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의도였는지 알 수 없이 첫 사랑과 끝내고, 그 후에도 제 자신감을 한껏 올려 줄 몇 번의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 있었습니다.
높아만 가는 자신감에 비해, 슬프게도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저는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고 울부짖는 여러 남자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날, 고등학교 동창의 소개팅 제안에 심드렁히 나갔던 그곳에서 저의 여섯 번째 죄악이 시작되었습니다.
소개팅이기에 한껏 꾸민 저의 모습은 참 예뻤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 와중에,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을 보고 택시 아저씨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택시 아저씨는 카드를 건네는 네일아트로 치장해 도도한 저의 손길에 "이햐! 아가씨 참 예쁘게 생겼어. 내가 여태까지 본 손님 중에 제일 예쁜 거 같아." 하셨고 괜히 올라가는 어깨는 교만이었습니다.
요즘 따라 파스타에 맛이 들린 젊은 아가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식당으로 소개팅 장소를 잡았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 손 들며 예의상 "예쁘다."라는 말과 함께 도착하지 않은 남자와 주선자에 대한 비매너를 뒷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남자를 보고 저는 친구를 향해 웃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제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에 친구와 저는 그저 이 시간에 맛있는 거나 먹고 헤어지자며 눈빛 결정을 했습니다.
이미 주문 해둔 음식들이 나오고, 남자들은 우리의 주문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와 저는 맛있는 음식에 그저 즐거웠지요.
앞에서 들리는 "아 느끼해."라는 말에 웃음을 탑재한 유혹적인 얼굴로 "많이 느끼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저의 웃음에 고개도 못들고 연신 그 느끼한 음식을 드시던 그 남자분의 속마음을 알 것 같아 더욱 저의 턱은 높아지고, 콧대는 살아났습니다.
커피 한잔의 여유를 느끼며, 그제야 통성명 한 저를 바라보면서 주선자들은 슬금슬금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 남자는 심호흡 크게 하더니 "영화보러 가실래요?"라고 어눌히 말했습니다.
뭐 영화정도야...,
"네. 그러죠."
마침 보고 싶었던 히어로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제 차로 가시죠."
앞장 선 남자의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겨 바라본 차는 정말 맘에 안 들었습니다.
건방지기 짝이 없었던 제 앞에 서 있던 그 남자의 차는 빨간색 중형차...,
보통은 검은색, 흰색이 전부였던 그런 중형차만 보다가 빨간 색을 바라보니, 참 싼티가 나 보이는 게 더욱더 그 남자와는 더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영화는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괜히 그 차에 모이는 거 같았습니다
26살의 젊은 아가씨는 그 상황을 정말 싫어했고요.
그런 저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일까요?
그 남자는 저에게 "저 이것 좀 맡아 주시겠습니까?"라면서 현금이 정말 많이 들어있어 보이는 두툼한 지갑을 저에게 건넸습니다.
명품 지갑, 그리고 현금...,
그저 기가 찼습니다.
‘요즘, 누가 현찰을 이렇게 들고 다녀? 일수쟁이야? 건방지게 이런 걸로 날 꼬실려고?’
이런 마음이 가득해져서 더욱더 콧대는 날카로워지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영화관...,
"팝콘 드시겠습니까?"라며 제 눈치를 살피는 그에게 저는 "배 안 부르세요? 아까 느끼한 음식도 드셨으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나 하시죠."라며 아까 건네 받은 지갑을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당연히 계산하라는 의미로...,
그날 교만에 빠진 저는 그 남자에게 은총을 베풀고 있음이 당연했으니까요.
아무 말없이 그 남자는 웃으면서 커피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함께 입장한 영화관...,
혹시 모를 딴 생각을 애초에 방지하기 위해, 전 영화보는 내내 팔짱을 끼고 있었습니다.
아주 단호히, 나는 영화보러 온 것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
크레딧이 올라가고, 이제 제가 그 남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저와의 데이트가 즐거우셨기를..., 그럼 안녕히…’라는 속마음과 함께 "저, 바쁜 일이 있어서 여기서 헤어질게요."라고 정중히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는 빨간 중형차 남자의 애프터 신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끝난 저녁, 소개팅을 주선해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어땠어? 영화 봤다며?”라는 말을 기대하면서 받은 수화기 너머에 친구는 대뜸 "야! 너 그분 지갑 가져갔어?"라는 말을 했고, 저는 당황해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커피 살 때 건네줬는데, 그 현금이 두둑했던 지갑은 제 가방 안에 왜 얌전히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의 지갑을 언제 제 가방에 넣었을까요?
