닮아서 그런 끼를 타고 났나 몰라. 나는 애교랑은 사이가 먼 사람인데.”

 “언니는 애교보다는 성숙미죠. 가만 있어도 줄줄 흘러나오는 어쩔 수 없는 매력?”

 기분 좋게 들리라고 한 말인데 언니가 대답이 없다. 말실수라도 한 건가? 김 위에 밥과 속을 얹고 둥글게 말아 쟁반 위로 옮기는 내 동작을 미란 언니가 빤히 쳐다본다.

 “왜요? 뭔가 빠졌어요?”

 “아니, 김밥이 아니라 너 말야.”

 “제가 뭘요?”

 미란 언니의 눈이 게슴츠레하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진다. 언니 앞에서 얼굴 붉히면 곤란한데.

 “무슨 좋은 일 있니?”

 “좋은 일이요? 오늘 사진 찍으러 가잖아요. 사진 찍는 건 항상 즐겁죠.”

 “아냐, 사진 말고. 사람이 달라 보여.”

 “달라 보이긴요. 전혀 그럴 건더기 없어요. 언니도 참.”

 바쁠 것도 없는데 일부러 바쁜 척 부산스레 움직였다. 미란 언니가 그래도 나를 향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신경 쓰인다. 어디가 달라 보인다는 거지?

 “가평은 언제 가도 좋지 않아요? 특히 요즘 같은 선선한 날씨에 둘러보기도 그만이구요.”

 슬쩍 주제를 바꿔본다. 언니가 나를 향한 시선을 그대로 두고 답을 한다.

 “그래, 가평 좋지.”

 자꾸 쳐다보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든 그 시선을 무시하려 애쓰며 김밥을 말았다.

 “너 잠깐 있어 봐.”

 “예?”

 언니가 손가방을 뒤지더니 화장품 몇 가지를 꺼내든다. 그러더니 본인이 아니라 나를 향해 들이민다.

 “어, 어.”

 “잠깐만 그대로 있어.”

 손에 김밥 재료를 든 상태로 그 손에 얼굴을 맡겼다.

 “연애 초기에는 뭐니 해도 예쁘게 보여야 하는 거야. 그러다 친해지면 여유를 부려도 되지만.”

 무안해져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연애, 라니요.”

 “얘는, 나이는 먹을 대로 먹어놓고 부끄러워하기는. 너 때는 연애를 안 하는 게 문제가 있는 거지 연애를 하는 건 당당히 내세울 일이라고. 잠깐만 눈 감아.”

 “아니, 언니, 그게 아니라.”

 그러곤 눈을 감아야 했다. 눈썹 다음엔 코와 입술 주변이 다듬어졌다. 원래 화장을 진하게 하는 편이 아니라서 어째 불편했다. 언니가 일부러 신경 써주는 걸 굳이 마다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내심 불안했다.

 “누구야? 나도 아는 사람?”

 언니는 나에게 질문을 하곤 스스로 답했다.

 “괜찮아. 차차 소개시켜줘도 되니까 일단 그 순간을 즐기라고. 연애 초기가 가장 즐거운 법이니까.”

 놀리듯이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댄다. 간지럽다고 그만하라고 하니 대뜸 화장하는데 자꾸 움직인다고 면박을 준다. 방귀 뀐 사람이 화낸다더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제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시각이 되어 대충 김밥 말기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욕실로 들어와 거울을 보니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이 거기 있었다. 익숙지 않은 진한 화장이 어색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가끔은 변화를 줘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위로를 해도 어색한 걸 어찌할 수 없어 살짝만 지워냈다. 살짝, 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내가 손을 댄 걸 언니가 눈치 채고 타박을 주며 다시 덧칠하려고 화장품을 찾는다. 그걸 피해 얼른 밖으로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이 부셨다. 이렇게 청명한 가을 날씨도 금방 지나가겠지. 요즘 들어 점점 봄과 가을이 짧아지는 걸 느낀다. 그러니까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야겠다. 어차피 지나고 아쉬워하는 건 피할 수 없으니까.

 미란 언니는 나름 운전을 터프하게 해서 그 옆에 탈 때마다 긴장하게 만든다. 언니가 불편하지 않도록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근육이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번에 새로 뽑힌 동호회 회장님 나름 멋있지 않니?”

