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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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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25
작성일 : 19-10-07     조회 : 413     추천 : 0     분량 : 8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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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머리를 식히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거나 사건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땐 걷는 버릇이 있다. 걷다 보면 갑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어디까지 간다는 계획 없이 그저 걷다보니 제법 큰 시장 어느 한 귀퉁이에 도달했다. 상인들의 요란한 호객행위로 시끌벅적하다. 요즘엔 주로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편이라 이런 골목시장에 오는 경우가 흔치 않다. 시장만 골라 범행을 저지르는 퍽치기 강도를 잡으려다 제대로 한 방 맞았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 한 구석이 씁쓸해진다. 어릴 땐 자주 어머니 손을 잡고 함께 장을 보러 가곤 했었다. 원하는 걸 사달라고 조르다 혼나던 기억이 선명하다.

 골목 어귀 자리한 상점을 지나쳐 되돌아가려 했다. 그 상점 귀퉁이 한쪽에 누런 골판지가 떡하니 붙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검은 마커 펜으로 ‘근육 뭉친데 최고, 5분이면 바로 풀립니다,’ 라는 글귀가 보인다. 그 아래 샘플이 자리한다.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뭉툭한 막대를 중심으로 해서 둥그런 구슬 3개가 삼각대칭으로 둘러싼다. 간편히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마사지 기계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이런 간이용 물건이 흔하다. 휴대폰은 말할 것도 없고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것들이 작게 축소되어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발명된다.

 상점 주인은 물건을 팔겠다는 의욕이 별로 없는지 내가 다가가도 손님 맞을 자세를 갖추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 샘플 물건을 이러저리 둘러보고 나서 물건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어보았다. 그리 무겁지 않다. 겉에 사용설명이 굵은 글자체로 쓰였다. 누구나 바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은정 씨한테 필요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 특성 상 항상 어깨와 팔이 아프다고 하던 그녀. 물건 값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오자 이걸 어떻게 전해주나 하는 걱정이 슬며시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은정 씨가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녀가 아파하는 게 안쓰럽지만 이제 슬슬 물러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시작부터 잘못이었다. 하나 씨에게 전해달라고 할까? 하나 씨에게 이제 더 이상 은정 씨 만나지 못하겠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은정 씨가 이걸 받아들고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요즘엔 문자로 이별통보를 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못할 짓이다. 문자로 그만 만나자고 하다니. 그건 예의가 아니지.

 전화가 울린다. 아내의 전화번호가 화면 위로 떠오른다.

 “어, 왜?”

 “지금 바빠? 통화 가능해?”

 “응, 괜찮아. 지금 별 일 없어.”

 아내가 살짝 숨을 고른다.

 “당신, 급한 일 생겼다고 지현이 시합 끝나기 전에 헐레벌떡 나갔잖아.”

 “그랬지.”

 “아침밥도 못 먹고 바빠 보여 음식이라도 챙겨줄까 전화했더니 휴대폰이 안 되더라. 사무실에 전화했더니 비번이라던데. 그때 일하러 간 거 아니었어?”

 가슴이 철렁했다. 아내가 직장으로 전화할 줄은 몰랐다. 다급히 변명할 거리를 찾으려 하니까 오히려 마음만 급해지고 할 말이 없다. 괜히 짜증이 치솟아 오른다.

 “거기로 전화는 왜 하는데? 자꾸 집에서 쓸데없는 일로 연락하면 받아야 할 급한 전화 받는데 방해된다고.”

 “마음이 안 되서 그런 거지. 휴대폰도 꺼져 있고.”

 “배터리 방전 되서 그런 거잖아. 내가 일부러 그랬나.”

 아내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진다.

 “제대로 챙기던가. 집에서 온 연락 때문에 급한 전화 받는데 방해된다는 사람이 휴대폰 하나 제대로 못 챙겨?”

 이제 내 목소리도 날카로워진다.

 “전날 너무 피곤해서 휴대폰 충전시킬 걸 깜빡하고 자버려서 그랬다고. 사는 게 쉬우면 그런 거 일일이 잘 챙기면서 살지. 그게 힘드니까 그렇잖아.”

 “당신 아직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안 했어. 그때 어디 간 거야?”

 빨리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끄집어냈다.

 “회사 동료 중에 갑자기 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 거기 갔다. 동료 경조사에 참석하는 것도 일이라고. 그래서 일 있다고 나간 거라고.”

 “회사 동료 누구?”

 아내가 묻는 말에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게 죄책감 때문인지 아님 집요하게 물어오는 데 대한 반감인지 가늠할 새도 없이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누구라고 하면 우리 회사 사람 다 알아?! 이름 대면 누군지 바로 알 거냐고?”

