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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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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26
작성일 : 19-10-07     조회 : 390     추천 : 0     분량 : 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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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모르겠다. 너무 성급하게 행동하는 건 아닌지 망설여진다. 진우 씨를 알아온 지 겨우 6개월 정도인데 이래도 되는 걸까? 그래도 이 사람, 놓치고 싶지 않다. 나를 아껴주는 그의 진심이 눈물 나게 고맙다. 살면서 욕심 많이 부리고 산 적 별로 없는데 그만은 평생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 확인하고 싶다. 그의 마음은 어떤지 알아야겠다. 주변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들리니까 마음이 조급해지고 그럴수록 더욱 집요해진다. 결론을 내버리면 흔들리지 않겠지.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혹시, 하는 여지가 남는다. 그럴수록 의지를 다 잡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거다. 우리 두 사람만 확고하면, 그럼 주위의 우려도 불식되겠지.

 오빠가 결혼한다는 소식과 오빠를 위해 돈을 보태라고 하는 엄마의 잔소리에 불쑥 결혼 생각을 해버렸다. 안다. 여자가 나서서 결혼신청을 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왜 여자가 결혼신청을 하면 안 되는데? 여자라서 이래야 한다, 여자가 그러면 어떻게 하냐는 말은 더 이상 듣기 싫다. 여자라는 틀을 짓고 그 안에 가두려고 하는 그런 생각은 이제 한물간 편견일 뿐이다. 너무 성급한 건 아닌지 주저되지만 살면서 이렇게 간절했던 적이 언제 있었나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동한다.

 오늘 일하러 가기 싫다. 이제까지 정말 아파서 못 나갔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근을 한 경우는 없었다. 그에겐 바쁜 날일까? 급하게 행동하지 말자 자제하려고 하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더욱 초조해진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했다. 구름이 살짝 낀 파란 하늘. 긴 호흡으로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니 조금씩 안정이 된다. 간간이 흘러가는 구름이 지나자 눈 안으로 은은한 햇살이 들어온다. 눈을 부시게 할 정도는 아닌 훈훈히 데워주는 알싸한 빛이다. 그러다 불쑥 뜨거운 김이 가슴 중앙에서 치고 올라온다. 눌러놨다고 여겼던 감정이 북받친다. 아, 안 되겠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이럴 때 말해야지 그 기회를 놓치면 영영 다시 붙잡을 수 없겠다.

 전화기를 들었다. 실제로 아프지 않은데 아프다고 하려니 슬쩍 죄책감이 든다. 그렇지만 이 더운 가슴을 안고 일한다면 손에 아무것도 제대로 잡히지 않을 테고 어쩌다 실수라도 하게 되면 오히려 일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리라. 일부러 목이 쉰 소리를 내려니 어째 어색하다. 다행히 매니저 언니가 아니라 소라가 전화를 받는다. 미안해, 소라야. 진주 언니한테 잘 말해줘. 소라는 아주 쿨하게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몸 관리 잘해서 얼른 나으라고 해준다.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갑작스레 시간이 남아도니까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다들 일하러 나서는 날에 혼자 집에 남게 된 상황. 여유시간이 생겨 즐겁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겠다. 진우 씨에게 만나자고 할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손에 땀이 찬다.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나와 결혼해줄래요? 상상만으로 입 안이 바싹 마른다. 그가 바쁘다고 하면 어쩌지? 왜 생각 없이 불쑥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못나간다고 한 건지 후회가 든다. 아니야. 마음먹었을 때 해야 돼. 지금이 아니면 결코 하지 못할 거야.

 이번엔 그의 연락처를 찾았다. 망설인다. 바로 전화번호를 누르지 못한다. 지금 뭐하는 거야? 이럴 거면 왜 회사에 못 나간다고 했어? 휴대폰 화면을 반복해서 켰다 끄기를 반복한다. 결국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번호를 누르는데 차마 제대로 보기 어려워 눈까지 감았다. 아주 혼자서 잘하는 짓이다. 상대방은 전혀 아무 예상도 못하고 있을 텐데.

 “여보세요. 은정 씨.”

 “네, 진우 씨. 좋은 아침이에요.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통화 가능합니다. 마침 외근 나가려는 참이었어요.”

 “외근 나가세요?”

 “바쁜 일은 아니고, 국과수에 서류 전달하고 거기서 받아올 문건도 있고 해서요.”

 “국과수요?”

 “아, 그렇게 말하면 은정 씨는 모르시겠네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라고 저희가 종종 신세 지는 곳입니다.”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그가 설명해주는 내용을 들으려 노력했다. 귀로 그의 말을 듣고 있어도 이미 내 생각은 한 곳에 몰려 다른 말은 그저 지나쳐가기만 한다. 그가 설명을 끝내자 잠시 정적이 흐른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은정 씨는 별 일 없구요?”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저기, 진우 씨.”

 “네, 말씀하세요.”

 “그럼 외근 나가시면 오늘 많이 바쁘신가요?”

 “외근도 종류에 따라 달라서 오늘 같은 일이면 별로 바쁘진 않아요.”

 “그럼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오늘요?”

 “네.”

 당연히 이어서 만나야 할 이유를 설명해야 할 타이밍인데 말이 나오질 않는다. 내 자신이 바보 같다. 그가 ‘이 여자 오늘 왜 이러나,’ 라고 의아해하고 있겠지. 이번에도 그가 먼저 말을 꺼낸다.

 “그러죠. 안 그래도 이렇게 혼자 외근 나가게 되면 밥 같이 먹을 동행이 없어 곤란하거든요. 전 혼자 먹는 밥은 그리 익숙지 않아서요. 같이 점심이나 할까요?”

