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기억은 지워버리고 싶은 당사자의 의지와 달리 쉽게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의 죄악은 화려한 불빛의 유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뻤습니다.
누구보다 빛나던 저였지요.
스스로에 도취되어 교만했던 나약한 어린 시절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이것은 하나의 시험이야. 스스로 무너져선 안 돼. 그 찰나의 즐거움은 곧 사라지고, 삶은 내게 책임을 묻게 될 거야.”
그러나, 반짝거리는 친구들과 함께 그 누구보다도 환했던 저는 그 광분된 사람들 틈바구니를 죽을지도 모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달려들었습니다.
의지는 나약했고, 저에게 유혹적이게 다가온 술은 점점 저의 정신을 사라지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눈치빠르게 이 불이 자신을 태워버릴 거란 걸 알아챈 몇 명의 친구들은 만취한 저와 다른 친구들을 두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하얗게 질려버린 저에게 찾아온 생명...,
감히 끊어낼 수 없었습니다.
뛰고 있는 작은 심장의 움직임과, 초음파상에서 둥실 떠 있는 귀여운 모습에 저는 온 마음은 이미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냉정한 의사 선생님은 "이 세상은 아가씨가 애 키우면서 살 수 없어요." 지우기를 설득했지만, 저 조그맣게 뛰고 있던 심장을 차마 제 손으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 심장을 지키고자, 무너지고 금이 가버린 제 심장을 붙잡으며 찾아간 엄마 집에서 떼어지지 않는 입으로 겨우 말을 이었습니다.
하룻밤의 만남이란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고 성격 차이로 헤어졌으며 아기가 생겼다고...,
그런데 그 남자를 만나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과 함께 엄마 또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절실한 신앙으로 생명의 중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했던 엄마는 아이를 함께 키워는 것에 동의해 주셨습니다.
이제 막 들어간 회사에 감히 말할 수 없어, 점점 부푼 배를 큰 옷으로 숨기면서 힘들게 다니고 있었습니다.
임신하니, 감정의 소용돌이는 걷잡을 수 없이 거셌습니다.
밤마다 제 머리를 쥐어뜯는 일상은 계속되었고, 교만이라는 죄에 휩싸여 함부로 불결해진 몸을 보며, 살갗이 벗겨지게 닦고 또 닦았습니다.
그러다가, 빨개지고 피가 나 딱지진 저의 몸뚱어리를 끌어안고 엉엉 우시는 엄마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기 일쑤였습니다.
점점 어두워지고 트러블이 생기는 얼굴빛에 걱정스러워 하는 동료들을 어색한 웃음으로 "괜찮아."라고 하면서 버티는 하루하루는 지옥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뱃속의 어여쁘고 착한 아가는 엄마가 힘든 걸 느끼는 것인지 입덧 한번 안 시키며 자신의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스럽게도 작디작은 그 아기는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엄마를 걱정하는 듯 만삭 때까지 자신의 몸무게를 늘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또한,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습니다.
가장 끝까지 티 안 나게 회사를 다니다가 별다른 가십에 휩싸이지 않고 몸이 좋지 않아서 퇴사한다는 핑계와 걸맞는 얼굴빛 덕분에 저는 다가온 출산을 혼자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출산의 고통은 저의 죄에 대한 벌인 양, 엄청났습니다.
난생 처음 겪는 극심히 뒤틀리며 찾아온 고통은 죽음까지 생각하게 할 정도로 위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아랫배에 없는 힘을 쥐어짜 버텨 보았습니다.
고통은 1분 간격으로 찾아왔고, 힘이 없는 산모의 배는 연신 간호사가 눌렀습니다.
겨우겨우 6시간 만에 태어난 작은 아이...,
야무지게도 2.5킬로 밖에 안 되던 그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똘망거리는 눈망울로 인큐베이터를 거부했습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에 저는 보자마자 결심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온갖 시선을 받겠지만, 이 아이를 위한 삶을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 죄로 태어난 아이...,
이것은 저에게 벌이자, 축복이었습니다.
***
그날은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올린 기획서들은 상사의 마음에 들었으며, 오랜만에 듣는 긍정적인 반응은 신선했습니다.
외국에서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이제는 결혼 약속한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더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 7시쯤, 공항에 도착하는 그녀를 마중 나가기에 오늘은 정말 분위기 좋은 날이었습니다.
야근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일은 정시 퇴근의 눈치를 막아주면서 저의 하룻밤을 응원하는 거 같았습니다.
공항에서 그녀를 만나면 바로 그녀의 오피스텔 근처 마트로 가서 오랜만에 항상 꿈꾸왔던 신혼부부 모습으로 빙의해 카트의 한쪽 끝을 잡고는 팔짱을 낀 채, 그녀가 좋아하는 알리오 올리오 재료와 와인, 그리고 과일 몇 가지를 사서 그동안 비워져있었던 그녀의 오피스텔로 행복한 기분 가득해 향하게 될 것이라 상상하는 맛이 정말 좋았었습니다.
