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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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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27
작성일 : 19-10-07     조회 : 396     추천 : 0     분량 : 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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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차선을 바꾸기 위해 이동하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뒷좌석에 둔 간이용 안마기. 슬쩍 백미러를 통해 곁눈질했다. 원체 물건 포장에는 재주가 없어 정성들여 싼다고 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늘 건네줄 수 있을까? 은정 씨가 만나자고 한다. 점심을 함께 하자는 약속. 지금 내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은정 씨를 볼 수 있어 기쁘지만 이제 그녀를 마음 편히 만날 수만은 없다. 하나씩 마음의 문을 닫는 연습 중이다. 그게 연습해서 제대로 숙련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게 연습으로 해결이 될까.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머릿속으로 할 말을 떠올려도 막상 그 자리에 선 내 모습을 상상하면 바로 가슴이 콱 막혀오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녀 앞에 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좋았던 그녀와의 시간들이 이렇게 변해야 한다는 현실이 원망스럽다. 너무 많은 생각과 이리저리 얽혀버린 상황에 마음 그 자체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무력하기만 할 뿐이다. 이럴 땐 그 앞에 당당히 마주하기보다 그저 피하고만 싶다.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아무리 애써 표정을 밝게 보이려 해도 은정 씨가 내 돌덩이 같은 마음을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다.

 어쩌면, 이번이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질질 끌기만 하다 제대로 된 기회를 놓쳐버리고 은정 씨가 다른 사람을 통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게 최악일 거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아님 그마저도 놓쳐 버리고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속 좁고 겁 많은 인간이 되었는지 한심하기만 하다. 약속 장소로 잡은 한정식 집은 교외 한적한 곳에 있다. 아는 지인들과 식사를 했었는데 다들 평이 좋았고 꼭 한 번 다시 오고 싶었다. 음식이 정갈했던 기억이 있지만 오늘 도무지 입 안으로 음식을 넣을 수 없을 듯하다. 먹어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생각할 여지가 없겠지.

 은정 씨가 어떻게든 상처를 덜 받도록 하고 싶지만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다치지 않을 방도가 없다. 왜 하필 나 같은 놈을 만나서 그녀가 이런 피해를 입어야 하는지 스스로 다그치기만 한다. 차창 밖 화창한 햇살 아래 보이는 수목의 푸름이 아찔하게 눈을 찌른다. 평일 오전 교외로 나오니 교통이 한적하다. 은정 씨와 그저 저 나무와 숲을 보며 즐길 수만 있다면 좋겠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런 날이었다면. 아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완전할 수 없다. 항상 가슴에 돌을 얹고 걸어다니는 기분이랄까. 그걸 내려놓기 전까진 아무리 보기 좋은 풍경을 보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위장 한 구석이 체한 듯 텁텁할 거다. 그럴 거면 시작은 왜 했냐는 질문에 답을 어떻게 할까. 안 된다고 그건 잘못된 선택이고 금단의 사과를 건드리는 거라고 머리가 아무리 말려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할까. 아니, 오히려 말리니까 더 하고 싶어지는 못된 심보 때문이었다는 변명을 할지도. 평생 가져보지 못했던 달콤한 빨간 사과가 바로 눈앞에 어른거리니 이성이 마비되고 숨을 쉬기 힘들어 받아들여야 했다고. 제대로 숨을 쉬고 싶어서.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며 조금이나마 착잡한 기분을 위로해보려 했는데, 이런, 그녀는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교외에 나와 좋은 풍경을 보며 맛있는 식사를 할 상상에 들떠서 기다릴 수 없었던 걸지도. 아, 그런 그녀의 좋은 기분을 망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겠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길은 들어섰고 다시 되돌아가려 하면 더욱 구덩이 속으로 잠길 뿐이다.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화가 났다거나 슬픈 모습은 아니다. 3.1절 중대한 모의를 앞두고 있는 애국지사의 자태가 더 어울리는 비장한 결의. 그녀가 그런 표정으로 과장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런 인위적인 웃음은 그녀에겐 참 어울리지 않는다. 그럴수록 심각한 기운만 뻗친다.