 “조, 좋아요. 점심 같이 먹어요.”

 맙소사. ‘좋아요’는 더듬다가 ‘점심 같이 먹어요,’ 라는 뒷말은 쏜살같이 내뱉었다. 차라리 빨리 전화를 끊어야겠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면 나아지겠지.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얼른 진우 씨에게 고르라고 일임했다. 그는 나를 배려해주려고 나보고 고르라고 사양했지만 내가 더욱 완강하게 나가자 순순히 메뉴를 골라주었다. 진우 씨가 한정식을 먹자고 했다. 이왕 외근 나가니 경치를 구경하며 기분 좋게 먹을 수 있는 곳에 가자고 덧붙이며. 난 식욕이 전혀 동하지 않았지만 애써 기쁜 목소리를 내며 동조했다. 그 뒤로 어떻게 통화를 마무리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장소와 시간을 재차 확인했던 것만 머리에 남는다.

 꾀병을 부리고 낸 병가. 그와의 점심 약속. 청혼. 청, 혼, 이라는 두 글자에 화들짝 놀랐다. 그에게 청혼한다는 사실이 피부 위로 슬며시 다가온다. 이런 날 뭘 입지? 아, 외출할 때마다 옷을 고르는 건 고역인데 특히 의미가 있는 날은 더하다. 이럴 땐 차라리 외출복도 회사 유니폼처럼 요일별로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 굳이 고르지 않고 저거 입고 나가야지 미리 일정에 따라 짜여 있다면 고민하지 않아 좋을 텐데. 정장을 입을까? 아니야. 점심 한 끼 같이 먹기로 했는데 내가 정장을 입고 나가면 우스워 보일 거다. 너무 편하지 않게 특별한 날 기억에 남을 정도로 분위기를 띄우는 복장. 중요한 날에 꺼내 입으려 아껴놓은 옅은 분홍색 재킷이 생각났다. 그것만 걸치면 요즘 날씨에 쌀쌀하지 않을까 해서 그 아래 옅은 감색 스웨터를 받쳐 입기로 했다. 아이보리 코트를 겹쳐 입으면 어떨까 고민하다 그건 너무 나가는 거 같아 포기했다. 아직 한겨울도 아닌데.

 아직 약속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떨린다. 그가 한정식을 먹자고 했다. 평소 같으면 풍경 좋은 교외에서 맛보는 제대로 된 한정식을 기대하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할 텐데 정말 입맛이 싹 달아나버려 음식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오직 그의 얼굴만 떠오른다. 그와 마주하고 나서 말을 꺼낼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딴 소리만 하다 오면 내 자신을 엄청 구박하게 될 거다. 그럴 거며 굳이 병가를 내고 쉬는 의미가 없다. 아니 병가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아니면 평생 그 말을 꺼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해보자. 아니, 해야 한다. 진우 씨를 잃고 싶지 않다. 그 없이 살아가는 내 인생이 너무 메말라 보인다. 그저 회색빛 천지다. 그를 알고 나서 이렇게 겨우 삶이 색감을 띠게 됐는데 다시 무채색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하기도 싫다. 보통 텔레비전에서 보면 청혼할 때 남자가 무릎 꿇고 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설마 오늘 나도 반지를 준비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아니야, 반지는 나중에도 구할 수 있으니까 일단 오늘은 그의 대답을 듣는 게 중요했다. 이은정, 제발 김칫국부터 미리 마시지 말라고. 혹여 그가 거절한다면? 맙소사, 그 이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이건 확률 반반인데 그가 거절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그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가? 그 생각에 정말 몸이 지끈거리고 한 구석이 아파오는 듯했다. 병가를 내고 나서 아프게 되는 경우도 있나? 그에게 연락해서 점심 약속을 취소할까라는 생각까지 했지만 역시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는 다짐이 가슴 가장 한가운데 자리했다. 무엇도 그걸 밀어낼 수 없었다. 가자. 가서 대답을 듣고 나면 그 후는 따라서 어떻게 되겠지. 어차피 예스, 아니면 노, 확률 반반이잖아. 그가 받아들이면 그 후는? 그럼 날짜를 정하고 예식장을 물색하는 건가? 이은정, 그만 해. 상상 그만하라고. 머릿속이 터질 듯하다. 차라리 약속 장소에 일찍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야겠다. 이렇게 집에서 되지도 않는 상상으로 머리를 채우다간 그대로 가슴이 터져버릴 거다.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옷을 고르는 손은 왜 이렇게 떨리는지 자꾸 옷을 아래로 떨어트린다.

 진우 씨, 살면서 이런 흥분을 느끼게 해준 것 자체가 당신이 준 큰 축복이라고 봐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진우 씨 존재 자체가 나의 삶을 바꿔놨어요. 내게 기회를 줘 봐요. 정말 잘할게요.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랑하며 살게요. 나 이제 진우 씨 없으면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답니다. 예전에는 별로 가슴에 닿지 않던 사랑 노래가 다 내 노래 같고, 유치하게만 보였던 사랑 이야기가 전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요. 있다가 진우 씨랑 마주하게 되면 너무 떨리겠지만 그 기회가 너무 간절하고 이번에 놓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 여기며 마음 단단히 먹고 나갈게요. 이런 내 모습이 너무 바보 같을까요? 진우 씨, 이런 게 내 진심이에요. 어리숙하고 치졸하지만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막을 도리가 없네요. 많이 사랑합니다. 내 삶에서 진우 씨가 내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라 여기고 살겠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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