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오늘 잠복근무가 있는 날이다. 며칠 사이 퍽치기가 연달아 일어났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동일하게 동네 시장 근처였다. 같은 장소에서 연달아 일어나진 않았고 대략 동선을 조사해보니 타원을 그리며 위치를 바꿔가고 있었다. 범행 시각은 사람의 인적이 드물어지는 해지고 난 후 저녁 무렵. 여자만을 노려 일단 머리 근처를 가격하고 정신이 혼미해진 틈을 타 손에 든 핸드백이나 지갑을 낚아채서 달아난다. 팀원 회의에서 여직원을 잠복시켜 범인을 유인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범인에게 상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아 자진해서 나갈 사람만 받기로 했다. 일단 세 군데 잠복근무가 결정됐다. 상현과 내게 배정된 직원은 신입 여순경 권옥자. 한창 의욕이 넘칠 시기다. 신입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긴 하지만 문제는 과욕을 부리면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이 커 신입직원과 같이 일하는 게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다. 그렇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진해서 나서주는 게 고마울 뿐이다. 저녁 근무라 늦은 점심을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욕실 거울을 보고 있는 내게 아내가 말을 건넨다.
“당신,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좋은 일? 왜?”
“난데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려서 그러지. 혹시 승진 소식이라도 있는 거야?”
“승진은 무슨. 요즘 같은 불경기에 안 짤리면 다행이게.”
“참, 긍정정적인 사람이야, 당신.”
웃어보였지만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 조심한다고 해도 그런 무의식적인 부분을 조절하긴 상당히 어렵다. 아내가 내게서 어떤 바뀐 면이라도 발견한 걸까? 미리 약속한 장소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상현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내가 달라 보이나?”
“달라 보이다니?”
“그러냐고 묻는 거잖아.”
아래위로 나를 훑더니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다르게 꾸며보는 게 어때? 변화도 줄 겸. 하루하루 너무 똑같아서 지겹다.”
놀리듯이 혀를 찬다. 이 녀석에게 난 항상 같은 모습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더도 덜도 말고 지금과 같이 지내면 더 바라지 않겠다. 권순경이 보인다. 그녀가 근처로 다가오며 인사를 건넨다. 상현은 신입이라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이것저것 질문하면서 챙긴다. 어떤 건 기본적인 경찰 근무 숙지사항인데도 너무 꼬치꼬치 캐물어서 듣는 내가 불편하다. 권순경은 처음 해보는 잠복근무라고 한다. 굳은 얼굴이 긴장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지 상현이 농담을 건넨다.
“핸드백이 빛을 받아 요란하게 번쩍거리네. 아주 화려한 걸로 골랐어.”
권순경이 범인을 유인하려는 목적으로 한눈에 시선을 끄는 핸드백을 어깨 위로 걸치고 왔다.
“짝퉁이긴 한데 이왕이면 눈에 제대로 띄라고 일부러 이런 걸로 골랐어요.”
쑥스럽게 웃는다.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진품으로 꾸며보지 그랬어?”
“선배님도 아시잖아요. 경비가 어디 수월하게 나와야죠. 이것만 해도 비용 청구하려면 시간 꽤 걸리지 싶네요.”
“그놈의 경비는 맨날 쥐꼬리만치 주면서 항상 실적 타령만 하니 직원 사기가 올라가겠냐고. 투자를 해야 결과가 나오지.”
“추가 경비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자주 듣는 비품 아끼라는 소리만 안 했으면 좋겠어요.”
“식사는 제대로 하고 왔어? 밤늦게 돌아다니려면 많이 출출할 텐데 우리 오뎅 하나씩만 먹을까?”
“갑자기 오뎅 타령은.”
“저는 괜찮습니다. 두 분 드시려면 드세요.”
권순경은 배고픔을 느낄 겨를이 없어 보인다. 의지를 단단히 굳히고 나왔겠지. 난데없이 오뎅은 왜 찾냐며 핀잔을 줬다. 하지만 상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일단 권순경이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장 주위를 돌아보는 동안 슬쩍 주전부리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첫 잠복이니까 바로 걸리기야 하겠어. 분위기 파악이나 하는 거지.”
“아예 우리 둘만 나왔으면 괜찮은데 권순경이 있으니까 조심스러워. 얼굴 표정 보니까 신입 분위기 제대로 나오더라. 권순경이 잘못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그로 인한 죄책감이 무거울 걸.”
“의욕은 아주 넘쳐 보이던데. 잘 할 거야. 너무 신경 써봤자 정신건강에만 해로워.”
“너는 정신이 건강해서 참 좋겠다.”