 “좋으신 분 같던데요.”

 “회장이란 직함은 리더십이 있어야 하거든. 회원들 의견 조율할 때는 하면서 필요할 땐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모습이 보기 좋더라. 딱 그 직함에 어울리는 성격이야. 마음에 들어. 아, 주.”

 ‘언니, 카페 사장님은 어쩌고요?’ 남성 편력이라고 하면 너무 직설적일지 모르겠지만 미란 언니가 남자를 자주 바꾸는 경향은 인정해야 한다. 회장이란 직함은 핑계고 그 남자 멋있다는 얘기로만 들린다. 얼마 전부터 사귀기로 했다는 카페 사장님 얘기는 어느새 쑥 들어가 버렸다. 설마 벌써 정리하신 건가?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지선이 종진 오빠와 민우를 양쪽에 두고 뱅글뱅글 돌다 우리를 발견한다.

 “저기, 엄마! 은정 언니!”

 엄청 빠른 속도로 우릴 향해 달려온다. 저 나이 때는 어쩜 저리 에너지가 넘치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 나이 때 저랬을까? 지선이처럼 뛰어다니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는다. 항상 무거운 책가방 메고 축 처진 어깨로 학교 갔다 돌아오는 모습만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일 뿐인데. 지선인 미란 언니 옆에 바짝 붙어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낸다. 종진 오빠와 민우가 어디에 데리고 가서 무엇을 사줬는지 쉬지 않고 이어갔다. 역시 엄마는 다른 건지 미란 언니는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지선이가 주절거리는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준다. 그런 엄마의 호응에 더욱 신이 나는지 몸을 흔들어가며 음성을 높인다.

 종진 오빠와 민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 곁으로 가서 인사를 나눴다. 사진 모임에 나오면서 알게 된 두 사람은 만나면 어느새 살가운 느낌이 들 정도로 친해졌다. 종진 오빠는 우리 중 가장 먼저 동호회에 가입했었다. 대학생 때 다니기 시작한 사진 동아리를 졸업 후 정리하고, 온라인으로 사진 모임을 찾다 이 동호회를 발견했다. 전형적인 선비 유형이라고 할까. 성격이 순하고 말을 참 조곤조곤하게 한다. 아직 한 번도 오빠가 언성을 높이는 걸 본 적이 없다. 미란 언니가 가끔씩 빨리 결혼하라고 타박을 줘도 그저 웃어넘긴다. 내 친오빠와 종진 오빠를 맞교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건 나만의 비밀이다.

 지선이를 제외하고 우리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민우는 나름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더욱 귀여운 대학생이다. 막상 나이가 들고 보면 한 살이라도 더 어려 보이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어릴 땐 왜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지. 그건 그때만의 성장통이다. 나도 그랬다. 나이 먹고 성인 대접을 받으면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민우에게 너 나이 때는 나이 어린 대접을 받는 걸 마음껏 누리라고 해봤자 먹히질 않는다. 누난 이미 지나왔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는 반박만 듣는다. 그래, 지나봐야 깨닫게 되겠지. 때가 될 때까진 모든 게 잔소리로 들릴 테니까. 슬쩍 머리 한 구석에 진우 씨 얼굴이 떠오른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아유, 다들 일찍 나왔네. 부지런하기도 하셔라.”

