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렇다고 사진 찍기 나쁜 날씨는 아니다.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어 역광이 들지 않아 구도 잡긴 오히려 편하다. 문제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오늘따라 사진에 집중하기 힘들다. 지금 은정 씨는 두 사람 건너 옆에 있다. 사진을 찍다가도 멈춰서 찾게 되는 그녀. 시선이 저절로 따라간다. 게다가 바로 곁에 있는 상현이도 계속 의식하게 된다. 쓸데없는 노파심인지 모르겠지만 평소와 달리 녀석이 하는 행동이 달라 보인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평소 같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다. 하나 씨를 초대하면서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일행 중 당뇨가 있는 민우 씨가 혈당이 떨어져 잠시 소란이 일었다. 직장에서 배운 응급처치라도 해야 하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당분을 섭취하고 나아졌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일행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좋긴 하다. 자주 볼수록 정든다더니 이제 서먹함이 꽤 줄고 말을 나누기 편해졌다. 은정 씨가 언덕 아래에서 위로 경사지게 구도를 잡고 해가 구름을 빠져나올 때마다 셔터를 누르고 있다. 조금 전 내가 그녀에게 했던 행동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건지. 오늘 하루 단체로 몰려다닐 걸 예상해서 그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듯했다. 지나고 나서 떠올려보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봤다면 어땠을까 가정하니 내 자신이 참 어리석다. 사람이 생각이 짧아지면 용감해진다고 다신 그런 서투른 행위는 금지다. 행동조심, 말조심이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지 말자 다짐했다.
슬슬 점심 먹을 때가 가까워온다. 은정 씨는 먹음직스럽게 말린 김밥을 준비해왔다. 내가 김밥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선택한 걸까? 그런 생각만으로 은정 씨가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하나 씨는 야채와 고기를 섞은 볶음밥을 가져왔다. 가장 큰 어른인 미란 누님은 돈까스를 튀겨 오셨다. 종종 사람 착각하게 만드는데 이건 사진 모임이 아니라 식도락 모임 같다. 다들 어찌나 먹을 준비를 잘 해오는지. 요리에 소질이 없는 상현과 나는 자꾸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언제 한 번 제대로 고기를 사기로 했다. 고기라는 말에 일동 모두 흥분한다. 시간 나면 고깃집 괜찮은 곳을 알아봐야겠다.
속이 출출해질 시간이 되자 점심 먹자는 의견이 나온다. 함께 모여 앉기 좋은 곳이 있나 훑어보는데 상현이 팔을 툭, 건드린다.
“잠시 저쪽으로 가자.”
“왜?”
“긴히 할 말이 있어.”
직장에서 항시 붙어 지내는 것도 모자라 여기 와서 긴히 할 말이 있다니? 어쩌면∙∙∙∙∙∙, 은정 씨와 나 사이에 어떤 낌새라도 포착했는지 영 찜찜해진다.
“급한 일이야? 여기까지 와서 일과 관련된 얘길 꺼내는 건 아니지?”
“급한 일은 맞고 일과 관련됐다는 건 틀렸어.”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 할 말을 찾는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아, 된통 걸렸다는 직감이 온다. 설마, 은정 씨와 내가 함께 있던 걸 봤나?
“하나 씨와의 관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어.”
하나 씨? 은정 씨가 아니라? 우리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얼른 대답할 말을 찾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진전된 거야?”
“그 재수 없는 기장 자식 기억하지?”
“어떻게 까먹겠냐? 그 난리를 쳤는데.”
“그 일 있고 나서 하나 씨가 자기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다고 무척 미안해하더라고.”
“치사한 놈. 미안해하며 마음 약해진 틈을 이용했구나.”
“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완전 악질 카사노바 같잖아. 시작은 그게 아니었어. 상처 받은 하나 씨를 위로해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었다고.”
“동기야 어쨌든 결과는 순수하지 않잖아.”
“자꾸 그럴래? 더 이상 너랑 얘기 안 한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지금은 상황이 어때? 나한테 할 말이 뭐야?”
“음, 실은 말야.”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옆얼굴을 긁어댄다. 상현이 이 자식이 이렇게 뜸을 들이면 걱정이 앞선다. 웬만해선 이런 행동을 보이지 않는데 굼뜬 굼벵이 같이 굴면 꼭 뒤탈이 생긴다.
“넌 경험이 있으니까.”
“뭔 경험?”
“모른 척 하긴. 너 일부러 그러지? 정신적으로 날 괴롭히려고.”
“인간아. 네가 이야기를 질질 끄니까 답답해서 그러잖아. 속 시원하게 얘길 해 봐.”