“너와 달리 챙겨주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빌 언덕이 없는 나 같은 놈이 그거라도 건강해야지 아님 어떻게 사냐?”
상현을 따라 오뎅 파는 가게 앞으로 왔다. 파랑, 빨강, 노랑, 세 가지 색 종이 테이프가 오뎅에 꽂힌 막대기 위에 붙여져 있다. 상현이 빨강 오뎅을 집는다. 그걸 바라보고만 있으니 날 향해 묻는다.
“안 먹어?”
“별로 생각이 없네.”
“신입 때문에 긴장한 거냐?”
“집에서 제대로 먹고 와서 아직 배가 안 고파.”
“너는 임마, 제수 씨한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해. 맛있는 밥 꼬박꼬박 챙겨줘. 애들 잘 지키워 줘. 제수 씨는 복덩이라니까, 복덩이.”
그래,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모르겠다. 그 감사함을 이렇게 갚으면 안 되는데.
“진우야, 저기.”
“어?”
“아까 저 자식 지나가는 걸 봤는데 다시 돌아오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모자를 푹 눌러쓰고 헐렁한 티셔츠를 걸쳤다. 내 눈엔 제대로 띄지 않았는데 상현이 오뎅을 먹으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나 보다. 권순경이 지나갔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권순경이 어디쯤 있나 고개를 빼서 찾았다.
“저쪽에서 오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장 보러 온 젊은 처자다. 어째 요란한 핸드백만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너무 화려한 걸 고르지 않았나 싶은데 두고 볼 요량이다. 상현이 가리켰던 자는 권순경을 지나쳐 간다. 아니었나. 잠복을 하면서 이러기를 반복한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순 없으니까 조그마한 낌새에도 주시해야 한다.
권순경이 반대쪽으로 지나가고 나서 상현이 오뎅 하나를 더 집는다. 너무 욕심내지 말라고 하자 이것만 먹고 그만 먹겠단다. 권순경이 골목으로 빠져 나가고 바로 그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는 중년 남자가 있다. 머리가 벗겨지고 살이 오른 사십대 초반 정도. 그 자도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상현이 오뎅을 끝내고 돈을 지불한다.
“잘 먹었습니다.”
“만족하냐?”
“이제 일할 힘이 나네.”
방금 전 무슨 고함 소리가 들린 듯 했는데 워낙 잡다한 소음이 많은 시장 안이라 딱히 두드러지진 않았다. 뒤이어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 이건 권순경이다! 상현이 오뎅이 꽂혔던 막대기를 던지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뛴다.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다행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권순경을 발견했다. 바닥에 누워 한 손에 호루라기를 들고 있는 권순경과 그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호루라기 소리에 당황한 모습의 그 중년 남자. 오른손을 천 같은 걸로 둘둘 감았다. 그걸로 머리를 노렸을 텐데 권순경이 맞고 쓰러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잠복 첫 날은 성과가 없이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데 오늘은 바로 걸렸다. 권순경이 우릴 향해 흥분한 목소리로 질러댄다.
“저는 괜찮아요. 뒤에서 덮치기에 막다가 넘어졌을 뿐이에요.”
상현이 다가가자 남자가 움찔, 하며 천을 감은 손을 들어 위협한다.
“어이, 형씨. 우리 좋게 해결합시다. 세 명을 형씨 혼자 상대하려면 힘들어. 조용히 같이 가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문제될 거 없어요.”
일단은 달래고 본다. 순순히 검거하면 그보다 좋을 순 없다. 비록 그럴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권순경이 남자가 우리를 향해 돌아서 등을 보이는 사이 조심스레 일어난다. 다행히 어딘가 가격 당하진 않았는지 피가 나거나 다친 자국은 멀리서나마 보이지 않는다. 상현과 보폭을 맞춰가며 앞으로 조금씩 접근했다.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 있다. 너무 사납게 저항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몸이 굳었는지 한 자리에 멈춰서 움직이질 않는다.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일 수도 있다. 사이를 가로질러 갈 정도의 여유 공간을 두고 접근한다. 상현이 최대한 사람 좋게 보이는 인상을 짓는다.
“아주 멀쩡하게 생기셨는데 이런 일을 하십니까? 무슨 속사정이 있나 본데 가서 얘기 잘 하시면 형벌이 감경될 수도 있어요. 괜히 일 벌리지 말고 순순히 갑시다.”
남자가 말이 없다. 일단 말을 트고 대화가 이어지면 흥분했던 상황이 가라앉으면서 잘 마무리 될 때가 있지만 아무 대답이 없으면 아무래도 말로 끝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상현이 공격할 의시가 없다는 표시로 양팔을 벌려 보이며 다가선다.
