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게 마음을 확인하고 고백하던 갈매기 과자 데이트 이후, 그와 그녀의 마음 속은 서로에 대한 생각으로 더욱더 가득차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침부터 분주한 그녀는 마트에 출근하기 전, 초등학교 1학년인 산이를 챙기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학교 가기 싫어."라고 투덜거리는 산이를 안으면서 "가는 길에 동진 아저씨께 전화해야지."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면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 산이가 벌떡 일어나서는 그녀를 따라 등교 준비를 하였고 그런 아이의 모습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는그녀에게 은총이고 기쁨이었다.
고양이 세수에도 빛나는 아이 얼굴에 모닝 뽀뽀를 하고는 옷을 입히고 좋아하는 반찬으로 식사하는 이 순간이 너무도 행복스러웠다.
그릍 만나기 전, 아픈 아이의 외로운 투병을 바라보며 달라붙는 사신의 사악한 웃음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자신이 만든 계란말이를 야무지게 먹는 품 속의 아이는 그가 말했던 대로 신의 용서와 축복인 것만 같아 고마운 마음 한가득, 꼭 껴안는 그녀였다.
산이의 등교길.
휴대폰 너머 들리는 그의 차분한 음성에 "엄마 엄마, 동진 아찌 바꿔 줘." 라며 성급히 뺏는 손길에 황당하지만, 아빠와의 통화인 양 살갑게 대화하는 모습은 그저 사랑스러웠다.
항상 같은 시간을 서서히 일상이 되어 물드이는 그가 점점 그녀의 마음 속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런 행복한 만남은 자신의 삶 속에서 그가 처음이었다.
여덟 살 된 아들을 둔 엄마가 될 때까지 인생을 살면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주는 그와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한 자신의 헛된 삶이 한심하면서도 자신뿐만 아니라 산이에게까지 다정하고 성실한 그가 고맙고 다시 한번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
그의 일터는 집에서 멀지 않은 전철역 앞, 예전 그녀가 산이를 살리기 위해 간절히 구걸하던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작은 컨테이너로 조립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구둣방이었다.
구두 굽을 갈아달라 맡긴 구두 두 개, 광을 낼 구두 세 개.
그리 바쁘지 않게 일하면서 머릿속 깊이 남은 그녀와의 추억에 혼자 피식하는 자신에게 놀라는 그였다.
항상 혼자임에 익숙한 시간과 장소, 그 길을 오가는 행인 구경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인 그에게 이런 경험은 너무나 색달랐다.
어려서부터 그림이 좋았고 자신의 생은 무엇인가를 그리며 살아갈 거로 믿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뒤로, 그녀와 함께 다녔던 직장과 아트 디렉터라는 직업도 모두 다 마음이 아파, 가슴에서 흔적을 지워야 했다.
모든 연을 끊고 집에만 머물기 수 해, 점점 더 나이를 드시며 홀로 남겨질 아들 걱정뿐인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억지로 받은 장애인 직업 훈련으로 구둣방을 차리게 되었다.
“동진아, 네가 나보다 먼저 죽어야 내가 네 장례를 치를 것인데. 몸 불편한 너를 두고 내가 먼저 갈 수 없구나.”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 그 심정이 어떠하실지,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시작한 구둣방은 생각과 달리 세상으로 향하는 입구가 되지는 못했다.
큰 돈 벌기 힘들고, 큰 돈 벌고 싶은 생각도 없는 그에게 이 좁은 구둣방은 단지 적당한 피난처인 셈이었다.
오가는 행인들의 옷차림이 차츰차츰 변하는 것으로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들의 얼굴 표정의 밝음과 어두움으로 경제의 호황과 불황을 짐작하며, 그저 집과 구둣방에서의 외롭고 어쩔 수 없는 인생을 견뎠다.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그에게 가끔 사람들이 찾는 세상 속 외딴 섬인 셈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아침부터 걸려오는 산이의 전화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는다는 또 다른 기쁨이 되고 있었다.
"아저씨, 보고 싶어요."
그 한마디에 연인과 통화하는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출퇴근 길에 지나치던 작은 공원 벤치를 볼 때면,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와 산이가 살아가는 모습에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드는 그였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모든 이와의 연락을 끊고, 자신의 어머님과 연락만을 위해 사용했던 그의 핸드폰은 어느새 새로운 일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마트에 가면 정신 없는 일상이 숨 돌릴 새 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아침 조회를 시작으로, 기계가 된 것처럼 몰려온 계산대 물건의 바코드를 찍고 "얼마입니다."라고 말하는 일상.
산이의 병 때문에 잃었던 일자리였기에, 다시 그것을 찾은 그녀에게는 항상 ‘우리 산이를 위해서 열심히’란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다짐과 달리 정신 없이 분주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지쳐가는 몸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기운이 샘솟는 건 왜 일지…,
항상 퇴근 시간, 언젠지 모를 통화의 시작은 하루의 지친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생에 더 이상 화사한 로맨스는 없을 것이라 단호히 생각했기에, 그 천사의 전화는 오랜만에 메마른 감정을 채우는 오아시스가 되었다.
***
어느덧 주황색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면서 어두움을 몰아내는 시간이 오면 그는 항상 그녀와 대화했던 그 벤치에 앉아 퇴근하는 그녀의 이제는 명랑해진 목소리로 마음 가득 상쾌함에 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항상 같은 시간의 통화에 웃으면서 "하하하. 우리 꼭 좀머 씨 이야기 책 속, 좀머 씨 같아요. 시계처럼 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선생님과 통화하고 있으면, 또 내일의 이 시간이 기다려져요."라며 상쾌하게 그의 마음을 만들고 있었다.