 “진우 씨, 일찍 나오셨네요.”

 “저보다 은정 씨가 더 빨리 도착하셨는데요.”

 “이런 교외는 나올 때마다 너무 좋아서 일찍 와서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어요. 진우 씨 덕분에 이렇게 나올 기회가 생겨 감사해요.”

 “덕분이라고 인사 받을 정도는 아닌데요.”

 그녀를 향해 웃었다. 같이 웃는 그녀의 입가가 굳었다. 이런, 나만 불편한 게 아니었나? 어쩌면 무겁게 결심을 하고 온 내 뻣뻣한 기운이 그녀마저 감염시켰나 보다. 또 미안해지려 한다. 그녀에겐 미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바깥 날씨는 저렇게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한데 내 안은 지독하게 껌껌한 먹구름이 낀 장마철이다. 곧 비가 내릴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첫 손님인지 식당 안엔 우리밖에 없다. 가장 안쪽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마주 앉은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내 눈을 피한다. 설마, 그녀가 알아버린 건지도. 그게 가장 염려하던 일이었다. 바보 같이 주저하기만 하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두려워진다. 아, 은정 씨, 내가 너무 늦었나요?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은정 씨가 고개를 든다. 핏기 없는 입술. 초췌해보이기까지 하다. 우리 중 누구도 딱히 메뉴판을 보려 하지 않았다. 한정식 2인분을 시키고 종업원이 물러간 후 물을 따라 컵을 건넸다. 그녀가 냅킨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싸서 건넨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격식을 차리니 어색하다. 딱딱한 공기를 부드럽게 해보려 평소엔 관심 없는 시사문제를 거론하며 대화의 물꼬를 터보려 했다. 그녀가 조심스레 대답하자 실없는 농담을 했다. 살짝 웃더니 괜히 젓가락을 정돈한다.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확실히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에게 화를 낸다면 오롯이 받을 각오가 돼 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플지 상상하기 싫다.

 짧게 대화가 오가고 잔 반찬들이 나온다. 종업원이 음식을 나열하고 되돌아가자 그녀가 이제 마음을 굳힌 듯 비장한 표정으로 어렵사리 입을 떼려 한다.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런 내 진심을 모르고 있을 그녀. 미안하다. 그녀가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장받아야 할 그녀다.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수 있겠지. 그녀의 눈, 코, 입, 동그라니 완만한 얼굴선, 머릿결, 어깨와 가슴. 머릿속에 가능한 한 자세히 그려놓고 싶다. 시간이 지난 후에 꺼내보면 제대로 떠올릴 수 있을까. 그녀와 함께 하며 매순간 느꼈던 감정이 오랜 후에도 살아날지 모르겠다. 그걸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불평할 게 아니라 그런 감정을 한 번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사람은 당연하지 않은 걸 너무 쉽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못된 습성이 있다. 그럼 벌 받는 거다. 그래, 지금 내게 벌 받는 차례가 온 건지도.

  그녀의 입술이 열린다. 그녀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려 한다.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그녀를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안하고 지금껏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살면서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 잊지 못하겠지. 나이가 들고 치매라도 걸려 기억이 가물가물해도 그녀가 앞에 서면 떠오를 만큼 그 기억은 강렬하다. 미안해요, 은정 씨. 이렇게 끝을 향해 가게 되는군요. 고마워요, 은정 씨. 기대한 적 없었는데 그런 큰 기쁨을 느끼게 해줘서. 행복해주세요. 그것만 바랍니다. 제발, 슬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많이 웃으며 살아요. 그 웃음 평생 간직하고 살게요. 내가 절절히 아꼈던 당신의 웃음입니다. 그렇게 환한 웃음으로 삶을 밝혀줘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언제 어디서나 웃고 살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입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온다. 진우 씨, 라고 내 이름을 부르며.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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