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송성태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라이브는 훌륭했고 좋아하는 노래의 멜로디가 흘러나올 때마다 그에 맞춰 따라 부르며 몰입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공연이었는데 사실 관람하는 동안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진우 씨가 옆에 있는데도 혼자 온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의 마음이 공연장에 있지 않다는 건 괜한 오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다 공연 중간 살짝 조는 그의 옆모습을 발견했다. 이 사람 나를 위해 힘들어도 와줬던 거다. 헐레벌떡 뛰어와서 땀범벅이었던 그의 얼굴. 사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내심 늦을까 불안했었다. 너무 고대했던 공연이라 일찌감치 도착해서 주변구경을 하고 기념품 티셔츠도 하나 사며 기다렸는데 공연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늦진 않겠지, 라며 스스로 다독였지만 시간이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전화라도 해볼까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는데 그의 등이 보였다. 사진 모임에서의 첫 만남. 가장 먼저 내 시선을 끌었던 그의 등.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에 시선이 갔다는 얘기를 누가 들으면 평생 등 뒤만 보며 살 거냐며 핀잔을 줄 수 있겠지만 내 마음이 그랬다. 그 어깨와 등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서 손으로 건드려 본다. 멀찍이 보기만 했었는데 이제 이렇게 원하면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런 그의 등만 보며 살아도 좋지 않을까, 라는 우스운 생각이 든다. 그의 목소리는 귀로 들으며 눈은 등을 바라보는 걸로 좋겠지.
그렇지만 공연을 보고 나서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를 잡은 후에도 그의 마음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 어딘가 마음이 쏠려서 집중을 하지 못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본인이 먼저 꺼내지 않는데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때가 되면 말을 꺼내지 않을까 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결국 헤어질 때까지 심각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가 되길 바라더라도 그건 본인이 원할 때야 그렇게 된다. 살면서 기다려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대화 중 말이 자꾸 끊어진다. 오늘 많이 피곤해서 그런 거라 이해하려 했지만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그와 헤어졌다. 그 힘든 몸과 마음이 다음에 만날 땐 나아지길 바랐다. 살면서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거다. 기쁠 때가 있으면 힘들 때도 있겠지. 그저 기쁠 때가 더 많기를 바라며 사는 거다. 오늘 나 혼자 너무 즐겼나 괜한 죄책감마저 든다.
잠에서 깨 눈을 뜨니 열한시가 다 되었다. 일요일 느지막이 일어나는 이 순간이 좋긴 하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한가히 시작하는 하루. 이미 하루의 절반이 다 지나가버렸다는 현실이 아쉽지만 그래도 아직 절반이 남아있다. 뭘 먹을까? 전화가 울린다. 미란 언니. 언니는 연애 경험이 풍부하니까 상담을 요청해야겠다.
“언니! 굿모닝.”
“아침 다 지나갔는데 굿모닝이라니 어째 그렇다. 너 목소리 들어보니 금방 일어났구나.”
“일요일이잖아요. 오늘 여유 부리고 있어요.”
“푹 쉬어서 그런지 나름 목소리에 힘이 있네. 언니, 라며 아주 우렁차게 부른다.”
송성태 공연에 갔던 얘기를 순서대로 자세히 읊었다. 언니는 맞장구 쳐주며 찬찬히 내 얘기를 들어준다. 이럴 땐 언니가 참 가깝게 느껴진다. 공연에 관한 얘기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 언니가 망설이다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다.
“저기 은정아.”
“네?”
“어제 공연에 진우 씨랑 함께 갔었지?”
“그랬죠.”
“그 사람 누구 데려오지 않았어?”
언니가 그렇게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누굴 데려와요?”
“동행이 없었어?”
“아뇨. 공연장 데이트에 따로 합석한 사람은 없었어요.”
언니가 잠시 말을 멈춘다.
“이제, 데이트 하는, 사이구나.”
언니가 긴 호흡으로 말을 잇는다. 이거 조짐이 좋지 않은데.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언니, 다 알아놓고 새삼 그렇게 말하는 건 뭐예요.”
“진우 씨랑, ∙∙∙∙∙∙, 잘 돼 가?”
언니가 천천히 말할수록 듣는 나는 답답해진다.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한데 사람 감질나게 하고 있다.
“그럭저럭요. 아이, 언니, 안 그래도 언니가 연애 전문가니까 물어볼 것도 있긴 했는데∙∙∙∙∙∙.”
“내가 무슨 연애 전문가야. 그렇게 잘 알면 혼자서 이렇게 궁상떨며 살겠니?”
언니가 대뜸 말을 잘라서 하던 말을 멈췄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언니가 그러다 말을 않는다. 사뭇 조심스러워진다. 언니가 기분 나쁘도록 말실수라도 했나?
