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첫 번째 죄악은 3살 때였습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부산한 날이었지요.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동생이 태어날 거 같다며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엄마의 식은땀 가득한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제가 느낀 부정적인 감정이 온 마음을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 눈앞에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아빠와 함께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작은 손으로 눈물 훔치며 쫓아 나가려는 저의 허리를 감싼 할머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외로움은 3살짜리 아가를 감싸 안았고, 이 세상 전부였던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를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절망적인 버려짐에 어린 심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아프고 끔찍했었습니다.
할머니와 삼촌은 온갖 방법으로 절 달래면서 안아주시고, 막대사탕도 들려주셨지만, “왜?”라는 억울한 생각에 휩싸여 모든 것을 나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은 싫었습니다.
저를 안아주시는 할머니의 품도, 삼촌의 애교도...,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는 제 마음을 몰라주는 어른들의 어색한 미소도 정말 싫었습니다.
엄마가 빨리 제 곁에 나타나 환한 미소로 안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랬지만, 제 기다림은 아랑곳없이 엄마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울다 지쳐 잠자기를 몇 일 째, 할머니는 도저히 안 되시겠는지 이미 지쳐버린 삼촌을 바라보시면서
"얘 잡겠다. 아무래도 지 엄마한테 데려다 줘야지 원...,"
하시며 노란 원피스를 입히고, 따스하게 내리 쬐는 햇빛이 따가울 세라 노란 챙 넓은 모자도 씌워 주셨습니다.
제 귀에는 "엄마 만나러 가자." 이 환상적인 말이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노란 병아리처럼 할머니의 느린 발걸음에 맞추어 쫄래쫄래 걸어가는 길이 참 발랄했었습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저의 모자를 살짝살짝 건들 때면 "안 돼. 내꺼야."라며 이 마음에 드는 모자를 나쁜 바람이 가져갈까 봐 꽉 움켜쥐기도 했지요.
싱그러운 바람의 장난에도 할머니를 따라서 엄마와 아빠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빠르게 걷는 걸음이 너무 좋았습니다.
도착한 곳은 복도가 긴 병원이었습니다.
어쩌면 엄마,아빠를 만나는 설레임이 그렇게 느끼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복도에 울려퍼지는 제 발걸음 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두근거렸지요.
며칠만에 보는 저를 엄마, 아빠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웃음을 보여줄까요?
얼마나 저에게 따스한 포옹을 해줄까요?
할머니와 함께 멈춰진 병실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저는 정말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달려와서 "사랑해. 우리 딸!"이라며 안아주시고, 뽀뽀해주실 거라 생각했던 엄마, 아빠는 저의 등장을 많이 당황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어머니, 애기 여기 오면 안 돼요."라며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와버린 양,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제가 안쓰러우셨는지 할머니는 그저 저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의 시선은 엄마 옆에 꼬물거리는 강보에 싸인 아기에게 꽂혀 있었습니다.
엄마는 이 세상 가장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 아기를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저 품은 내 자리인데...,
왜? 우리 엄마 품에 저게 안겨있는 건지...,
나는 왜? 안아주지 않고 저것만 엄마가 안아주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굳어진 저에게 엄마는 웃으며 손짓하기 시작했습니다.
다가간 저에게 엄마는 한숨어린 미소 한 가득으로 저를 들어 무릎에 앉히고선, 시선으로 안고 있는 아기를 가리키며 말씀 하셨습니다.
"은수야, 네 동생이란다. 여자 동생이란다. 좋은 언니가 되어주렴."
저는 조심히 잠자는 아기를 찔러보기 시작했습니다.
말랑거리는 볼살은 매력적이게 움찔거렸고, 그 조그마한 입술을 귀엽게 오물거렸습니다.
저보다 훨씬 귀여운 얼굴은 정말 화가 났습니다.
왜? 엄마와 아빠가 저한테 오지 않고 이 아이와 함께한 것인지 깨닫는 순간, 저의 작은 가슴은 죄를 저지를 준비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침대 한 켠에 아이를 내려 놓은 엄마의 행동에 맞춰서 저는 발로 동생이라는 아기를 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침대는 높았습니다.
떨어지면 이 조그맣고 보드라운 아기가 죽을만큼...,
저의 첫 번째 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기는 침대 난간 사이로 빠져 나가더니, 그대로 쭉 미끄러지듯 떨어졌고,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엄마의 외마디 비명과, 마침 그 부분에 있었던 아빠를 "여보!"라며 다급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동생은 밑에 앉아 있었던 아빠의 품에 추락하고 말았지만, 질투심어렸던 저의 행동은 어른들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빠는 화를 내기 시작했고, 전 여전히 저 아기가 너무 미웠습니다.
절대 저것과 우리 부모님의 사랑을 나누어 갖지 않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할만큼...,
전 그렇게 다시 울부짖으면서 할머니 손에 이끌려 부모님과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엄마는 몇 일 뒤에 저에게 돌아 왔지만, 저의 질투는 끊임없이 동생을 괴롭히는 것으로 계속 되었습니다.
