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에겐 별다른 바 없는 똑같은 날인데 이젠 매니저 언니와 소라마저 무슨 좋은 일 있냐고 묻는다. 그런 건가. 사람 마음에 변화가 생기면 그게 밖으로 번진다는 걸 나이 서른이 넘어서 깨닫는다. 어디 대놓고 얘기하기 부끄럽지만 애인이 생기면 둘이서 함께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다. 혼자서 하긴 용기가 나지 않아 다이어리 한 구석에 적어놓기만 했던 것들. 나열해놓은 순서 첫 번째로 적어 놓은 둘이서 같이 콘서트 가기. 음악을 골라 듣는 마니아 수준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평소 즐겨 듣는 가수가 있었다.
송성태.
누군가는 뚜렷이 내세우는 장르가 없는 정체성 흐릿한 가수라고 비판한다. 내겐 그 단점이 다양한 장르에 걸쳐 친숙한 멜로디로 듣기 좋은 노래를 만든다는 장점으로 다가왔다. 세련미가 떨어지고 투박한 느낌이 났던 첫 번째 데뷔 앨범만 빼고 두 번째 앨범부터 귀에 꽂혀서 그 이후로 그가 발매한 앨범 모두를 구매했다. 토요일 오후와 저녁 콘서트를 하는데 너무 늦지 않게 오후 1시 공연시간을 골랐다. 혼자라면 선뜻 표를 구매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텐데 동행이 있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진우 씨한테 조심스레 의견을 물어봤을 땐 거절하면 어쩔 수 없다고 이미 마음속으로 체념을 하고 있었다. 진우 씨가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기뻐하는 표정이 너무 여실히 드러났는지 ‘그렇게 좋아요?’, 라고 묻는다. 솔직히 많이 좋았다. 송성태 콘서트를 가게 된다니, 그것도 진우 씨와 동반한다는 상상에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표 가격이 다양하다. 자주 가보는 콘서트도 아닌데 너무 뒤에서 보긴 싫었고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스탠딩 표 가격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쌌다. 적당한 중간 가격에 표 2장을 구매했다. 아직 공연 날짜는 한참 남았는데 소풍 날 기다리는 애 마냥 들떠서 하루를 보낸다. 먹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든든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현실로 다가온다. 매번 이런 식으로 다이어트를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니 예전에 그런 글을 읽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내가 겪어보니 알겠다. 송성태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건가? 아님 이게 연애를 한다는 건가? 나 같은 사람도 연애를 하고 이런 기분을 가져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데 진우 씨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자꾸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둘이서 여행을 가면 좋겠고 놀이공원도 가보고 싶다. 온라인에서 유명하다는 맛집을 골라 먹방 여행을 다녀도 좋겠지. 맙소사. 나이 서른이 넘어서 소녀 감성이라니. 그게 창피하면서도 싫지 않다. 보통 점심 도시락을 싸가는 편인데 오늘따라 도시락을 싸는 게 영 귀찮다. 한 번씩 그럴 때가 있다. 맨날 하는 일인데 갑자기 하기 싫어지는 귀찮음. 가끔은 밖에서 점심을 해결해도 괜찮다며 스스로 다독였다. 가게는 최소 한 사람은 카운터를 지키고 한 사람은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해서 밥은 교대로 늘 혼자 먹게 된다. 매니저 언니와 소라에게 점심 먹으러 간다고 하고 나오니 막상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확 당기는 음식이 있을 때는 바로 그걸 찾아서 가면 되는데 어째 이도 저도 심드렁하기만 하다. 가장 만만한 햄버거나 사서 볕 좋은 곳에서 먹을까 생각 중인데 전화벨이 울렸다. 미란 언니잖아?
“여보세요.”
“안녕, 은정. 지금 전화 받기 괜찮아?”
“네. 마침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였어요.”
“점심시간인 거 알고 전화했지. 내가 그런 건 잘 챙기잖아. 일할 때 전화하면 안 받을 거 같아서.”
“아유, 그걸 다 생각하셨어요? 어쩔 땐 언니가 나보다 더 총기가 있어 보인다니까요.”
“총기는 무슨. 애 낳고 나서는 기억력이 떨어져서 방금 뭔가를 하려다가도 그게 기억이 안 날 때가 있어.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니까.”
“언니보다 어리고 애 낳은 적 없는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다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가 웃는다. 너는 애가 벌써 그러면 안 되지, 그런가, 내가 너무 사서 걱정인가, 라며 말을 잇는다.
“언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일은 무슨. 그냥 전화했어.”
살짝 틈이 생겼다. 언니가 할 말이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말을 꺼내기 위해선 준비할 틈이 필요하다. 그걸 기다려줬다.
“너 아줌마 3인방이랑 자주 얘기해?”
“아줌마 3인방이요?”
“거 왜, 사진 모임에 나와서 뭉쳐 다니는 아줌씨들.”
“아, 그 분들이요. 그냥 지나가면 인사하고 그래요.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은 없는 걸요.”
“그 중에 가장 무식한 여자가 있어.”
누군지 안다. 언니가 못 잡아먹어서 가장 안달이 나는 미자 아줌마. 이제 신임 회장님까지 엮여서 두 사람 사이서 아주 불꽃이 튄다.