 동호회 내에서 항상 뭉쳐 다니는 세 아줌마 중 한 분이 지나가다 우리를 발견하고 인사말을 건넨다. 이 분들은 동호회 가입은 각자 따로 하셨는데 모임에 나와서 서로 죽이 너무 잘 맞아 이제는 어딜 가든 꼭 붙어 다닌다. 입담이 무척 좋아 이야기가 시작 되면 끝이 없다. 가끔은 너무 시끄럽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지만 동호회 회원들 사이에서는 분위기를 띄우는데 나름 일조한다는 의견이 대세다. 그런 사람도 있어야 동호회 성격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을 테니. 미란 언니와 비슷한 연배인데 미란 언니는 그들과 섞이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 차가 나는 우리가 더 편하단다. 언니도 한 성격 하시니까 서로 부담이 되서 그런가. 게다가 하나 더 문제가 생겼다. 새로운 신입 회장님. 처음엔 몰랐는데 미란 언니가 회장님에 대해 은근히 관심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나서 그 분들과 미란 언니 사이가 차가워졌다. 아니 차가워졌다기보다 불꽃이 일렁인다고 해야 하겠지. 세 분 중 가장 연배가 있으신 송미자 아줌마 또한 회장님에 대해 관심을 내보이자 일이 복잡해졌다. 미자 아줌마는 딸이 하나 있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남편과 헤어지셨다. 이제 그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딸이 자기 앞가림을 제대로 할 만한 나이가 되자 미자 아줌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돌아보고 행복을 찾자고 결심했단다. 그 앞에 불현듯 나타난 회장님. 그 회장님이 문제다. 하필 왜 싱글을 회장으로 뽑았냐고. 아니 싱글이라서 더 인기를 얻어 뽑힌 건가? 미란 언니가 모임 공적인 자리에서 의견을 내놓을 때마다 미자 언니가 일일이 걸고 넘어져 이제 두 분이서 대놓고 사나운 눈길을 교환하신다. 주로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분은 세 분 중 가장 성격이 좋으신 홍아리 아줌마. 은근히 음식도 챙겨주시고 하시는데 옆 두 분 때문에 신경이 쓰여 함부로 친한 척 못하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친구는 정말 잘 사귀어야 한다.

 “저희 방금 도착했어요.”

 종진 오빠가 사람 좋게 인사를 건넨다. 웃어주는 아리 아줌마와 달리 미자 아줌마와 그 곁에 바짝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유나임 아줌마는 대면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친다. 누가 보면 친자매라고 할 정도로 미자 언니와 나임 언니는 친하다. 친한 걸 수도 있고 아님 나임 언니가 미자 언니의 심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니야, 그만하자. 남에 대한 나쁜 말은 되도록 삼가자. 아, 진우 씨가 보인다. 진우 씨는 여느 때처럼 상현 씨와 동행했다. 어라? 그 옆엔 하나잖아? 하나가 여길 왜?

 “은정아!”

 하나가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든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설마 사진 동호회 가입하려고? 내가 몇 번이나 가입하라고 꼬실 땐 듣지도 않더니만.”

 하나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건드린다.

 “가입까지는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여러 사람이 이 모임에 나오는데 나도 같이 어울리면 좋지 않겠냐고 상현 씨가 꼬드겼어 나와 봤어. 그러다 모임이 좋아지면 가입할 수도 있는 거고. 얘는 별 걸 다 걸고넘어진다. 사람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지.”

 반갑게 웃는 상현 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진우 씨를 살짝, 넘겨봤다.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지는지. 남들은 연애를 할수록 가족처럼 편해진다는데 더 가까워질수록 어렵기만 한 내 심리는 뭘까.

 “오늘은 머리 묶으셨네요.”

 “네, 뒷머리가 걸리적거려서요.”

 서로에게 말을 건네며 비슷한 타이밍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째 예의 바른 동방예의지국 시민처럼 인사를 나눴다. 하나가 슬쩍 밀치며 끼어든다.

 “이 사람들, 무슨 조선 시대 내외하시나. 너무 격식을 차리는 거 아니에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게 전해진다. 얼른 누구에게 들킬까 봐 시선을 돌렸다. 나름 제어를 잘하는 성격인데 어째 진우 씨 앞에서는 내 자신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 큰일이다. 이래서 모임에 나와도 편하게 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나까지 와줘 공기가 더욱 편해지긴 했다. 지선이가 누구냐고 자꾸 물어 아예 모두 앞에서 하나를 소개시켰다. 다들 반갑게 인사를 건네줬고 그렇게 내 베스트 프렌드를 환대해줘서 고마웠다. 하나는 특유의 친밀감을 발휘해 금방 사람들과 친해졌다. 게다가 상현 씨 옆에 있으니 빛이 난다. 정말 잘 맞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거겠지. 이 커플 오랫동안 저렇게 같이 예쁘게 늙어간다며 좋겠다. 행복한 사랑하길.