“언니, 무슨 일 있어요?”
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숨. 이제 궁금함을 지나 어색한 기분마저 든다. 언니가 왜 이러지?
“은정아. 너, 진우 씨 애 있는 거 알고도 시작한 거야?”
언니가 꺼낸 말이 귀로 들렸지만 머릿속으로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언니가 기다려주지만 할 말이 없다. 애가 있다니?
“몰랐구나.”
괜한 헛웃음이 나온다. 미란 언니 일요일이라 나랑 장난치는 건가?
“언니, 자꾸 그러지 마요. 저 같은 사람 순진해서 그냥 넘어간다니까요. 진우 씨가 무슨 애가 있어요. 하마터면 믿을 뻔 했잖아요.”
“내가 봤어.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지선이 학교 모임에 나갔다가 진우 씨와 만났는데 아빠라고 부르는 아들이 있더라. 지선이 나이쯤 돼 보이던데.”
그 다음부터 언니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선이 나이쯤 되는 아들이 있다고? 언니가 한참 이어가다 대답이 없자 멈춘다. 머릿속에서 뭔가 뱅뱅 돌아가고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확,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데 그건 예의가 아니겠지.
“은정아, 언니가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 요즘 세상엔 돌아온 싱글이 많아. 이혼한 게 그리 큰 흠이 아니지. 오히려 누군가에게 선택 돼 결혼까지 해봤다는 건 그만큼 검증된 경우라고 봐도 될 거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애를 키우는 일은 또 다른 문제야. 살다보면 내 배로 나은 애 키우기도 만만치 않은데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남의 애를 키운다는 건∙∙∙∙∙∙.”
이번엔 내가 언니의 말을 잘랐다.
“언니, 염려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도 이건 저와 진우 씨 사이의 문제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중에 언니 도움 필요하면 연락드릴게요. 지금 저 잠시 어디 나가봐요 해서요. 또 연락해요.”
미란 언니가 미처 답하기 전에 얼른 통화 종료를 눌렀다. 금방 잠에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놓고 어디 나가봐야 한다고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다니 참 궁색한 변명이다. 그래도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미란 언니한테 들은 말을 속으로 삭히는 것만으로 벅찼다. 진우 씨에게 지선이 만한 나이의 아들이 있다고? 그래, 지선 언니 말이 백번 맞다. 요즘 세상에 이혼한 사실이 그리 큰 흠이 되지 않고 애 가진 아빠라는 게 지탄받을 일도 아니다. 그래도 그걸 미란 언니에게서 전해 듣는 건 충격이었다. 진우 씨가 애 있다는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물론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사귀었다고 굳이 내게 알릴 생각은 아직 없었겠지.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의 애를 키운다고? 벌써부터 그런 상상을 하고 싶지 않은데 언니한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진우 씨 아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 애를 위해 도시락을 싸고 학교를 보내는 장면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겨우 하는 상상이라곤 그런 거다.
전화벨이 울린다. 미란 언니가 아직 할 말이 남았나? 날 걱정해주는 건 알겠지만 지금은 별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 아니다. 엄마다. 참 좋은 타이밍이다. 하필 이런 순간에 전화를 주다니.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엄마다. 집에서 쉬는 중이니?”
여느 때처럼 안부를 묻고 답했다. 특별히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요. 엄마는 무릎이 좋지 않다며 하소연을 한다. 물리치료를 받아본다고 했었는데 그다지 효과는 없는지 결국 의사를 만나기 위해 예약을 했단다.
“은정아. 좋은 소식이 있어.”
이제 엄마가 전화한 이유를 꺼낸다.
“네 오빠가 결혼할 마음을 굳힌 것 같다. 결혼 날짜랑 식장을 알아보려 하고 있어.”
“아, 그래요? 잘 됐네요.”
평소라면 기쁜 목소리로 축하하는 말을 꺼냈을 텐데 마음이 무거우니까 심드렁하게 말이 나온다.
“너는 오빠가 결혼한다는데 그런 식으로 대꾸 하냐. 집안의 큰 경사잖아.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기뻐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스륵, 가슴 한쪽이 찔린 듯 통증이 느껴진다. 엄마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미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짜증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최대한 그 좋지 않은 감정을 눌러대며 빨리 전화를 끊으려 했다.
“방금 전에 자다 일어나서 아직 정신이 없어서 그래요. 오빠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엄마, 내가 있다가 잠 완전히 깨면 다시 연락할게.”
“잠깐만, 은정아.”
엄마가 전화를 끊지 못하게 붙잡았다.
“너도 알겠지만 네 새언니 될 사람이 나름 있는 집안 출신 아니니.”