“나중에 말야, 들러리가 돼 줄 테야?”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렇게까지 진행됐어? 너, 임마, 혹시∙∙∙∙∙∙.”
“혹시, 뭐가?”
“하나 씨, 홀몸이 아닌 거야?”
눈썹을 찡그리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팔을 들어올린다. 양손으로 내 목을 잡더니 힘껏 조여 온다.
“이 자식, 날 뭘로 보고.”
“아, 아, 놔 봐. 알았어, 놔 보라고. 그냥 한 소리야. 알았다고.”
다 큰 두 남자가 이런 실랑이나 벌이고 있는 걸 누가 보면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지. 그래도 상현이 한동안 놔주질 않는다. 몸을 힘껏 비틀어 어렵사리 그 손아귀를 벗어났다.
“아주 사람 잡겠다, 너. 일은 네가 저질러놓고 내가 왜 험한 꼴 당하냐고?”
“말을 아주 곱게 하니까 그렇지. 나도 쉽게 꺼내는 얘기가 아니야.”
“그건 말하는 꼴을 보니 잘 알겠네. 연애에는 아주 수줍은 숙맥이셔.”
“그 기장이란 놈이랑 그런 일 있고 나서 하나 씨가 나한테 많이 고마워하면서 챙겨주더라. 무척 감사하다면서.”
두 사람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고 나름 인지하고 있었지만 상현이가 결혼할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상현 씨, 진우 씨. 여기요, 여기. 우리 자리 잡았어요. 얼른 와요.”
어린 꼬맹이, 지선이 손을 잡은 채로 하나 씨가 우릴 발견하고 신호를 준다. 어서 오라고. 우리 기다리느라 배고프겠다며 발을 떼는데 상현이 슬쩍 묻는다.
“반지는 왜 빼고 왔어?”
눈썰미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바로 그걸 눈치 채고 물어볼 줄 몰랐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한 방 맞았다.
“어, 사진 찍을 때 은근히 거슬리더라고.”
“사진기 셔터 누를 때 넷째 손가락은 쓰지도 않는데 그게 거슬리냐?”
대답이 궁해진다. 얼른 되는 대로 답하고 주제를 바꾸는 게 최선이다.
“아니, 카메라를 잡을 때 느낌이 떨어지는 것도 같고. 너는 결혼반지 안 끼어봐서 몰라. 하여튼, 그래서 결혼식장이랑 신혼 여행지도 물색했어? 날짜는 잡았고?”
다행이다. 녀석이 다시 수줍은 모드로 돌아갔다. 살짝 볼이 발그레해진다. 볼까지 붉히다니 못 볼 걸 봐버렸다.
“아직 양가 상견례 하지도 못했고 챙겨야 할 게 산더미야. 일단 너한테 먼저 알려야 할 거 같아서. 안 그랬다간 나중에 큰 우환이 닥칠 테니까.”
씩, 웃는다. 어깨를 툭, 건드려줬다.
“잘했어. 나한테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딴 사람 통해서 들었다면 아주 된통 혼났을 거야. 선견지명이 있네.”
등 위로 식은땀이 흐른다. 왼손 약지를 보니 손가락 가장자리 위로 희미한 자국이 둘러져있다. 멀리서 자리를 잡고 둥글게 둘러앉은 일행이 보이고 그 사이에 있는 그녀가 날 발견하고 웃어준다. 그러다 문뜩 떠오른 생각. 하나 씨가 상현이와 결혼하게 되면 당연히 두 사람은 본인 주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게 될 거다. 그럼 상현이 하나 씨에게 내 얘기를 할 테고 그 모든 내용이 은정 씨에게 전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그 결론에 머리가 아득해진다. 어쩐다? 은정 씨가 아무 걱정 없는 맑은 얼굴로 김밥을 내민다.
“이거 들어보세요. 안에 든 내용물은 별 거 없어요.”
상현이 냉큼 그걸 받아들더니 입에 넣는다.
“아휴, 이거 팔아도 될 만큼 맛난데요. 은정 씨, 김밥 집 하나 차리세요. 김밥천국은 이미 있으니까 김밥낙원은 어때요?”
넉살 좋은 그 녀석 말에 웃음이 터진다. 어렵사리 미소를 지으며 김밥을 받아들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나도 같이 마음 편하게 어울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쁜 마음먹고 사진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그저 사진이 찍고 싶었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을 뿐이다. 은정 씨가 내 앞에 나타났고 그저 끌리는 대로 반응하기만 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라면 해결책이 있을까? 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모르는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숨은 비법을 내게 전해준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 거다. 은정 씨, 어쩌면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