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우연히 들어갔던 어느 빵집에 이런 글귀가 있더라고요.
게으름에 대한 신의 벌.
하나는 실패한 자신과 다른 하나는 옆 사람의 성공이라는...,
그 글귀를 보면서 저의 죄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요.
엄청난 죄임에 분명한 게으름, 신은 절대 게으른 자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 다시 죄가 찾아온 때는 동생의 유치원비와 바꾼 인형 사건 이후 시간이 한참 흐른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중2의 저는 사춘기에 외모 지상주의를 탑재한 막무가내 고집쟁이였지요.
이 세상은 중심인 저를 위해 돌아가야 했습니다.
한참 관심 많아진 외모에 공통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이 퍽 좋아하던 때였습니다.
가족들과의 대화는 거의 단절되고, 어차피 사이 나쁜 동생은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철저히, 남보다 못한 사이로 그저 같은 집에 사는 자그마한 아이로 치부한 저는 그 때부터 죄에 휩싸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험이 끝난 한가로운 오후, 학교가 파한 뒤 여유롭게 도착한 집에서 엄마는 집안 일에 바쁘셨습니다.
동생은 감기 기운으로 약에 취해서 잠을 자고 있는지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동생을 아랑곳 없이 전화기 너머 시험을 망쳤다고 울먹이는 친구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픈 동생 옆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제가 꼴보기 싫었는지 엄마는 방 문을 벌컥열고 들어와 제 등짝을 후려치셨습니다.
갑자기 맞은 등짝이 얼얼해 통화 중이던 친구가 놀랄만큼 "아!" 소리를 냈습니다.
이미 짜증이 날대로 난 엄마는 저를 바라보시며 미간을 펴지않고 계셨지요.
"통화 좀 작작해라. 이것아. 동생 아파서 누워있는데. 엄마 잠깐 나갔다와야하니까 저기 가스레인지 위, 삶고 있는 빨래 30분 뒤에 꺼. 알겠어?"
맞은 등짝의 아픔에 통화 방해를 받은 짜증이 더해 건성으로 끄덕거린 고개가 제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함께 쓰는 방, 감기 약을 먹고 잠들어 있는 동생을 힐끗 바라보면서 놀랜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심드렁한 말투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수화기 너머 "야! 오늘 유명한 그 쿠션 반값이래."라는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쿠션은 반값이고, 화장품 가게까지는 우리집에서 멀지 않았으며, 전 절실히 예뻐지기 위해 그것이 꼭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나 지금 나갈게. 금방 갔다오겠지?"
친구의 말은 성급함을 만들기에 충분했고, 30분은 충분히 길었습니다.
빨래는 아직 더 삶아져야 하니까요.
저는 통화하는 전화기를 놓지 않은 채, 빠른 잰 걸음 그대로 밖으로 향했습니다.
부엌까지는 고작 3걸음, 하지만 저의 급한 마음은 그 마저 귀찮았습니다.
현관 앞에서 신을 신으며, 저는 방에서 자고 있는 동생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야 빨래 꺼 놔."
잠든 동생이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제 명령만을 남긴 채, 저는 즐겁게 통화하며 화장품 가게로 뛰어갔습니다.
그 앞에서 만난 친구는 이미 자신은 두 개를 샀다며, 즐겁게 자랑하기 시작했고, 저도 그 친구의 웃음을 보면서 화장품 가게를 구경하였습니다.
즐겁게 보낸 시간은 항상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불현듯 휴대폰을 바라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혹시 모를 걱정에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가까이 갈수록 불안한 사이렌 소리가 귓가에 맴돌더니 점점 크게 들려왔습니다.
설마? 아닐거야…,
설마는 항상 사람을 잡는 법이니까요.
가까이 갈수록 심장을 울리는 묵직한 사이렌 소리에 저의 마음은 한층 더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다 보이는 엄마의 모습...,
발을 동동 구르며 "우리 애들이 저기 있다고요."라고 울부짖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엄마?"하고 다가가자, 엄마의 눈물 가득한 시선은 안도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어보는 "동생은?"이란 단어에 손가락으로 가리킨 집은 다시 엄마의 눈빛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제가 현관에서 단지 세 걸음 떨어진 부엌으로 가서 가스레인지를 끄지 않았던 그 게으름으로 아래에서 바라본 우리 집 베란다는 온통 연기로 뒤덮혀 있었습니다.
엄마는 제 어깨를 흔들며 소리치셨습니다.
"가스불...안 껐어? 동생 깨웠지? 그렇지? 말을 해 봐. 엉? 동생 깨웠지?"
두려움이 차버린 눈빛으로 절레거리는 고갯짓은 엄마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는 듯 일제히 시선을 보냈고, 엄마는 제 고갯짓에 다시 두려움이 가득해져서 자신을 막는 소방관들을 향해 소리치셨습니다.
"우리 애가...우리 막내가 저기 있다고요. 놔 줘...이 개자식들아...내 새끼 죽는다고 내가 들어가야 된다고..."
그러더니 분노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고는 손을 높이 들어 저의 뺨을 사정 없이 때리셨습니다.
엄마의 가득한 눈물에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돌아간 고개의 얼얼한 뺨만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네가 사람이니? 네 동생을 두고 너만 지금 화장품을 사와? 저 연기 속에서 네 동생이 지금 혼자 있는데."
그때였습니다.
엄마에게 다가온 소방관 아저씨는 "아줌마 큰 불은 아니예요. 다행히 빨래만 탔어요. 연기만 가득차있고 애는 없었어요. 집 밖으로 나간 것 같은데."라며 이미 불안할대로 불안해진 엄마의 마음을 위로하셨습니다.