“사람이 무식한데다 어쩜 그 무식함을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니. 신임 회장님이 점잖아서 그렇지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보는 내가 안타깝더라. 게다가 자기가 무슨 이팔청춘인 줄 아나 봐. 그 나이에 예쁜 척 하려고 눈웃음을 살살 흘기는데 정말 어이가 없더라. 내가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말야.”
대답을 하려다 말았다. 이럴 땐 논리적으로 따지기보다 그저 들어주는 것이 상책이다. 한참을 미란 언니가 미자 아줌마 욕을 해댄다. 3인방 중 미자 아줌마와 나임 아줌마는 성격이 세신 편이라면 나리 아줌마는 나긋나긋하시다. 언니한테 말은 안 했지만 나리 아줌마와는 가끔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낼 필요는 없겠지. 언니가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다 끄집어내더니 휴, 하고 한숨을 내쉰다. 전화 건너편에서 뭔가 마시는 기척이 들린다.
“하나 더.”
“뭔데요?”
“이은정, 이제 탐정 놀이는 그만 하자. 연애하잖아. 실토하시지.”
말문이 막혔다. 점심시간인 걸 아니까 일 핑계를 둘러대고 전화를 끊을 수도 없다.
“누군지 불어. 이미 짐작 가는 사람도 있어.”
“언니도 참. 뜬금없이 무슨 소리에요?”
뜨끔했다. 그렇게 드러났나?
“짐작 가는 사람이요? 누군데요?”
“그럼 인정은 하는 거네.”
“아니, 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네가 바라볼 때마다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더라. 얼마나 된 거야?”
“아직 누구라고 말씀 안 하셨잖아요.”
“말 안 해도 뻔하지. 사진 모임 회원이고.”
“그건 당연하죠. 언니가 봤다니까 사진 모임일 테죠.”
“끝까지 그럴래? 그냥 자수하고 광명 찾자.”
그의 이름이 입 끝에서 맴돈다. 뱉으면 다시 도로 담을 수 없다. 언니가 정말 아는 걸까? 말해도 될까?
“언니, 회장님이랑 잘 돼 가세요?”
“아휴, 이것이 말 돌리기는. 네 친구 하나랑 더블데이트 하는 거야?”
올 게 왔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다. 언니가 더블데이트라고 하는데 이미 결론이 났지.
“시작은 그렇지 않았어요. 하나가 먼저 시작했죠.”
“상현 씨나 진우 씨는 사진 모임에서 만난 거잖아?”
“사연이 긴데 하나가 좀 곤란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 일 때문에 상현 씨와 진우 씨 도움을 받게 됐는데 그러다 어울리게 됐어요.”
“앙큼하긴. 언니한테 보고도 없이 그렇게 일을 진행시키다니. 연애 상담은 할 필요 없었어?”
“언니, 그게, 얼마 안 됐거든요. 너무 서운해 마세요.”
언니가 다시 웃는다.
“서운한 건 아니야. 보기 좋아서 한 번 놀려보는 거지. 축하해. 연애 예쁘게 오래오래 잘 하면 좋겠다.”
언니, 같이 공연 보러 가기로 했고, 놀이공원도 가고 맛난 것도 먹으러 돌아다닐 거예요,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미란 언니한테 연애 상담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때가 되면 언니가 귀찮아할 정도로 매달릴지 모른다. 언니가 짓궂게 웃더니 다시 미자 아줌마 얘기로 돌아간다. 내 연애 얘기는 나중에 소소한 사항을 덧붙여서 집중적으로 듣겠다고 하신다. 그 후로 언니가 하는 얘기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집중이 되지 않아 대충 대답을 하다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 지나간다. 이러다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돌아가야겠다. 그래도 배가 부르다. 먹은 것도 없는데 든든하다. 누군가 마음에 있으니 그렇겠지. 애 있는 사람은 자식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했는데 애인 있는 사람은 그 사람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르다고 해야겠다. 가끔은 무서울 정도다. 내가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있나 염려가 된다. 이러다 그 사람을 놓치게 되면 얼마나 힘들까 앞선 걱정도 든다. 책보다 더 영양가 높은 마음의 양식이 있다. 그건 연애다. 칼로리가 너무 높아서 조금씩 맛 봐도 항상 배가 부르다. 이건 다이어트 할 걱정도 없다. 살로 가지 않으니까. 이게 질릴 날이 올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오겠지. 그건 그때 가서 받아들일 일이고 지금은 그저 즐기자. 너무 감사하다. 그 사람이 내 삶에 들어와서 고맙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지 않아서, 밥을 먹지 않아도 든든해서 신기할 따름이다. 밤에 잠들 때, 콘서트 티켓을 만져보고 눈을 감는다. 이미 머릿속에선 공연이 시작된다. 송성태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 가끔 그 사람 옆얼굴을 본다. 지금 현실이 너무 꿈 같아서 꿈을 꾸는데 현실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꿈이 오래 가면 좋겠다. 언젠가 깰 때가 오겠지만 깨고 나서도 기분 좋은 여운이 남아 아쉽지 않을 거다.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게 해줄 행복한 꿈. 이것도 지겨워질까? 그럴 거란 예상이 안 된다. 지루해도 좋으니까 매일 꿀 수 있다면 좋겠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