뜨거운 불 앞, 텔레비전 속 셰프들처럼 그녀를 위해 파스타를 만들고 멋스럽게 접시에 담아 그녀에게 가져가 디캔딩한 와인을 잔에 따르며, 은은하게 켜진 촛불을 바라보고 "사랑해" 한 마디와 함께 유혹적이며, 뜨겁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오랜만에 자극적인 식사를 하게 될 것이 좋아서 계속되는 웃음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와인에 취한 그녀의 눈빛을 탐닉하면서 제 넥타이를 잡고 저돌적인 자세로 이끄는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익숙하면서도 너무나 그리웠던 입술을 찾는 거로 분위기를 띄우고는 한 달 동안 잊지 못하게 그리웠던 그녀와의 데이트를 즐길 걸 생각하면 오늘의 이 잘된 일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행의 시작인 줄은 알지 못한 채...,
멍청하게 저는 이 모든 상황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격렬한 포옹과 함께 사람들이 보든 말든,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을 취하는 것까지 좋았었습니다.
그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고 운전하는 그 순간에도, 저는 작게 울리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갇혀 있었습니다.
불행은 저의 행복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소리가 귓가에 지나가며 소리 나는 쪽으로 돌린 시선 너머에 역주행하는 빨간 외제차가 앞에 차들을 들이박고 제 차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잡은 손에서 식은땀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제 옆의 앉은 그녀의 비명에 저는 정면에서 달려오는 역주행 외제 차를 향해 미친 듯이 경보음 울리며 핸들을 돌렸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온 그 차는 급하게 꺽은 저희 차의 조수석 옆구리를 강하게 받아버렸습니다.
신기하게도 갑자기 시간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깨지는 조수석 유리창에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파편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막히고 있었습니다.
팔을 들어 보려 했지만, 제 행동이 너무 느려서 답답했습니다.
서서히 올라가는 팔에, 그녀는 이미 기절한 듯,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에어팩은 터지고, 하얀 막에 가려진 시야는 더욱 상황을 악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달리는 속도, 틀어진 각도...,
차는 자신의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며 뒤집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몸 이곳저곳은 너무 아파왔지만, 옆에서 미동조차 없는 그녀가 너무 걱정되어 저는 겨우 올라간 팔로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습니다.
"으."
작은 신음…,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살아있었고, 사이렌 소리도 들렸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마무리 되는 듯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다리 쪽에서 느껴지는 뜨겁다 못해 미칠듯이 타는 고통스러운 느낌이 가득해졌습니다.
연료가 새는 것이었을까?
다리에 불이 붙어버림에 당황하고 무서웠습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에 다가왔고, 다리의 느낌은 너무 끔찍해 공포에 가득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소방관들이 다가와 문을 뜯어내기 시작하자마자, 저는 다급히 옆좌석의 그녀를 가리켰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 옆에 여자를 살려주세요."
소방관들은 저와 차를 번갈아 보면서 힐끗 보더니 "시간이 없어. 빨리..., 빨리."라면서 그녀가 있는 반대편 문 쪽으로 몇 명이 가서 매달리며 문을 떼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쉽게 열린 제 문에 비하면, 부딪히는 충격 때문이었을까요?
그녀가 있는 쪽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제 다리는 종아리 아래부터 심각하게 타버렸지만, 그 고통은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절 끄집어내는 소방관을 향해 그녀를 살려달라 고래고래 소리쳤습니다.
"네, 네…, 사장님 다리부터 치료합시다. 지금 부상이 심각하세요."
소방관의 친절하고 안전어린 권유로 그녀에 대한 걱정을 접고 구급차로 이동하는 순간.
펑.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달려오는 소방관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안 돼! 안 돼!"
그녀를 잃고, 정신도 잃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습니다.
‘그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번쩍 떠지는 눈 그리고 제 눈앞에 눈물 가득하신 어머니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미진이?"
첫마디는 이미 상견례까지 마친 제 여자친구의 안부였습니다.
제 말에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고 계셨습니다.
"악!" 머리를 쥐어뜯고, 울부짖었습니다.
몸을 일으켜 링거를 빼고 이불을 걷는 순간, 저는 경악을 하면서 다시 더 크게 소리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소리에 놀란 의료진들이 진정제를 놓을 때까지...,
저는 진정제 기운에 다시 쓰러져 기운 빠진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디아픈 마음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진정제 맞기를 몇 차례...,
무릎 아래로 사라진 양다리의 불편함 덕에 목숨을 버리기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제 옆에서 저를 지키고 계셨으니까요.
어머니의 눈물로 조금씩 마음의 피고름이 씻어져 내려갔지만, 그 무식하게 흉진 자국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아프니,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촉망받았던 아트 디렉터...,
잘 나갔던 과거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미진이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살아갈 의미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만 아니면...,
살아 남음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원에 누워있던 저는 제 불행의 흔적을 쫓아가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불행은 계속 저를 저격하기 위해, 제가 행복해지기를 기다렸다는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