처음엔 좀머 씨가 누군지 몰라 되묻는 그에게 수화기 너머 그녀는 예의 그 밝음으로 왜 ‘좀머 씨’라 했는지 설명하며 그와의 대화 자체를 즐거워 했다.
“아, ‘파트리크 쥐스킨’란 작가가 쓴 단편 소설인데, 주인공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마을에 살던 좀머 씨란 남자를 기억 속에서 소환해 마치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서술을 해요. 그 책 안에서 주인공의 기억 속 좀머 씨는 항상 같은 시간의 같은 장소를 시계처럼 도는 사람이에요.”
“좀머 씨는 칸트 같은 사람이군요.”
그녀는 자신의 긴 설명에 칸트를 언급하며 짧게 내용 정리한 그가 불쾌하긴 커녕 오히려 재밌는 유머라도 들은 양,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칸트요? 하하하, 그렇네요. 칸트네요. 칸트.”
언제나 그는 좀머 씨, 아니 칸트가 되어 정확한 시간, 바로 그 공원 벤치에 앉아 그녀와의 통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아 자신조차 무심했던 그의 핸드폰은 이제 자신의 역할을 찾아 활기찬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의 두 다리가 온전히 존재했던 그날 이후, 또다시 찾아온 생명 같은 은총어린 목소리에 다시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그였다.
***
오늘은 등교 길 산이가 울상이 되어, 그녀도 꽤 속상한 상태가 되었다.
항상 같은 시간, 동진 아저씨와의 통화를 즐기며, 친구와의 놀이 이야기도 하고 어제 배운 공부 이야기도 하며 그에게서 아빠의 정을 채우고 등교하던 산이였는데, 오늘따라 연결되지 않는 아저씨의 전화에 얼굴 가득 심통이 나 있었다.
"별일 아닐 거야. 내일은 되겠지. 이따 엄마가 해볼게."
말은 이렇게 해도 자신 역시 항상 통화되던 일상에서 벗어남이 불안해 마음 한가득 걱정스러운 그녀였다.
마트에 가서도 오늘따라 연락되지 않는 그가 연신 신경 쓰여 핸드폰을 바라보지만, 여전히 응답 없음에 더욱더 신경쓰이고 그가 걱정되었다.
어느새 다가온 매니저의 "은수 씨, 일 합시다. 집중하세요."란 경고를 들어도 통 울리지 않는 전화에 불안감과 걱정을 넘어서 서운함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차기 시작했다.
***
그는 아침부터 너무 오래되어 더 이상 기능이 안 되는 핸드폰을 보고 안절부절 못했다.
산이가 등교할 시간이 되어가자 실망할, 혹은 걱정할 모자 생각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그 시간마저 지나자, 비타민같은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산이 목소리없이 시작하는 아침은 온통 기운이 없었다.
분주하게 준비하고 그는 근처 핸드폰 매장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오래된 것일까?
그동안의 통화를 이기지 못한 핸드폰과 벽시계를 바라보며 그는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매장문이 열릴 시간, 그는 전동 휠체어에 몸을 실고 부리나케 그곳으로 향했다.
이제 막 영업 준비를 마친 매장 주인을 보자마자, 빠르게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이 핸드폰이 오래돼서 그런지 안 되네요. 다른 걸 보고 싶어요."
그는 살짝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주인에게 낡은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조급한 심정을 담아 재빨리 말을 건넸다.
그가 들어 올린 핸드폰을 보고는 매장 주인은 놀라워했다.
“이 오래된 것이, 아직도 배터리가 버텼군요. 굉장하네요. 손님께선 알뜰히 아껴 사용할 분이시니, 신상으로 맞추시는 것이 좋으시겠어요.”
그는 더 생각할 겨를없이 빠르게 "네. 네."하며 최신폰과 무제한 요금제로 변경하고는 그녀의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걱정할지, 아니면 무심할지 온갖 생각에 휩싸인 시간은 너무 느려서, 그를 더욱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느덧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더니, 주황색 불빛이 거리를 물들이기 시작하자, 그는 재빨리 이미 머릿속에 각인된 그녀의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어머, 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놀란 그녀의 물음에 미안함이 가득한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답했다.
“죄송해요. 핸드폰이 너무 오래돼서 그만..., 이제 바꿨습니다. 바쁘실까 봐, 기다렸어요."
수화기 너머 그녀가 말이 없자, 그는 불안한 마음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 요금제 무제한이라서. 이젠 제가 걸게요.”
전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그녀 특유의 상쾌한 웃음이 들려왔고, 그의 마음에 청량함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푸하하, 아 그러셨군요. 다행이에요. 참 다행입니다. 아. 오늘 제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네요. 좋네요. 그럼 앞으로 선생님이 전화하시는 거죠?”
“네!”
그의 목소리가 꽤 씩씩하게 들렸다.
믿고 싶은 사람.
생명과 같은 활기를 건넨 사람.
그녀에게 그는 세상에 대한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에게 그녀는 또다시 세상 속으로 안내하는 인도자였다.
그는 웃음 가득한 그녀에게 사랑을 담아 이야기했다.
“오렌지색 불빛이 환해지면 당신께 전화를, 찬란한 햇살로 아침이 밝으면 이전보다 빨리 구둣방 문을 열고 산이에게 전화할 거예요. 좀머 씨처럼 항상 정확하게요.”