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시커멓던 구름이 한바탕 비를 뿌리고 나자 하얗게 탈바꿈했다. 비가 꽤 내렸는데도 구름은 그대로 하늘 위에 자리한 채 해를 보여줄 생각을 않는다. 올 겨울엔 눈이 많이 온다. 작년 겨울은 유독 추웠는데 이번 겨울도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하나 벌써부터 걱정이다. 모처럼 평일에 맞이하는 비번. 아내는 분주히 아이들을 챙기고 있다. 겨울방학동안 열리는 과학캠프에 두 녀석 함께 보내려고 바쁘다.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엄마라는 존재는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몇 번 그렇게 반복하다 질려서 손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텐데.
아내는 비번인 날에는 늦잠을 자도록 깨우질 않는다. 이미 머리는 깨어있었지만 일어나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눈을 감은 채로 침대 안에서 뭉그적거렸다. 몸에 힘이 없다기보다 가슴에서 의욕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은정 씨는 잘 돌아갔을까? 먼 거리를 그 상태로 보낸 게 많이 미안하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기를. 상처 입은 마음이 어서 빨리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저 그녀의 행복을 빈다.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머릿속 이런저런 생각에 유영하듯 잠겨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나 보다. 주변이 환하다. 이미 정오를 지난 듯하다. 살며시 문이 열린다. 아내가 들어와 나를 살핀다.
“깼어. 애들은 나갔어?”
“응.”
그 뒤로 말이 없다. 딱히 건넬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건너편으로 뒤척거리며 이불을 넘겼다. 아내가 도로 나갈 생각인지 문을 잡고 그대로 있다.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울린다.
“점심 먹을 시간이야. 아침도 건너뛰었는데 배 안 고파?”
“그래. 밥 먹어야지. 쉬는 날이라고 아주 늘어지게 잤네.”
아내가 방문을 열어놓은 채로 나간다.
“콩국수 할게.”
“좋지.”
콩 삶는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진다. 그 냄새에 서서히 배고픔이 밀려온다. 욕실로 가서 대충 얼굴만 씻고 거실로 나와 식탁에 앉았다. 아내가 썰어놓은 오이와 삶아놓은 계란이 올라있다.
“도와줄 거 있어?”
“아니. 거의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아내가 마저 준비를 끝내는 동안 신문을 펼쳤다. 항상 그렇지만 그 안의 내용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많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었고 경제는 살아날 줄을 모른다. 물가는 오르기만 하지 내려갔던 적은 없다. 내 심보가 꼬여서 그런지 평소와 다름없는 신문이지만 유독 오늘따라 답답하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기자들은 이런 것 말고 쓸 게 없는 건지.
아내가 콩국수를 그릇에 담아 내오자 신문을 접고 수저를 챙겼다. 물컵에 물을 담자 향긋한 결명자 냄새가 코로 올라온다. 반쯤 잔을 비우고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었다. 언제나처럼 콩물이 진득하게 배어있다.
“맛있네.”
“많이 먹어. 면이랑 국물 더 있어.”
슬슬 배가 차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쯤 아내가 오늘따라 말이 적은 걸 깨닫는다. 내가 이렇게 둔하다. 아님 지금 경황이 없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지도. 뻔한 얘기지만 애들은 항상 우리의 공통 관심사라 애들 얘기를 끄집어냈다.
“지현이랑 지호가 오늘 가는 게 무슨 캠프라고 했지?”
“과학영재캠프. 애들끼리 과학에 관련된 실험과 체험학습을 한댔어.”
“그거 괜찮네. 어릴 때부터 과학에 친해지면 좋지.”
“애들이 우릴 안 닮아야 할 텐데 말야. 난 학교 다닐 때 과학하곤 거리가 멀었고 당신도 영 젬병이라고 했잖아.”
“어. 학교 다닐 때 과학 선생이 하는 얘기를 통 따라잡을 수가 없었어.”
아내가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한다. 고즈넉하고 단조로운 오후 풍경이다. 이렇게 보내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특별히 흥분되는 일 없이 조용하게 하루를 넘기는 날.
“엄마 잠깐 들른대.”
“장모님 오신다고?”
“고춧가루 빻아서 나눠준다고.”