더욱이...,
그 남자는 일이 있어 가겠다는 저에게 왜 지갑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애프터 신청이 어려워 분명 잔머리를 쓴 그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우리 집 근처까지 오시라고 해. 전해드리겠다고"라며 말하고는 대충 모자 하나 눌러쓴 채, 민낯으로 밖에 나갔습니다.
어느새 도착한 그 남자는 모자쓴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웃음이 났습니다.
아까의 제 모습이 예쁘긴 했거든요.
그러다가 지갑을 들고 다가온 저를 보면서 그 남자는 다시 쭈삣거리며 눈치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꼴보기 싫게 말입니다.
저는 아무 말없이 지갑을 건넸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데 "저기."하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다시 그를 그저 바라보았습니다.
"저, 연락처 하나만 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역시…,
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용기 없는 남자의 잔머리는 건방졌습니다.
‘어디 감히...,’라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남자를 향해 도도한 코끝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민낯을 자신있게 내놓으면서, 그 남자를 향해 낮게 말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취향이 아니세요."
그리고 더 이상 볼 필요 없다는 듯 돌린 등 뒤로 그 남자가 굳어있는 것을 당연스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게요.
왜 제 맘에 쏙 드는 사람이 없는 걸까요?
저는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말이죠.
저의 교만은 일곱 번째 죄악을 연결해주는 다리였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고 저는 그렇듯 건방지게 예뻤습니다.
***
첫 사랑의 떠남은 저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를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 군대에 가면 나아지겠지?’ 싶었던 제 트라우마는 결코 쉽게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대를 하고 몇 번의 소개팅을 통해, 여성분들을 만나 보았지만, 마음 속에서 저분들이 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쉽게 마음을 열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전 연애다운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일에만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한창 혈기 왕성한 20대 중반의 열정을 일에 쏟아부으니, 생각보다 취직도 쉬운 편이었습니다.
유명 게임회사의 아트 디렉터…,
노력은 쉽게 사람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여섯 번째 불행은 그 회사에서 시작됐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저의 사랑하는 연인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그게 왜 불행이냐고요?
절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을 그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행복했던 기억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러대면,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을 때리며 울부짖는 것이 제 일상이었습니다.
저의 불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아픔을 주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였지요.
제가 취직한 그 회사에는 저랑 동갑이였던 직속 여자 상사가 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넘치는 자신감이 교만스러웠습니다.
그녀는 항상 제가 한 일에 대한 모든 부분을 검수하였습니다.
그림의 선, 구도, 배경…,
한 그림이 적어도 열 번의 수정을 거쳐야 만족하니, 참으로 스트레스와 압박이 무척 심했습니다.
디자이너의 크리에이티브와 의견은 조금도 필요 없었고 오직 그녀의 생각만이 결과물이 되었습니다.
“예술하고 싶으면, 순수 미술하세요. 신입 사원 동진 씨, 회사는 당신의 자아성취를 이루는 곳이 아니에요. 조직을 따르세요.”
인격 모독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으나, 높디높은 콧대로 "동진 씨"라 부르는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회식 자리에서도 "동진 씨는 여기서 고기 구우세요."라며 자신은 고기 냄새 배는 게 싫다는 그 직속 상사의 말이 황당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사회 생활…,
그녀보다 늦게 들어간 저의 잘못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고기를 굽던 저에게 직속 상사와 같은 기수인 동갑내기의 장래 제 연인, 그녀가 다가와 집게와 가위를 빼앗아 가더니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김혜정 디렉터님,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신입에게 이런 걸 시키세요? 이건 제가 하도록 하지요."라며 어설프게 썰어진 고기들을 다시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설픈 신입의 어벙한 표정으로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눈앞에 이미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는 직속 상사의 눈치를 살폈지요.
그 상사의 눈썹이 짜증스럽게 올라가면서 "신입 사원 동진 씨, 물 좀 가져오세요."라고 신입 사원에 액센트를 주며 위압적이고 거만하게 시키는 그 말에 따라 어색히 주춤주춤 일어나는 저의 팔을 고기 굽던 그녀가 잡았습니다.