 “왜 언성은 높이는데? 잘못한 사람이 성 낸다고 누가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언성은 당신이 먼저 높였잖아. 왜 오늘따라 이렇게 난리야. 있다가 집에 가서 얘기해. 바쁘니까 끊어.”

 아내가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대로 통화종료를 눌렀다. 따르륵. 전화가 끊긴다. 집에 가면 한바탕 소동이 일겠지만 지금은 그저 조용히 있고 싶었다. 방금 아내의 전화가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이라면 집에서 치를 소동은 그나마 예상을 하고 맞이하는 지상전이 될 테니까 차라리 그게 나을 터였다. 경찰서 정문 근처에 다다르니 오늘따라 유난히 드나드는 행인이 많이 보인다. 나야 일하는 직장이니까 그렇다 쳐도 저 사람들은 어떤 사연으로 그렇게 경찰서를 찾을까 의아했다. 가만히 철문을 바라보며 섰는데 그 사이로 상현이 동행을 데리고 나온다. 신입 권순경이다. 참 그러고 보면 상현은 정이 많아 저렇게 주변을 잘 챙긴다. 신입이라고 마음이 쓰였는지 저렇게 데리고 다니며 하나씩 일일이 가르친다. 다들 본인이 맡은 업무에 바빠 신입이라고 굳이 챙겨줄 여유가 없는데 녀석은 다르다.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가고 정이 생긴다. 그런 그를 직장 동료로 두게 된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다.

 상현이 거의 일방적으로 얘기를 하고 있고 권순경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을 한다. 저때는 그저 귀로 받아들이기 급급하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오니 머리로 받아들이는데 한계가 있다. 그건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듣는 것과 몸이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 그러니 신입 때는 항상 고달플 수밖에. 상현이 말을 하다 나를 발견하고 멈춘다. 권순경에게 뭐라고 지시를 한 다음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여어. 인사를 건네는데 어째 표정이 밝지 않다. 답도 않고 그렇게 내 곁으로 온다. 심각한 사건이라도 생겼나?

 “신입 교육하느라 바쁘네. 그래도 챙겨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참 알뜰해.”

 대답하는 상현의 목소리가 심드렁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그보다 잠깐 시간 있냐?”

 “내가 널 위해서라면 없는 시간도 만든다. 왜? 사건 터졌어?”

 “사건은 아니고. 잠시 저리로 가자.”

 상현을 따라 사람 없는 한적한 장소로 옮긴다. 녀석이 이렇게 무거운 표정을 짓는 건 참 드문 일이다. 우리가 잠복 나가서 실수라도 했나? 불편민원이 들어오면 그게 주로 골치 아픈 일이다. 요 근래 민원 들어올 만한 문제 일으킨 기억은 없다.

 “토요일 비번이었지?”

 “그래. 지현이 축구시합 있다고 했잖아. 나름 잘 뛰더라고. 아빠로서 뿌듯했지.”

 “사무실로 제수 씨 전화 왔더라고.”

 상현이 아내의 전화를 받았나 보다. 하기야 제일 만만한 게 상현인데 아내가 전화해서 녀석을 찾았겠지.

 “너 일한다고 알고 있던데.”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이제 상현이 날 취조할 차례인가. 오늘따라 질문하는 사람이 줄을 선다.

 “아, 그거, 일 한다고 한 게 아니라 회사에 일이 있다고 하고 나온 건데 아내가 잘못 받아들였나 봐. 아는 사람이 상을 당해서 다녀오느라 자리를 끝까지 못 지켰어.”

 “상 당한 사람 누구?”

 다시 슬슬 가슴 밑바닥에서 짜증이 올라오려 한다. 너한테까지 내가 말을 만들어내며 답해야 하냐? 이제 그만 나를 내버려두면 좋겠다. 이건 아주 동네 주위를 질질 끌려가며 뭇매를 맞는 소가 된 기분이다.

 “넌 모를 거야. 예전 신입 때 알던 선배인데 그분 가족 중에 누가 돌아가셨어.”

 내 대답에도 녀석의 표정이 미덥잖다. 그렇다고 그리 얘기하는 내게 더 밀어붙이진 못하리라.

 “그 날 미란 누님이 전화하셨어.”

 미란, 이라는 이름에 눈앞이 깜깜해진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머리가 울리자 뒤이어 가슴이 무거운 둔기로 한 방 맞은 듯이 저릿하다.

 “그래서?”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이미 무슨 말을 할지 알지만 달리 도망갈 구석이 없다.

 “널 봤다고 하더라.”

 “아, 그 토요일에?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딸이 지현이랑 같은 학교 다니더군.”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진다. 녀석이 그걸 알아차릴까 조마해진다.