 “잘 지냈어요?”

 어느 순간 진우 씨가 옆에서 걷고 있다. 사람 마음이 무섭다. 의식하지 않았는데 이미 내 무의식이 진우 씨와 발을 맞춰 걷게 만들었다. 이러다 완전히 스스로에 대한 컨트롤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마저 든다.

 “네, 진우 씨는요?”

 “저야, 잘 지냈죠. 요즘 서류정리를 많이 하는 시기라 문서작업 때문에 눈 아프고 목이 뻐근하긴 한데 그것 빼곤 괜찮아요.”

 “서류정리요? 저도 영수증 챙기고 수입이랑 지출 맞추고 그러는 거 너무 싫어해요. 몸은 힘들어도 고객 마주하는 게 훨씬 편하다니까요.”

 “그러게요. 이런 건 누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여러 번입니다.”

 이전엔 몰랐는데 그의 옆머리 위로 흰 머리카락이 살짝 덮였다. 그리 많은 정도는 아닌데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자리한다. 누구는 나이 드는 표시가 나서 흰 머리카락을 싫어하고 보이는 족족 바로 뽑아버린다고 하지만 자기 나이에 맞춰 변해가는 모습에선 원숙미가 배어나온다.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해서 그런 건지 그의 흰머리마저도 멋있어 보인다. 우습다. 나도 참.

 “구름이 꽤 있네요. 있다가 해를 볼 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비 올 정도는 아닌데 구름이 빨리 걷히진 않겠는데요.”

 앞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피하려 움직이다 그의 손에 닿았다. 전기가 통하듯 짜릿, 한 감각이 전해진다. 그가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그 눈을 건드려보려 손을 들었을지 모르겠다. 말을 하고 있는데도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만 딴생각을 하게 된다. 가슴이 어린 아이처럼 콩닥거린다. 이건 숫제 사춘기 소녀로 돌아가고 있다. 사춘기 시절에도 이러진 않았는데.

 “은정 씨, 잠깐만요.”

 그러면서 그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어쩌다 뒤처졌는지 주위에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진우 씨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구석을 가리킨다. 단단한 암석 사이로 보라색 꽃이 피었다. 텁텁한 색을 띄는 돌을 뒤에 두고 가운데 자리한 꽃의 보라색이 유독 도드라졌다.

 “우리 이거 찍고 가요. 나름 색대비가 아주 우월한데요.”

 “좋아요. 저 꽃은 어떻게 저런 두꺼운 지반을 뚫고 올라왔을까요?”

 그 꽃 자체만 보기엔 연약한 한 줄기 꽃일 뿐인데 자리한 위치가 범상치 않았다. 새삼 모든 생명체가 경이롭게 다가온다. 어느 하나도 만만히 지나쳐 볼 게 아니다. 그 하나하나가 치열하게 생존하고 있고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저 사람의 이야기는 어떤 걸지 문득 궁금해졌다.

 등에 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진우 씨가 찍기 좋은 자리를 골라 내게 손짓으로 가리킨다. 둘이 동시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자리를 조금씩 바꿔갔다. 이렇게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꼭 그와 내가 방송일 함께 하는 직장동료처럼 느껴진다. 그럼 좋겠지. 직장에서 항상 같이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사진을 찍고 올라가던 길로 되돌아왔다. 금지된 짓이라도 한 듯 조심스레 서로 웃음을 교환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가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놓는다. 목이 뻣뻣해져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그 감촉이 오래도록 손 안에 자리한다. 한동안 사라지질 않는다. 그가 말하는 단어 하나, 전달하는 촉감 하나가 내 안에 오래 머무른다. 그가 전하는 향이 참 짙다. 쉽게 흩어지질 않는다.

 동호회 회장님이 회원들을 한 곳에 모은다. 모임 인사를 건네고 일정을 소개한 후 간단하게 동호회 소식과 회비 관리 내역을 전한다. 역시나 미란 언니와 미자 아줌마가 눈을 초롱이 뜨고 회장님이 내뱉는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집중한다. 이건 심상치 않은 징조다. 동호회 내에서 머리채 잡고 고성이 오가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속으로 말을 건넸다. 미란 언니, 그 카페 사장님 무척 사람 좋아 보이던데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동호회 내에서 이러지 말고.