누누이 읊어대는 레퍼토리. 엄마는 아직 식도 올리지 않은 며느리 될 사람을 무척 신경 쓴다. 사돈어른 될 분이 지역구 의원이라 했다. 돈이 꽤 있나 본데 그쪽 집안과 어떻게든 구색을 맞추려 엄청 노력하는 중이다.
“결혼 준비하면서 우리 쪽에서 더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하게 맞추기는 해야지.”
“그래서요?”
“하나뿐인 오빠가 결혼하는데 너도 보탬이 되면 오죽 좋겠어? 그런 게 남매 정이라는 거잖아.”
어릴 때부터 오빠와 그리 살갑게 지낸 기억은 없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빴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빠는 언제나 엄마의 집안 기둥이었고 난 그런 기둥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서까래였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엄마는 오빠 뒷바라지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것만이 삶의 의미라는 듯이. 차라리 내겐 그게 편했다. 그만큼 나를 향한 간섭은 덜했으니까. 오빠도 엄마 때문에 힘든 적이 많았을 게다. 나보고 그 역할을 하라고 했으면 벌써 어딘가로 도망쳤지 싶다.
“얼마나요?”
엄마가 때를 정말 잘못 골랐다. 가족끼리 서로 돕고 살자는 의도는 알겠지만 지금 내 기분은 어째 통제가 되지 않는다.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는 걸 알면서도 그걸 통제할 의지는 이미 상실했다. 엄마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내 질문에 머쓱해졌는지 조금 상냥한 톤으로 바꾼다.
“아니, 굳이 얼마를 내라기보다 정성을 보이라는 거잖아. 형제끼리 행사 있을 때마다 서로 돕고 사는 게 도리 아니겠어.”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신대요?”
엄마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듯하다. 셈을 하시고 계시겠지.
“너무 무리는 말고. 한 천만 원 가능할까?”
“엄마!”
천만 원? 그 돈 있었으면 내가 이 곰팡내 나는 반지하에서 습기에 절어 살지 않았다.
“내가 무슨 한 달에 수천 만원 버는 대기업 사원일 줄 알아요? 천만 원이 애 이름도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잖아. 너는 애가 왜 이렇게 날카롭니? 안 된다고 하면 누가 억지로 마련하라 할까 봐.”
“그것도 정도껏이죠. 천만 원이 작은 돈도 아니고.”
엄마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더욱 화가 끓어오른다. 그래, 어릴 때부터 난 실망만 주는 존재였고 오빠만 항상 엄마의 기쁨이었다.
“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서 여태까지 일했잖아. 그 정도 돈은 모았어야 하지 않니? 누누이 얘기하지만 여자가 손이 헤프면 안 돼. 나중에 결혼해서 살림은 어떻게 할래?”
‘여자가’, 라는 단어에 그만 어렵게 붙들고 있던 마지막 실타래마저 놓쳐버렸다. 악에 받쳐 입으로 말을 쏟아내는데 머리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엄마가 중간에 대꾸를 하려는 걸 무시해버리고 성난 목소리로 고함지르듯 돈을 엄마가 원하는 만큼 모으지 못한 이유와 굳이 오빠 결혼준비를 도와야 할 의무는 없다는 논리를 펼쳐냈다. 내 머리로도 언뜻 말이 안 된다는 자각이 들기도 했지만 터진 말발을 멈출 이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참 언성을 높여 마구 쏘아붙이자 엄마가 그만 질려버렸는지 ‘그래, 나중에 잠 깨서 제대로 된 정신으로 통화하자,’ 며 얼버무리며 끊는다. 나중이라고 해도 할 말은 똑같다. 그 돈 없다고 할 작정이다. 잘난 아들이랑 잘해보시라고 덧붙일 거다. 아니 오빠는 여태 그럼 그 돈 모으지 못하고 뭐했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 할 말은 한참 남았는데 다 꺼내지 못한 게 분했다. 한동안 분을 참지 못해 씩씩, 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애꿎은 고양이 쿠션을 발로 차서 방구석 한쪽으로 날려버렸다. 어떻게 이 분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매운 게 먹고 싶다. 너무 매워서 눈물 쪽 빼버릴 만한 걸로.
분함을 참지 못해 괜히 방 안에서 빙빙 돌기만 하다 결국 지쳐 주저앉았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다 꽉 뭉쳐버린 어깨 근육을 조금씩 눌러주었다. 가슴이 진정되고 나니 이러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래도 엄마가 미운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다. 오늘 하루만큼은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아예 전화기를 꺼놔야겠다.