“우리라고 일을 만들고 싶겠습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같이 갑시다.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있습니까?”
둘 사이 거리가 확 줄었다. 이제 여차하면 팔이 맞닿을 정도다. 이 정도면 투항 아니면 전사, 결정할 순간이다.
“에이, 씨!”
방심한 틈을 노렸는지 천을 감아놓은 주먹을 휘두른다. 맞히려고 한 게 아니라 겁을 주려는 시도였다. 반사적으로 상현이 상체를 뒤로 젖히자 앞으로 뛰어나온다. 그걸 알아채고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서자 이번엔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빠른 속도가 아니라서 피하기 수월했다. 겁을 준 후 기회를 봐서 도망가려 했는지 공간을 찾아서 옆으로 향한다. 주먹이 자리한 위치를 봐가며 언제든지 날아오면 막아낼 준비를 하고 덮쳤다. 허리채를 잡아 눌러버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시야에 펄럭이는 뭔가가 들어온다. 남자가 오른손에 감고 있던 천조각이 풀리며 하늘거린다. 별 생각 없이 걸리적거려 걷어냈는데 그만 그 끝에 감겨있던 주먹이 쑥, 하고 위로 올라온다. 눈에 별이 번쩍였다. 코에 제대로 한 방 맞고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코를 감싸자 손바닥 위로 축축한 느낌이 전해진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이 새끼가.”
상현이 내 코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보고 열을 받았는지 욕을 해대며 뒤에서 달려든다. 남자는 다리가 꺾이며 앞으로 주저앉는다. 뒤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미 늦었다. 상현이 얼굴 양쪽을 한 번씩 가격하자 얼굴을 감싸 쥔다. 상현이 하체를 누르고 있자 권순경이 얼른 다가와서 상체 위로 올라타고 앉아 무게로 누른다. 양팔을 꺾고 수갑을 채우는 동작은 재빠르다. 역시 신참이 고참보다 속도는 빠르다. 경험은 부족해도 패기가 있다. 사람은 손이 제압당하면 한층 무력해진다. 남자는 수갑이 채워지자 스스로 포기했는지 그 후로는 잠잠해져서 수월하게 진압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권순경이 걱정스럽게 훑어봐서 별 거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피가 빨리 멈추도록 고개를 들고 손가락 두 개를 올려 코 위를 눌렀다.
“남진우 씨. 이제 실력 다 죽었네. 그런 것도 못 피하고.”
“그냥 주먹이었으면 맞받아치고도 남았어. 갑자기 예상치 못한 게 날아와서 그랬지.”
“핑계는. 어쨌든 코피 터진 건 사실이잖아. 신입 신경 써줄 게 아니라 본인 몸부터 잘 챙기라고.”
자꾸 신경 거슬리게 해 한바탕 고함을 쳤더니 실실, 웃으면서 엎어져 있는 남자를 일으켜 세운다. 권순경이 근처에 주차해 놓은 차를 운전해 오겠다면 얼른 달려간다. 상현이 천천히 오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남자를 끌고 간다. 사람 속 뒤집는 재주는 아주 타고났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얼얼했던 통증이 조금씩 가신다. 요 근래 일하면서 피를 흘려보긴 오랜만이다. 강력반 소속이 아니니 큰 일 치를 상황이 자주 생기지 않는데 아주 간만에 제대로 한 대 맞았다.
고개를 들고 있으니 어두운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 하늘에는 별이 적다. 게다가 오늘따라 달도 초승달이라 더욱 캄캄해 보인다. 문득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손이 가는 대로 누르고 나자 퍼뜩, 정신이 든다. 신호가 가는 소리에 허둥거리며 끊으려 했지만 코를 잡고 있는 손을 제외하고 한 손으로 조작을 하려니 시간이 걸렸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답을 해야 하는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보세요. 진우 씨?”
요즘엔 발신번호가 뜨니까 나인 줄 바로 알겠지.
“예, 예, 은정 씨.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있어요?”
“똑같죠.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밥 먹고 하루 정리하고 텔레비전 보고 있어요. 진우 씨는 별 일 없고요?”
굳이 은정 씨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알리고 싶진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험한 일을 하는 직종이라 일과 관련된 얘기를 하다 보며 흔히 되돌아오는 반응이 걱정과 염려다. 은정 씨를 걱정하고 염려하게 만드는 건 원하지 않는 바다.
“저도 고만고만하게 하루 보내고 있네요. 특별한 건 없어요.”