 회장님 말씀이 끝나고 회원들이 주변으로 흩어진다. 우리 일행은 사진 찍기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조금 더 위로 올라가기로 한다.

 “민우야, 너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혈당 떨어지지 않게 간식이라도 챙겨 먹어.”

 “살 빼기로 계획 중이라 먹는 양 줄이고 있어요.”

 민우는 어릴 때부터 소아 당뇨가 있어 자주 혈당을 체크해야 한다.

 “그러다 당 떨어져 넘어간다.”

 “그 정도는 저도 충분히 숙직하고 있거든요.”

 미란 언니는 내뱉는 말이나 하는 행동은 터프한데 그 속은 알고 보면 참 살갑다. 주위 사람을 항상 챙기고 생일에는 결코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 작은 거라도 꼭 티를 내야 한단다. ‘생일을 아무 일 아닌 날처럼 보내는 것만큼 슬픈 게 없거든.’ 언니가 가슴에 품고 사는 좌우명 중 하나다. 생일은 생일다워야 한다는. 그건 나도 십분 공감한다. 다만 내 생일에 사람 놀라게 하는 행사만 사양한다. 생일이라고 사람들이 축하해주는 상황이 어째 그리 쑥스럽다. 어릴 때부터 어떤 자리의 주인공이 되어 주위의 시선을 받는 게 편치 않았고 그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힘들어진다. 언니가 사람은 너무 좋은데 그것만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면 완전 퍼펙트한데.

 민우가 알겠다고 하는데도 미란 언니가 따라다니며 뭘 자꾸 먹이려고 든다. 역시 엄마다. 나도 나이가 들고 애가 생기면 언니처럼 될지. 엄마라면 그래야겠지. 슬쩍 아이 아빠는 진우 씨가 되는 영상이 끼어들었다. 얼른 영상이 나오는 영사기 스위치를 끄고 카메라를 들어 눈높이에 맞춘다. 머릿속이 언제부터 이렇게 한심해진건지 한 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다. 사진에 집중하자, 집중. 오늘 모인 곳에는 돌과 절벽이 많다. 어떻게 보면 삭막하다 할 수 있겠는데, 어두운 흙색의 암석이 생생한 인상을 가진 푸른 나무나 숲에서 발견할 수 없는 무덤덤하면서 독특한 자태를 드러낸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을 점거한 숨 없는 무생물의 거처. 지구라는 곳이 살아있는 생명체만을 위해 지어진 게 아닌데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가 많다. 지천에 널려 있는 흙과 돌이 그 위를 밟고 다니는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여기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기암절벽은 워낙 인기가 많아 사람이 빼곡하게 모여들었다. 높다랗게 올라간 암석으로 채워진 절벽이 고개를 빼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가파르게 치솟았다. 저기를 등반하는 사람도 꽤 있다는데 나는 누가 등을 떠다밀어도 하겠다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위험한 일을 자기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처하는 마음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렇더라도 당사자에겐 소중한 가치가 있겠지. 죽음을 두려워 않고 히말라야 에버레스트를 오르는 등산가처럼. 그런 등산가가 있어 그 산의 가치를 알게 되겠지. 그런 일을 하는 영웅적인 운명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그저 멀리서 감탄하고 혹은 고개를 저으며 바라보기만 하는 소시민적인 삶도 있는 거니까.

 기암절벽에서 사람에 너무 치이다 보니 진이 빠졌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자는 미란 언니의 말에 모두 동조해서 자리를 옮겼다. 위로 더 올라가보기로 했는데 걷기에 그리 평탄하진 않다.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몇 번 반복되자 지선이가 힘들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미란 언니는 같이 걷던 일행에게 미안했던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라며 독려한다. 미란 언니와 지선이만 남겨두고 가기엔 미안했다.

 “이 근처도 그리 나쁜 풍경은 아닌 걸요. 둘러볼까요?”

 상현 씨가 그렇게 말하자 하나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킨다.

 “저기 어때요? 신기하지 않아요. 꼭 무슨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입구 같아요.”