불쑥, 진우 씨 얼굴이 떠오른다. 전화기를 끄려다 그에게 전화를 하고 꺼야 하나 주저했다. 전화기가 꺼진 상태에서 그가 전화를 할까 걱정이 들었다. 푹 잘 쉬고 있겠지. 아직 자고 있으려나? 일요일이니까 늦잠을 잘지도 모른다. 지선이 만한 애가 있다는 언니의 말에 그의 아이를 위해 도시락을 싸는 상상을 했었다. 오빠가 결혼을 한다는데 나는 왜 안 돼? 잠깐만. 결혼?
진우 씨와 결혼. 그와 얼마나 알아왔다고 벌써 결혼을 생각하나 반문을 했다. 그렇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종종 첫눈에 반해 결혼을 하거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피드 데이트 후 바로 결혼하는 사례도 흔하게 봤다. 우리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진우 씨 마음만 나와 같다면. 한 번 그렇게 마음을 열자 웨딩드레스, 신혼여행, 신부 들러리, 웨딩촬영까지 한달음으로 속에서 파노라마같이 펼쳐진다. 결혼이라고? 마음 한쪽 이성이 나를 붙잡는다. 지금 되지도 않는 상상하지 말라고. 제대로 갖춘 것 없이, 엄마 말 맞다나 천만 원도 모으지 못한 내가 무슨 결혼을 하냐고 꾸지람을 한다. 그러자 반대쪽에서 감성이 원성을 높인다. 돈은 결혼해서 모으는 거지 돈 모을 때까지 기다리면 평생 결혼하지 못한다고. 이 정도면 더 제대로 갖춰야 할 건 또 뭐가 있냐고. 애는 어떡할 거냐며 이성이 강하게 한 방 먹인다. 잠시 머뭇거리다 감성이 답한다. 요즘 세상에 입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의 아이를 반듯하게 키워낸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겠냐며 물러서지 않는다. 진우 씨와 나, 그리고 그의 아이. 그의 아이를 키우면서 진우 씨와 나 사이 아이가 생기면 함께 키우면 되는 거다. 더욱 사랑을 쏟으면서. 정신 차리라며 이성이 덤빈다. 현실적인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지금 꿈꾸고 있다고 꿈 깨라는 이성에게 감성이 최후의 한방을 날린다. 현실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진우 씨 아이 키우기 마뜩찮으면 그와 헤어질 거냐고 묻는다. 그와 헤어진다고?
다리를 포개고 팔로 그 위를 감싸 안은 채 한참을 방바닥 위에 앉아있었다. 내 인생에서 그가 없는 상상을 한다.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도 그에게 전화할 수 없고 그와 함께 하기 위해 적어놨던 목록을 더 이상 채워나가지 못하는 상황. 가슴이 답답하다.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는 허망함이 내 몸을 가득히 메운다. 숨이 가빠진다. 인생에 자리하던 중요한 부분을 잃는다는 상실감에 몸서리쳤다. 아니야, 안 돼. 진우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 절대로.
언젠가 유튜브에서 봤던 동영상이 생각났다. 급히 휴대폰으로 검색했지만 제대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찾아 헤맸다. 이거였나. 아니, 링크가 어디에 있었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오랫동안 검색 한 후 겨우 원하는 동영상을 찾아냈다. 동영상을 재생하자 검은색 긴 생머리의 여자가 한 손에 꽃을 들고 남자에게 다가간다.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남자는 반쯤 궁금함과 반쯤 당혹함이 겹친 표정으로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여자가 무릎을 꿇자 웅성거리는 소리는 이제 거의 함성으로 변하고 귀를 따갑게 울리는 비명소리마저 들린다. 주머니에서 작은 검은색 상자를 꺼내 뚜껑을 들어 올리는 그녀.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연신 반복하며 여자를 껴안더니 일으켜 세워 격하게 키스를 해댄다. 아마 그가 하지 못한 일을 여자가 대신해서 미안해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머리 한쪽에서 꽝꽝, 거리고 소란을 피우던 이성을 멀찍이 차버렸다. 이제 다른 건 상관없었다. 진우 씨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이 전부였다. 그래, 돌아온 싱글이면 어떻고 아이가 있으면 또 어때. 그의 아이니까 더욱 예뻐해주고 챙겨주리라. 그러자. 진우 씨에게 청혼해보자. 지금 당장 허락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괜찮다. 그에게 내 마음을 보여줄 거다. 그를 향한 감정이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고 싶다. 여자가 먼저 청혼하고 무릎 꿇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그러자. 그에게 청혼하자. 미란 언니가 염려하던 목소리는 내가 더욱 전의를 불태우게 만든다. 말리면 더욱 하고 싶어진다고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렇다. 휴대폰 안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떠오른다. 단단히 마음을 굳혔다. 진우 씨, 나와 결혼해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