은정 씨가 직장에서 고객 때문에 일어났던 우스운 일을 전한다.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가 귀에 음악처럼 다가온다. 오늘은 가늘게 초승달이 떴고 별은 겨우 한두 개 보인다. 하늘은 밝지 않은데 그 아래 지상은 각종 간판과 전등으로 뒤덮여 눈이 부시다. 이렇게 위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차라리 눈에 부담이 덜하다. 저녁으로 우동 면을 삶아 가쓰오부시 국물에 넣어 먹었다고 한다. 면 말고 밥을 먹어야죠, 하니 가끔은 면이 당길 때가 있단다. 은정 씨와 서로 이런 사소한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어느 샌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은정 씨도 나와 같이 느낄지 궁금하다.
수줍게 콘서트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묻던 그녀.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힘들게 말을 꺼내서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해줬다. 기뻐서 환하게 웃던 그녀. 그 웃음이 눈부셨다. 자주 웃게 해주고 싶다. 둘이서 함께 하고 싶은 목록이 있다며 다음에 보여주겠다고 아이처럼 흥분한다. 나를 필요로 하고 둘이서 같이 할 목록을 만들고 있는 그녀가 나를 설레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 공통 관심사를 찾아 둘이서 경험하고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사진이 우리를 맺어주었다. 사진 동호회 모임에서 만났고 사진을 통해 더욱 가까워졌다. 다시 사진 찍으러 동행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서로 바쁘고 시간 맞추기가 쉽진 않은데 그래서 그런지 어렵게 만나게 될 때 그 기쁨은 배가 된다.
그녀가 사진 모임 얘기를 꺼낸다. 다음 모임에는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뒤이어 신임 회장 얘기를 꺼낸다. 얼마 전에 모임 회장이 바뀌었다. 모임 내에서 나름 인기가 있는지 나이가 있으신 여자분들 사이에서 종종 얘기 거리가 되나 보다. 은정 씨는 어떻게 사진 찍는 걸 좋아하게 됐어요? 그녀가 대답하고 나서 내 차례를 기다린다. 저는요, 사람이든 물체든 주변 풍경이든 제 사진에 담기기만 하면 그걸 간직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시간이 흘러가고 사물이 바뀌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내 손에 들어온 사진은 그대로 있으니 그걸로 기억을 환기해가며 그때 살았던 감정을 계속해서 떠올릴 수 있어 소중한 걸 발견할 때마다 사진기를 들게 돼요.
은정 씨가 내 대답을 듣고 심오한 철학이 담겼다며 오, 라는 소리를 낸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메라에 비치는 세상은 단순해서 좋았다고. 복잡한 사연도 잡다한 소음도 다 배제하고 그저 보이는 모습 그대로만 받아들일 수 있어 카메라로 세상 보기에 푹 빠졌다고 한다. 우리 삶도 그렇게 단순해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보이는 대로 느끼고 그 감정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도록. 내가 한 말인지 은정 씨가 꺼낸 말을 들은 건지 헷갈렸다. 어쨌든 그 말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한 번쯤은 그러고 싶다. 그저 바라는 대로, 내 안에서 원하는 그것을 앞뒤 재지 말고 해보기. 그럴 수는 없으니 더 바라는 거겠지.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기만 하다면 세상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번뇌에 몸부림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은 없을 거다.
잘 자라는 인사를 전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잠시 응시했다. 어두운 화면이 공허하다. 내가 바라는 게 뭐지? 머리에 불쑥 떠오른다. 나만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걸까? 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때가 종종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어릴 때부터 수십 번도 더 들었지만 나를 알기는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힘들어진다. 지금 이 순간, 은정 씨라는 존재가 내겐 가장 큰 고민이지만 어쩌면 이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수 있겠지.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이 다가올까? 삶이라는 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런 감정을 견디고 또 견디는 과정밖에 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참 허무하다. 그러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평안해지려나. 은정 씨를 만나면 그 순간이 행복하지만 그 후론 더욱 마음이 허해진다. 죄책감, 미래에 대한 불안함 그것도 아니면 끝을 모르는 불만족인지도. 코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멈췄다. 코피처럼 내 안에서 흐르는 어두움도 멈추면 좋겠다. 그걸 지혈할 수 있도록 손을 넣어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없다. 제대로 막지 못해 둑이 터지듯 흘러넘칠까 두렵다. 하늘에 뜬 초승달이 작은 생채기처럼 보인다. 저 사이로 밤이 뚝뚝 흘러내리려나. 손가락으로 눌러주고 싶다. 내 코를 막았듯이. 눌러주고 싶다. 흘러내리지 않고 진정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