 하나가 가리키는 방향에 커다란 지층이 위와 아래만 좌우로 연결되고 그 사이는 텅 비어 길쭉한 타원형처럼 갈라진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수박 한가운데를 잘라 속만 파먹고 껍데기만 남겨둔 모양새다.

 “엄마, 저거 신기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가는 길 같아요.”

 힘들다던 애가 어디서 힘이 났는지 갑작스레 뛰어간다. 미란 언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얼마 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읽었거든. 그 후부터 어디든 신기하게 생겨먹으면 전부 앨리스가 갔던 이상한 나라랑 비교를 하네.”

 “재미겠다. 언니랑 같이 가.”

 이번엔 하나가 지선이 뒤를 따라 뛴다. 우리 모임에 애가 하나가 아니었군.

 “하나 씨, 넘어져요. 조심해서 가요.”

 그 뒤를 따라 상현 씨가 뛰기 시작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 다 같이 뛰어야 하는 거야? 그래, 뛰자, 뛰어.”

 미란 언니마저 달려나가자 종진 오빠와 민우도 뒤를 따른다. 마지막으로 남은 진우 씨와 나. 그가 미소 지으며 묻는다.

 “대세를 따라야겠죠?”

 “진우 씨가 꼴찌네요.”

 “예?”

 진우 씨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앞으로 뛰었다. 그가 소리 내어 웃으며 뒤따른다.

 “이러기 있는 겁니까? 배신자.”

 “배신자라뇨. 약속한 것도 없는데.”

 길이 경사가 졌는지 앞서 간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다들 달음박질에 자신이 넘치나 보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손이 내 오른팔을 잡으며 허리께를 감싸 안는다. 내가 놀라서 멈추자 내 몸을 끌어당긴다. 멀리서 봤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지층을 따라 옴폭하게 들어간 공간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는 구석이 보이질 않을 만큼의 폭이 그 사이에 있었다. 그가 등을 벽으로 향한 채 구석을 향해 나를 민다.

 “누가 보면 어쩌려구요.”

 “잠시만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그가 손목 위에 혀를 살짝 대고 입을 맞추더니 냄새 맡듯 코를 미끄러뜨리며 팔을 타고 어깨 위로 올라온다. 간지러워서 큭, 큭, 거리다 누가 들을까 얼른 입을 막았다. 그는 내가 내는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지나 귀 근처까지 도달해서 주위를 더듬었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그의 입술이 만들어내는 감촉이 내 안에서 교차한다. 아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내 모습이 재밌기라도 한지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귀 아래를 깨물었다 놓는다. 그만하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젠 코를 지나 눈 가장자리에 도달해 입술로 눌렀다 떼며 장난을 친다. 금방이라도 저 너머에서 누가 넘어올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지만 그게 정말 걱정해서 그런 건지 아님 그의 행동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서 그가 멈추길 바라면서도 그의 입술과 손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입을 맞춘다. 그의 혀가 달콤한 향을 내며 안으로 들어온다. 머릿속이 뿌옇게 번진다. 이젠 모르겠다. 누가 우릴 발견한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람.

 “민우야, 괜찮아?”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미란 언니가 걱정하듯 민우를 향해 묻는다.

 “어머, 민우 씨.”

 이번엔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우 씨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손에서 힘을 푼다. 그의 입술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자 아쉬웠다. 이런 상황에서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동물인가 보다. 민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걱정보다 진우 씨와 조그만 더 가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 진우 씨와 나는 잠깐 시간을 보내며 가슴을 진정시킨 후 서로 괜찮은지 눈인사를 교환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래로 가파르게 꺾어지는 길 저만치에서 일행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민우가 주저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잘 챙겨먹어야 된다고 했잖아.”

 미란 언니의 걱정스런 책망을 민우가 손을 저으며 부정한다.

 “갑자기 뛰어서 그런 거라니까요. 별 거 아니에요.”

 진우 씨와 같이 그 곁으로 다가가니 민우가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상현 씨가 옆으로 온 진우 씨에게 묻는다.

 “저혈당 증세 아니야?”

 “저혈당 증세요?”

 진우 씨가 뭐라고 답하기 전에 하나가 되묻는다.

