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저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부모님이 바라보는 동안은 그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잘 노는 척, 착한 언니인 척하다가도 영악하게 부모님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으면 언제나 동생에게 못된 행동을 일삼으며 괴롭히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생이 저의 괴롭힘에 대한 괴로움과 아픔에 몸서리치면서 울라치면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저란 걸 감춘 채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라는 6살짜리 제스쳐는 순수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해진 동생은 제 모습이 눈에 띌 때마다 자지러지게 울면서 반응을 보이는 터라 부모님의 관심은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더욱더 동생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은 애정결핍이라는 결과를 낳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았습니다.
저의 행동은 부모님이 보기에 걱정스럽게 변하기 시작한 건 어쩜 당연한 것이지요.
어느 순간부터인지 전 짧디 짧은 손톱을 피가 날때까지 물어뜯는 행동을 보였고 엄마의 외출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화장실만 가도 놀란 심장으로 가슴 찢어지게 울면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부모님을 잃어버린 아이인 양 찾기 일쑤였습니다.
근처에 사시는 친할머니의 집에도 엄마를 찾아 울면서 들어가기를 여러 번...,
할머니는 항상 놀란 얼굴로 제 손을 잡고 집으로 뛰어와 사라진 저를 한참이나 찾고 있던 엄마를 퍽이나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죄악은 그런 헛헛한 감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 수없었던 너무 어린 6살 꼬마는 이 채워지지 않고 비어있는 듯한 마음을 달래는 것을 감히 알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집어 넣을 것이 없으니, 허하고 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뱃속으로 집어넣기에 바빴습니다.
뱃속이 채워지면, 왠지 모르게 마음 또한 채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 허전한 마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점점 심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잘 먹는 것에 보기가 좋았는지, 부모님의 애정어린 눈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관심을 받는다라는 것이 좋았고, 어느덧 통통하니 살이 오른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애정 가득한 눈길도 좋았습니다.
채워진 배만큼, 가슴 또한 가득 차버린 거 같아 적게 느껴지는 헛헛한 감정 또한 좋았습니다.
그것이 소아 우울증이라는 병임을 깨닫지 못한 채, 전 또 다시 어린 나이에 알아채지 못할 식탐이라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6살 나이에 느끼는 엄청난 가슴 속 외로움은 결국 폭식증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 이쁘다 칭찬해주시던 부모님의 눈길은 점점 걱정스럽게 변해버릴 정도로 전 먹고, 체하고, 토하고를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해진 부모님은 과도한 식탐으로 폭식을 하고 급체를 하는 절 보며 먹는 것을 절제시키려 했지만, 배가 채워졌을 때, 가슴 속에 느껴지는 헛헛함을 잊을 수 있다는 욕구로 과도한 반응을 보이면서 소리치고 발버둥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런 저의 행동이 낯설었을까요?
엄마는 밥통을 껴안고 퍼먹는 6살 꼬맹이인 저를 어이없어 바라만 보기 일쑤셨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절 이해하시기 위해 많은 부분을 노력하려 하셨지만, 그것은 동생이 태어나서 생긴 것임을 아시지는 못하셨습니다.
결국은 답답한 마음 가득 가슴 속에 품으신 부모님께서 저의 손을 잡고 심리 상담 센터에 가서 이것 저것 테스트를 해보기 시작하셨습니다.
상담사의 "이 아이는 지금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놀란 마음으로 절 꼭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엄마와 아빠는 저와 동생이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저와 동생의 시간을 더욱 철저하게 분리해 주시기 시작하셨죠.
낮에는 근처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직장에서 돌아온 아빠의 자전거 보조 의자에 앉아 쌩쌩 달리는 속도에서 가슴 속 깊이 시원함을 느끼며, 그동안 아프디아픈 헛헛함을 채워 나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요?
저의 죄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것에 대한 욕심은 유치원에서 친구가 많아지기 시작하고 하원후 이어지는 아빠와의 자전거 여행을 통해 조금씩 제게서 도망갔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저는 그제서야 저보다 작고 어린 동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아갔던 나쁜 것에서 불쌍한 동생이 되자, 그제서야 조금은 귀여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사랑하기에 6살의 전 어렸습니다.
그때의 그 감정이 정말 끔찍했을까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불안하면 전 사정 없이 손톱을 물어뜯습니다.
그리고 숨가쁘게 먹을 것을 찾기 시작하죠.