 “나한테 은정 씨 얘기를 하더라고.”

 이제 정말 막다른 곳에 섰다. 물러설 자리가 없다. 머리를 박고 쓰러지든지 아님 악을 쓰고 버티든지.

 “진우야, 우리가 알아온 지 꽤 됐잖아.”

 “갑자기 목소리를 쫙 깔고 이상하게 왜 이래?”

 어색하게 웃어보이려 했지만 상현은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내 주변에서 너를 향해 천생 양반이라고 하는 걸 여러 번 들었어. 법 없이도 살 사람이고 올 곧게 정도만 걷는다고. 그래서 항상 네 곁에 있었지. 너같이 미더운 동료를 둔 적 없었고 너랑은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달리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너, ∙∙∙∙∙∙, 은정 씨랑 연애 하냐?”

 입이 착 달라붙어 억지로 뗀다.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가 영 어색하다.

 “연애라니?”

 “내가 들은 말로는 그걸 연애한다고 밖에 못하겠던데. 달리 다른 뜻이 있어?”

 “은정 씨랑은, 사진 동호회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잖아. 너랑 하나 씨랑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처럼.”

 상현에게 내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지 말을 해도 반응이 신통찮다. 그저 본인이 할 말만 이어나간다.

 “어디까지 간 거야?”

 “∙∙∙∙∙∙.”

 침을 삼켰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대로 밀고 나갈지 아님 다 풀어놓을지. 취조에는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라 나조차도 상대하기 벅차다. 차라리 다 까발리고 마음 편하게 드러누워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은정 씨 참 좋은 분이라고 느꼈어. 하나 씨도 진심으로 아끼더라고. 게다가 제수 씨랑 애들은 어쩔 건데. 생각이 있는 놈이 그러고 다니냐?”

 날 걱정해서 이러는 걸 안다. 그렇다고 해도 머리와 달리 마음이 자꾸 도망치는 건 어쩔 수 없다.

 “네가 무슨 말을 듣고 이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게 공평하지 않냐?”

 녀석에게 이미 나는 죄인이다. 내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너도 충분히 나이를 먹은 어른이니까 점잖게 이른다. 중년의 위기라고 해도 좋고 오춘기 꿈을 꿨다고 해도 변명으로 받아줄 테니까 적당히 하고 접어라. 더 이상 문제가 깊어지기 전에. 나도 어디까지 네 편이 되어줄지 자신이 없다.”

 “은정 씨랑은, 그러니까, 은정 씨가 나랑 공통관심사가 맞더라고. 사진 찍는 취향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하고. 그저 친하게 지낸 것뿐이야.”

 상현이 나를 쏘아본다.

 “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앞에서 이러기냐? 언제까지 말을 돌리기만 할 건데? 제대로 된 답을 듣기 위해 내가 굳이 너를 물고 늘어져야 돼? 되지도 않는 헛소리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빨리 정리하라고. 내가 언제 너 하는 일에 간섭하는 거 봤냐.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놈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고 있으니까 걱정 되서 이러는 거잖아.”

 가슴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멍하다. 제 눈에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생각하기도 싫다. 지금 그걸 신경 쓰는 내 자신도 우습다.

 “설마, 너 은정 씨랑 갈 데까지 간 건 아니지?”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지만 차마 대답하진 못했다. 발끝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아챈다.

 “미친놈.”

 조금 전까진 제대로 담판을 해볼까 가늠해보기까지 했는데 멱살을 잡아채는 손길에 오히려 힘이 쭉 빠졌다. 차라리 매를 맞으면 속이 편할까 싶었는지 몸이 그대로 녀석의 손에 저항 없이 매달린다. 내 멱살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대로 주먹이 날아와도 대놓고 맞을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나이 헛 먹었냐?! 무슨 생각으로 그러냐고! 일이고 가정이고 다 팽개치고 아무렇게나 살고 싶은 거야?!”

 내가 답이 없자 더 화를 낸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답해 봐! 팔푼이처럼 어물거리지 말고!”

 상현이 화난 동작으로 홱, 손을 떨쳐버리자 무릎에 힘이 풀린다. 그 자리 그대로 푹, 주저앉았다.

 “으이그, 못난 놈!”

 뒤로 돌아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간다. 금세 눈에 보이지 않을 거리만큼 멀어졌다. 그래, 이런 내 모습이 엄청 못나 보이겠지. 나도 내가 이렇게 싫은데 너야 오죽하겠냐. 답답해서 몇 번이고 쥐어박고 싶을 거다.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면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그렇게라도 세상에서 눈을 가리고 싶다. 잠시만 다 피하고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조금만 시간을 줬으면 했다. 상현이 하는 말이 다 맞다. 그러니 제대로 대꾸도 못한 거다. 어차피 정리하려고 했었다. 이렇게 유세를 떨 일은 없었으면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못했다. 하나 씨를 힘들게 했던 그 천기장이랑 자와 내가 다를 게 없다. 은정 씨를 힘들게 할 생각에 가슴이 너무 무겁다. 아내와 아이들은 또 무슨 잘못인가?