“그럼 우리도 뭔가 대접해야지.”
아내가 답이 없다. 둔한 나라도 이번엔 아내가 생각에 잠겨있단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접은 무슨. 가족끼리.”
“이것저것 얻어먹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장모님 좋아하시는 보쌈이라도 시킬까?”
“지현 아빠.”
아내가 날 부르는 소리가 단단하다. 이 사람 속에 할 말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손에 든 젓가락을 식탁 위에 놓았다.
“어.”
아내가 말을 잇기 전 손가락으로 살짝 앞이마를 누른다.
“당신 어제 자기 전에 또 휴대폰 충전하는 걸 잊었더라고. 지난 번 지현이 축구시합 때도 충전해놓지 않았다가 휴대폰 방전 돼서 고생했었잖아.”
그랬었다. 그래서 그 날 꽤 힘들었다. 이제 휴대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돼버렸다. 가만, 자기 전 휴대폰 만지작거리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던 것 같은데∙∙∙∙∙∙.
“난, 당신 폰 충전해주려고 했던 것뿐이었어. 그러다, ∙∙∙∙∙∙, 폰이 잠금해제 돼 있는 상태더라고.”
아내가 이제부터 무슨 얘길 하려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설마.
“미안해.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서로 침범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는 건데 어제는 내가 어떻게 됐나 봐. 슬쩍 장난기가 들기도 하고 그래서 당신 폰을 건드려봤어.”
눈이 감겼다. 다 내 잘못이다. 어리석은 실수 하나 때문에 경찰에 검거되는 범인들을 볼 때마다 부주의한 행동을 비웃곤 했는데 이제 나는 그렇게 비웃을 자격이 없다.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걸까. 한순간 정신줄을 놓아버리면 그 짧은 방심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신∙∙∙∙∙∙.”
“지현이 엄마.”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가슴이 턱, 답답해진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내가 내 얼굴이 아닌 그 너머로 시선을 주며 말을 이어간다.
“우리, 결혼한 지 얼마쯤 됐지? 십 년이 다 되어가던가, 아님 넘었나? 애들 둘 낳고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지? 당신은 어디 가나 선비 같다는 소리를 들었잖아. 언제나 한결같고 법을 지키는 일을 하지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달리 내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한 번도, ∙∙∙∙∙∙, 당신이 허튼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어. 가끔은 이 사람 참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아내가 잠시 말을 멈춘다. 시선을 돌려 나를 보자 그 눈을 맞추려 했다. 무슨 말을 하든 겸허히 받아들이려 마음을 다독인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아내는 얼마나 분할까? 갑자기 초인종이 울린다. 아내가 문을 열 생각은 않고 굳은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 당신 휴대폰 문자를 확인할 때 충격을 받았나 봐. 머릿속이 하얘지고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지금 엄마가 집에 오는 거 나 때문이야. 누구든 의논할 사람이 필요했어.”
장모님이 아신다는 건가? 아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많이 힘들었겠지. 결국 벌어질 일이겠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상황이 펼쳐지고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장모님을 마주해야 한다는 게 당혹스럽다.
“미안하긴. 다 내 탓이야.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잖아.”
그 말을 듣는 아내의 얼굴이 순간 쓸쓸해 보인다. 어쩌면 내 마음 상태가 투영된 건지도 모르겠다. 위로해주고 싶지만 어떤 말과 행동으로 다가가야 할지 조심스럽기만 하다. 상처가 나서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길 원하지만 자칫하다 더 나쁜 상태로 만들까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심정. 아내의 가슴이 짓이겨져 벌건 피를 흘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불쌍한 사람. 너무 미안하다. 초인종이 다시 울리자 아내가 문으로 향한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장모님이 안으로 들어오신다.
“엄마, 왔어?”
“그래. 너는 애가 밥은 제대로 챙겨먹고 다니냐? 어째 볼 때마다 얼굴이 반쪽이 돼가?”
“장모님, 오셨어요.”
“남서방, 오늘 쉬는 날인가? 집에 있네.”
장모님은 다 알고 오셨을 텐데 짐짓 너스레를 떤다.
“잘 됐다. 내가 고춧가루 빻아 오면서 수육을 삶아왔지. 집에 갓김치 담근 거 있지?”