"아줌마 부르면 되는데, 왜 동진 씨가 해요? 김혜정 디렉터님 참 못된 상사시네요. 저기요! 여기 물 좀 갖다주세요."
그녀의 방어벽과 직속 상사의 공격…,
저는 그 사이에서 연신 눈치만 보고 있었고, 주위의 회사 사람들은 전쟁난 저의 테이블을 재미난 듯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저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여자들의 기싸움이 누구로 촉발된 것임을 알지 못했던 순박한 저였기에, 왜 저렇게 눈빛들이 날카로운지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여자 친구를 통해 들어본 바로는 제가 입사할 때부터 저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게임 프로그램 개발자였던 그녀는 항상 제 직속 상사를 부러워했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콧대 높은 제 직속 상사 역시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직속 상사는 절 잡아먹을 듯 괴롭혔을까요?
슬프게도 그날 이후, 저는 모든 고난 속에서 직장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대에 목을 내밀고 있는 듯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그녀의 위압적이고 냉정한 말투에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야근은 물론이거니와, 주말과 명절에도 카톡을 보내며 일의 마무리를 재촉하는 그녀의 업무 지시로 저는 일상 생활을 거의 하지 못할 만큼 정신 없이 보내고 있었습니다.
“IT에서 성공하려면 야근과 밤샘을 불사해야 한다”며 업무를 과중 시켰습니다.
첨단 산업 분야로 생각했던 IT는 그녀의 말로 결국, 70년대 봉제 공장만도 못한 곳이 되었습니다.
야근을 하든 철야를 하든 업무외 수당은 당연히 없었지요.
그녀의 말대로 IT에서 성공하려면 그저 열심히 해야하기 때문이니까요.
그렇게 끝낸 일을 그녀에게 가지고 가면 교만하게 치켜든 턱을 유지하면서 "동진 씨, 이 배경은…, 저 캐릭터는…,"라고 하는 통에 전체 수정하기가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나마 잠시 옥상에서 담배 한대 피우는 점심 시간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이 시간이 끝나면 또다시 저를 몰아붙일 거만한 직속 상사의 말투는 항상 저를 화나게 하였습니다.
그때 다가온 사람이 그녀였습니다.
밥 먹는 것조차, 직속 상사와 단 둘이 해야 하는 숨막히는 상황에 그녀는 저에게 다가와 "김혜정 디렉터, 나도 함께 먹어요."라며 다가 왔습니다.
긴장어린 두 여인 사이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니, 그때는 정말 체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과 달리 둘의 관계는 꽤 친한 사이였습니다.
투닥거리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만큼…,
저는 밥먹으면서까지 유지되었던 일 이야기를 벗어남에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웃으면서 직속 상사와 대화하는 그녀에게 감사했습니다.
여전히 직속 상사의 무한 일 중독은 저를 괴롭혔지만, 햇살처럼 다가온 그녀의 "동진 씨 저랑 커피 한잔할래요?"는 또다른 행복이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힘듬 직장 생활 속에서, 그녀는 핑크빛 물감으로 저의 어두운 마음을 서서히 물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연은 서서히 사랑이 되었고, 회사 사람들 모르게 저희는 사내 커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의 컴퓨터를 무심히 보던 직속 상사에 의해 들킨 저희의 연애는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후, 더욱더 치졸하게 직속 상사는 절 괴롭혔습니다.
사내 연애는 조직의 기강을 흐리고 업무 효율을 저하시킨다며 끝없는 업무와 검수가 더욱더 심화 되었습니다.
새벽 2시에 퇴근하여 오전 회의 준비를 위한 8시 출근이 이어졌습니다.
우습게도 제 연인보다 직속상사인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더 늘었지요.
결국은 심각한 스트레스로 기흉이 생겨 업무 중 쓰러졌고, 구멍난 폐를 수술하기 위해 입원할 때까지…,
그 여자의 위압적인 교만은 제 생명을 위협하며 계속되었습니다.
그녀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제게 벌을 내린 셈이었습니다.
흉곽까지 뚫린 폐는 확 쪼그라들어 수술 후에도 꽤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했으나 불행히도 제 직속 상사는 퇴원 후에도 여전히 제 직속 상사였습니다.
전 누구에게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했음에도,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