 툭, 툭, 차가운 냉기를 띈 금속이 어깨 근처를 건드린다. 고개를 드니 상현이 앞에 서 있다. 손에 든 캔 커피를 건넨다. 그래도 너는 돌아와줬구나. 캔 커피를 받아들었다. 녀석이 옆에 나처럼 쪼그려 앉는다. 자기 손에 든 캔을 따서 한 모금 들이킨다. 그렇게 둘이서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만 멍하니 바라보는 녀석의 옆모습이 인물화가 아니라 풍경화의 한 부분처럼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 한 모금 더 들이키더니 말을 뗀다.

 “어차피 지난 일이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거고 앞일을 생각해야지.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상현아. 나, 아내와 애들 없이 못살 것 같아. 혹시라도, 만약, 가정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러니까 빨리 정리하라고. 그렇게 후회할 일은 왜 벌린 거야?”

 “그게, ∙∙∙∙∙∙, 아내와 애들이 눈앞이 아른거리면서 걱정되는 동안에도 그 뒤에 은정 씨가 서 있어. 그건 머리로 되는 게 아니야. 어느새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고. 나 어쩌면 좋냐? 이 나이 먹고 제대로 처신도 못하고 흔들거리는데 어떻게 해?”

 녀석이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살핀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다.

 “사진 동호회를 나가지 말 걸 그랬어. 그걸 후회해.”

 상현이 커피를 쭉 들이켜 끝을 내더니 캔을 내려놓는다. 슬쩍 입가를 훔친다.

 “살면서 그런 감정 한 번도 못 가져보고 죽는 사람도 많다더라. 어쩌면 그런 기회를 가진 것도 축복일지 몰라. 막 이렇게 바람에 흔들려 보고 주체하지 못하다가 돌아오면 더욱 굳게 뿌리를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경험했다고 치고 주변 사람들 최대한 피해 안 주게 조용히 막 내리도록 해.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어.”

 “그래,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지.”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보다 흠칫, 놀랐다. 물방울이 떨어져 땅을 적신다. 이렇게 눈물을 흘려보긴 오랜만이다. 근래 울어본 적이 언젠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감정이 흔들린 때가 없었다.

 “너 그건 뭐야?”

 “이거? 아니, 별 거 아냐. 집에 쓸 데가 있어서.”

 은정 씨 주려고 샀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평소에 여러 가지로 힘이 되고 든든하게 느껴진 적이 많았지만, 이렇게 힘들 때 옆에 있어주니 그 고마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혼자서 견디라고 하면 어디 절에라도 들어가서 숨었을지 모른다. 그저 다 피하고 싶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마주하기 너무 괴롭다. 손에서 모두 놓아버리고 도망치기를 바랐다. 그럴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렇게 간절히 원했다. 상현이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고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님 사방이 완전히 가로막힌 듯 다가와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것이다. 그래, 이제 그만해야겠지. 깊은 바다 속을 수영하며 그 풍경에 빠져 한때를 즐기더라도 평생 제대로 숨을 쉬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 언젠가는 편안히 숨을 쉬기 위해 바다 밖으로 빠져나와야 할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그동안 아름다운 광경에 흠뻑 취해 마음껏 즐기고 행복했었다. 다시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에 직면한다. 다만 하나만, 부디 한 가지만 허락한다면 간절히 빌고 싶다. 은정 씨가 너무 힘들지 않기를. 그녀가 상처 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 상처가 너무 깊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에게 미안하다. 우리가 다른 위치에서 지금과 같지 않은 상태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더 많이 행복했을까? 아니면 그러지 못해서 더 간절하게 빠져버린 건지도. 은정 씨, 미안해요. 나 같은 놈, 괜히 지나가다 잘못 걸려서 그 마음에 큰 상처를 주게 됐습니다. 평생 잘못을 빌면서 살겠습니다. 이제 우리 끝이네요. 지금 당장 어떻게 이별의 말을 전해야 할지 상상할 수 없지만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은정 씨,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해 주세요. 그러면, 은정 씨가 행복하다는 그걸로 위로를 삼고 살아가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못난 인간 만나게 되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저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그 웃음 끝까지 간직하게 못하게 되서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미안해요, 은정 씨. 정말, ∙∙∙∙∙∙, 미, 안, 해, 요.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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