장모님은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들고 온 물건을 하나씩 식탁 위로 꺼낸다.
“엄마, 방금 콩국수 삶아 같이 먹었어. 수육 들어갈 배가 남아있지 않아.”
“어휴, 얘는, 면은 금방 꺼져. 남서방이 자주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외근한다 뭐한다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집에 있을 때라도 잘 챙겨먹여야지. 남서방뿐만이 아니다. 이것아, 너도 잘 챙겨먹어. 남자가 셋인 집이다. 여자가 잘 챙겨먹어야 뒷바라지 할 힘이 나서 다른 식구도 잘 거두는 법이야. 사람은 다 밥심으로 산다. 옛날 말 틀린 거 하나 없어.”
“장모님, 이 사람 너무 잘해요. 너무 잘 먹어서 살이 오르는 걸 피부로 느낀다니까요.”
장모님이 넌지시 나를 봤다 얼른 시선을 피하더니 가지고 온 음식을 따로 가지런히 나눈다. 집사람은 그릇을 꺼내 그에 맞춰 하나씩 따로 담는다. 나는 멀뚱히 서서 두 사람이 하는 공동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부엌일을 하는 엄마와 딸의 손이 척척 호흡이 맞는다. 빠른 속도로 식탁이 차려지고 장모님이 어서 앉으라며 나를 재촉한다. 콩국수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불렀지만 장모님이 애써 권하는 걸 거절할 수 없었다. 가지고 오신 수육을 갓김치를 얹어 입에 넣었다. 향긋한 김치 냄새가 진득한 고기향과 버무려져 입 안에서 퍼진다. 방금 전 식사를 했는데도 음식맛이 좋아 침이 가득 고인다. 잠시 다들 먹는 데만 집중했다. 장모님이 부지런히 내 주위로 음식을 밀어준다. 아내는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놀리고만 있다.
“장모님 해주시는 음식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가 않네요. 손맛이 일품이라 같은 음식을 하셔도 유독 입에 착착 붙어요.”
“말만이라도 고맙네. 요즘 음식 잘하는 사람이 널렸어. 내 음식이야 시골 아줌마 솜씨지 별 다른 게 있을라고.”
대화가 끊기고 적막이 흐른다. 장모님이 내 눈치를 살피는 걸 알 수 있다. 정작 눈치를 살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나 물 한 잔만 다오.”
아내가 말없이 일어나 냉장고를 향한다. 장모님이 수저를 내려놓고 애써 밝은 얼굴을 하며 나를 본다.
“남서방. 혹시 내가 남서방 서운하게 한 적 있나?”
“장모님이요? 아니요. 제가 저희 부모님한테 욕은 먹어도 장모님한테 상소리 들은 적 한 번 없었죠. 처가 복 있다고 언제나 감사해 합니다.”
장모님이 아내가 물을 건네줄 때까지 기다린다. 아내는 물을 건네고 난 후 망설이더니 빈그릇을 집어 싱크대로 향한다.
“설거지는 나중에 해도 돼. 너도 여기 앉아라.”
아내는 장모님의 말에 고분하게 돌아와서 자리에 앉는다.
“요즘 젊은 사람들 공부 많이 하고 똑똑한 거 나도 아네. 늙은이들 하는 소리야 다 잔소리 같겠지. 그렇지만 세월을 겪으며 쌓인 지혜에서 나오는 얘기가 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 나이 먹은 할머니가 그저 넋두리로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들어주면 좋겠네.”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어깨를 펴도 괜찮아.
“남서방, 나는 여자지만 살아오면서 남자들 많이 만나고 봐왔어. 완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어떻게 행동하는지 눈만 감아도 그림이 그려진다네. 남서방이야 양반이지만 술 먹고 행패 부리고 도박하고 오입질하는 거, 남자라면 다들 하는 짓거리들 내 너무 잘 알고 있네.”