소방관의 말에 엄마는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은혜야! 은혜야!"라 외치시며 동생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동생은 연기가 자욱한 그 집에서 나와 옆 집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콜록거리는 기침이 안쓰럽게도 연기 때문인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동생을 끌어안고 펑펑 우셨습니다.
저를 향한 분노의 눈길은 쉽게 풀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때 불타버린 삶통 사진을 간직하셨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엄마는 그 사진을 보여주며 신의 모습으로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항상 뭔가 마음이 묵직하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실천하거라. 동생을 해칠 뻔 한 때를 기억하면서..., 그 세 걸음의 귀찮음은 정말 무서운 것이란다."
***
저의 불행은 한동안 사악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발에 입은 화상 자국이 피부 이식을 통해 옅어지기 시작한 중학교 2학년 무렵, 불행은 저의 꿈을 방해하기 위해 꿈틀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참 좋아했던 꼬마 남자아이는 초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상하는 그대로가 그림을 통해 살아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 또한 저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재능도 있었던 모양인지 상도 여러 개 쉽게 타가지고 올 수 있었기에 우쭐하기도 했던 때였습니다.
부모님의 놀란 표정도, 친구들의 "이햐! 너 잘 그린다."라는 감탄도 너무나 뿌듯한 경험이었습니다.
흘러간 시간 속 저의 실력은 제가 자라는 것처럼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들어간 유명 미술학원에서는 당연히 예고 진학을 목표로 하자라며 아낌없는 칭찬이 이어졌고, 저 역시 그런 말들이 부끄러웠지만, 싫지 않았습니다.
예고 실기를 목적에 두고 경험을 쌓고자 여러 대회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그림들은 하나 하나 작품이 되어 저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고 진학을 위한 중요 대회를 앞두고 저는 제 실기 작품에 계속 공을 들였습니다.
그 대회에서 입상할 경우, 입시에서 중요한 내용 한 줄을 생활 기록부에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어른들은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한번 해 봅니다.
한 달 정도 시간을 저는 이 대회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학원, 집 이렇게 쳇바퀴의 힘든 과정은 분명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 믿었습니다.
행운이나 불행 따위의 어떠한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어린 저는 그렇게 어리석었습니다.
불행은 저의 노력을 비웃으며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면서 “어디 한번 해 봐.”라며 절 괴롭힐 궁리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지요.
드디어 대회 당일, 긴장 어린 마음으로 미술 도구를 준비하고 학생증을 챙기는데 뭔가 의아함을 느낀 엄마는 저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셨습니다.
"근데...수험표가 없다."
그렇습니다.
분명 미술 선생님은 접수를 했다고 하셨고, 수험표는 선생님께서 대회 시작 전에 항상 미리 준비해 주셨습니다.
저는 놀란 마음에 학원으로 전화하였습니다.
아직은 이른 시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괜찮아. 신분증이 있으니까 아마 수험표 없어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말이였지만, 우선 한 달간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온 몸에 어려버린 긴장과 불안을 안고서, 실기를 보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고를 가기에 꼭 필요한 오늘의 대회에서 저는 실력을 보여 줘야하기에 더욱 더 수험표의 부재는 마음 속의 부정적인 생각을 커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절 데려다 주시는 엄마도 제 마음이 전달된 것인지, 연신 "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어 줄게."라며 차분한 말투로 격려하셨습니다.
그러고 들어간 고시장에서 저와 엄마는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멍해졌던 저의 손을 가만히 잡으시던 엄마는 확실하게 모든 것을 확인하시고 다시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마음이 무너진 저는 계속 나오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대회장 자리 안내하는 벽보 그 어디에도 제 이름이 없었습니다.
확인해본 결과, 저는 이번 대회에 신청조차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날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엄마는 집에 돌아온 그 시간부터 미술 학원에 계속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메모를 남긴 학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시곤 격한 화를 내셨지요.
도대체 그 중요한 대회에 왜 접수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인지 엄마는 따지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미 마음이 무너진 저는 그런 통화를 뒤로 하고 방에 들어가 있었고요.
학원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이유인 즉슨, 절 담당하시던 선생님의 게으름으로 일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대회에 나가는 학생이 저뿐이었던 것에 귀찮음을 느꼈던 선생님은 대회 신청을 미루고 미루다가, 자신이 신청을 했다고 착각하셨답니다.
그렇게 미안하다는 사과에 갇혀 들은 한마디 "동진아...선생님이 다른 대회 준비로 바빴어. 사내 자식이 그 정도는 이해해 주면 안 돼냐? 사람인데 깜박할 수 있지."
저는 도무지 이해해 달라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홈페이지 한번 여는 것조차 깜박할 정도로 귀찮은 일이었던 것일까요?
수험표를 뽑겠다는 생각 하나만 했더라도 제가 이렇게 공들이지 않았을 텐데...,
한 달의 시간은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지요.
가식적인 미안함을 담은 얼굴로 사과하는 그 선생님의 얼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게으름은 저를 지옥에 빠트려 버렸기 때문이지요.
저의 예고 진학을 위한 한 줄도 그렇게 날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귀찮음으로 말이지요.
마음에 뭔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어른이기에 그 일을 빨리 진행하는 것이 맞는 거 아닙니까?
공연한 피해자를 만드시고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시면, 저의 지나간 한 달의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바로 그 학원을 때려쳤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대회는 제가 접수하기 시작했지요.
아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노력에 대한 배신을 또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겨우 바쁘다는 핑계 때문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