잠자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날카롭게 물어뜯고, 울고 있는 아이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막고, 겨우 앉게 된 아이의 머리를 쳐서 다시 쓰러뜨리며, 먹고 있는 우유병을 빼앗아, 도리어 아기 흉내를 내기 일쑤였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제 맘을 알아주기 원하며...,
엄마에게 몇 번씩이나 혼이 났지만, 질투심에 휩싸인 저는 모든 것을 동생 탓으로 돌리기만 했습니다.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
하지만, 괴롭힘의 강도는 나날이 강해져, 결국은 엄마의 강제 조치로 “동생은 사랑받아야 돼”라는 문장이 각인 될 때까지, 분리되어 있어야 했었습니다.
***
저의 첫 번째 불행이 있었던 날은, 참으로 날이 좋았던 따스한 늦여름이었습니다.
제가 그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제는 보이지 않을 발에 남은 상처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3살 장난꾸러기는 부지런한 엄마의 주변에서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집안에 먼지를 털고 있는 엄마의 먼지털이개를 달라고 조르며 뺏기도 하고, 청소기를 밀고 있는 엄마 모르게 그 위에 올라타기도 했습니다.
깨끗해진 방 안에 온갖 장난감을 다 끄집어내고, 사랑하는 붕붕카를 타면서 머릿속에 다채롭게 펼쳐지는 상상 놀이에 푹 빠져 저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잔소리가 끊어진 엄마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 유혹적인 자태로 빨래를 하기 위해 꺼내진 커다란 삶숙이 통이 등장하자, 전 박스를 발견한 고양이가 되어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넓직한 통은 3살 아이가 들어가기에 참 아늑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삶숙이 통 안의 옅게 남아있는 알싸한 세제의 내음이 코끝을 스치면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며 그 속에 살짝 취해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요 녀석! 나오지 못해?"라는 깜짝 놀란 말투와 함께 거북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의 겨드랑이를 잡아 번쩍드시면 저의 그 환상적인 여행은 짧고 아쉽게 끝나 버립니다.
번쩍 들린 채, "싫어. 싫어."하며 부정적인 발버둥을 치면서 고집스럽게 울어버리기도 했지만, 냉정한 엄마는 사랑스러운 삶숙이통만 가져가버리고, 울고 있는 저를 바닥에 그냥 내려 놔 버리셨습니다.
슬펐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심심해진 저는 텅 빈 방 안을 두리번거리고는 붕붕카를 타고 또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울했던 기분은 기차 모양 붕붕카로 많이 즐거워졌습니다.
"뿌뿌!"
기차 경적소리 내면서 신나게 달리는 순간,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알싸하고 반가운 향내가 저에게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붕붕카와 함께 그 냄새가 이끄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옥으로 된 집 대청 마루 바로 앞에 휴대용 가스렌지 위 사랑하는 삶숙이 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왜 그럴까요?
불행은 저를 경주마처럼 그것만 보게할 뿐, 다른 건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려버렸습니다.
저의 모든 정신은 '저 삶숙이 통을 차지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붕붕카에서 내려서 서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고, 그 마루 끝에서 휴대용 가스렌지 위에서 이미 바글바글 거품을 내며 끓고 있는 속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유혹적인 거품은 저에게 '이리 들어와. 아가야. 거품 놀이할 시간이야.'라고 말하는것 같았습니다.
저는 발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뜨거운 맛을 잘 이해 못하는 죄로 불행은 사악한 웃음과 함께 급격히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날카로운 비명이 귓가를 때리기 시작했고, 저는 신발도 신지 않은 발을 고대로 삶숙이 통안에 집어 넣었습니다.
뜨거운 거품이 저의 발을 감싸기 시작했고, 지옥불 속 악마처럼 여리디 여린 살을 빨래와 함께 삶기 시작했습니다.
생전 처음 느낀 고통이 낯설어 당황하던 그때, 다행히도 비명과 함께 달려온 엄마는 통 속에 완전히 빠질뻔한 저를 번쩍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제서야, 급격하게 몰려오는 발의 통증에 저는 그만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울음에 당황한 엄마는 정신 없이 저를 안고 냉장고로 달려가 얼음과 물을 꺼내, 어느새 가져온 세숫대야에 빠르게 부어버리시고는 저의 발을 거기에 담그셨습니다.
너무 아프다라는 건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저의 울음에 맞추어 함께 울고 계셨고, 이미 빨개질대로 빨개진 발은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습니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얼음물이 제발 진정시켜 주길 바라며 엄마는 신께 기도하고 또 하셨습니다.
2도 화상의 고통을 처음으로 느끼면서 뜨거운 것에 대한 공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트라우마처럼 남아버린 그것으로 인해 사우나 가는 것도 치를 떠는 저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심하게 일그러진 피부로 인해 계속적으로 피부 이식을 해야 했습니다.
신발을 신는 것조차, 참 편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불행의 장난은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일을 시작으로 저에게 일곱 번의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찾아온 불행은 처음엔 제 키만큼 사소하면서 차츰 그 크기를 불려만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