오입질? 그렇게 말하니 그 표현이 참 상스럽게 다가온다. 맞다. 누군가에게 연애라면 누군가에겐 불륜이라 했던가. 보기에 따라 사랑이기도 하고 상스러운 짓거리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 짓을 벌인 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남서방 같이 참하고 곧은 사람이 한눈을 팔면 넘어가기 더 쉬운 편이지. 내 지현 애미한테서 얘기를 들었네만 남서방 잠깐 실수한 거라고 생각해. 남녀 사이야 헤어지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지만 애들은 어쩌겠나. 저 어린 것들 생각해야지?”
“장모님. 장모님이 어떤 얘길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요, 그게 사실인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을 겁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다 제 불찰입니다. 제가 지현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백 번 고개를 숙여도 부족합니다.”
장모님이 이번엔 아내를 살핀다.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미처 알지 못했는데 목덜미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 갑자기 장모님이 아내의 팔등을 세차게 때린다.
“이것아! 뭘 잘했다고 울어! 여자가 집안 단속 제대로 못하면 남자가 밖으로 나도는 법이야. 이게 남서방만 잘못해서 벌어진 일인 줄 알아? 네 책임도 큰 줄 알아야지!”
장모님이 아내를 심하게 다그친다. 그 힐난에 아내의 울음소리가 커져간다. 차라리 나를 때리고 다그쳤다면 마음이 편했으리라. 그런가? 이게 장모님이 나를 벌하는 방법인가? 어쩌면 나를 직접 대하는 것보다 그 효과가 더욱 크겠지. 아내를 향해 다시 손을 올리는 장모님을 애써 말렸다.
“장모님. 제 탓입니다. 이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차라리 저를 탓하세요.”
장모님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척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아내는 이제 크게 입 밖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더니 욕실로 향한다. 쾅. 문을 닫는 소리가 집 전체에 울린다. 장모님은 길게 한숨을 내 쉬더니 손을 앞으로 모은다.
“남서방. 요즘 사람들 사랑, 사랑 그러지만 결혼이라는 게 사랑만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건 자네도 잘 알 거라고 보네. 한 집안의 가장이라면 애들 거두고 가정을 지킬 책임을 져야지. 한 번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네. 그런 걸로 자신이 가진 중요한 걸 포기하면 안 되네. 혹시, ∙∙∙∙∙∙, 그 여자, 임신이라도 한 건 아니지?”
이미 나는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덫에 걸렸다. 이제 수순은 차례로 정해졌다. 장모님과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잘못을 빌 테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확답을 준다. 그땐 눈에 뭔가 씌었다고,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변명과 함께 사과하고 내 탓을 하고 또 할 것이다. 그리고 신실한 남편과 아버지로, 한 집안의 가장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걷는 거다. 그걸 감히 불평할 생각은 없다. 그리 된다면 절절히 감사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이다. 이미 다쳐버린 아내의 마음은 어떻게 치료해줄 수 있을까? 평생 가슴 안에 생긴 생채기를 다독이고 살아가야 하겠지. 그건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완치가 되기 어렵다.
그리고 은, 정, 씨. 그녀에게 지독한 짐을 지웠다. 죽을 때까지 던져낼 수 없는 가슴 안 무거운 덩어리. 나 한 명 때문에 이렇게 여러 사람이 힘들고 상처를 입었다. 정말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의도는 없었다. 그저 행복하고 싶었다. 잠시 가슴이 원하는 대로 하게 놓아주었을 뿐이다. 그랬다.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채. 장모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장모님은 싸늘해진 눈빛으로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들이킨다. 이제 장모님이 선고를 내릴 차례다. 머릿속에서 어떤 말이 돌고 있는지 확연히 그려진다. 요즘 젊은 것들 아무리 날고 기어도 별 수 없다. 남자는 다 똑같고 그걸 다루는 방법은 여전하다. 어리석은 딸아이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래, 나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고 장모님은 형량을 재고 있는 재판관이다. 벌을 받을 땐 받아야지. 그저 절실히, 내 죄로 인해 지독한 고통을 받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나로 인한 그 아픔이 너무 크지 않기를. 빨리 회복되기를. 다 잊고 예전처럼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되기 힘들 거라는 걸 알아도 계속 기원한다. 그것만이 오직 내가 할 수 있다. 이렇게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서 기다리는 죄인에겐 오직 그것만이 남았다. 비루한 죄인. 그저 잘못했다고 빌 뿐이다. 그저 잘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