 “민우 씨가 당뇨가 있다면서요. 당뇨 있는 사람이 혈당 떨어지면 식은땀이 나고 몸에 기운이 없어져요.”

 미란 언니가 사정없이 민우 등짝을 때린다.

 “어휴, 내가 그렇게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잘 한다. 너 단 음식 가지고 다니지? 어딨어?”

 “배낭 구석 작은 주머니 안에요.”

 민우가 언니에게 맞은 곳이 아픈지 눈을 찡그리며 배낭 주머니를 가리킨다. 상현 씨가 지퍼를 열고 그 안에서 사탕과 젤리를 꺼낸다. 지선이 그걸 보고 눈이 커졌다가 애써 참는 모습이 역력하다. 민우 오빠가 몸이 안 좋아서 먹어야 한다는 걸 아는 거겠지.

 “지선이도 하나 먹어볼래?”

 그렇게 묻는 민우를 미란 언니가 막는다.

 “애는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먹어. 혹여 뒤로 넘어갈까 걱정이다.”

 “제가 저를 잘 알죠.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지선아, 괜찮아. 오빠랑 나눠먹자. 그래도 돼.”

 지선이 엄마 눈치를 살핀다. 미란 언니가 손가락을 들어 잠시 기다려 보라는 신호를 준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민우가 흘리는 땀의 양이 줄고 몸이 떨리던 것도 잦아지자 그제야 미란 언니는 지선에게 막대 사탕 하나를 쥐어준다. 지선이가 사탕을 손에 쥔 채로 민우를 관찰하다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사탕 껍질을 벗긴다. 다들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상현 씨와 하나는 동시에 안심하는 한숨을 내쉰다.

 “이거 되게 재밌다. 사진 동호회 모임 나오니까 별 일 다 있네요. 이상한 나라에도 들어가고 응급환자 처치도 해보고 자주 나와야겠어요.”

 하나가 분위기 좋아지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자 모두 같이 웃음을 터뜨린다. 상현 씨가 환한 얼굴로 답한다.

 “제가 그랬잖아요. 하나 씨도 좋아할 거라고요. 베스트 프렌드 은정 씨도 있고 다들 회원들도 좋은 분이라 하나 씨도 금방 적응될 거라고 했죠?”

 “좋아하기는 상현 씨가 제일 좋아하네요. 오늘따라 왜 그럴까?”

 미란 언니가 상현 씨를 놀리듯 말하자 상현 씨도 지지 않는다.

 “왜긴 왭니까? 미란 누님같이 멋진 여자분이랑 함께 있으니 좋아서 그러죠.”

 “아유, 상현 씨는 얼굴도 훤칠한 미남에다 말까지 잘하네. 누가 여생을 함께할지 복 터졌네, 복 터졌어.”

 그 말에 하나가 더욱 기분이 좋아졌는지 깔깔거리며 웃는다. 저 웃음, 진짜 기분 좋을 때 나오는 건데. 그런 하나를 보며 같이 웃다가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바로 옆에 있는데도 궁금해질 수 있지? 여유가 생기니 다시 아쉬운 기분에 사로잡힌다. 조금 전 진우 씨가 했던 행동이 꿈만 같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 맞아? 아쉽다. 그와는 아무리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도 아쉽기만 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러다 어느새 끝나 버린다. 그의 손길, 움직임 하나하나가 내 머릿속에 각인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 사람은 조각가고 나는 그의 손에 따라 모양을 갖춰나가는 완성되지 않은 조각품. 한 조각씩 파여지고 깎여나갈 때마다 더욱 마음이 조급해진다. 완성됐을 때, 행여 그가 완성된 내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까, 실망해서 불 속에다 집어던져 버릴까 봐 두렵다. 그게 불안하면서도 그의 손길이 멈추지 않기를, 계속해서 날 만져주기를 바란다. 그건 내 마음 속에 든 잡을 수 없는 불길이다. 언제 내 안에 이런 게 자리했나 깜짝 놀라면서도 끌 수가 없다. 무섭다. 그 불길이 너무 커져서 전부를 태워버릴까 무서워진다. 불난리다. 그 불을 끌 수 있는 물을 찾아야 할 텐데. 이러다 활활 타버리겠다. 완전히 재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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