마음이 아팠던 6살의 그때가 정말 많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죄를 죄라고 생각지못할 만큼...,
저는 지금도 단호히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은 차라리 마음이 아픈 것보다 훨씬 나아. 몸이 아프면, 내가 아픈 걸 누구에게나 티를 낼 수 있거든. 그러면 사람들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기라도 해. 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아무도 몰라 줘. 오롯이 나 혼자 견뎌내야 해. 그건 정말 끔찍한 짓이야.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게 되거든."
***
저의 두 번째 불행은 6살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불행으로 생긴 화상 탓에 지속적인 피부 이식을 해야했던 발은 어린 남자아이에게 불편한 생활을 제공했습니다.
이만하기 다행이다.
어른들은 붕대에 칭칭 감긴 저의 발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저의 고통이 다행인지는 사실 와닿지 않습니다.
발에 생긴 고통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전 어른들의 가식적인 그 말이 싫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화상치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두 번째 불행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6살 까불이는 여전히 감긴 발의 붕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방지축 날뛰기 일쑤였습니다.
엄마는 혹시나 위험한 것이 있지는 않을지, 항상 노심초사하셨지요.
화상 자국은 엄마의 가슴 속 괴롭게 박힌 못이 되어버렸거든요.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아직 어린 꼬마 남자아이는 그저 엄마의 사랑 가득한 잔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습니다.
여전히 온 집안과 마당은 저의 놀이터였고, 엄마는 위험 요소를 치우기에 바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무더운 날이었습니다.
따가운 햇빛에 갇혀 신나게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던 그 천방지축 장난꾸러기를 위해 엄마는 시원한 물냉면을 만들어 절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어른들은 제 별명을 면돌이라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밥이 면이면 좋을만큼 세상 모든 면요리가 사랑스러웠습니다.
한 포크질로 입 속에 넣으면, 후루룩하며 목넘김마저 환상적이게 부드러웠습니다.
입에 남아있지 않은 아쉬운 마음으로 연신 포크질을 할 때의 감촉 또한 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눈앞의 빛나는 갈색면은 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도 역시 충분했습니다.
후루룩 쩝쩝...,
얼굴만치 큰 냉면 그릇을 들어 국물을 크게 들이키고는 마지막으로 계란까지 잡아 먹으면,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불행이 저의 이 행복감을 시샘하고 고통스럽게 저에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엄마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괜찮았습니다.
모두가 함께 먹은 음식인데도 말이지요.
신나게 냉면을 먹고나서 뛰어놀던 그 남자아이는 마당에서 뒤틀리기 시작한 배로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자전거 타다 갑작스레 토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 뛰어 오셨고, 등을 두드려주면서 이미 뱃속의 통증 가득해 열을 내는 저의 이마를 만져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119에 전화하시자마자 저를 번쩍 자전거에서 들어 대청 마루에 눕히시고는 엄마 손은 약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엄마 손은 약손임에도 제 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해서 잰 체온은 39도..,
놀란 어른들은 저를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식중독이란 진단과 함께 함께 드신 어른들의 멀쩡함을 의아해 하다가 그저 면역력이 약한 6살 아이가 이기지 못한 것으로 합리화하셨습니다.
괴롭게 뒤틀린 배의 고통은 병원에 와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의료진들은 계속 주의 깊게 저를 관찰했지만, 불행은 그것을 비웃으면서 말도 안 되게 한 달씩이나 절 식중독이라는 이름으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쉬 낫지 않은 이 특이한 병이 불행의 장난임을 모르는 의사 선생님들은 아침마다 싫다고 몸부림치는 저의 피를 빼내면서 온갖 검사란 검사를 다하였지만, 그저 식중독이란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결론에 고개를 가로젓기 바빴습니다.
수액을 맞고 금식하기를 한 달하던 어느 날, 불행은 갑자기 나타나 저를 괴롭게 했던 그날처럼 소리없이 사라졌습니다.
알 수 없는 증상에 학회 보고감이라 말하시던, 이제는 친해진 의사선생님들의 의아함 뒤로, 저는 그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면돌이에 까불이지만, 그날 이후 냉면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걱정 가득한 엄마의 마음 때문도 있었지만, 그 고통스러웠던 병원 생활 역시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불행은 살며시 다가와 더욱더 지능적으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어릴 때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요?
글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하나도 겪기 힘들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저의 불행은 저를 향해 쏘아진 미사일처럼 저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냐고요?
사고가 있었던 그 끔찍했던 저녁, 전 사랑하는 그녀와 두 다리를 잃고나서 그저 넋나가 병원에 누워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가는 무시무시한 사고 장면부터 시작해서 지나온 삶을 곱씹어 보다가 온 몸에 돋는 소름으로 몸서리를 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 모든 불행은 처음부터 저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